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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백과 조선음악—그의 은퇴와 금후의 조선성악회—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이동백과 조선음악—그의 은퇴와 금후의 조선성악회— 李東白과朝鮮音樂—그의隱退와今後의朝鮮声樂会—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이달재 李達載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9-05 昭和十四年五月
면    수 330 330
기사
[사진] 李東白

當代의 名唱 李東白氏가 隱退를한다. 지난 三月 府民舘에서 열닌 公演을 最後로 隱退를 한다하야 그의 絶唱 春香傳 「磚石티」를 인제는 다시 드러볼수가 없음에 판소리의 팬에 있어서뿐이 아니라 一般으로서도 자못 그의 隱退를 아니 아까워 할수가없다.
그러나 氏의 年齡이 이미 稀壽를 넘었으니 挽留할수도 없고 後進을 爲하야 餘生을 바친다고하니 이제는 다만 後進으로부터 李東白氏의 뒤를 니을 絶唱이 나오기를 기다리는수밖에 없다.
그렇니 後進을 기다리는 一般의 마음은 自然히 朝鮮聲會硏究曾로 끌리여 가게될수 밖에없는것이다.
이 朝鮮聲樂硏究會도 李東白氏가 있었음으로 생기어 흙속에 깊이 묻혔던 朝鮮의 古曲音樂을 캐게되었다고 보아도 過言이 아니다.
그리고보니 이 朝鮮聲樂硏究會의 由來를 아자면 또한 李東白氏가 名唱으로 나서까지의 氏의 過去의 聲樂修練時代에서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게된다.
氏는 忠淸南道舒川出生으로 十歲頃에 벌써 노래에귀를 떠 가지고 노래하는 사람을 좇아다니었는데 當時의 名唱 崔相仲, 金貞根氏等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그때 氏의 마음을 餘地없이 感嘆시킨것이 있으니 그것이 今日의 氏를 낳게만든 動機로 沈淸傳의 그 至極한 沈淸의 孝誠이였다. 이 沈淸歌를 드를때마다 氏는 自己도 한번 소리를 그렇게 잘하야 그 沈淸의 孝誠을 世上에 알리움으로 一生의 事業을 삼겠다는 決心이 저도모르게 어린마음에 굳어졌다.
그리하야 「도마니흐리山」이라는 山에다 움집을 짓고혼자 드러박여 소리工夫를 하였다. 山中이라 낮에도 혼자 있기가 그리 좋지는 않은곳인데 暗暗漆夜의 이山中에서 무서운 즘생의우름소리가 들릴때에는 實로 소름이머리끝까지 치받혀 짐짓恐怖속에 아니떨수없게되나 소리에 心醉한 氏에게는 그것도 듣는 그瞬間뿐이요 「綠樹奏京 넓은뜰이 나다니던 길이오, 租龍山城 다시보자 仙隱寺야 無事하며 廣寒樓야 잘있드냐 烏鵲橋 반가워라」하고 다시 소리를 부르기 始作하면 이 소리의 興에 무서움도 두려움도 모다 잊고 밤이 밝는줄도 모르고 불러내면 나중에는 목이 부르터 올라 터저서는 피를 쏟기도 한번 두번에 그친것이아니었고 힘을 너무써서 산증까지에도 걸리어 苦生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소리工夫를 하여가지고는 萬人의 앞에 소리를 公開하랴는 壯志를 품고 서울로 올라와 放浪을하게되였다. 그렇면서 한긋으로는 쉬지않고 依然히 工夫를 繼續하야 沈淸傳, 春香傳, 裴裨將傳, 華容道, 토끼타령, 박타령等을 順次로 金惠鍾씨에게 배웠다.
그리하야 비로소 李東伯이라는 이름을 얻은 氏는 料理집이라 劇場이라 불리여다니기 始作하야 漸漸 人氣가 높아짐과 同時에 소리도 판에 박히게되여 李東伯이 아니고는 못부를 소리를 부르게되니 斷然 氏는 판소리의王으로 長安의 人氣를 그한몸에 集中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판소리는 賤人이 부른다고 소리에는 헤를 털면서도 人格的으로는 待遇를 아니 하여주는것이 氏의 마음에 아픈傷處를 주었다. 소리를 부르는 精神이 決코 一般의 享樂을 相對로 한낱 娛樂的인 意味에서 부르는것이 아니라 沈淸의 孝誠이라던지, 春香의 節操라던지의 사람의 根本人情을 소리로서 感興을 주어 世道人心에 도움도되고, 優美典雅한 情緖를 또한 듣는사람으로 傳하는것이 소리의 根本精神인줄 아는 氏는 賤視하는 소리의 價値를 높이기 爲하야 料理집 劇場等에는 一切 발을 끊고 스스로 몸을 重이 가질 必要를 느낌과時時에 이 貴한 古曲音樂을 永久이 保存하고 將來하지않어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으로 宋萬甲, 丁貞烈, 金昌龍, 韓成俊, 吳太石, 金容承, 金宗基, 金東岡, 朴綠珠, 金彩蓮, 沈相健, 姜太弘等 十三名으로 더부러 論議會合하야 聲樂院이라는 名稱으로 聲樂硏究會를 組織하였다. 그리고 會員 三十八名을 얻어 부서를 또한 組織하게 되였으니 理事制로 理事長을 李東白氏, 常務理事에 丁貞烈, 會計에 韓成俊, 庶務 金承容氏等이 推薦되여 聲樂에 硏究部, 器樂에 硏究部, 校習部, 興行部, 外交部 等의 部를 세우고 聲樂硏究에 精進을 하게된것이 現今의 朝鮮聲樂硏究會로 名稱을 이렇게 改稱하게 되기는 現在의 事務所 益善町으로 옴기면서 였으니 그것이 바로 昨年이다.
이 조선 聲樂硏究會가 이렇게 今日까지 거러오는동안 現在의 會員數는 實로 二百三十名이라는 多數에 達하게 되였다.
그러면 現在 이 會員中으로 名唱은 누구누구를 꼽나? 李東白外에 大先生으로 모시는 金昌龍氏가 있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事實이지만 이밖에 趙相鮮氏의 소리도 一流의 名唱에 屬하기 부끄럽지 않다고한다.
그리고 女子名唱으로는 朴綠珠, 林小香, 吳翡翠, 朴初月, 金素姬, 金如蘭이가 있고 이들 名唱에 따르는 名樂士로는 丁南希, 姜太石, 申快東, 朴鍾基, 沈相健, 趙永學氏等이 있어 聲樂의 硏究를하는 한便, 會員의 指導에 盡力을 하고 있는데 이들을 길러내는 李東白氏와 金昌龍氏의 그 소리의唱法에는 서로 獨特한 調가있고 또 소리에 長技가 있으니 배우는 사람들도 그 長에따라 이先生 저先生에게 좇아 마음대로 배우게 되었다.
李東伯氏는 다 아다싶이 春香傳의 「磚石티」가 그中 絶唱으로 무척 소리를 우렁차게 부른다. 이것을羽調라고 하는데 羽調라는것은 卽다시말하면 號令調이다. 그리고 金昌龍氏는 華容道가 絶唱으로 哀訴하는 듯이 부르는데 特長을 가젔으니 이것은 界面調라는 것으로 말하자면 羽調와는 正反對로 부드럽게 곱게 부르는것을 말함이다.
그런데 소리를 부르는데는 節奏라는것이 있으니 이것은 正宗大王 純宗卽位年間에 宋興祿氏가 만드러낸것으로 中頭(중머리) 頻中頭(자진머리) 乖中頭(엇머리), 促三拍(세산조리)等으로 바로 宋興祿氏는 얼마前에 作故한 名唱宋萬甲氏의 祖父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소리에 進陽調라는것이 있는데 이것은現存 名唱 金昌龍氏의 祖父인 金成玉이라는 분의 制作인데 이 進陽調와 節奏가 只今까지 傳해 나려오는것으로 朝鮮古典 판소리의 硏究에 이 宋, 金兩氏의 功績이 컸음을 여기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리하야 이 兩氏의 曲調에 李東伯, 金昌龍兩先生의 名唱을 본받어 밤이나 낮이나 장구소리에 마추어 소리를 練習하는 華容道나 春香傳의 멋드러진 曲調가敦化門 큰거리까지 흘러나와 行人의 발목을 짐짓 머므르게 하는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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