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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대의 사적 발달과 및 그 가치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조선 광대의 사적 발달과 및 그 가치 朝鮮광대의史的發達과및그價値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어조동실주인 魚鳥同室主人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8-05 昭和十三年五月
면    수 310 310
기사
[사진] 唱劇의 한 場面인 듯

朝鮮唱劇調-광대소리가 어느時代부터 生起었으며 누가광대의嚆矢인지 文字의記錄이없는만큼 資料蒐集이 憑據가全無하고 傳說로는 證據가糢糊하므로 따라서 記述하기가 퍽困難하고 疑問이많다 父老의口傳과 現在老광대의 口述에 依憑할外에 다른道理가없다 그러나이역시 人物의先後顚倒와 年代의錯誤가없음을 免치못할줄안다.

唱劇調의由來와그變遷發達
唱劇調는 巫女의 살풀이 祝願 其他名色굿에서 變遷한것이아닌가한다 證據할만한것은 지금도 全羅道의巫女의 살풀이나 祝願 其他各色굿소리를 들어보면 그調와 너림새가 퍽 광대의唱調와 彷彿하고 광대가 모다 才人巫女階級에限하야 出生한것으로보아서 可히알수있다 過去名唱中에 權生員, 鄭春風, 其他數人의 비가비가 例外도있지만 내年少時代에 恩師 李石亭定稷先의게 春香傳의 由來와 그發達을 斷片的으로 드른 記憶이 있다 石亭先生은 漢學의 巨匠으로 當時擧世가 推詡할뿐더러 古今漢詩文論評에 在하여는 可謂當代獨步이였고 當時詩人 黃梅泉 李寧齊로더부러 相許하야 交遊가깊었었다 餘談이지만 先生의 詩와文이 二十餘年前에 發刊되였고 詩에對한 校正은 金滄江의 붓으로 删削하였다 그의博學博識인 片屑의 口述이라도 나는 貴重히여기고 그信憑할만한 價値를 認定한다.

春香傳의由來와發達한經路
石亭先生의 談話에依하면 春香傳의由來와 그發達에關한 傳說이區區不一하나 其中可信할者를 取擇한다면 如左하다하였다.
南原邑老妓月梅딸 色은薄色이고 成春香과 時任守令의아들 李道令과의 肉的關係가 있었든것이 事實이고 李守가解任上京後 其家는零衰不振하였다 春香이가 몸은賤生이나 處女의몸으로 兩班의子弟의게 許身한것이 光榮이고 또한戀情이 날로깊어졌다 그러므로 李道令이 富貴榮達하야 다시自己를찾기를祝願苦待하였으나 千里遠隔에 通信不能奈何오 畢竟은 짝사랑으로 그無情의怨恨을 품고 죽고말었다 그後에 南原一郡이 凶災가 들어서 내려三年동안을 繼續하였다 全郡人民의 飢餓狀態는 人心이洶洶하고 流離丐乞의慘狀을 現出하는極度에達하였다 農民과婦女들은一般이 凶災의原因은 怨鬼 春香의所使라고 迷信하고 防災策에對한 議論이沸騰하였다 時任吏房이 治者의立場에서 一般人民의 迷信의歸趣를 諒解하고 春香傳을 지어서 이것을 巫女의살풀이에 올려서 그 怨魂을 慰撫하였다 그것이 果然 奏效하였든지 凶災는 곳 登豊으로換易하였고 따라서 人心도 곳安定되였다 其後에 春香傳은 文人의붓으로添削을加하야 小說이되고 南原을爲始하야 그隣近邑郡에서는 巫女의 春香傳살풀이가 盛行하였다 광대는 그價値를 認定하고 唱劇調로옴겨서 부르기를始作하야 數多人의 添削과 多年의鍊磨를 經由하여서 完成하게된것이다 이것이 春香傳이 巫女의살풀이에서 광대의唱劇調로 變遷發達한經路이다 놀보傳 兎鱉歌의由來는 아즉붓을 머물너두기로하고 광대이야 기부터해보자

광대의人物과그歷史
朝鮮광대의歷史를 簡單히말하면 광대는李朝肅宗時代를 前後하야 發生한것으로볼수있다 春香傳卷頭에 肅宗大王卽位初에 時和年豊하고 라고記載하였고 또는現存名唱 宋萬甲의 從祖宋興祿을 광대의中始祖로 잡는다하면 以上두가지點으로보아서 距今二百年內外에서 唱劇調가始作한것이아닌가한다.

광대의嚆矢
現存全北泰仁郡居老광대 全道先의口述에依하면
광대의嚆矢는 結城의崔先達과 河漢潭이라한다 이것은 무엇을憑據한것이냐하면 自己年小時에 名唱朴萬順 李捺致等의 소리풀이 할때에 叅席하야드른것이라고한다.
소리풀이는 무엇이냐하면 광대가 唱劇을맟이고 最終에 過去歷代名唱을 一一히呼名하여놓고 그앞에서 다시 自己의獨特한唱調로 한바탕하는式이다 年代는 未詳하나 後人의 소리풀이式場에서 第一먼저들어서 呼名하는것으로보아서 崔河兩氏가 광대의嚆矢인줄로 認定할수밖에他道가없다.

兩班광대權生員
權氏의年代는 未詳하나 勿論崔河兩人의 後輩이고 李朝翼憲兩代間 人物인듯하다 이것은 그의後輩 廉啓達이가 憲宗時代人임으로보아서 推測할수있다 그의 더늠으로後世에傳한것은 제비歌인데 後人의 評으로는 그曲調가 單純하고 그製作이 그리出衆할것이없으나 세마치장단으로 一毫差錯이없이 소리한바탕을 맟이는것이 他人의 믿지못할 獨特한點이라한다 氏에對한 한逸話가있으니 幼少時부터 歌謠에能할뿐아니라 鄕班의子弟로서 글공부는힘쓰지아니하고 광대소리만 全力함으로 그父兄은 家門의恥辱이라하야 그全然抛棄함을 極勸하였으나 終是듯지아니하므로 一門이모다서 議論한結果 차라리 그生命을없새서 家門의名譽를 保存함만같지못하다하야 드디여 刀斧之下에 殺戮하기로決定하였다 權은泰然自若으로 歌調一曲一唱으로 最後를맟이기를 切願하므로 一座는그가련한 人生의 最後所願을 許諾하였다 悲絶悵絶한歌調는 듯는사람으로하여곰 참아못할 感動을 줌에어찌하랴 그리하야 죽엄을免하고 인해家庭에서 逐出을當하였다는것이 後世까지傳하는 有名한이약이다 몸은죽어도 藝術은 죽지아니한다는 眞理를 이에서도 넉넉히볼수있다.

廉啓達
廉啓達은 李朝憲宗時代에 京畿道驪州出生인 名唱이다 광대의出生이 擧皆全羅道인데 京畿에서 名唱을내였다하야 特히 廉氏를부를때에는 京畿광대廉啓達이라고 부른다 氏의더늠으로는 春香傳獄中歌中에서 春香이가 杖下에서 끗끗내 新守令李穆龍의 沒恥的貪慾을 拒絶하다가 마츰내 慘酷하게도 絶命하고만것을 三門밖에서 待立하고있던 여러할양들과 妓生들이듯고 춤들을추면서 그泥中出荷花的 潔白한貞操를 讚美한 대목이다.
죽었단다 죽었단다 누가누가 죽었다냐 春香이가 매를맞고 거의죽게되였단다 云云의曲調이다 憲宗의寵愛를 받어서 同知의官爵까지 받었다한다. [사진] 沈淸傳의一場面

高壽寬
高壽寬은 廉氏와同時代의 名唱인데 春香歌中 사랑歌가 그의더늠으로 後世에 傳하는것이다.
사랑사랑 내사랑아 어허둥둥 내사랑아 네가무엇을 먹으랴느냐 울긋불긋 수박 웃봉지 떼버리고 云云의것이 이것이다.
高氏 晩年에 花柳病에 걸녀서 鼻音-코먹은소리를 發하므로 지금도 광대다려 그더늠을하라면코먹은소리로 사랑歌를한다.

歌王宋興祿
宋興祿을말하기前에 興祿의仲兄 光錄을 말아니할수없다 光錄이는 早死하였음으로 後世에無聞하였으나 其實은 資品이 其第興祿보다 오히려나엇고 盡陽調를 創始한만큼 斯界에 功獻이不尠하였다한다.
宋興祿은 李朝憲哲兩朝間 광대인데 모든歌調의集大成한 功勞로보아서 技藝의特出한것으로보아서 광대의中始調이다 그天資의高邁한것과 技藝의絶倫한것과 抱負의浩大한것이 到底히後人의 밋지못할것이었다 그러므로 同時代의 名唱牟興甲이는 先輩로極히 推尊할뿐아니라 歌王의稱號까지 바첫다 그兄光錄이의게 盡陽調를 學得하야 多年硏磨하야 그完成이 極致에이르렀고 羽調 界面其他모든曲調를 集大成하였다 盡陽調完成에關한 한揷話가있다 晩年에 어떤名技와 同居하는中에 閒雲野鶴으로 餘生을보낼가하야 咸鏡道어느地方山水를 차저가서 한동안살었다 元來宋氏의性格이 異常할뿐더러 그傲慢하고强怕한點이 他人과調和하기가 極히困難하였다 同居의妓生이 그소리에팔녀서卽반하여서 同居하기는하나 性格의不和뿐아니라 그乖悖한뜻을 받기에는 너머힘이不足하였다 必竟은 보찜을싸가지고 서로헤여지게되였다 憤激한김에 永永絶緣的으로 門을박차고 나서니까 그때宋은 마음으로는 卽時慰撫挽留하여서 다시 和解하기를 請할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그自負가强하고 傲慢에太甚한性格이 이에 나지아니하고 그憎惡의 憤怒와 孤獨의悲哀가 一時에幷發하였다 愛人과永永別離하게되는때에 그悲痛의感情을 悲愴한曲調로 發함을 不覺하였다.
네이년잘가거라 네이년 잘가거라 네가간들 어쩔소냐 云云하야 그슬푸고 외로웁고 애달고 사랑스럽고도 미운感情을 餘地없이 發露하였다 그리하여서 紫門밖에서듯고섯든 그안해는 同感의情을 이기지못하야 다시들어와서 서로풀고말었다 이것이 그不和不覺中에서 自歎歌로 부른것이 偶然히 盡陽調를 完成한것이었다 소리制作法이 어떠하냐하면 狂風이 大作兮여 高木이折이로다는形狀으로 千兵萬馬가 뒤끌어와서 天地振動하는形狀으로 하는式이다 그러다가도 언제그래든가 싶이 春風和暖에 百花爛漫 格으로도라선다 그더늠으로 後世에 傳한것은
치여다보니 千峰萬壑 내려구버보니 白沙地땅이라 허리굽고늙은長松 狂風을 못이기여 우줄우줄 춤을춘다이골물이 꿜꿜 저골물이 솨르를 云云의것이다.

牟興甲
牟興甲은 宋興甲과同時代하야 一世를 振撼한巨匠이다 宋은羽調로 極致에達한歌王이라하면 牟는界面으로 極致에達한絶唱이다 宋은東派의始祖일同時에 牟난西派의始祖이다 그의더늠으로 後世에傳한것은 有名한 春香傳離別歌中
여보도련님 여보도련님 나를어찌고가랴시오 날다려가오 날다려가오 쌍교도싫고독교도실네 云云의한대목이이것이다 이에對한 한揷話가있으니 牟氏가 八十晩年에全羅北道全州郡 어떤村前에서 餘生을보내는데 買物의必要가있어 全州府市場에 들어와서 要件을맟이고 도라가는 길에 多佳亭에 數千의群衆이 環堵함을보고 웬일일가하고 훼치고 들어가본죽 當世名唱으로 名聲이錚錚한 朱德基가 소리를하는데 聽衆의 拍手唱采-지구난소리 비오듯한다 朱唱劇을맟이고 自誇를이기지못하야 牟興甲은 不足掛齒요 宋興甲도 猶不足仰視라고 自讚自尊的言辭를 敢發하였다 따라서 座中은 그當함을 許한다 牟氏 듯기에 甚히不快하야 그괘심함을 詰責하기爲하야 듸여入場하야 座中에 拜禮하고 前記 離別歌一曲을 前齒한唇音으로 힘있게 불넜다 當年八十에 그精力이 오히려吐하거니와 調格의 높고 아름다운것은 朱의미치지못할바이다 朱元來 宋牟兩人의 鼓手로 多年擧行한者이라 服服謝過하고 敢히 그앞에서 開口를못하였다 이것이 有名하게도 그前齒의發音으로 後世에 傳하는 더늠늠이다.

朱德基
朱德基는 宋興甲 牟興甲兩人의鼓手로 多年댕기다가 唱劇에天才가있엇던지 修鍊에修鍊을더하여서 마츰내 名唱이된사람이다 赤壁歌中
趙子龍이가 활을 非丁非八로 法을갔추어 깍지손을뚝떼니 번개같이 가는살대 徐感 丁奉의 탄배의 도대를 와지직끈 부즈러트려 배머리는 빙빙 물결은 출넝출넝 云云의것이 그의後世에 傳하는 朱德基활는대목이라는더늠이다.

宋우렁이
宋우렁이는 宋興甲의 繼續된嗣子로서 그父의게서 各種의 더늠을 많이學得한 名唱인데 너머도 그父親의名聲에 壓倒되여서 그의特殊한더늠으로 後에끼칠것이업슴을 歎惜하는바이다 調格은羽調로 製作은東派이었다.

朴萬順
朴萬順은 宋興甲의 衣鉢을 받은 直系弟子로써 東派의大將이오 近代唱劇調의 出衆한大家이다 그唱劇의天才로 擴充發揮코자하야 朱德基의手下에서 指導를 밧다가 後에宋興甲의門下에 이르러서 約十年동안을 專攻하였다 任實郡어느瀑布下에서 聲音의修鍊을 十年이나 積工하였다 피도거의동우로쏘닷거니와 聲量이畢竟은 人語難分超尺間境遇를 聲出千峰萬壑間境遇에 到達하였다 特히 春香傳獄中歌一篇을 十年동안이나 宋의手下에서 專攻한後出世間第一着으로 全州宣化堂에서 第一聲을 發하였다 筆者가일즉 李石亭先生의게 들은말삼을 記憶하면이러하다
때는 五六月夏節인데 宣化堂과距里가 數마장인 自己의堂齋에서 듣는데 萬籟岒寐한深夜에 그웨치는 목소리가 婉然히 耳膜을울녀왔다한다 생각건대 千古有名한 希臘時代의雄辯家 데모스네네스의聲量도 이에믿지못하리라 性格이 傲慢한데兼하야 技藝가 卓出하므로 그自負自慢이 一世를 睨視하였다한다 自己스스로 興이나지아니하면 笞杖을 죽도록마저가면서 品貴權勢의威力에 不服하였고 그自高的操守가 買杖的行爲를 질거히아니하므로 到處에 萬人의稱譽를 받는同時에 한편으로는 數多人의 미움도 퍽많이 받었다한다 有名한이야기가있다 한번은 李朝大院君의 부름을받고 시골에서 서울로 올나가는데 歷路가 忠淸道이라 時任監司 趙東植이가 불너서 소리한번하기를 命하였다.
大院君께서 소리를 봉하여가지고 오라고하였으니 소리봉지를 뗄수가없다고 拒絶하였다 兩班의 勢力만믿고 生殺與奪를 任意로하는 그時代에있어서 粗暴하기로有名한 北村벨락의別號를가진사람이아닌가 趙氏로도 大院君의 勢道的威力下에는 一介賤人 광대朴萬順을 어찌하지 못하였다 朴은그길로 서울로 올나와서 大院君의게서 數朔留連하다가 歸家할時에 上京途中에 趙의命令을 拒逆한 顚末을 告하고 歸則被戮乃己니奈何오 그生命의救濟함을 乞願하니가 大院君이 듯고나서 罪當代死라하고 趙監司의게 書簡一張을 躬徃神致하도록 命하였다.
蔽一言하고 朴某의罪는 죽여맛당하니 任意處理하되 다만 그絶世的唱調를 한번듯고 죽임이可하다는 書意임으로 趙는 그뜻이 소리로보아서 살녀두라는말인줄 알고 드듸여冥之하고 소리한바탕을 식히였다 朴은 死에서更生한 恩德을갑기爲하야 心力을다하야 그技藝를 發揮한 結果 돌히여 趙氏의게 寵愛를받었다한다.
筆者일즉 故鄕에서 鄕父老의게 朴이某家에서 一個月동안이나 留連하면서 그의請으로 李날치 丁昌業 張子伯等 여러名唱을 招請하여서 宴會 唱劇으로 迭蕩하게논때가있었는데 그當時 光景을 實際로본 談話를 들으면 그는果然絶世的名唱이였다고한다 音聲은陽聲이고 唱調는 羽調로 판을짜가는데 唱去唱來 上聲을 한번 全力을다하여서 내지르면 婉然히 碧空에서 떠러저내려오는듯하고 各様各色의 技藝는 奪人造化的이다 때와境遇를따라서 千變萬化하는 그힘있고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 그점잔하고도 구수하게 作態하는 제스추워 듣고 보고 늣겨서 愉快할뿐이지 말로는 形容할수업다고한다 몸은倭短하고 머리는後頭盖骨이 툭내미러서 面貌와體格으로는 風神이퍽초라하였다 언제던지 綿衣紗冠의 俳優的色彩가없고 峨冠博帶 布彩布衣가 그의服色이고 言語行動은 彷佛히 儒家의氣風이 있었다 이러한 姿勢로 앉어서 名唱家의 唱劇을 거기가 이러니 절어니 이대목은 잘하느니 못하느니 先生이 學生을 訓導하듯이 批評만하고 앉었는데 大巫之前小巫不敢搖鈴으로 다른광대는 敢히 그앞에서 任情任意로 開口하지못하되 惟獨李날치는 不關하고 自由自在로 그獨特한 唱調를 發表하였다한다 내생각건대 朴氏만일 儒家에서나서 漢字를硏究하였드면 그才品이 넉넉히 支那에있어는 宋代蘇東坡에 比儔하였을것이고 朝鮮에있어서는 申紫霞 黃泉에 네리지아니하였으리라 漢人의餘唾殘滓를 盜襲模寫한 시고 곰팡내 나는 朝鮮人의 所謂大家라는이의 漢詩보다 朝鮮的情趣가 濃厚하고 朝鮮사람의 思想感情에맞난 광대의 短歌나 唱劇調보다 훨신났고 더욱좋다고 나는忌憚없이말하여둔다 朴氏의더늠으로는 春香傳中 사랑歌, 獄中歌中 鬼哭聲 兎鱉歌中
토기가水宮에서 배腹를내밀면서 배갈너라 배갈너라 내배를갈너서 肝이나오면좋거니와 만일肝이나오지아니하면 云云의調가 後世에傳한다.

李날치(捺致)
李날치는 西派大將으로 朴萬順과同時代의 좀後輩로서 수리성으로 界面을 主로하여서 唱劇調를하는광대인데 抱負와技藝가 非凡할뿐더러 그聲量이 巨大하야 春香傳唱劇調를할때에 라팔(喇叭)을 불때에는 완연히 實物로 부러서내는 소리내고 배래는뎅뎅하면 꼭實物의잉경소리가 一村一洞을 울녀내인다 한참興이나서 소리가 佳境에들어가면 푸지고도 훔우저서 聽衆의 拍手喝采-얼시고절시고 좋다 感歎不己의 지수는소리가 左右에서 쏘다저나온다 聽衆으로하여곰 能히울니고 能히웃기고한다 여게서 暗然히 훌적훈적울다가 瞥眼間에 抱腹絶倒하는 그光景과 그唱劇의제수추워를 아울너보면 實로 天下壯觀이라한다.
朴萬順의소리는 識者에限하야 稱譽하지만 李날치의소리는 男女老少 詩人墨客 樵童牧笠 할것없이다좋아한다 調格만 다를뿐이지 當時에있어 後輩로서 能히 朴과一二를 다투웠다한다 朴과並立하야 서로번갈너서 소리를하게되면 聽衆이 各其特色에 昏醉하야 罷散하기를 不肯히하나 만일朴李뒤에 다른광대 丁昌業 孫子伯같은이가 出場하게되면 聽衆은三三五五로 슬금슬금 풀녀서 소리판은 殺風景이되고마는것이 十常八九였다고한다.
그의長技는 새타령인데 前無後無할만큼 當時獨步였었다 벅국새 숙국새의소리를하면 實物의새가 소리를따라서 날너들어온일이 間或있었다고 傳하는말이있다 現在 漢詩로 有名한 林偶丁奎氏의말을드르면 自己少年時代에 京城附近 어느 山寺에가서 李唱의새타령을 듣는데 때에 숙국새인지 벅국새인지는 모르나 새는分明히날너들어온것을보고 在座一同이 奇異驚歎한 일이있었다고한다 이것은 그진말같은참말이다 藝術의極致는 能히實物化하는지경에 到達하는것을 우리는 미들수있는것은 歷史的記錄으로도 아는것이 있지안이한가 新羅時代에 有名한 畵家率居가 소나무그림을 黃龍寺壁上에 붙여섰는데 새가 實物로알고 날너들어와서 가지에 앉으랴다가 붙치지못하고 다시날너나간다 이런일이 種種있었다고 茅滄吳世昌氏著 槿域書畵徵에도 掲載되였다 李唱이 能히 사람을 울니고 웃기고 하는데對하야 한揷話가있다 그當時에 서울에 어떤老宰相으로 性格이 몹시 剛毅沉靜하야 喜怒哀樂의感情을 外面에 發露치아니하는이가 있었다 自己孫子나 아들의夭慘을 보고도 泰然自若하는이다 어느때 親舊와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話頭가 광대의이야기로되야서 한사람이 名唱은 能히 사람을 울니고 웃기고 한다하니까 主人老宰相이말하기를 그것은 그러할理가없을것이로되 만일있다고하면 心弱한 拙丈夫에限하야 있을일이다 剛毅하고 氣魄있는 大丈夫로서 一介微賤한 광대의게 感情의支配를받어서 笑與哭을 被動的으로 當할것이냐하야 甲論乙駁에 歸一치못하다가 必竟은 實際的으로 李唱을 불너서 與否를 試驗하기로하였다 主人老宰相이 決諾하고 卽時로 李날치를 불너서 金千兩과生命으로 交換하기로 賭約하였다 다시 換言하면 李唱의 唱劇에 感動을 받어서 主人宰相이 落淚한다면 主人은 金千兩을 李의게給與하고 이와反對로 主人宰相의게 何等의 感激的悲哀와動作을 發露케못한다하면 李난 목-生命으로 代價를밧치기로하였다 事實이 實際化하느냐 아니하느냐하는것은 別問題하여두고 前日兩班과賤人의 賭約이 一時的弄談에 붙이지못할것인以上 그을마나 嚴하고 毛骨이竦然할約束이냐 李唱은欣然히 滿座 앞에서 沈淸傳中 沈淸이가 供養米三百石에 인당水祭物로 몸을팔여서 그父親과永訣하고 惡魔같은南京船人들의게끌여가는場面 그눈못보는 孤獨한父親을 村隣들의게 愛護하여달나는 遺托의哀辭 피눈물을 흘니면서 허둥지둥 인당수에 몸을던질그때에 그悲絶慘絶한 人生의 最後를 如實히 悲劇으로表現하였다 滿座의聽衆은 勿論이고 鬼神까지라도 우름을 發하게되였다 沈淸의 出天的孝誠에 感激을받으면서 人生의悲哀를 느끼면서 主人宰相은 不知不覺中에 뒤로돌아앉어서 한번눈물을 슬적남모르게씻고 卽時로金千兩을 李의게 命給致送하였다한다 雄辯家가 聽衆의感情을 自己任意로 支配하야 能動能激能哭能笑의 行動을 發作케함이 이에서더지낼수있으랴 名俳優가 觀衆의게 衝動을 줌이 이보다 더能할것인가 筆者 이에 이르러 붓을놓고 暗然히 생각할뿐이다.

丁昌業
丁昌業은 朴萬順의從輩로 東派에屬한 當時名唱中一人으로 羽調를主로하야 판을짜는솜시인데 그高邁하기 勿論朴萬順의게 比肩할수없고 調格은다르나 李날치와같이 雄渾하지못하였으나 亦是一家를 完成하였었다 比하자면 金碧燦爛한 高樓巨閣은 못되야도 四五間草堂을 子坐午向으로 精動하게 앉엇고 들어가보면 灑落한庭園에 奇岩恠石과 異花夭草가 깔여있고 間間히 靑松綠竹과維色樹木이 서서있어서 有時乎 蜂蝶이 날너들고 房안에들어가면 文房四友가 제자리에 꼭뇌여있고 窓辟間에는 縱橫으로 書畵를 失格아니하고 붙엇다 氣分이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 베고누었으니 大丈夫살님살이 이만하면 넉넉하다는노래를 불음즉한 調格이라고 말할수있다 그더늠으로傳하는것은 놀보傳中
중하나 나려온다 중한여석이 나려온다 저중의 거동보아라 굴갓쓰고 장삼입고 실띄띄고 손에木鐸들고 흔들걸이고 나려온다 흔들흔들거리고 나려온다 興甫門前에 當到하야 那無阿彌陀佛觀世音菩提 云云이이것이다. [사진] 劉忠烈傳의一場面

張子伯
張子伯은 朴萬順 李날치의 後輩요 丁昌業과同輩로서 西派에屬한界面을主로삼어서 하는手法인데 當時名唱中一人으로 丁昌業과 並立하야 世人이稱譽를 받은사람이었다 풍신이좋고 美男子로有名하였다 名唱이 되랴고 一大決心을가지게한 큰動機가있었다 그妻亦是 美色이 張의風采에 뒤지지아니하리만큼 佳麗하였다 其妻恒常 其夫의唱調가 他人의게 落後됨을 不滿히 여기고있든중 必竟은 그大成치못할줄로 斷定하고 이에 落望하야 全北沃溝某人의妾으로 들어갓다 張이이에 憒激하야 飜然히 覺悟한바있어 죽기로내기고 唱을 工夫하여서 一世를 聳動케하는 巨手가못되면 죽엄으로써밧구겠다는 決心을하였다 그리하야 樵軍農夫의生活로 家計를 維持하면서 千辛萬苦로 硏磨에硏磨를 더하고 負笈百里에 霜橋月店의 가진苦楚를 다격거가면서 工夫를한結果 必竟은 目的에到達하야 自他가共認할만한 名唱이되였다 錚錚한名聲이 遠近에 퍼지자 沃溝地方어늬뉘 回甲宴에 불녀가서 소리를하는데 前日逃走한妻가 소문을듯고 가만이와서 밤을새도록 들었다 名唱이된 以上 唱調가 前日에 比할것이아니거니와 그선풍도골인풍채가 더욱전날과 다르게뵈인다 變한心理가 다시새로운 戀慕의情으로 박구인다 熱火的愛情을 이기지못하야 罷하고 도라가는 張의소매를 붓들고 다시 百年偕老이기를 哀願하였으나 場은 그非한것을 諄諄히 說諭하고 終是拒絶하고말었다 이로보아서 人情飜覆似波瀾이 可謂實際語失諸東方收之桑楡가 正是格言이로다.
張이界面的광대로 李날치와같이 西派의本色을 그대로 發揮하지는못하였으나 西派의體面은 維持하면서 언제든지 滋味있게 失手없이잘하였다한다 名不虛傳이로 眼目이 높은前人의 그許與한것이 어찌偶然하였으랴.

評論家金世鐘
金世鍾은 朴萬順과同時한 東派에屬한大家이다 文識이 있고 古今唱劇調의 歷史에 照明하고 더욱이 唱劇調와 歌謠에 對한批評은 當世獨步로 自他가 共認하였다한다 朴萬順한참當年에 누구던지 그앞에서 敢히 開口하기를 끄려하였고 設或開口하야 是非長短을 評論하드래도 傾聽은姑舍하고 一言之下 否定하였다 그러나獨金世鍾은能히 是非長短을 批評하였고 批評만하면 그評의適切함에는 朴도服應하였다한다.
金이恒常말하기를 「唱劇調는 勿論唱을 主體로하야 調의組織과 唱의抑揚反覆을 힘써야한다 그러나 제수추워 動作形容을 等閑히하면아니된다」 말하자면 우름을울때에는 實際로 手巾으로 낯을가리고 업듸려서 울던지 앉어서 울던지 훌적훌적 울던지 放聲痛哭으로 울던지 그때그때 境遇를 따라서 如實히 우는動作을 表示하여만한다 泰然히 아무悲哀의感情도 表現치아니하고 아무動作도없이 그저우두컨이 哭聲만 發하면 唱과劇이 相合치못하야 失格이된다는말이다 聽衆이 何等의 同情과感激을 받지못하면 唱劇調의精神을 일는것이아니냐 가령
竹杖집고 芒鞋신고 千里江山 들어가니 를불을때에는 앉엇다가 쪼그리고 쪼그리여서 徐徐히 起身하면서 손으로 向편을 指示하면서 千里나 萬里나 들어가는 動作은 形容하야 聲調와 動作形容이 마조떠러저야 한다 喜怒哀樂의感情을 發露할때에 行住坐臥의動作을 表示할때에 그聲調와 行作이符合하여서 마조떠러저야한다.
치어다보면 萬壑千峰 나려구버보면 白沙地땅이라 할때에는 치어다보는 仰面과 내려구버보는 手指로 平地面을 指示하는 表示가있어야한다 例를들면얼마던지 들수있으나 餘此皆倣이니라.
曲調의 高低長短 抑揚反覆과 言辭의 大小疎密이 失格지아니하여야한다 例를들어서 말하자면
金剛山上上峰이 平地가되면 오랴시오 를한다하면 金剛山上上峰이 雲空에 聳出하여서있는만큼 上上峰을 細細上聲으로 질너야하고 平地는 平低란音聲으로 發하여야한다 枚擧하기 張皇함으로 이에끝이고 讀者의 스스로 例를들어서 判斷함에 막기거니와 金世鍾의 評論家的 色彩의如何를 말하다가 筆者의淺見을 너머張皇히 記述하였는가싶다.

비가비광대로評論家인鄭春風
鄭春風은 朴萬順 金世鍾과 同時代人物인데 忠淸道 어느儒家에서 出生한 兩班광대로서 權生員後 처음이다 元來儒家에서 生長하야 進士科에登한만큼 文識이 相當하고 唱劇調에對한 評論에있서서는 古今을通하야 鄭의右에 出할者가 없으리라고생각한다 批評家로 金世鍾과 當時에 可謂雙壁이어니와 그學識의優餘함과 理論의高尙함은 金과 不可同日語요 人階級에서 出生한 金世鍾과 兩班階級에서 出生한 鄭春風과는 好對照이다 鄭氏 性格이 疎放하야 事物에碍滯가 없음으로 自號春風하고 到處春風으로 生涯를맟였는데 광대로서 雅號를 行世한이가 鄭春風이 嚆矢이다 儒家出身으로 唱劇調를 他人의게서 學得한것이아니고 그天才가 飄逸함으로 自家獨工으로 古今을 綜合하여 마츰내 大家를 일우었다.
唱調는 羽調格이고 그製作과手法이 東派系統이 分明하다 그러나 그自身은 自負가 强한만큼 超然而居하야 東이니 西이니 派에屬함은 不屑히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長枝는 赤壁歌이고 그더늠은 弟子 朴基洪의게 많이傳授하였다 額技로 歌詞 音律에嫺熟하야 亦是一家를 일우엇엇다한다 氏에對한逸話나 其他抱負에對한 材料가 많이있을줄로안다 그러나 余의寡聞으로 이以上더말할것이 없음을 甚히 遺憾으로생각한다.

朴基洪
朴基洪은 慶尙道咸陽出生이다 慶尙道에서 이러한 大家를 내인것이 近來 斯界에 한特色을 加한것이다 朴萬順 鄭春風의 弟子로서 堂堂한 東派魁傑이라기보다 二百年東派敎學을 혼자 두손바닥우에 받들어들고 끗판을 막다싶이한 宗匠이다 現存宋萬甲 金昌漢 李東白 柳成俊等의 先輩로서 其中宋萬甲과는 種種同席하여서 소리한일이 있었다 中年네 大邱某의집에서 같이
소리를 하게되였는데 朴宋의先後次第로順序를 定하였다 宋이말하기를 朴의뒤를 따라서난 소리가 되지안을뿐안이라 聽衆의解散으로 緊張味가 없는만큼 소리할興味가나지안이함을 엇지하랴함으로 宋朴의先後로 順序를 박구어서 宋이 먼저 소리를 하는데 朴은 옆에앉어서 장타령을하느니 念佛을하느니 名門집 子孫으로 家來法을 崩壞한 悖子息이니 酷評을하고 있었다 果然 宋은 名門의後裔로 門閥의 三韓甲族이오 그法制있는 家庭的涵養이엇더할것이냐 名唱으로 一世를울닌 宋萬甲으로도 朴氏의앞에서난 고개를 들지못한것을보면 듯지아니하여도 朴氏의 抱負와 力量의 如何를 可히推測할수있다
말이暫間빗나갓지만 宋의뒤를 이어서 朴이出塲하여서 소리를 하는데 싱거워서 들을수가없다 聽衆은 하품과 조름 를하기始作한다 소리가 어늬지경에 이르니까 그特色있는 聲調로 한마듸를 뽑아 질너내엇다.
공중에서 떠러젓난지 땅의서 소삿는지모를 난데없는 딴목소리가 뛰여나온다 하품하고 졸든 聽衆들이 귀를 벗적들고 얼시고 절시고 좋타 拍手喝采가 左右에서 쏘다지듯한다 이런法으로 操縱하면서 밤이늣도록 繼續하였다한다.
朴은이러한 製作, 手法이다 神奇卓異非至人이오 濃肥辛甘이 非眞唻라 淡淡하게 冷水的으로 順平하게 大路的으로 하다가 어늬지경에 이르러서 그엇던 特調를 發揮하는 式이다 이것이 東派의本領인 同時에 自家의特徴이다.
朴은 소리금을 하고 소리하는사람이다 換言하면 貳拾圓받고는 貳拾圓만치하고 五拾圓받고는 五拾圓만치 百圓이면 百圓만치 밖게아니한다는말이다 圓錢의多少로計較하여서 技藝의程度를 高下케하야 그表現을 自由自在로함이 그力量과 抱負의 浩大함을 알수있는것이 아니냐.
朴氏 唱劇調에만 卓出할뿐아니라 詩調歌詞 거문고 伽倻琴 피리 저 해적 할것없이 無不精通이다 各各 一家로 完成할뿐아니라 다出衆한 技藝를 가젓섯다한다 통틀어서말하면 朝鮮聲樂에 있어서는 空前絶後한 天才와偉大한抱負을 가젓든사람이다 朝鮮聲樂과 音律에 見識이있는 사람으로 朴氏와 交遊한이는 如出一口로 다 無不歎服이다.

現代名唱
現代名唱을 列擧하기前에 第一着으로 宋을 들지않이할수없다 宋은果然 名門집後裔로 現存名唱家中 異彩을放하는 巨手이다 家門의傳統的法制를 不踏하고 一種特色의調를 創作하야 一家를完成하야 그特徵을 發揮한다 東派의 面目을 推支하는지 모르거니와 동글고 모지락스럽게 上聽으로 내질너떠러지난 聽調난 全人未踏處를開拓하였스나 그러나 曲調의 變化가없고 안일이와 제수추워가 不足하다 一句一節에만 힘을쓰고 全體를 統括하여가는데 遺漏가많고 力量이不足하다 八十客으로 能司舞臺에서能히 라듸오로 放送하난것은 그精力이 壯하거니와 得音의所致인가한다.
春香歌中 農夫歌中一篇은 넉넉히 그의 더늠으로 後世에傳할資格이 充分할줄안다 各種소리에 具備하고 特徵이있는만큼 亦是一大家로 許與치아니할수없다.
宋興綠 牟興甲以後로 朴萬順 李날치 金世鍾 鄭春風 朴基洪等을 五大作家로 잡으면 그末席에 叅與하기에난 부그럽지아니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金昌漢
金昌漢은 西派的色彩가 濃厚하다 自己스스로난 西派로 自負할는지도모르나 何如間界面格으로하는 名唱인데 唱調보다는 제스추워로 판을 짜는 솜씨이다 그잘난 風采로 一擧手, 一投足 몸짓의 널임새난 聽衆으로하여금 그技藝에昏倒하야 感歎을 發하게한다 唱을듯난것보다 그 形象하고, 動作하는 態度가 美人의 一嚬一笑가 사람의 精神을 恍惚저하는것과 恰似하다 各色唱劇에 能通한것이나 前人手法에 聞見이많은것이나 亦是巨手로 許與아니할수없다.

李東白
李東白은 그體格부터 堂堂한偉丈夫이다 對하면 一種不可侵할威信이 있는듯하다 忠淸道의胎生으로 聲音이美麗하거니와 그가지각색의목소리난 들을 때마다 이点으로난 現代누구든지 믿지못하리라 各色唱劇調에 精通하고 새타령이長技이나 非東非西非羽非界에범벅이다 그러나 現代에있어서 亦一大家임에난 틀임없으리라 아모리 생각하여보아도

丁貞烈
丁貞烈은 그天資는 瓦礫인데 修鍊의積工으로 成功한名唱이다 工夫하든 途中 聲音이濁하고 聲量이不足함을 恨하야 至殺할가하기를 非一非再하였다한다 東派的 規範을많이 繼承하야 羽調格으로 썩맛있게한다 부침새가 能한点으로난 世人이共許하는바이지만 「대사소삼」의 장단을 너흘수가없난만큼 大家로許與하기가어렵다 春香歌에 限하여서 殿堂에들어서는 感이없지아니하나 各種唱劇調에精通치못하고 赤壁歌에 이르러서는 無識을 免치못함을爲하아 퍽遺憾으로 생각한다.

金昌龍
金昌龍은 忠淸道胎生으로 누구의게서 소리를배웟는지 其父가 名唱이었다는말은 들었으나 家門의 傳來한法制인지 東인지西인지 羽인지 界인지 내의 寡聞薄識으로는 批判의붓을 네리기 좀 困難하다 聲量이좋아서 멧칠을 繼續하드라도 聲滯의變이없는点으로 보아서는 名唱된素質만은 가젓다고할가 橫說堅說不如擱筆論他

評論家의全道先 柳成俊
全道先은 지금八十老齡으로 全北泰仁郡 어느村落에서 間雲野鶴으로 벗을삼고 閒雅한生涯를보내고있다 全北에서 多少名聲이있는 광대로 그리手下에 치지아니한이가없고 丁貞烈도 初年에는 많이指導를 받엇다고한다 지금도 負笈하는 年少輩가있거니와 來者不去하고 去者莫進이며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로 지낸다 지금도 소리할機會만있으면 멧칠이던지 繼續할精力이있거니와 한참當年에는 멧달을 繼續하드래도 聲帶가如前하고 지치난法이 없었다한다 이로보아서 그精力과 修鍊이 凡常치아니함을足히알수있다 學의熱誠이 壯함으로 因而得之한사람이다 當時先輩名唱의 措導를받다가 나종에는 朴順萬手下에서 多年磨喙修鍊하야 一器를完成하였다 朴의手下에서 多年指導와 鞭韃을받엇슴으로 聞見이높고 製作과 手法은 東派의氣分이濃厚하다 聲量이不足하야 能히數千의聽衆을휘쓸지는못하나 그複雜한聲調와 多端한技藝는 一流名皷手가아니면 能히應皷하지못한다 各種唱劇에 無不精通하고놀보傳에있어서는 長技를 發揮하지못하되사람을 敎導함에는 妙味가있다 그러함으로 郞谷에뭇처서 널리 世上에 알리지못하야 名皷이不振하였으나 門下에 錚錚한弟子가輩出하였다 唱劇調評論에 있어서는 現代에있어 理論으로보나 抱負로보아서 第一指를 屈하리라

柳成俊
柳成俊은 慶尙道胎生으로 朴基洪手下에서 指導를 받엇슴으로 聞見이높고 東派의더늠을많이 繼承하였다한다 文識이잇고 文識으로는 全道先輩에比하야 勝한点이잇고 그評은 各其特色이있는만큼 互有長短이고 如何間全과아울너 現代雙方의評論家다 지금 咸興에健在하야 群小輩의指導에 힘을쓰고있다고한다 柳에對한말은 이以上더陳述할것이없는것은 遺憾으로생각한다

女流名唱
前代에는 女子의광대가 거의없었고 最近에 이르러朴小春 金綠球를 爲始하야 裴雲香 李花中仙 金楚香 浦項香蘭 金秋月 朴綠珠 申錦紅等이輩出하였다 朴小春, 金綠珠 裴雲香에對하야는 내의寡聞으로 各其特色은陳述할것이너머없음을 遺憾으로하거니와 世人의傳하는 바에 依하면 金綠珠는綠珠의이름과같이 썩잘하였다한다 朴小春은 筆者八九年前에 시골 某回甲宴에 叅席하였슬때에 들은記憶이있는데 늙고 廢한나마지에 게우塞債하고말었음으로 批評할何等의 長短을 發見치못하였스나 그광대的面目은 躍如하였다 [사진] 春香傳의一場面

李花中仙
얼골은 薄色인데 音聲은絶等하게佳麗하다 水湧山出로 거침없이 어름에배밀듯하게하는 手法이다 소리를 製作하지아니하고 自然에 맷기여서 그저나오는대로한다 듯는 刹那間에 愉快함만늣길뿐이지 듯나서는 記憶이남어있지 아니한다 이것이 長点인데同時에 또한短点인가한다

金楚香
李花中仙이냐 金楚香이냐 듯는사람의 眼目高下如何를 따라서 各其取함을 달리할것이나 現代女流名唱으로 雙璧이다 楚香소리는 仰揚이過하고 一句一節에만힘을드림으로 高低長短과 仰揭反覆이全篇를 統括하는, 点이많□人物的에흘너서 不自然한点이많다 이것이그의大缺點인가한다.

朴綠珠
當年小壯으로 宋萬甲丁貞烈의敎鞭下에서 제법製作한다 聲量이 巨大하거니와 모즈락스럽게 맷고끝는點이 넉넉히先輩楚香이를 凌駕한다 硏磨하면 앞으로많은觸響을부칠수있다 名唱될素質을 넉넉히 가젓느니라 勉哉勉哉-저
女流에있이서난 東西의分派도없고 羽格이니 界格이니할分間도없다 生理的關係도있으려니와 修養의工夫가너머 不足함을 大遺憾으로 생각한다.
以上에서記述한것과같이 男女唱家의歷史와 그소리에 對한批評을말하였으니 短見寡間으로 疎漏한點이 不無하고 人物의出生地와 年代를一一히 擧치못한것은 스스로한遺憾으로생각하거니와 말하면倉猝之間에 調查할時間이없다 讀者는이에對하야 諒解가있기를바라노라.

東西兩派의由來와羽調界面의分析
以上에 間間히 東派니西派니 羽調니 界面이니하였지만 지금그由來를 說明하고 差異를分析할 必要가있다.
東西派의 分裂이 宋興祿 牟興甲兩人으로부터 始作인데 兩人의居住地의方向을 指稱하야 分立하였든지 或은 羽調과界面의 主張與否를 標準하야指稱함인지 그原因을 分明히알수없으나 宋의製作을 模範하면 東派라指稱하고 牟의製作을模範하면 西派라指稱하였다 그리고 東派는製作이 羽調를 主張삼고 西派는製作이 界面을主張삼는것이 各其特色이었다 그러므로 東은調가 雄健淸遠하야 仙家나 道士的風神이 彷彿하고 西는調가浮華輕薄하야 俳優나활양的色彩가 濃厚하며 東은淡淡然菜蔬的이며 西는津津然肉舖的이다 東은千峰出月格이며 西는百花爛漫格이다 그精神과製作을 一槪界略으로서 表示하고말기로한다.

羽調와界面의差異
羽調와界面의差異를 分明히區別하자면 直接소리를 드러면서 指摘하여야 正鵠을失치아니할것인데 지금筆로만 形容表示하자니 果然如實히 描寫하게될넌지 疑問이다.
簡單히말하면 羽調는 氣海丹田에서 우러나오는 音聲이오 界面은喉舌唇齒間에서 發生하는聲音이다 淡淡하게 悠長하게 綿中裏鐡的으로 진重하게들처내는소리는 羽調요 浮輕하고 美麗하게끌어내는소리는 界面이다 音이健實淸遠한것은 羽調요 浮華輕薄軟美한것은 界面이다 大略이렇게만알면 過히틀이지아니한다
短歌로 그限界를表示하면
赤城아침날은(上聲羽調) 느진안개띄여있고(上聲羽調) 綠水에저믄봄은(羽調上聲羽調) 花柳東風둘넛는데(低羽) 瑤軒琪構何催嵬(羽調上聲) 臨高臺로일너있고(羽上聲) 紫閣丹樓粉晴曜는(羽 界面)廣寒樓로이름이라(羽低) 廣寒樓景좋거니와(界面) 烏鵲橋가더욱좋다(界面) 烏鵲橋가分明하면(界面) 牽牛織女없을소냐(界面) 牽牛星은내가되려니와(羽界) 織女星은(羽) 뉘가될가(面) 오날이곳花林中에(界面)三生緣分맛나리로구나(界面).
以上短歌로 高低長短으로 羽界로位置를일치아니하고석거너어서 부르는것이나 羽調格광대는 全篇를 純羽調로하기도한다.
소리가 羽調라界面을合하야 組織된것임으로 羽界가先後倒錯하면 調가失格하여서 病身이되고만다 羽調로할데는꼭羽調로하고 界面을너어서할때는 꼭界面을너어서 하여야만정말잘된 唱調이다 純羽調로만純界面으로만 하여서도 장단만 맞으면 소리가아니되는것은 아니나 빡빡하여서못쓴다 純羽調로만하여서 들을맛은 있으나 純界面으로만하여서는 참 곳厭症이나서 오래들을수가없나니라 그러므로 羽가主요 界는從이라.
내朝鮮광대의唱劇調에 對한趣味를 남달니가졌음으로드를機會가있을때마다 꼭빠지지아니하고 듯고 광대를面對할機會만있으면 언제던지 붓들고 이야기를들었다 이多少의聞見一綜合이야 이러니저러니하야 非斷妄評을하였으나스스로 도라보아서 罪悚함을이기지못한다.

結論
結論이라고할가 내가지금 直覺的으로 생각나는것을意見삼아陳述하랴한다.
나는朝鮮광대의唱劇調를 퍽 좋아하고 讚揚한다 나뿐아니라 朝鮮사람은 男女老少를 勿論하고 좋아아니하는이가 없고 讚揚아니하는니가없다 優雅淸閑한時調보다 軟美細嫋하고 浮華輕薄한 歌謠보다 悲哀한然竹보다 雄健淸遠하고 가지각색의 情趣를 具備한 唱劇調가 더욱좋아 朝鮮的情趣가 濃厚하야 우리의思想感情에 꼭맞는다 喜怒哀樂愛惡慾의 感情을 自由自在로 表現하며 境遇를따라서 聽衆으로하여금 能笑能哭의 衝動을준다 그形容動作 그曲調의 高低長短抑揚反覆은 演說家나 俳優가模範할것이있고 文藝家도 取할것이많이있으리라.
치어다보면 千峰萬壑 내려구버보면 白沙地땅이라 허리굽고 늙은長松 狂風을못이기여 우줄우줄춤을춘다 이골물이꿜꿜 저골물이솰르르云云 自然美를描寫한 一幅堂이다 그雄健한 曲調를들을수록 좋거니와드를때에는 완연히 金剛山한모퉁이나 보는것같다
붉은꽃 풀은닢 우는새 나는나비 春光春興을 자랑한다 傑作이로다 봄의生命을讚美함이 이에서 더할수없다 烈風嚴寒이 來襲하는 冬節에라도 이소리를 드를때에는 春氣和暘한 大自然의품속에 앵기는듯하다
달밝고 서리찬밤에 울고가는 저기러기 朝鮮詩로朝鮮노래로 絶唱이다 그얼마나 우리의感懷를 이끄러내는것이냐 李靑蓮의 地上靑州出이나 姜秋琴의 寒星이皆在水보다는나으리라.
白鷗야 껑정날지를마러라 네잡을내아니라 聖上이바렸으매 너를쪼차 여기왔노라 江上에터를닥가 構木爲巢하여두고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베고 누었으니 大丈夫살님사리 이만하면 넉넉하제 云云 不遇의士 醜惡한鬪爭을 일삼는 現實社會를떠나서 平和한 生活을누림이 이에서 더지낼수없다 士志於道而恥惡衣食者 未足與議也道士의生活을 가장잘表示한말이로다 當者가 財物을貧내며肉體的亨樂을 마음것하랴고하고 다른餘念은없는것이 그얼마나 醜惡한生活이며 官能的亨樂을 賤視하고 人生의참다운길을찾으며 哲學的思索을 게울니하지아니하야 蔬食飮水로끈니를 예우더라도 晏如하고 오직 精神的生活內容을充實히하고 아름답게하는것이 道德的見地에서 볼때에 그얼마나 高潔한人間의 生活이냐.
누구던지 광대의소리는 좋아하면서 광대의人格은 賤待蔑視한다 前日 才人階級을 賤待하던 惡風餘習이 아즉도 우리社會에 根據가 깊이밖여있는 證據다 差別道德과 階級思想을 打破하고 萬人平等의 人格主義를 高調하는 現代에있어 그 무슨 矛盾이냐 내人格을尊重하는만큼 다른사람의 人格을尊重하자 己欲立而立人하고, 己欲達而 遠人이니라 다른사람의 人格을 賤待蔑視하고 어찌 내人格의尊重을保持하랴 近來에는 라듸오 放送으로 全社會가 晝夜없이 朝鮮音樂과 歌謠로 娛樂을 維支한다 광대가 現代에있어 堂堂한 聲樂家이다 남의게賤待받을理由가없고 우리가 不待할何等의權利가없다 西洋聲樂이나 音律은 高尙視하야 尊崇하면서 朝鮮聲樂이나 音律은 低劣視하야 侮蔑할理論의 根據가 어데있는가 옛날 事大思想에서 支那의文物制度는 尊崇慕仰하고 朝鮮의文化凡節은 侮蔑賤視하든 遺風餘習을 아즉도 快히 脫却못한것에서 由因함인가 옛날文만崇尙하야 士에限하여서만 人格이있고 農工商其他藝術家는 奴隸視하던못된 버릇이 아즉도 저저서 남어있음인지 남의長點과美點을 吸收消化하야내의것으로 만드는同時에 내의것을 闡明發達케하는 氣風을 새로樹立하자 시고곰팡내나는말같지마는 再認識할 必要가있다 創作改良進步發達은 自我中心에서되는것인줄안다.
自來로 광대自身의 敎養이 너머 不足하다 現代科學的常識은 勿論이고 文藝에對한 知識이 全然缺乏함으로 自己自身의 向上發達을 期待할수가없다 그無識이社會的 賤待를 招來하는 一理由가 거게있다 知識과修養이 人格의內容이다 思想이높아야 따라서 表現力法이 高尙하다 藝術은 思想의反映이다 高尙한人格에서 偉大한思想에서 傑作의藝術이 表現된다.
광대들아 古典的唱劇調만 힘쓰지말고 現代的唱劇調도 하심이 어떠한가 春香傳이나 놀보傳이 옛날 그時代에있어 時代相을背景으로할 作品이라하면 오날時代相을背景으로한 作品을 넉넉히 내일수있는것이안인가 그러하자면 광대들自身도 敎養이있어야하겠지만 社會에서 有志人士들이 指導할必要가있지아니할가 광대들諸氏여 한번 깊이 覺醒할바있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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