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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제금가 안병소 씨 대담기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천재 제금가 안병소 씨 대담기 天才提琴家安柄玿氏對談記
종    류 대담 對談
필    자 K기자 K記者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8-07 昭和十三年七月
면    수 174 174
기사
지금으로부터 滿四年前-昭和九年四月十日밤 本社學藝部後援으로 安柄玿 李愛內 李寅善 三氏의 海外負笈을契機로하야 公會堂에서 告別의뜻으로 三氏合同演奏를 開催하야 滿都의 人氣를끌든 光景이 바루 어제와같은 感이없지 않은데 그동안 벌서 四年이라는 歲月이흘러서 再昨年가을에는 伊太利에서 工夫中이던 李寅善氏를 맞이하야 우리樂壇의 活氣를뵈였고 이제 또 滿四年間이나 獨逸伯林에서 提琴을 硏究中이든 出衆의 天才提琴家安柄玿氏를 맞이하게된것은 다만 樂壇뿐만아니라 一般이다함께 기뻐하지않으면 안될一大快事가 아닐수없다 더구나 李愛內孃도 七月에는 歸國하리라하니 우리 樂壇에 盛事라할것이다.
이 鬼才提琴家 安柄玿氏의 지나간 經歷에 關해서는 벌서 江湖 一般이 자세히알고 있을것이니 長惶히쓸必要는없고 이제 簡單히 氏의 過去를 들어보기로하자.

그의略歷
氏는 서울서 出生하야 시골서 자라났는데 그의祖父되시는 분은 朝鮮書畵界에 이름이높으신 心田先生安중식씨였고 氏의 嚴親되시는 분은 安명호씨로서 實業界에 많은 活動을하시는 분이다. 집안이 그리 가난하거나 적막하지는않었으나 不幸이도 氏는 갖난시 八箇月만에 痢疾 비슷한 病에 걸녀 젔도잘못먹고 次次身體가 衰弱해지며 두다리가 明袖고름처럼느러지게 되였다 그후 좀 差度는 있었으나 웬인일지오른편 다리는힘을쓰지못함으로 마침내 서울로올러와서 總督府醫院으로가보니 脊髓痳痺症이라는 宣告를 받었다.
그후 그父親의 끝없는 精誠도 虛事가 되어 氏는, 영영 不具의 몸으로 世上을 지나게되었다.
그러나 그가엽슨 몸에 이윽고 世界的 提琴家로서天下를 울리울뿌리가 싹트고 있었든것이다.
氏가 八九歲때 遂安公立普通學校에 다닐때부터 氏는 모든課目中에서도 特別히 唱歌成績이 良好하였다. 그후 아버지께서 사다주신 조그마한 풍금을 저녁마다 작난하기를 한三四日만에 벌서 學校에서 배운曲調를할수가있었으며 그후 二年을지난 열한살되는해에는 동모헌데 헌바이올린을 얻어다가 단이틀만에 唱歌曲調를훌륭히 켤수가있었다한다. [사진] 새로도라온安柄玿氏
그러자 父親이 經營하던 事業關係로 遂安에서 黃海道平山南川으로 집을옮기게되어 氏는 南天公立普通學校 三學年에 入學하게 되었는데 그해여름 그 골 郡守宅에 東京가서 音樂工夫를하는 崔虎永氏라는 이가 放學동안에 나와있다는 消息을듣고 아버지는 곳 찾어가서 바이올린가지는 法만이라도 가르처달라고 請한結果비로소 天才少年安氏는 처음으로 音樂先生으로 맛나게되었던것이다.
그러나 前記 崔虎永氏는 學生의몸이라 곳東京으로건너가버리고 그後 얼마안되어 어떤사람의 紹介로 當時 朝鮮 호텔의 音樂指揮者로있던 獨逸音樂家『후-쓰 氏의 指導를 받게되었음으로 곳 시골집을 거두워가지고 서울로도라왔다. 上京하야 爲先中東學校速修科에 在籍하야 이듬해 養正高等普通學校에 入學하야서 學業을 繼續하는한편 前記「후-쓰」氏의 指導를 約一年동안을 받었는데「후-쓰」로 하여금「인젠 내가가르킬것은 다가르키고 더가르킬것이없오 이런무서운 天才는 東洋에와서 처음보왔오 獨逸이나 伊太利같은 곳으로가서 一二年동안만 더 工夫하면 世界的 音樂家가 될것이요 하게쯤되였다.
單一年동안의 工夫로 열네살의 어린몸이 이렇듯이, 훌륭한 成績을 내인 氏에게는 實로 非常한天禀이 숨어있었든것이다
이리하야 養正高等普通學校를 卒業한 나어린바이올리니스트 安柄玿氏는 앞에서도 그말한바와같이 벌서 十五, 六歲때부터 大曲으로 獨奏會를 열적마다 世上은그를「天才」라고 불러왔다.
그후 한때는 米國으로 留學간다는 消息도 있었으나 여러가지 事情으로 말미아마 如意치못하고 그대로있다가 只今으로부터 六年前-卽 昭和七年에 神戶로건너가서「크레인」이란 伊太利先生에게 배우다가「크레인」이 本國으로 도라간 後에는 다시 提琴家로 高名한「모기렙흐스키-」氏門下에서 그의 個人敎授를 도우면서 指導를 받고있었다.
그러다가 昭和九年 봄을 맞이하면서는 마침내 大望을품고 憧憬하던 獨逸留學을 떠났던것이다.

歸國한첫印象
記者는 처음으로 五月二十三日 歸國人事次로 本社를 來訪한 安柄玿氏와 對面할 機會를 얻었다. 작달막한키에 해말숙한 얼굴-더구나 氏의 유달리 빛나는 양눈동자가 그럴뜻싶어서 그런지 어댄가 天才다웁다고생각했다.
記者『伯林으로 가서는 곳 國立音樂大學에 入學하셨읍니까?』
安氏「아니올시다. 내가 國立音樂大學에 들어간것은, 二年後 一九三六年입니다.」
記者.「그럼 그前에는 어되서 工夫하섰읍니까?」
安氏.「푸로페써․빌렌헤쓰氏로부터 個人敎授를 받어섰지요.」
記者.「그빌렌헤쓰氏란 어떤분입니까?」
安氏.「푸로페써로 世界的으로 高名한분이지요. 그뿐만아니 歐洲樂壇의 大演奏家요. 大敎授입니다. 近二十年동안이나 伯林帝立音樂大學(至今은 國立音樂大學으로 되였읍니다마는)의 바올린科의 首席敎授로 게시든분으로저 有名한 쿨렌캄푸․불푸스타- 아돌푸․뷰쓔같은 人物을 길러내인 大先生입니다. 現存音樂家로서, 音樂辭典에까지도 올르신분입니다.」
記者.「그런분에게 個人敎授를받자면 퍽힘도들겠읍니다그려?」
安氏.「네, 처음에 그를 찾어가서 個人敎授를 받으려왔노라고 하니까 나의 차림차림과 風采를 보더니뭐너같은 놈이 個人敎授는 무슨 個人敎授냐는듯이 도대처 받아주질 않습니다. 그래여러번 찾어가서 애걸하듯이 간청했더니 정말 너의 뜻이 그렇거든 한번 내가보는데서 試奏해보라기에 바이올린을 컷습지요. 그랬더니 그도놀래면서 그만했으면 資格이 充分하다고 自己의 弟子삼기를 約束하야 주었읍니다.」
記者.「그런분에게 敎授를 받자면 敎授料같은것도 相當할테지요?」
安氏.「한時間 普通 百마-크式입니다. 圓으로 換算하면 大槪百圓 가량쯤되지요. 나도 처음에는 百마-크式을 支拂하면서 배웠읍니다. 없는돈에 百마-크式을 내고보니 나로서는 百마-크에 값을할려고집으로 도라와서는 잠도못자고 猛烈한 練習을 繼續하였든때문에 늘 코피를 쏟았지요. 그後 到底히百마-크式을 支拂할수없다고 나의 事情을말했더니만 그러면 半折을減하야 五十마크로 敎授를 받게되였읍니다. 그러는중나의 經濟狀態는 漸漸逼迫해가는 한편師弟의情義는 漸漸두터워젔읍니다. 그래나의 事情으로는 五十마크도어렵다고 했드니 그럼 特別히 厚待하여 二十마크만내기로하고 約半年쯤을 繼續하다가 그것두 또 어려워서 이번에는 時間制를廢하고 每日百마크로定하고 쭉 繼續하였읍니다.」
記者.「그럼 그빌린해쓰氏에게 敎授를받은것도 얼마동안이나 되는가요?」
安氏.「一九三四年부터 三六年까지니까 約二個年동안입니다. 그後敎授夫人이 心臟이弱해저서 伯林을떠나 轉地療養을 떠나게되여서 그만할수없이 中止하였지요 그때도 가치 旅行을하면서 工夫하라는것을 經濟上으로나 禮儀上으로 모다미안해서 그만두었읍니다. 그때에 그가 말하기를 인제부터는 先生이없드라도 혼자서 넉넉히 工夫할수가 있다고하여 그만 두었지요」
記者.「그러면 國立音樂大學에 入學하신것은 바루그後였읍니까?」
安氏.「네, 그렇습니다. 혼자서 硏究해볼생각도 있었으나 또 經驗도 얻을겸 國立音樂大學에 入學하였읍니다.」
記者.「國立音樂大學이란 大體로보아 어떤 程度에 大學입니까?」
安氏.「伯林 國立音樂大學이라면 歐洲에서도 엄지손꼬락치는 學校지요. 이學校에 合格될만한 資格이면 벌서 어느程度의 音樂家로 看做할만한 學校올시다.」
記者.「그學校에 李愛內氏도 게신다지요?」
安氏.「네, 피아노科에 있읍니다 퍽재주가있는분이죠.」
記者.「그럼 그學校에서는 어떤분께서 敎授를 받었읍니까.」
安氏.「막쓰․슈트릎氏에게 師事하였읍니다.」
記者.「그는 어떤 사람이예요.」
安氏.「쏠리스트로 有名한 분입니다. 多年間敎授生活을 한 有名한 先生입니다 그學校바올올린科에 入學하여 亦是 그學校 五大오이케스트라中 가장 代表的인「하웁트, 콘첼트, 씸포니, 오케스트라」에 加入하였읍니다」
記者.「그學校는 몇해에 卒業입니까」
安氏.「三年에 卒業입니다마는 저는 二年만에 卒業한셈이지요. 그런데 그學校에서 卒業證書以外에 科長으로부터 實力을 認定한다는 말하자면 實力認定證明書같은것을 내주지요. 저도 바올린科 科長으로부터 『安氏는 國立大學에서 나의 提琴科에屬하여 提琴을硏究하였다. 나는 그의 音樂的進步 解釋 테크니크等에大端히 滿足한다. 그의 經歷은 넉넉히 先生의資格을가졌다고 證明한다』大略이와같은 證明書를내주지요.」
記者.「學費는 어떻게 장만하였읍니까?」
安氏.「내가 神戶에 가있을때 「모기렙흐키」氏게서 師事한적이있읍니다. 그때 「모기렙흐스키」氏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러오는 사람이많었지요. 그러나 모氏는 奔忙하고해서 내가 그의代身으로 個人敎授를 한적이있읍니다. 그렇게해서 번돈과 또때때로 演奏會에도나가고 放送도하고 해서 번돈 約三千圓가량을 가지고 갓섰지요. 그것과 또 여기서 떠날적에 내외家에서 반드시 갑겟다는 條件으로 每月 百圓式을보내겠단 約束으로 떠났지요. 그래 結局한 一年以上쯤 어떤때는百圓百五十圓 또는 二百圓式을 받었읍니다마는 다른事業과달러서 깽깽이 工夫를해서 그돈을 언제갚을까고 모다들주저하는 모양이였읍니다. 하여튼갚겠다고 말한이상 어떠한 일이있드래도 반드시 갚겠읍니다.」
記者.「伯林서도 個人敎授를 맡아보섰다는말을 들었는데요?」
安氏.「네, 支那사람 몇名과 內地사람들에게 個人敎授를 하였읍니다. 그리고는 音樂會에 나가서 얼마씩벌어섰읍니다.」
記者.「듣건대 이번本社後援으로 열리는 演奏會에 손수 만든 바올린을가지고 演奏하신다는 말을들었는데 그것이 事實입니까.」
安氏.「네, 제가 만든거로 演奏하렵니다」
記者.「아니 바올린製作法은 또 언제부터배우섰읍니까?」
安氏.「學校에 入學한後 저 도몰으게 樂器製造에 趣味를가지고 어떤사람에게 물어보니 바올린製作은 收入이많으니만큼 月謝金도만타고하면서 每月一千막크내야된다는것입니다. 그래 그렇게는 到底히낼 能力이없다고하니까 그는 바올린製作者로 이름이높은 「아르미노이맨」을 紹介해주었읍니다. 그런데「아르미노이만」은 그러면 네재주를 試驗하겠다고하길래 맨처음부터 材木을 깎아서톱질을하여 바올린한개를 만드러놓았지요.」
記者.「참 용한 技術을다가졌읍니다 그려!」
安氏.「차차-. 그랬더니만 그는 눈을 크게뜨고 놀래면서 말하기를 처음만든것이 이처럼 훌륭할줄은 몰랐소하면서 自己가 그와같은 程度의것을 만든것은, 바올린製作에 손을대인지 八年後라고하며 感嘆합디다 後日 伯林에서도 바올린製作者에가장名聲이 높은 사람이나의 바올린을보더니 이것은「분트릿히」란者가 만든것이라고 하길래 바올린속을 보라고했더니만 아 당신이 만든거냐고 아주놀냅디다.」
記者.「그래 그것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읍니까?」
安氏.「팔어먹었읍니다. 千마크에팔어서 生活에보태썻읍니다. 지금가지고 나온것은 그後에 또만든것이지요」
記者.「朝鮮에 나와서도 바올린製作을 하시겠읍니까」
安氏.「네하겠읍니다. 이번에 나올때도 材料를 사가지고 나왔지요. 여기서는 ․ 到底히 材料求할수가없으니까요. 적어도 三十年 或은 五十年이나 百年쯤말리워 두었던 材木이래야만되니까요.」
安氏와의 對話는 여기서 끝이였다. 끝으로 한가지더 添記할것은 지난一九三六年 伯林에서 열린올림픽大會에서 開催된 伯林휠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란데쓰오케스트라 大學生오케스트라 이三大오케스트라가 聯合하여 成立된 大오케스트라 (近)三百名人員의 一員으로서加入하였던 安柄玿氏를 紹介하고 붓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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