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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단·사반세기의 회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악단·사반세기의 회고 樂壇·四半世紀의回顧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홍난파 洪蘭坡
출처정보 중앙 中央
연    도 1936-09 昭和十一年九月
면    수 222 222
기사
나이四十이 될락말락한 나로서 二十五年前일을 回顧한다함은 爲先 그事實內容 如何를 不問하고 주저넘고 건방진짓이라는 생각이 먼저나게된다. 그러나 내가 音樂工夫를 始作한것이 벌서 四半世紀나 되었으니 그當時의 回顧談비슷한것을 하나 쓰라는 「中央」編輯子 Y兄의 嚴命이람보다도 억지같은 때에 못견디어서 이붓을 들게된것이다.
西樂이 東漸하기 시작한것은 半世紀 훨신前의 일인줄안다. 예수敎가 새로히 輸入됨에 따라서 讃頌歌란것이 쫓어들어오고 風琴도 또한 여기에 곁드렸을줄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것이 곧 西洋音樂이 朝鮮에輸入되던 第一矢가 될것이다.
예수敎의 宣布는 各方面으로 우리의 묵은思想을 攪亂하야 상투와 笠子는 次次로 斷髮戴帽케 되고 固陃한 儒道의 敎意는 新文物의 侵入과함께 그信念이 次次 薄弱하게 되었으니 長長한春夢에 渾醉되었던 이社會는 이에 바야흐로 눈을 부비게된것이다 이때에 光武皇帝께서는 깊이 洞察하신바 계시자 國民의思想을向上시키고 士氣를 鼓舞함에는 西洋의 所謂 軍樂隊만한것이 없다고하사 至今으로부터 三十六年前에, 그當時 日本陸軍樂隊의 先生으로있던 獨逸人 「엑케르트」氏를 招聘하사 軍樂隊를 創設케하시고 그로하야금 敎授의任에 當케하셨으니 西洋樂이 完全한形式으로 輸入되기는 아마 이때가 처음일것이다.
그러나 그때로 말하더라도 敎育機關이란것이 不備하야 오늘날에 우리가 보는바 學校라는것은 거이 얻어볼수가없었으니, 宮中에는 가끔가끔 軍樂隊의 吹奏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르지마는 庶民의귀에는 音樂이무엇인지 들어볼機會가 없었으며 더구나 學校音樂같은것은 꿈에도 생각해본사람이 없었을것이다.
이와같이 지내기를 몇해하다가 政府로부터 新敎育令이發布되고 學校라는機關이 新設되자 當時學部에서는 學校唱歌의 制定의 時急함을 깨닷고 그第一着手로 「運動歌」라는 唱歌를 만들어서 距今 三十餘年前에 (仔細히記憶지는 못하지마는) 各小學校와 私塾으로부터 唱歌에 才質이있는兒童 二三人式을 選拔하야 學部로 모아놓고 이唱歌를 가리처서 그해春期 各小學校聯合 大運動會가 訓練院大廣場에 열렸을때 이노래를 齊唱케했으니 나도 그때에 選拔의 光榮을입은 學生의 한사람이다. 내가 記憶하기에는 그때 그노래는 곧 「大韓帝國 光武日月 富張安泰는 國民敎育 普及함에 專在함일세, 運動할때 運動하야 體育힘쓰고 工夫할때 工夫하야 智識넓히세」라하는 曲調도 없는노래였었다. 勿論 이노래가 流布하기前에도 一部 예수敎學堂等에서는 讃頌歌에 類似한 唱歌들을 間歇的으로 불러왔지마는 政府의힘으로 學校唱歌를 制定하기는 아마 이運動歌가 처음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이後로부터 「學徒歌」니 「愛國歌」니하는 勸善懲惡, 愛國心鼓舞, 國權恢復等意味의 感傷이요 鄕土的인唱歌가 雨後竹筍의勢로 出來하였으며 한편으로 學部에서는 「敎育唱歌集第一輯」을 出刊하자 各學校에서는 爭先하야 唱歌敎師 招聘에 애를썼다. 그러나 本是 배우지못한것을 가르칠사람이 누구이랴, 예수敎學校에서 讃頌歌章이나 부르든이들이 一流音樂敎師가 되었을것을 可히 推知할일이다. 그러나 다른 諸般文物과 施設이 不完備한 이때에 唯獨히 唱歌敎育만의 不完全을 더느낄必要는 조금도 없을것이다. 그러하므로 되나안되나 學校唱歌라는것은 이모양으로 몇해를 支續해왔었다.
그러다가 距今 二十五年前인 大正元年에 一部有志者들의 發起로 「調陽俱樂部」란것을 創設하고 그事業의 하나로 「朝鮮正樂傳習所」란 敎育機關이 倂置되어 一方으로는 朝鮮正樂의 復興을 主眼으로하고 他一方으로는 西洋音樂의 普及을 目的하야 朝鮮樂과 西洋樂의 兩部를 分置한後, 李王家의 補助를받어서 몇해동안 經營해오게 되었다. 그當時 西洋樂部 主任敎師의任에 當한사람은 곧 우리樂界의 大先輩요 元老格인 金仁湜先生이었다.
내가 音樂工夫를 시작한것이 곧 이때부터이다. 그러나 그當時로 말하면 先生이나 學生이나 모다 처음 시작하는일이므로 音樂에天分이 좀 있다는사람이면 一二年안에 當代一流音樂家가 되고만것이다. 그때로부터 二十五年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音樂學校의 施設을 보지못하는 우리社會에서는 오히려 그當時正樂傳習所의施設은 相當했다고도 하려니와 將來할 朝鮮樂界에對한 貢獻도 決코 적었다고 할수가없을것이다.
그後 大正三年겨울에 金仁湜氏가 同所를 辭任하자 그뒤를이어서 筆者인내가 얼마동안 敎鞭을잡고있었다. 그러다가 大正七年겨울에 내가 笈을負하고 東京으로 音樂工夫의길을 떠나게되자 正樂傳習所의 西洋樂部는 廢地되고 만것이다. 그런데 正樂傳習所 西洋樂部의 全盛時代이던 大正二年겨울에 同所西洋樂部敎師, 助敎師와및 卒業生諸氏의 協力으로 京城內 各敎會靑年들을 紏合하야 一大合唱隊를 組織하는同時에 會名을 「京城讃揚會」라 命名하였으니 이것이 朝鮮宗敎樂의 發達史上에 一新紀元을 作하게된것이다. 그리하야 創設된지 數月을不出하는 그해十二月二十一日에 第一回로 「聖誕祝賀音樂會」를 鐘路中央靑年會舘 大講堂에 開催하였으니, 우리의손으로 音樂演奏會를 開催한것은 아마 이것이 처음일것이다.
그當時 京城讃揚會의 主要幹部로는 金仁湜氏를 筆頭로하야 朴瑞陽(醫博) 安鍾健(實業家) 廉光燮(米國哲博) 崔東俊(當時橫笛奏者) 洪永厚等이요 그後로 金亨俊, 金基磬, 李尙俊氏等도 大同團結하야 實로 이會는 京城樂界 (樂界라는것이 形成되지는 못했지마는)를 風靡하는感이 없지않었다.
그러나 그當時 同會會員들로 말하면 音樂을 專門攻究하는사람도 없지는않었지마는 大部分이 다른方面에 從事하며 한갓趣味로써 音樂과 接近해보랴는데 지나지않었으므로, 이結果는 自然히 專門家와 非專門家의 音樂上技術程度가 逐日懸隔해질뿐아니라 海外各地와 地方各處로 留學或은 轉任하는이가 많게되자 一時 京城各物의하나이던 京城讃揚會도 얼마동안 休會한다는 宣言아래에서 解散이되고 만것이다.
그러나 同會가 우리樂界를 爲하야 開拓해온 事業은 實로 적지않었으니 現時 京鄕各地에 散在한 合唱隊나 讃揚隊는 그源을 여기에서 發하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흔이 가지는바 音樂演奏會란것도 亦是 朝鮮안에있어서는 同會가 元祖가 되지않을수없다. 그뿐아니라 同會가 創設第二年 곧 大正三年겨울에 世界的으로有名한 「할렐루야」라는 合唱을 音樂會席上에서 出演하야 內外國人을 驚嘆케한것도 또한 萠芽期에있던 그當時 우리樂界에 있어서는 特筆하지않을수없는 事實일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빼놓을 當時 音樂工夫에 뜻을둔사람에게는 누구나 다같이 當하던것이었다. 그리하야 四半世紀前에 音樂을 始作한이로 오늘가지 꾸준하게 本志를 꺾지않고 걸어온사람은 別로볼수가 없고 大槪는 方向을 轉換해버린것도 오로지 그네들의意志가 薄弱했던탓만도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돌려생각하건대 今日의 音樂靑年―東京에만도 百餘名의 音樂學徒가 있다는데 每年十餘名乃至 數十名의 卒業生이 나오기는하나 한갓 一時의 新聞記事材料가됨에 그치고 이렇다할만한 音樂家의 出現이 없음을볼때에 그네들은 한갓 四個年이란 卒業期限을 채움과 某音樂學校出身이라는 無用의直啣을 얻기爲하야 끔직한物資를 消費함에 지나지나 않었을가하는 주저넘은 걱정조차 없지않다.
오늘날의 半島樂界는 여러분을 歡迎하고 여러분을 理解할만한 그만한準備는 넉넉히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校門을나온後 獨奏會나 獨唱회를열랴면 主催해줄사람도 있고 後援해줄사람도 있으며 여기에 雲集해오는 聽衆까지도 있다. 훌륭한 「홀」도 있으며 「그란드피아노」까지도 있다. 이얼마나 幸福스러운 그대들의 處地인가. 제손으로 許可를얻고 제손으로 집을빌고, 제손으로 票를팔고, 이같이 求乞하듯이해서 演奏會라고열면 그結果는 物質上損失과함께 體面上의損失이 쫓어올뿐이던 二十餘年―아니 十餘年前까지도 우리들이 當하던 그런 悲慘한境遇를 後進들은 夢想도 못할것이다.
그어떤때 나는 東京音樂學校退學後 京城에와서 當時半島樂壇의 代表的存在人物이던 金永煥, 金亨俊, 崔東俊諸氏와및 軍樂隊의後身인 京城樂隊員의 賛助를얻어서 團成社를 빌어가지고 어떤土曜日午後에 所謂 「마티네」(晝間興行) 란것을 연일이 있었다. 그때 내생각에는 東京에는 每土曜와 日曜마다 各處에 「마티네」가 盛行되는데 京城이라고 반드시 「컨써-트」(夜間興行)以外에는 열지못하란法이 어디있으랴는생각에서 그 所謂 「마티네」란것의 本보기를 보이랴고 했던것이다. 그날은 공교로히 日氣가 몹시치웠기는 했지마는 團成社집貰가 六拾圓, 京城樂隊出演料가 五十圓, 印刷費니 人件費니해서 少不下貳參拾圓―이리하야 開催한 이 「마티네」에, 讀者여러분은 그날 몇사람의聽衆이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定刻이 지나도록 總入場者는 男女七人!
놀라운 冒險을 敢行했던일이다. 이 빚(債)을 갚기爲하야는 나는 一年以上 京城에 留하면서 東京에는다시 가지못했던것이다. 父兄이 이빚을 갚으시라고?音樂을 工夫해서 所用이 무엇이냐고 恒常 나물 하시는 그말슴의對答으로 이빚을 물려드릴수가 있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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