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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명창 정정렬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오호! 명창 정정렬 嗚呼!名唱丁貞烈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 +++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8-05 昭和十三年五月
면    수 216 216
기사
嗚呼! 名唱丁貞烈
朝鮮것이라면 무에나 값이싸고 무에나 賤待받는것이
[사진] 寫眞은故丁貞烈氏
무슨 鐵則처럼된 오늘날 그래도 목에 피ㅅ줄을 세워 가지고 朝鮮聲樂을 북도다 보겠다고 努力해오든 丁貞烈氏는 지난三月二十一日 봄비가소리없이 나리는 正午에六十三歲를 一期로 이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었다.
多難한 朝鮮古樂의 길에있어서 只今 朝鮮聲樂會가 가지는 使命은 적지않거니와 이 丁貞烈氏를 잃은 朝鮮聲樂會는 눈물속에 그들 葬禮지냈으니 그의喪轝뒤에따르는 數百數千의 知己 後輩들의눈물의 葬送은 넉넉히 丁貞烈氏의 죽음이 얼마나아까운것을 雄辯으로 證明하는것이 안이냐.
그러면 丁貞烈氏는 어떻게 音樂을 修業하고 어떻게 朝鮮노래에對해 復興하려고 努力했든가?
이제 그의 一生의 피눈물나는記錄을 적어보자
그는 지금부터 六十三年前 丙子五月二十一日 全北益山郡內村이란 마을에서 났다 어릴때부터 才氣있는 어린이로 마을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였으며 父母님께서도 귀염둥이로 사랑을 받고자라났다 그리하야 나이일굽에들자 목청이 將來音樂家 서 훌륭한素質이 나타났으므로父母님의 뜻에따라서 그때國唱으로 一世에이름이높던 丁昌業의 門下에 드러가서 聲樂工夫를 始作하였다.
丁昌業은 마침 一族이요 한마을에 살고있었스므로어린아이의 素質에 對하야도 그가 나종에 大成할것을미리알고 그를가르키며 귀여워하였다 그때 丁昌業은 벌서 五十客이였음으로그의 열 살때에 世上을떠나고 말었다 스승을 잃어버린 그는다시 丁昌業과함께 國唱으로 有名한李날치의 門下에 드러가서 공부를 게속하다가 그도열여섰살적에 世上을 떠났음으르 하는수없이獨學을하게되였다 그의 令第丁在燮氏의 말을드르면 그때는 노래에 밋친少年으로 아조 밥먹는것과 노래工夫以外에는 아모것도 잊어버리였다고한다.
노래공부는 주장 절간으로 도라다니면서 하였는데그가第一처음으로 드러간절은 益山神谷寺였었다.
여기서 몇해동안 工夫를하다가 忠南鴻山의 無量寺란 절로 옴겨갓는데 여기서 그의노래工夫는 비로소 成熟하기始作하였다 밤이면 人跡이 끊어진깊은山中에 드러가서 致誠을하며 목청을 다드머 노래를불렀다. 그리하야 마즈막으로 四十에이를때까지 公州의 甲寺라는절에서 工夫를하였는데 이미 그의일홈은 全國的으로 有名하여젔고 出世하야도 되겠으나 때를기다리고 實力을기르기爲하야 더욱 더 工夫하였다 이야기의順序를 조금 돌리거니와 이렇게 그의일홈이 우에들리자 나라에서는 그에게 參奉의벼슬을 내리였다 그때 그의나이는 스물여덜의 靑年이였었다.
이렇게 그가 四十歲以後에 벌서 國唱으로 世上에 이름이 높아지자 그는 中央進出을 하게되였다 그때는 聲樂을 배우려 찾어드는사람이 많었음으로 僻地에있어서는 여러 가지로 不便한點이 많음으로 그는 여러사람의 請에따라서 서울로 오게되였다.
서울서는 그當時 長安의 名妓들이 모도 그의弟子로 오래공부를하랴고 門下에 뫃여들뿐아니라 聲樂에 素質이있는 젊은 樂人도 雲集하였으며 宋萬甲 李東伯等의 名唱들과 親交를맷게되였다.
이렇게 하는가운데 그의名聲과技倆은 完璧에이르고 弟子들도 全朝鮮의 곳곳에퍼저서 舊樂의발전에 빛이되였다.
그가 名唱으로서 黃金時代를 이루기는 지금으로부터 十餘年前 朝鮮劇塲에서 열린 本社主催의 名唱大會의때였다고 한다.
그리하야 平素부터 가르키든 弟子들도 實力이 느러가고 이方面의 硏究者도 많어지므로는 그는 舊樂을 後世에 남겨놓을 人材를기르고 이것을 集成하기 爲하야 硏究團體를 만들자고 發議하고 李東伯等의 名唱들과 손을잡고 昭和九年五月에 朝鮮聲樂硏究會를 組織하고 여기 常務理事로 李東伯과함께 元老로앉어서 이날까지 힘을 애끼지않었다.
그리하야 처음에는 社會의 理解와支持가없이 困難을 맛보며 싸와나왔으니 이것은 先驅者의쓰라린 길이 아닐수없었다.
이로서 그의生活은 朝鮮聲樂硏究會와함께 起居를같이 하고 가난한 生活속에서라도 한결같이 舊樂의새로운方向을 찾으랴고 애쓴나머지 지금까지에 누구나 손을대이지 못하던 舊樂의 歌劇化에 成功하자 聲樂연구회의 聲價를 世上에서 알게되였다.
이것은 그가 李東伯과 더부러 그의 弟子인 少壯聲樂人들을 指導하야 밤을 새워가면서 曲과詞의 바른길을 찾으려고 애쓴보람이였었다.
그리하야 春香傳 沈淸傳 토끼타령등의 歌劇을 上演하고 한편으로는 在來에 文獻으로서 全無에갸까운 舊樂論을 斯界의 學者들에게 考證을시켜서 體系를세우기에 힘썼다.
그뿐아니라 六十老齡의몸을 끄러서 舞臺에오르고 聲樂硏究會의 發展을 爲하야 東奔西走의 눈물겨운 活動을 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오른舞臺는 昨年十二月中旬에 東洋劇塲에서 올린 沈淸傳인데 여기에는 沈奉事의 役을마터서 熱演을하였다 이舞臺가 끗난十二月末 JODK에서 春香傳中 『박석티넘는데』의 노래를 放送하고 곳 病이드러서 눕게되였으니 이것이 그의 絶唱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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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葬日인 三月二十三日正午 朝鮮聲樂硏究會舘에서는 그의 永訣式이있었는데 來參者는 千餘名에 達하고 知心之友로 一生을함께지나던 李東伯 宋萬甲等의 元老를 爲始하야 그의 男女弟子들이 服을입은양은 보는사람들로하야금 感激을 禁치못하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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