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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명기 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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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경성 명기 점고 京城名妓點考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상화실산인 賞花室散人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40-09 昭和十五年九月
면    수 203 203
기사
名妓中名妓
평양(平壤)을 기생의 명산지라하면 경성은 기생의 도회청(都會廳)이라할것이다.
예나 이제나 명기라하든지 또는 제법똑똑하다는 말을 듣게된 기생치고야 경성에 와서 때를 벗고 채를 맞지 아니한 기생이 누구이였랴경. 성은 실로 기생의 발신지이였다.
그러므로 경성은 기생의 도회청이 되고 그런중에도 명기의 전람회장(展覽會塲)이였다. 거누구 하나인들 범연하였으리요.
원래 조선기생의 시초를 구태여 옛날 신라진흥왕(新羅眞興王)당시에 창설한바 원화(源花)를 끄러댕기여서 기원을 삼는다하면 조선기생의 력사는 무릇일천여년의기나긴년대를 갖었다할것이요 그 원화를버리고 고려태조(高麗太祖)시대에양수척(楊水尺)의 무리중의여자로써 기생을 삼었다는것을 조선기생의람상(濫觴)이라 잡는다면 조선기생의 력사는 그래도 무릇 천유여년의 긴 력사를 갖었다.
설혹고려시대의 기생은 알은체할것이없다고 억지쓰는말을 좋아서 리조(李朝)로만 친다하드래도 어느듯 조선기생은 오백여년의 력사를 갖었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명기는 계림(鷄林)에 모았을것이고 고려시대의 명기는 송경(松京)에 모았었을뿐이 경성에서야 누가 그들의 화용월태를 보았으랴?.
그러나 이조에 들어서서도 오백여년의긴력사를 가진 기생이여니 북망산 높고나진 두덤속에 옛날명기는 몇몇치며 화조월석에 유두분면의 향기를 피우는 지금 명기는몇몇치나되는가?.
이 경성에도 과연 죽어 백골만남은 명기도 많고 살어화용월태를 자랑하는 명기도하도 많아다.
그런데 경성안의 명기는 예나 이제나 각처에서 모아든 명기요 오직 경성태생의 명기만이 아니였다.
원래 경성은 오백년 국도의 명기를가진 땅이였거니 그 지령(地靈)을 빌어나은 명기인들 어찌 적으리만은 만록총중의 일점홍(一點紅)격으로 그명기중에서도 또한 명기가 있었으니 거 와누구이던가.

義妓冠紅粧
관홍장(冠紅粧)은 중종조(中宗祖) 당시의 기생이다. 얼굴이 절색이요 가무가 능란하야 당대에 짝이없었든것이 관홍장의 큰명예요 자랑이였다.
그러나 관홍장은 그 어여뿐얼굴이며 그 능란한 가무보담도 그 천성이 개결한것이 모름직이뛰여난명예요 자랑이였다. 그래서 비록 청루의 몸이되였으나 일즉 그 천금보담 더귀한 정조를 더럽힌일이없었다.
그런데 관홍장에게는 하눌이마련한 인연이있어필경 그몸과 마음을 차지한유복한남아가있었으니 그는 한주(韓澍)라는 사람이였다. 관홍장이 한씨와인연을 맺어 지내는중에 어느듯 그실라에는 귀한딸하나를 두게까지 되였다.
바그런데 뜻밖에 모인 액운이 관홍장의 앞을 막어 한씨가 명종대왕(明宗大王)시대을사사화(乙巳士禍)에몰리여 남해(南海)로 구향가게되였다.
이에 관홍장은 천리적소 에 있는 애인을 길우며 독수공방의 쓰라린 세월을 보내게되였다. 그런데향기를 풍기는 꽃송이에 봉접의떼가 찾는것과같이공방을 직히는 관홍장에게는 여러남자의 감언과 위협이 극심하였으나 관홍장은 한번 지킨 마음을 곳칠줄을 몰라섰다.
그러나 칠십노모가 주린배와 헐버신 괴롬을 익이지못하는 경상을 당한 관홍장을부모를 위하야 몸을 고치지아니할수없는 운명에 닥쳤다. 그리다가 필경은 종친(宗親)이천군(伊川君)의 사랑을 받게되였다. 관홍장이 처음 이천군을 만날때에
『첩이 어미의 주림을 면키위하야 이제 공자(公子)를 섬기려하오나 어느때든지 한씨가 도라오는때는 옛인연을 찾어가기를 허락하서야 공자께 몸을 허락하겠읍니다.
하는 약속을 굳게한뒤 이천군을 섬기게되였고 그뒤 어언 이십년세월을 지내는중 남녀생산도 많아였다.
그런데 한때는 적소에게 이십년을 지내고 자유의몸이 되여 다시 경성에 도라오게 되였다.
관홍장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야 이미 준비하였든 의복한벌을 한씨의 소생인 큰딸에게 주어 한씨를 성밖에까지 나가 맞게하고 관홍장도 전날약속대로 이천을 작별하고 한씨를 맞지하러하였다.
그런데 한씨가 그딸의 권한은 관홍장의 말을듣고 크게 놀래은빛으로
「너희 어미가 벌서 늙어 망령이로누나 내어찌 태귀인이신이 천군의 마마를취할수있으랴. 천만번 안될말이니 다시말을 내지말라.
하는 말로 오는정을 막었다. 관홍장은 그말을 듣고 방성대곡한뒤 그몸 그대로 한씨를위하야 늙다가 멀리 떠났다.

義俠妓星山月
성산월(星山月)은 명종(明宗)지대의 기생이다. 가무가 능란하고 교제를 잘하기로 일홈이 높거니와 특히 불의의일을 당하야는 참지못하는 천품을 가진것으로 유명한 명기였다.
당시 대사헌(大司憲)민제인(閔齊仁)이 소년시절에 백마강부(白馬江賦)를 지여 스스로 득의작으로 생각하고 선생에게 꼬느게된바선생은 등수를 이등으로 매였다. 민씨가 대단히 불쾌히 생각하다가 어느날 화창한 춘일을 당하야 숭례문루(崇禮門樓)우에올라가 그백마강부를 을펏다. 그 읊는소리는 문루의 기와골까지 울리였다.
때마침 성산월이 여러 명사의 선유노리의 부름을 받어 룡산을 향하야 나가다가 그 읊는소리가 매우 유창함을 듣고 루에 올라가 연유를 물었다. 민씨는 백마강부에 대한 불평을 자서히 설명하였다.
성산월이 민씨의 말을 자서히 듣고 백마강부를 배워 외인뒤에 룡산에 나아가 그 명사들 앞에서 백마강부를 가사로써 노래하였다. 여러명사들이 그 가사의 사연이 명작이라하야 칭찬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
성산월은 그 기회를 타서 백마강부에 대한 자서한 설명을하였다. 여러 명사들은 민씨의 시재(詩才)가 뛰여난것을 무한 칭찬하였다.
그래서 민씨의 시재가 투철한것과 백마강부가 명작인 소문이 성산월의 입으로부터 나왓고 그 배속에서부터 널리 전파되였다.
이에 성산월은 민씨의 불평에 동정하야 한때의 의협으로써 백마강부를 세상에 알리게하고 민씨의 출신에 큰 도움을 주게 되였다.

琴妓上林春
상림춘(上林春)은 중종조(中宗祖) 당시의 기생이다. 그 얼굴의 어여뿜과 그태의 어여뿜이야 어찌 되였든지 상림춘은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한기생이다.
상림춘이 한번 어전에 들어가 거문고를 탄주할새 때마침 유월염천이였다. 그런데 상림춘이 거문고줄을 집허가는중 상음(商音)을 내이게 되였다.
그 상음이 한번 손끝에서 흘러나오게되자 궁정안에있는 화초는 별안간 락엽도되고 락화도 되는 것이 많하였다. 그것은 달음아니라 상음이라는것은 가을의 기상을 띄운 소리인 까닭이였다.
상림춘의 거문고는 이와같이 손끝을 한번 놀림을딸아 능히 봄을 가을로 바꾸고 가을을 봄으로바꿀수 있게되였다.
그래서 당시의 고관대작과 여러 명사가 시(詩)로써 그 천재를 칭찬한바이 많고 상림춘은 그시를 모와 축(軸)을 맨들어 말년의 영광을 자랑하였으니 그시를보낸 유명한 인물로는 영의정(領議政) 홍언필(洪彦弼)영의정(領議政) 심수경(沈守慶)우의정(右議政) 정순붕(鄭順鵬)우의정(右議政) 성세창(成世昌)대제학(大提學) 김안국(金安國)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부사(府使) 정사룡(鄭士龍)이다.
그리하야 상림춘은 한낫 천기로써 그러한 그러한 귀인의 시를 얻게된것이 어찌 거문고의 힘이아니랴하는 명예스러운 칭찬이 낭자하였다.

美妓笑春風
성종조(成宗祖)당시에 경성에는 소춘풍(笑春風)이란명기가 한쌍이 있었다. 한 소춘풍은 영흥(永興)태생이요 한소춘풍은 경성태생이다.
영흥소춘풍은 노래를 잘하기로 유명한명기요 경성소춘풍은 얼굴이 어여뿌기로 유명하였다.
그럼으로 당시의 풍유랑들은 두소춘풍에 대하야 그 특장을 구별하여 말하되
『노래를 들으려거든 영흥소춘풍을 찾고 어여뿐 얼굴을 보려거든 서울소춘풍을 찾어라.』
하였다. 화용월태만을 어찌 갈으처 명기라하리요만은 소춘풍은 그 기예보담 아름답게 태여난 그용모가 한층더 유명하였든 명기이다.
筆者 경성의 명기가 어찌 이상 만에 끝이리요 만은 지면관게상 부득히 전기네명기의 일홈만겨우내놓게 된것을 독자제씨게서는 양해하여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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