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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의 내막을 듣는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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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레코드의 내막을 듣는 좌담회 레코-드의內幕을듣는座談會
종    류 좌담 座談
필    자 구원회․왕평․박영호․이면상․방희택․이훈구․함대훈․김내성 具沅會․王平․朴英鎬․李冕相․方熙宅․李勳求․咸大勳․金來成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9-03 昭和十四年三月
면    수 1936 1939-03
기사
[사진] 具沅會․朴英鎬․方熙宅 총 3매

出席人士
콜럼비아 具沅會
폴리돌 王 平
太平 朴英鎬
빅타- 李冕相
오케- 方熙宅
本社側
李勳求
咸大勳
金來成
時日 一月二十三日午後三時
場所 本社營業局長應接室

李勳求-座談會를 始作하기 前에 잠간 人事의 말슴을 엿줍겠읍니다. 多忙하심을 不拘하시고 여러 先生께서 이처럼 出席하여주시어 大端히 感謝합니다. 레코-드가 文化上 많은 影響을 갖고 있다는것을 여기서 다시 贅言할 必要조차 없읍니다 만은 이처럼 우리의 文化와 많은 關係를 가진 레코-드에 對하야 여러先生의 高見을 들어서 一般讀者에게 紹介하고저 하는것이 이座談會의 目的입니다. 재미있는 말슴을 腹藏없이 많이 들리여 주십시요.

事變前後의流行歌
咸大勳-레코-드가 朝鮮文化에 寄與하논바 影響이 적지않다는것은 더말슴드릴것도없지오만은 大體로 보아서 事變前後에 流行한流行歌와 그에 對한 販賣成績같은데 對해서 具先生께서 좀 말슴해주시면 좋겠읍니다.
具沅會-事變바루前에는 말하자면 레코-드에對하야 各會社의 競爭이 大端히 甚했읍니다. 따라서 競爭이 甚하면 甚할수록 맨드러저 나오는 레코-드는 거기에 正比例하야 점점 低級헤 젔읍니다. 그래서 그때는 거이 開拓할길이 없겠다고 까지 悲觀하게쯤 되였었는데 事變이 이러나자마자 레코-드界에 약간 活氣가 보이였지요. 內地에서는 時局歌가 相當히 産出되였고 또 販賣成績도 좋았지요. 그러나 朝鮮서는 그렇게 좋은成績은 보지못하였읍니다. 하옇든 지금와서는 事變前의 低級에 比하야 웬만큼 高級한것을 目標로 努力해온 結果 事變前보다는 成績이 좀 났다고 볼수있을겝니다.
方熙宅-事變以後에는 모다들 緊張해서 事變前보다는 活氣를 띠였다고 말할수 있지요.
咸大勳-特히 戰時盤같은것은 없읍니까.
方熙宅-있읍니다.
金來成-戰時盤에 대한 成績은 어떻습니까. 普通盤에 比하여 말슴입니다.
方熙宅-戰時盤이라고 있기는 있으나 成績이 그리 좋질못합니다
王平-事變前後하야 폴리돌에서도 朝鮮語盤으로 愛國歌를 냈었는데 販賣成績으로보아서 그리 良好치는 못하였읍니다. -結局 流行歌는 어디까지던지 流行歌이니까 거리에서도 부르기좋고 부르기쉬운 그러한 性質의것이 아니면 안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李勳求-銃後美談에 多少感傷的인것을 섞어서 내보면 어떻습니까.
王平-안됩니다. 時局歌는 徹頭徹尾 時局歌래야하지 거기에 무슨 感傷的氣分을 섞으면 첫째로 檢閱이通過가 안됩니다.

불루-스時代
咸大勳-朝鮮語로 된 戰時盤은 없읍니까.
王平-없읍니다. 國語盤은 大端히 많습니다 만은.
朴英鎬-別로 없읍니다. 그런데 한가지 奇現象은 事變前에는 도무지 팔리지않든것이 事變이 이러난後에 잘팔리는盤이 있읍니다. 即 「불루-스モノ」가 그것인데 「雨のプル-ス」같은것은 事變前에 市場에 나온盤인데 當時의 販賣成績을보면 아주 말이아니었읍니다. 그러던것이 事變以後에 갑짝이 流行하기 始作하였지요 그래서 그後「別れのプル-ス」도 나오고 아주「불루-스」流行時代를 이루운感이없지않습니다. 이처럼 「불루-스モノ」가 流行하는것을보면 流行歌의 傾向이 차츰 頹廢的氣分을 가지지않었는가 합니다.
具沅會-「불루-스」가 流行한것은 南京陷落 以後입니다. 그건 戰時下의 民衆이 무척 緊張한精神을 가지고있는 한편 그緊張애서 오는 疲勞를 「불루-스」같은데에서 풀어보고저하는 安易感을 否定할수는 없지요.
咸大勳-興行界가 繁昌해가는것과 마찬가지 理由로.

王壽福과鮮于一扇
咸大勳-다음에는 歌手를 얻기까지의 여러분의 苦心談을 좀 이야기해 주십시요.
李冕相-그건 좀 困難한데.
金來成-勿論 各社의 秘密도 있겠지 만은 그困難한 이야기를 좀 해주서야지요. 어떻게 어떤方法으로 歌手를 發見하며 歌手로서의 敎育을 시키는지 그런데對해서 재미있논 이야기 많을줄 압니다.
王平-하나 이야기 합시다. 폴리돌에서 王壽福을 끄집어낸 이야긴데 純全한 妓生으로서 레코-드界에出現하기는 아마 王壽福이가 第一 처음일겝니다. 이건참 大端히 卑怯한데…처음 王을 發見하기는 폴리돌이 아니고 다른 어떤 會社이었읍니다. 假令 그會社를 A會社라고 假定하고 그A會社에서 먼저 王을 平壤서 發見하고 테스트를 해보니 그리 나뿌지않음으로 하옇든 東京으로 데리고가서 吹込을 시켰는데 A會社에서는 王의 成不成을 퍽 念慮했읍니다. 그런데 그때 亦是 폴리돌에서 일을보고있던 나는 東京서부터 王壽福의 美聲이 괜찮게 생각되여 돌아으는 汽車에서 그를 붙들고 說明시켜 終是 平壤까지 와서 下車하야 一週日동안 行方을 감추었지요. 그때 알아보니 王은 아직 아모데와도 具體的 關係를 맺지않은 自由로운 몸이었읍니다. 그래 一週日동안에 王과 폴리돌會社사이에 正式으로 契約을 맺어놓았지요, 자아契約을 맺기는했으나 어째던 A會社에서 吹込한것보다 나어야하겠는데 그래 相當히 苦心한結果 作曲을全基炫氏에게 付託해서 처음으로 世上에 내놓은것이 저「故鄕의情恨」입니다. 그때 內地盤으로는 「島の娘」가 한창 流行하고있는데 어듼가 이「島の娘」에 비슷한데도 있고 그리고 그것을 王壽福의 고은 목소리로 길게뽑아넘기는데 人氣가 있었답니다. 그때 女歌手로는 朝鮮에서 王이 第一人者었읍니다. -그後約一年이 지나서 鮮于一扇이가 데뷰-했지요. 그런데 이鮮于一扇이가 데뷰하기 까지의 이야길하면 平壤妓生 鮮于一扇이가 노래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平壤으로 내려가서 鮮扇의 노래를 들어보았읍니다. 그런데 첫째 번쩍 귀에 들어오는 그 고은 목소리에 반했읍니다. 그래서 鮮于를 데리고 上京하야 金億氏作詞, 李冕相氏作曲인「꽃을잡고」라는 新民謠를 냈는데 이것이 말하자면 王壽福이의 「故鄕의情恨」 以上으로 人氣가 있었지요. 하옇든 우리들이 苦心하는것은 어떤 歌手를 發見한다음에 어떤曲調, 어떤歌詞를 불리올까하는 點에 있읍니다. 아모리 有望한 歌手라도 그歌手에 맞지않는 曲과歌詞를 불리우면 失敗입니다. 鮮于의 境遇에도 그런點에 있어서 퍽 苦心하였읍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經路를 가많이 보면 鮮于가 부른曲은 全部가 李冕相氏의 作曲이었읍니다. 李冕相氏의 曲과 鮮于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點에 있어서 서로 잘 어울리는데가 있지않은가 생각합니다.
李冕相-폴리돌에서 빅타-의 칭찬이야 하하
一同-하하하

張世貞과李蘭影
方熙宅-歌手들中에서는 李蘭影이가 第一 오랜사람인데 五六年前에 나온歌手이지요. 木浦出生으로서 처음에는 太陽劇場을 따라 地方巡廻를하다가 太陽劇場이 大阪서 解散을 하게되자 거기서 李哲氏를 맞나 京城으로 와서 契約을 맺었지요. 그때의 처음으로 吹込한것이 「木浦의눈물」이고 이어서 「아버지는 어디로」같은것이 人氣었읍니다. 그다음 張世貞은 平壤出生인데 平壤에 放送局이 創設되었을때 그 푸로그람에 張世貞, 宋達協의 이름을 發見하고 라디오로 들어보니 張은 蘭影이보다 나면 났지 결코 못하지 않음으로 翌日 곧 平壤으로 내려가서 테스트를 해보고 O․K에 入社시켰읍니다. 그의 처음 吹込은 「連絡船은떠난다」인데 張世貞은 마이크로폰앞에 서기만하면 목소리가 떨린답니다. 그래 그래서는 到底히 歌手가 될수없다고 좀더 大膽해야된다고 꾸중말도 많이 듣고했는데 이 「連絡船은떠난다」는 曲만해도 張은 折半울면서 吹込을 했읍니다. 그 떠는 목소리로 울면서 부른 이曲調가 나종에 보니 한칭더어울리었어 참 좋았읍니다. 男子로는 南仁樹가 晋州出生인데 (本名은康文秀) 東京가서 처음 吹込으로 「범벅서울」을 불렀는데 이것이 어찌된 셈인지 人氣가 없었어요. 本來폴리돌에 있던 李花子는 民謠歌手로서는 第一人者인데 「꼴망해牧童」같은것이 出世作이지요. 地方巡廻를 하면 演奏가 끝난後에 所謂 「飛入り」라는것이 있어서 그地方의 所謂 내라고부르는 素人歌手들이 「飛入り」해서 舞臺우에서 가장 自信있는노래를 부르곤하는데 殆半은 엉터리없는 者들이지요. 그러나 그中 가다가간或 「堀り出し物」가 있지요. 李仁權은 淸津서 「飛入り」에서 얻은 歌手입니다.
咸大勳-道別로보면 어느道에서 歌手가 第一많이 났읍니까.
王平-西道가 第一많지요. 우리 폴리돌에는 거반平安道出身입니다.
咸大勳-히트盤으로 第一많이 팔린것은 大槪 얼마나되는가요.
朴英鎬-萬枚가량이 最高일겝니다.
王平-레코-드의 生命엔 長短이 있는데 어떤것은 나오자마자 날개가 돋은듯이 팔리다가도 얼마지나면 딱 끊기지요. 또 그와 反對로 처음에는 잘 안나가다도 長時日을두고 슬금슬금 나가는것을 나종에 計算해보면 엉터리없이 많은 數字를 보여주는것이 있읍니다.
具沅會-하옇든 四萬枚만 나가면 朝鮮에서는 坊坊曲曲이 부르게되지요.

作詞․作曲․노래
朴英鎬-내가 關係한 歌手中에 南仁樹가 있는데 씨에론에 있을땝니다. 어떻게 된셈인지 吹込을 하는쪽쪽 소리가 잘 나오질 않었읍니다. O․K로와서 李哲氏는 못쓰겠다고 反對를 했으나 나는 그렇지않다고 그를 퍽 擁護해 왔읍니다. 그래 東京가서 吹込을 했는데 소리가 잘 나오질않어요. 元來 목소리가 퍽 가늘지요. 지금은 괜찮으나 처음에는 퍽 苦心했읍니다. 그다음 太平에 와서 元山樓氏學校를 中途退學했다는 朴響林이가 찾아와서 테스트를 하겠다고요 그래 해보니까 及第였읍니다. 南一鷰은 O․K에 있을때 통안되었다는 評判이었었으나 太平으로 와서부른 「靑春劇場」「눈물의京釜線」은 所聞나지않은 히트盤이었읍니다. 五萬이 나갔으니까요. 白年雪은 所謂新進인데 一年동안이나 테스트하기를기달려서 나온 사람입니다. 그의 「流浪劇團」은 히트盤인데 朴響林이 보다못지않게 잘 부른曲이지요. 또 미스, 코레야의 「白頭山바라보고」는 新人으로서 히트盤입니다.
咸大勳-歌手들의 報酬는 어떤方法으로 支拂하는가요.
具沅會-販賣數가 원체 많지못한 때문에 印稅로는 歌手들의 生活을 維持해나갈수가 없지요. 우리도 한번試驗해 보았으나 到底히 그것만가지고는 生活해나갈수가 없어요.
金來成-그럼 月給입니까.
具沅會-그렇습니다. 그리고 吹込할때 마다 또 얼마씩 手當이 있지요. 그것도 그사람사람에 따라서 많고적고하지요. 印稅만으로는 絶對로 안됩니다.
咸大勳-作詞같은것은 어떻습니까.
方熙宅-大槪는 專屬作曲家와 專屬作詞者가 있지요.
具沅會-「리」는 여러가지로 問題가 많이 이러나서 안됩니다. 假令 作曲한것을 이會社로 갖다주고 저會社로 갖다주고 한다던가 하옇든 問題가 생기기쉽지요 그러나 作詞者는 「리」래도 괜찮지요. 作曲家는 專屬이래야만 합니다.
王平-會社에 따라서 다르지요.
咸大勳-作詞, 作曲, 노래-이 세가지가운데서 어떤것이 第一 重要視됩니까.
具沅會-글세올시다. 제가 보기에는 歌詞는 좀 떨어저도 作曲만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朴英鎬-作詞도 雜誌와같이 季節을 따라서하는데 雜誌編輯者가 항상 느끼는것과같은 季節의 어그러짐을 느끼지요. 여름에도 겨울노래를 지어야하고 嚴寒에도 봄노래를 지어야하니까요-그런데 어떤사람은 曲을 먼저 지어놓고 거기다 適當한 歌詞를 써넣는사람이있읍니다.
李冕相-나는 歌詞없이 曲을 먼저 지어본일은 없는데.
朴英鎬-그건 李冕相氏만이지 내가 지금까지 對해온 作曲家에는 하나두 없었읍니다.
李冕相-나는 詩가 重要하다고 봅니다. 詩가 平凡하면 안되지요. 詩가 에뿌면 따라서 作曲도 잘되어지지요.
金來成-結局 大衆의 脾胃에 맞는 에로티시즘이 있어야 成功하지 않습니까.
王平-그렇지요. 에로가 流行歌에 있어서 重大한要素이지요.

主題歌의魅力
咸大勳-그런데 作詞나作曲을 一般의 口味에 마추어서 하십니까 或은-
王平-거기 對해서는 여러가지 問題가 많습니다. 하옇든 三十枚면 그가운데 몇個는 良人的인 盤을만들어보지요. 그러나 結局 計算이 맞질않습니다. 營業局의 統計를 보아야하니까요.
朴英鎬-「母の歌」「愛染かつら」같은것은 굉장히 팔렸는데 朝鮮서도 그처럼 「物語」的인 流行歌여야 팔릴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제부터 朝鮮서도 主題歌가많이 나올것같습니다. 그런데 映畵 「愛戀頌」의 主題歌를 맨들었는데 映畵封切이 너무늦어서 主題歌가 먼저 市場으로 나왔읍니다. 그러고보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앞으로는 次次 映畵會社와 妥協해서 映畵와 主題歌가 同時에 나오게되리라고 믿습니다.
方熙宅-우리도 所謂 主題를 해보았는데, 結局 映畵封切과 時期를같이하지못해서 퍽 싱겁게된일이있지요
咸大勳-歌手들을 어떻게 指導하십니까. 여러가지 方法이 있겠지만-
李冕相-流行歌도 인제부터는 劇的內容을가진것이 더많이 나올것 같습니다. 오페라式으로 感情을 그대로 쏟아놓아야 大衆들이 좋아하니까 그렇게 指導할수밖에없지요.
金來成-시굴서 歌手가 되겠다고 봄철이면 집을 뛰어나와 上京하는 靑年男女가 많다지요.
王平-一年中에서 겨울철이 第一 좀 적지요.
方熙宅-日氣나 따스해지면 將來의 一流歌手를 꿈꾸는 젊은男女가 不知其數입니다.
具沅會-그中에는 하야까시하러 오는者도 있읍니다.
方熙宅-歌手志望者가 하루에도 여러사람 찾아오는데 그들을 가만이보면 테스트하기前에 벌서 自己를 辨明한답니다. 飮食이 좀 나뻐서 목이 나뿌다느니 잠을 좀 잘못잤다느니하면서 테스트를 하고나서는 그저 벌벌 떨면서 來日와서 한번더 自信있게 해보겠다고요. 또 或은 試聽者를 불러서 저녁이나 같이나누자고하는 사람도있고 林檎箱子도 보내고-뭐 別한것이 다있지요.
朴英鎬-언젠가 한번 어떤 靑年이 찾어와서 테스트를 하겠다고 하면서 무슨 보따리를 가지고왔겠지요 明紬匹이였읍니다. 그래 테스트를 해보니 엉망진창이겠지요. 그래 뭐 어찌할수 없다고 그러니까 그럼 그明紬匹 드린것 도루 달라구요. 그래 가저가라구 그랬지요. 하하하

志望群의喜悲劇
方熙宅-그런데 요지음에는 시굴 面所書記라든가 訓導라든가 또는 巡査같은 사람들가운데 歌手志望者를 가끔 보지요.
具沅會-내어떤 親舊의 紹介로 歌手되겠다는 사람이 하나있기에 들어보았는데 成績이 좋지를못하야 돌아가 보라고했더니 다른親知의 紹介狀을 하나 내놓고 哀願을 하겠지요. 그래도 안된다니까 또 하나 내놓겠지요. 그래도 實力이없으니 안된다 했더니 那終에는 여기저기서 얻어온 紹介狀을 한 二十枚 내어놓겠지요. (一同笑) 더구나 능청스러운 사람들은 다른會社에선 採用한다는데 꼭 貴社가 마음에 들어왔으니 採用해달라하겠지요.
咸大勳-그들이 歌手志願하는 動機는 大槪 어디있읍니까.
李冕相-自己가 普通歌手보다 났게부른다는 自信이있어 그렇지요.
咸大勳-그런中에도 相當한 사람이 있어 採用한例가 있읍니까?
朴英鎬-있고 말구요 只今 이름을 날리는 朴響林이도 南一鷰이도 모-도 그렇게 찾어온女子입니다.
方熙宅-歌手를 憧憬하는 사람들이 全朝鮮에 相當히 많어요. 그래서 철따라 가방을끼고 會社로 바로오는 사람도 많지요.
朴英鎬-그러니만치 歌手되는法을 冊으로 낸다면 相當히 팔리겠어요. 어떤 內地人하나이 그런것을 刊行하는데 날보고 支社를하면 어떠냐고도하나 전 바뻐서 못했읍니다만 아무쿠 그들은 모-두 이歌手에對한熱望으로 집을속이고 나와서는 이제는 ××會社에 歌手로 뽑혔으니 安心하고 돈을보내라 하는者도 있어요 그래 때때로 「네가 一流歌手가 되었다니 반갑다」는 편지가 여러장왔지요. (一同笑)
咸大勳-그렇게 漫然히 찾어오는사람들을 어떻게 防止할 對策이 없읍니까?
朴英鎬-이레코-드業이라는게 一面 좋기도하고 또나뿌다고도 할것이되여 善導機關이 必要할것같아요.
李冕相-그야 個人의 修養問題지요.
王平-뭐 나뿌거나 不良性이 있다고는 할수없어요 그저 眞實하게 出世하려고 오는사람들이니 테스트는 다해보고 좋으면쓰고 나뿌면 拒絶하지요. 그런데 慶南서 自轉車로 上京한사람이 있어요. 그는 山中에서 三年間을 練習했다하는데 두사람이야요 相當한 自信이 있다고 하면서 六日동안을 걸려 自轉車로 上京했다기에 그때 폴리돌의 李冕相氏게 試聽을 請했지요. 그러나 歌手로서의 將來性이 全然 없었다고요. 그러나 그런때 이便에서는 可望이 없으니 斷念하라는 말은 참 하기 어려워서 그것보다 다른方面으로 轉向을 하라고 勸告했지요.
金來成-참 그것 딱하겠읍니다. 똑 잡아 뗄수도 없고.
王平-그러기에 말슴입니다. 歌手志望者의 大部分은 誠意를 가지고 달려드니까 그만 이便에서도 그誠意에 感動되는 때가 많습지요.

悲慘한人生曲
王平-이것은 지금으로 부터 五年前의 일입니다. 어떤날 會社에서 자고있는데 밤 열한時쯤 되어서 門을 두다리는 者가 있겠지요. 그래 나가보니 시굴서 吹込하러 上京한 사람이라고요. 그것두 同侔들의 激勵를 받아 車費도 그親舊들이 마련해주었다고요. 그러면서 꼭 吹込좀 시켜달라고 懇請하는데 참 딱한 事情이었읍니다. 그래 씨에론에 계신 金永煥氏에게 편지를 내어 그를 紹介했지요. 그래 金永煥氏는 이듬해 二月에 吹込할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에 밥을 굶으면서 기다렸는데 그만 그무렵에 金永煥氏가 會社를 그만두고 나가버리게 되고말었으니 吹込할可望이 없어지고 말었지요. 그래 그의誠意가 하도 기특하고해서 그때 어떤 劇團엘 紹介하여 주었드니 얼마동안을 流浪하다가 昨年에 다시 나한테 찾어와서 어떠한일이 있더래도 歌手가되고 싶다고 간청을하길래 바루 여기 계신 李冕相氏에게 紹介를 했더니만 테스트를 해보고 도무지 可望이 없다고요. 그래 이번에는 O․K의 金상진氏에게 紹介를 해서 가보라고 그랬지요. 그래 O․K에가서 아마 몹시 사정을한 모양으로 流行歌는 못 부르더래도 朝鮮소리라도 吹込시켜줄 意思를 表한 모양이야요. 그래 얼마동안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한여름이 지나도록 아모런 消息이 없이 그대로 지나버렸지요. 그러던것이 바루 얼마前에 또 나를 찾어와서 O․K에도 틀렸으니 야단났다고 사정을 합디다그려. 당장 밥먹을것이 없는 形便인데 참 딱하기두. 그래 이번에는 콜럼비아 具沅會氏에게 紹介를 했더니만 원체 具先生은 多情한 분이라 똑 잘라말할수가 없어서 하옇든 一月딸까지 기다리라고 했읍니다. 그래 기다리겠다고요. 수염이 덥수룩하니 나고 뭐 形便이 없이 되었어요. 그러던中 또 하로는 찾아와서 말하기를 旅舘費가 없어서 停車場 待合室에서 자고있다고요. 三十錢짜리 상밥을 사먹으면서요. 참 보기에 딱했어요. 그때 그는 放送局에 李瑞求氏를 찾아가보겠다고 하면서 양복저고리아레서 무엇을 끄집어내는것을 보니 조선단소겠지요. 하하하
一同-하하하
王平-지금은 이처럼 웃으면서 말합니다마는 五年동안의 그의 悲慘한 生活을 보니 내눈에 눈물이흘렀어요. 그도 내가 우는것을보고 왁 달겨들어 울었읍니다. 그래 둘이서 한참 울다가 그만 집으로 나려가라고 그랬지요. 꼭 自殺이라도 할것 같애요. 落望하지 말고 시굴로 나려가라고요. 레코-드가 大體뭐냐고요. 歌手가 되는것으로만이 人生의 全部가 아니라고요. 나의「合オ-バ」를 주어 典當을 잡혀서 내려보냈읍니다. 가엾은 人生!
具沅會-그래 그가 나헌테 왔는데 曲調를 팔라고했더니 曲調보다도 肉聲을 넣겠다고 그렇겠지요. 참,
一同-참, 가엾은 사람이로군!
咸大勳-그러면 이만하고 座談會는 끝이겠읍니다. 여러先生님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말슴해주시어 大端히 感謝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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