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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고가의 권위 하규일 옹의 장서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유일한 고가의 권위 하규일 옹의 장서 唯一한古歌의權威 河圭一翁의長逝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함화진 咸和鎭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7-07 昭和十二年七月
면    수 283 283
기사
[사진] 河圭一翁인 듯

故河圭一翁은 朝鮮에 오직하나밖에없는 古歌(宮中古歌)의 善歌手이였읍니다. 이번에 年歲는 높다하여도 강강하든이가 급거히 도라가시게되니 社會一般이 哀悼의情을 가짐은勿論 더욱 同好人들은 섭섭한마음을 禁할수없으며 藝術界를 爲하야 莫大한損失이라고 아니할수없읍니다. 바로 세상을떠나기前날밤까지도 正樂傳習所에가서서 열두時까지 늣도록이약이하시고 도라왔다고하는데 그翌日아츰 갑재기입에서 피가나오며 腦溢血로것잡을수없이 도라가섰다고 합니다.
故河翁은 저이先親과 交分이있고 近年雅樂部에關係하신後부터는 나이는尊長이나 그이가 老少同樂하는터이라 晝夜로 늘 만나서 노랐읍니다. 翁은 노래는 勿論 宮中舞 거문고等도 잘하섰읍니다. 그러나 古歌를 第一잘하섰읍니다. 좀더 사라게서서 좀더남김없이 가르처주고 도라가섰드면 얼마나朝鮮의藝術界를 爲하야 좋왔을가하고 哀嘆하는마음이생각할사록 더합니다마는 人力으로 어찌할수없을일이 아닙니까
翁의略歷을 말슴하면 明治元年에 京城에出生하시고 六歲부터 十一年間漢文修學 十四歲에成冠 一九歲에 비로소 音樂硏究를始作하였읍니다. 그後 三十四歲에 漢城府尹 漢城府裁判所 判事를 兼任하시고 四十二歲에 內藏院文部整理委員 全南督刷官 四十三歲에 鎭安郡守로 合倂以後는 官職을辭하고 專心音樂硏究에 全力을다하야 四十九歲에 正樂傳習所學監 五十歲에 大正劵番을創立 六十二歲에 朝鮮券番을創立 六十四歲에 李王職雅樂部囑托 七十四에 朝鮮券番株式會社을設立 享年七十五歲에 五月二十二日아츰 腦溢血로 도라가섰읍니다.
大槪音樂修業은 特別한 天才도있겠지만 그것만가지고는 어찌할수없고 끈임없는 修鍊이있어야되는데 故河翁은 本是 性質이 辟이있어서 한가지마음먹은것이 있으면 기어히하고야마는 것이있읍니다. 어렷을떄에 이러한 이약이가있읍니다.
故河先生의家庭은 世襲的으로 노래를잘하야 再從되시는 河順一氏와 三寸河俊權氏는 다 참말善歌로 當代에 이름있든 이들입니다. 그런데 노래를배우기는 河俊權氏의弟子 崔壽甫氏가 先生이였고 또當世에 일홈있는 朴老寬氏한테도 배왔읍니다. 그래서처음 노래를배우기 始作할때 二十살前後입니다. 그때는 父母들몰래 배우든터인데 하로는 三寸河俊權氏가 너노래를 배운다지 한번 그러면 내앞에서 불러보아라
하시드랍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부르니 다 듣고하는 말슴이
-음 너는 그 노래가지고는 도저히 성공할수없다. 네목청이 본래노래에 맞지않으니 구만 斷念하고마는것이 좋을듯하다. 그목으로는 도저히 할수없다.
-그러면 얼마나 工夫하면 되겠읍니까?
-글세 남이 一讀하면 너는 百讀이나하야 따러가겠다.
하드랍니다. 그래서 그말을듣고는 奮然마음에 깊이 찔린바있어서 한번마음먹었다가 못할것이 무엇이냐하고 晝夜로 一念丹心 노래工夫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무슨노래 배우는곳이 따로있어 한곳에 배우는것이 아니라 노래先生舍廊으로 다니며 工夫하였읍니다. 아닌게아니라 목청이조치를 못한便이였는데 하도 정성을다하야 하였든結果는 果然 今日의딸을수없는 地位를 가지게한것이지요. 그後數年에 한번다시 三寸이 불러서 그앞에서 노래를 하였드니 참말 恬目相對라고 그만하면 工夫하면 될수있었다고 하드랍니다. 그러나 이노래는 民間에俗謠가아니고 純全한宮中古歌입니다. 그럼으로 늘同好人이 모혀서 서로부르며 즐길뿐 누가招待하여서 가는일등은 絶對로 없었읍니다. 너는거문고 너는 양금 나는 노래 이렇게 舍廊에나 노리터에안저서 부르든것입니다. 이노래는 大槪 萬年長歡之曲中에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이樂曲은 本是부터 있는것이지요 故河翁은 또樂의技術보다 理論을 잘아르시였으며 歌詞도 지은것이 있읍니다. 이理論의 方面은 專門方面의것이니 다시 말슴하기로하고 그렇게 노래工夫를한後에 官職으로 드러갔다가 合倂以後는 다시나와서 이方面에 專□하였읍니다.
正樂傳習所라는 것은 그前 明治四十一年에 나와 洪肯燮氏 韓錫振氏 趙彛涥氏等과같이 創立한것인데, 그때에 河先生이 官職을 내놓고 놀고있음으로 내가 學監으로 請해오도록 力說하야 專任으로 四五年間 名譽學監으로 五六年間 게섰읍니다. 그곳에도 弟子가많음니다. 그리고 그後 券番을 組織하게된것은 이러함니다.
前에는 妓生들이 至今과같이 各個人이따로 營業한것아니고 宮中에 드러가 藥房妓生이니 尙房妓生이니하야 일이있으면 그것을 도왔읍니다. 宮中에太醫院이라는 病院같은 것이있어서 或 무슨일이 생기면 助手로가서 배와주고 看護에 從事하였으며 妓生이라기보다 醫女로서 醫藥鍼灸를 배왔읍니다. 또尙衣院이있어서 裁縫일을 도았읍니다. 그리던 것이 다廢하게되자 그만 各居流離하게 되였지요. 그때妓生들은 歌舞書畵와 志操를가지고 있었고 이러한宮中일을 마터보았든것임니다. 그外에도 二牌니 三牌니 하는 階級에따러 種類가있어서 노래를 파렀으나 이藥房 尙房妓生은 絶對로 그렇지않었음니다. 그렇게 이妓生들이 헤여지는것을 아깝게 생각하고 또 이들이 社會와는 서로떠날수없는 關係가있는것을 생각하야 이들을모와 統制하는 機關으로 처음 茶洞組合을 만들었든것입니다. 그것이 大正券番으로 朝鮮券番株式會社까지 이루워노은 것입니다. 河翁은 이組合의 모든일을보아 올뿐아니라 古歌를 손수가르치고 또 高尙한 宮中舞를 現代化하야 西洋風 和風까지 너어서 가르첬음으로 아마이 歌舞方面에는 朝鮮券番을 따를수가 없을줄암니다. 그렇게 무슨일이든지 始作하면 기여히 成功하고마는 性質이있읍니다.
雅樂部에 드러오신것은 이宮中古歌를 차차 배우는이가 없어짐으로 이것을 傳承할수가없는것을 遺憾으로 생각하야 限三年間 當局에 招聘하여오자고 交涉하야 겨우 大正十五年부터 와있게되였음니다. 以來 十二年間 하로 두세時間式 熱心히 가르처주시었읍니다. 퍽 嚴하기도하야 前番講한것을 모른다든지 時間中에 不注意하면 아주야단하시고 나에게도 말슴하시는 것이였읍니다. 果然 責任觀念이 强하서서 한두어달前에 病으로 누었는데 間病을가니깐
『내가病으로 나가지 못하니 낫기를기다리도록 하는것도 未安하니 辭職함이 좋을듯함니다』
하심으로 다시 그렇지않다고 말하야 그後에 또오섰든것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辟있고 責任을 다하는 마즈막 逸話인가봅니다. 雅樂部에서의 弟子는 四十名可量인데 그中成家한이가 七八名 後繼者로는 雅樂守長 李炳星氏가 있음니다.
一生동안은 波亂도 많어서 어렸을때는 富裕하게 지났으나 그後에는 남의 保證關係로 敗도보고 또 한때는 밤에 盜賊이 드러와서 喪輿를 가리고와서 全部 입은옷까지 빗기여가 이불과 몸만 남은적도 있었다고 함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一生을 古歌를 爲하야 바첬다고하여도 過言이 아니겠지요 다만또 한가지 섭섭한일은 뒤를니을 後孫이없읍니다. 다만 하나의 아들은 精神病者이기 때문에 父親이 도라갈때에도 나는 볼일이있어서 나가야겠다고 두루마기를 입고 나갔다고 합니다. 아들은 나이는 四十三歲인가 되였지만 이모양입니다. 後年에는 生活이豊足하야 貯蓄은 만치안어도 朝鮮券番 株式會社의株式이 半이나되고 社長 取締役으로 한三百圓收入이 있었다고 합니다. 文責在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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