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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사랑의 탑―남편·안기영 공개상―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무너진 사랑의 탑―남편·안기영 공개상― 문어진사랑의탑―男便·安基永公開狀―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이성규 李聖圭
출처정보 중앙 中央
연    도 1936-05 昭和十一年五月
면    수 286 286
기사
나는 安氏에게대하야 是非를 論하고 싶지않다. 是非以外에도 아무 할말조차없다. 없다는것보다도 그리할 必要가 없다. 그들이 서울로다시 돌아왔다고할때 나는 이미 決心한바가 따로히 있었을뿐이었다. 이 決心한바는 그들의 出奔했다는것을 確實히 깨달았을때 決心하였던것을 다시한번 다지는것以外에다른것은 아니다.
나에게 지금의心境을 이야기해달라고한다. 말못할것이아니오 끄릴배도아니지만 흔들리기쉬운 나의 感情이 다시더 흔들릴가 주저로워서그것을 나는 避한다. 그대신 나는至極히單調하나마 나의 잃어진사랑의 半生記를적어 請하심의 대답을 대신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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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中林町이되었지만 옛날말노는 『葉峴』이라하던데서 지금으로 三十七年전에 나는 世上에태어났다 우리집안은 과히 常스럽지 않았고 生活도또한 어렵지않았었다. 五男妹의막내로태어나서 집안의귀염을 마음것받으면서 자라났다.
學校에 들어가기는 열두살때였고 들어간學校는 淑明女學校普通科三學年이었다. 좀더일즉이 學校에를 갔어야할것이지만 頑固한父母님이 선뜻 承蹣을 아니하시었으므로 學校에들어가는것이 남조다 뒤떨어졌던것이다.
普通科를마치고 바로 高等科로들어가서 열일곱되던해에는 高等科를 卒業하였다. 그때 나의 憧憬은 學校先生님이었다. 學校先生님이 되고싶었다. 高等科를마친나는 演習科엘들어갔다.
그이듬해 演習科를마친나는 健康이좋지못하야 希望하는 敎員生活을 하지못하고 一年동안을 고시라니집에서쉬고있다가 열아홉살되던해에府內孔德町 敎會女學校로 비로소 先生님이되어갔다.
[사진] 結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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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氏를알게된것은이때였다. 當時 孔德里敎會의 牧師로있던尹聖烈氏가紹介를해서 그와 인사를하였는데 그때그는 延專에다니는學生이었다. 靑年音樂家로 將來의囑望이많다는말을들었고 또 그는 類달리나에게 親切히해서 퍽 印象이깊었었다. 가끔 學校에 와서 『코넷』을불어가며 아이들에게 音樂을가리켜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學校에 얼마를있지않고 집에서가까운 阿峴女學校로 轉動을하고말았다. 그런데 그해여름 夏令會로 사람이모였을때 偶然히安氏를 다시만났는데 그는 나에게사랑의表示를 하는것이었다. 그러나頑固한家庭에서 자라나고 또 女敎員의몸이라는 까장스러운 職業觀念은 나로하야 그의말에 아모런對答도하지못하게하였다.
그러할때에 내가 私立學校에있다는것을 母校에서알고서 不名譽스럽다는듯이 주선을하야 그해 겨울로 忠南大田公普로 가도록 주선을해주었다.
大田으로옮겨가자 安氏에게서 「사랑의 書輪」이 날라들었다. 나는 그편지를받고서 얼마나 당황해하고 얼마나 두려워서 몸을떨었는지 몰랐었다. 무슨 못지을罪나 犯한듯하고 큰일날봉변이나 만난것처럼 무서워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한편으로는 그에게대한 끌리는마음이 움지기고 그리운생각이 솟는것은 어쩐까닭이었는지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나는 몇번이나 망사리고 주저하였으나 결국엔 두려움에 가슴을조이면서 그答狀을했다.
이리하야 두사람사이에는 사랑의 글발이 비로소 오고가고하게되었다 그러는중에 해가바뀌자 三一運動이 일어났다.
安氏는 나에게 다시 私立學校로 轉動하라는 勸告을하였다. 나는 그의뜻을좇아 大田을떠나 開城貞和女學校로 옮겨갔다. 그러자 安氏는北滿을거처 上海로 亡命의길을 떠나게되었다.
그가 亡命의길을떠나기전에 前記한 尹聖烈牧師를졸라서 約婚을하도록마련을하였다. 나의집에서는 安氏의 家庭이 赤貧하다는것을 理由로 反對를하였으나 安氏를만나보자 집안에서는 사람은쓸만하다고 거의 半承諾은하게되었다. 우리두사람은 서로 約婚을하고 紀念으로 安氏는나에게 金노리개를 나는 安氏에게 팔에찻던 金時計를선사하고 寫眞까지交換하야 서로情標를삼았다.
安氏가 上海로간뒤 나는 늘 그의成功과健康을빌면서 二年동안을貞和女學校에있다가 몸이弱해저서 한겨울을 집에서쉰다음에 다시 全羅南道昌原으로 옮겨갔다. 이동안 安氏는 上海에서 車掌노릇을 하면서 지내다가 그곳 金陵大學에入學이되어 工夫를 다시 계속하고있었다. 이때 安氏는 二年二歲 나는 二十三歲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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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氏에게서는 늘 書信 왔다. 處女를 붓잡아놓기만하고 結婚을못하야 未安하다는 懇曲한사연 보고싶다는하소 上海로오라는勸告 米國에가서 工夫를하고싶은데 學費 때문에 못간다는이야기······書信이 올때마다 나는 맘을조리면서 答書를썼다. 나만은 아모問題도없으니 未安한생각말고 成功하고돌아오란말 상해로한시바쁘게 가보고싶으나 집에서듣지않을것이라 섭섭하다는이야기······사랑의글월은 그동안에 몇장이오고몇장이갔는지를 아지못하였다.
그러는동안에 하로는 서울서電報한장이왔다. 安氏가서울왔으니 至急上京하라는 사연이었다.
나는 꿈이나아닌가싶으게 반가워서 그날로 學校에다 辭任願을받히고 짐을싸가지고서 서울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주선을하야 貞洞禮拜堂에서 「케불」博士의主禮로結婚式을擧行하였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十四年전 安氏는스물세살 나는 스물네살때이다.
上海가있으며 工夫하다나온學生에게 結婚할財力이있을리없고 家庭亦是 餘裕가없으니 生活해날갈 方途가있으랴? 結局엔 紅把洞에다 남의사랑채를얻어가지고 엉성한 신접살림을 버리었다. 그러나 이나마도 이리저리 다니면서 그동안 敎員生活을하야 貯蓄했던 數三百圓이 結婚式으로부터 살림살이까지를 장만하게하여준것이었다.
달디단 사랑의새살림이 시작되자 安氏는 곧 梨專音樂科敎授 「미스·영」의 助手가되었다가 다시 事務員이되어 每月七十五圓의 月給을받게되어 우리들의生活은 活氣가있어지고 明朗하였다.
그렇다고 生活에餘裕가 있었던것은 아니다. 安氏의月給은 우리두사람의生活費, 父母님의供養, 또 米國으로 留學할旅費貯蓄— 이래서 늘빠듯하고 조려지내는生活이었으나 마음과마음은 서로合하야 依支가되고 듬직하며 幸福스러운生活이었다.
結婚한지一年! 첫아기를낳았다. 이름을 暎植이라고지었다. 다시 그댐댐해인 大正十四年 一月一日에는 華植이를낳았다. 이리하야 結婚한지 三年되는새해에는 벌서딸둘을거느린 젊은父母가되었다.
[사진] 新婚
그런한편으로는 旅行券을準備한다 米國갈빗을얻는다 살림을親庭(阿峴)으로옮긴다. 生活費를節約한다하야 그동안에 貯蓄한돈三百圓과 빗으로얻은 三百圓과 「미스·영」에게서 二百圓과합하야 八百圓을가지고 華植이를낳은지 열이틀되는 二月十二日에 그는 大望을품고 宿願의宿願이던 米國留學의길을떠났다.
그가간뒤 나는 두아이의養育과나自身의生活과 그리고 三百圓의빗을 갚기위하야 다시 敎員生活로나스게되어 前에한번 視務하던 阿峴女學校에서 敎鞭을들기로되었다.
그해一月二十日! 安氏를보낸지열흘도못되고 또 華植이를낳은지 三七日도채못된때 나는 學校로나아갔다. 三學期初다
그러나 産後調攝을 完全히못한채 阿峴女學校 높은山꼭대기를 오르나리게된것은 가뜩이나 身弱하던나에게 지나친無理였다 마음만은 相關없었으나 몸이 듣지를아니하였다. 學校나간지얼마되지아니하야病이자조나더니 結局엔 류마지스라는 반갑지아니한 病名을 醫師는 나에게다 붙혀주는것이었다.
[사진] 엽서
(銅版) 度美中에보낸安氏의多情한 私信一篇=나의 지극히사랑하는안해 성규에게 아마 그동안 지난번에써보낸글은 받았을듯하외다. 점점 나의 그리운안해와 딸들을 만나게될때가 가까와오니 나의마음은 참기쁘고 달력을볼때에 오늘이 四月十六日이다하니 제절로 웃음이 나오는구려. 성규가무엇이길레 내가이다지도 그리 위하고 보고저할가. 다른 남편도 나처럼 그렇게못나게 그안해를 보고싶어 못견듸고살이마를가? 흔히는 남자는 혼인한후에는 그여자를 덜바치고깊은사랑은있어도 타는듯한 감정은 적어진다는데 나는 그와반대로 더욱더욱나의정은타고 공연히당신을 잃을가겁이나오 (다시보지못하게잃는것말이오)-中略-참고맙소. 나는 당신이 너무히생적으로나가니까 쉬죽을가봐 겁이나오 좀 나쁘게굴더라도 오래 살아있기를 나는 바라오 그러나 우리의사랑이가리치는교훈으로 이리되여가는것이니까 그런헛걱정은 할필요없지오 -中略- 이 다음에 영식이가 내피아노를쳐주고 함게 出演한다면 그三分一까지 우리것이될것이요 ···下略···
月俸四十四圓……그것으로病고치랴 살림하랴 빗갚으랴이때의 苦生은참말로 深刻하였다. 그러나 唯一한希望은米國간 이의成功을 기다리는것이다. 아픈몸으로 두아이를길르고 빗갚아가고 하는것쯤은 至當히해야할일이었지 나에게 괴로운일은아니었었다. 그가 米國갈때에 一週日에한번씩은 꼭꼭 편지하자던約束― 그질거운約束을지켜서 그에게 편지를쓸때는 괴롬도 아픔도 모두 없어지고 나는 무척幸福스러운것으로만 생각되었었다.
이러한生活을 三年동안계속하였다. 昭和三年六月二十六日 安氏는 마침내 뜻하였던 學業을마치고 돌아왔다. 반가움과 기쁨에넘치는나는 그냥 두어린애를다리고 釜山까지 마중을나갔다.
그때의그기쁨, 그즐거움, 그반가움 宣敎部에서 學資를얻게되어 苦學이래야若干의苦學이었다는말, 「미스·영」의紹介도 「수양아버지」까지얻어 「피아노」도장만했다는말, 한번은肓膓炎을몹시알았다는이야기······京釜千里길을 꿈속에달리던 그날이記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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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온뒤 더욱이 「피아노」까지 나왔을때는 좁다란親庭집에서 寓居해있을수는 없었다. 이리저리주선을해서 阿峴에다집을얻고 다시 살림을차리어 三年만의團欒을누리게되고 九月新學期부터 安氏는梨專音樂科講師로 就任이되었다. 그대신 나는 阿峴女學校를나왔다.
그이듬해! 四月첫아들 宗植이를 낳았다. 宗植이를낳은後 「류마지스」가 대단하여서얼마동안呻吟을하야한때 明朗하고歡喜에찼던 집안을나의病으로 잠시憂欝하였었다 내病이낫자이번에는 宗植이가世上을떠났다. 사람의生活처럼無常하고翻覆이自甚한것이없다는것을 새삼스럽게느끼었다.
講師의收入으로 집세를내어가며살림을해가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어디까지 安氏를사랑하는 「미쓰·영」은 딱한사정을돌보아주어서 집하나를사도록변통이되었으나 집값이다못되어서 집을 低利로典執을하였으니 이때 典當을잡앗던이는 金顯順이의 어른되는 金泰相氏였다.
그러는중에 安氏는 正敎授로昇任이되어 每朔一百五十圓의俸給을받게되어서 生活이 피어가는가하였으나 本家에四十圓 低利五十圓씩을 물어가느라고 적지않게 힘이들었었다.
다시 그이듬해 昭和五年十月十日에 重植(아들)이를 낳았으나 그아이는 낳은지 스무하루만에 가엾게 세상을떠나고 나는 또다시 病이더치어 결국엔 세부란스病院에서 手術까지받고말았다.
이를 조곰앞서서 安氏가 米國에서돌아온지 얼마안있어 그를中心으로하야 聲友會가 組織되었었다. 金顯順이도 이때의 한會員이었다. 서로 이웃간이요 또 才質이놀라워서 安氏는 그를 퍽 親切히하였다. 나는 安氏의人格을 어디까지 믿었던만큼 무슨 疑心까지도 갖지아니하였었다. 그뒤 病床에누어있는 나의 귀로 그들의뜬소문이 가끔 스치었으나 그때亦是 귀담아듣지를 아니하였었다.
「오늘의成功은 왼롱 모두가 당신의숨은功勞요!」
「나의榮光이 당신한테로가는 榮光이요」
—이러한말은 安氏가 米國에다녀와서 나에게한말이다. 이러한 나를생각해주는 그가 變心할 리가 있을랴! 설마 그가 나를 저바리랴!
그러나 所聞은 連해서 나의귀로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밤낮 단둘이散步를한다.
—두사람의關係가 深刻해간다.
—어쩧다 어쩧다······
[사진] 아빠를잃은三男妹
모든 不快한所聞이 들릴때마다나는 깨끗이 그소문들을고싶었다. 나는 그를믿는다. 疑心은말자! 病床에누어있는 나를버리고 그가散步를하다니 千不當한말이다. 저親切하고 細心한그가 나를 잊을리가있느냐?
그러나 그의外出하는時間이 날로 자저가는것은 어쩐 일이냐? 下學後에 집에돌아오는 時間이 不規則해가니 웬일일가? 散步를 자조 하는것은 「消化不良 때문에 그렇다」는데······믿자. 모든것을 疑心해서는 못쓴다. 病席에 누어있는 나의 마음은 저윽이 흔들리었다.
巡廻音樂을하고 돌아올때 顯順이 집에 먼저들러온다는말― 金剛山에를 顯順이와함께 갔었다는이야기― 永遠한處女로서藝術에精進할것인즉 先生님의안해에대한사랑에는 浸犯치않겠다는 顯順이의말―나어린弟子를어찌사랑하겠는가하는安氏의말― 이 錯縱한속에서나는 그전날첫사랑을이야기하던 그때의純情― 그립기 짝없던 作別의生活― 成功하고돌아온後의 團欒하던 그生活― 또 믿고依支해온 그의淸廉한人格― 結局엔 모든所聞과 事實을 믿고싶지않았다. 다만 안해로서의義務! 어머니로서의職責! 여기에 忠實함으로서 모든것을 덮어버리려하였다.
그러나 昭和七年 二頃月 지루한 病床에서 겨우 지팽이를 집고 간신히 일어났을 그때엔 安氏는 항용 밤을 새다싶이 하고서 들어오는것이었다. 그理由를 물으면 安氏는 顯順이에게 私聲을가리키느라고 作曲을 가리키느라고···하며 대답을하였다.
어느날새벽이었다. 安氏는 대단히 疲困해서 돌아왔다. 그는 말없이黙黙히있더니 얼마만에 事實인즉 上海로갈려고 釜山까지 車票를사가지고갔다가 大邱서돌아왔다는 告白을 한다. 그리고 자기몸을 피하지않으면 안될일이있다하면서 그러나 참아 두어린아이와 당신을두고서 말없이 떠날수가없어서 도루왔다고띠엄띠엄 이야기를한다. 자기몸을 피하지않으면안될事情?― 그것은 무엇일가?
그다음날 三月어느날이다. 亦是하로를 안들어왔다. 食母를 安氏의 親家로 보내보았다. 그집에서도 간곳을 모른다한다. 그의親家에서는 安氏의동생이 놀래서 달겨들었다. 나는 그를붓잡고 그동안의이야기를할때 풀없이들어스는安氏의얼굴!
나는 더참을수가없었다! 두사람 사이에는 드디어 한바탕의 야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는 沙里院까지갔다가 回程을하였다는것이다. 이때의理由도 亦是피할밖에없는 딱한事情때문에 그리되었다는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부탁처럼 언제고 海外로 가고말것이니 떠들지를말고 「피아노」와 집을팔아서 살림을 주리도록하라는말과海外로나간다음엔 住所도 알리지않겠고 그곳가서 職業을얻어갓는대로善後策을차릴테니 그리알라는말까지하였다.
그뒤 한달가량지난 四月十日! 그가 기여코 國境을넘어간날이다. 尹致昊氏宅에서 梨專敎授招待會가있다고하면서 나간다음 그는 돌아오지를않았다. 몇날이지난뒤에 「哈爾賓」에있다는 편지를하고는 전날부탁한 그말과같은사연을 써보냈다. 그때梨專서는 李起福氏가 찾아오섰다. 萬事는 明瞭하다. 별르던 「쩜프」는 드디어 세번째에 成功이된것이다. 그는 나의 두딸과 有腹子 네사람을 남겨놓고 그여코뜀을뛰고말았다.
그전에 그가 海外로간다할때 顯順이까지 따라가려는 생각은 않고(또 그가정말간뒤에도 顯順이가 쫓아간줄은참으로 몰랐다) 『다시 더音樂을硏究하시겠거든 내가 몸을추실른後에 伊太利로가시요. 그동안 다시한번 내가 더 고생을한테니―』하고 말한적이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웨 家庭과妻子를버리고 行方을 감추지않으면 안되게되었나? 몹시 궁금한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문서를잡혀가지고 哈爾賓으로 그뒤를 쫓아갔었다. 그러나 앓고난몸이라 哈爾賓에 倒着하자마자 몸을가누지못하고 이틀동안을 그곳 牧師宅에서 누어있었을뿐 그가 어디가있는지를 찻아보지못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도 두사람이 사랑의逃避를하얐으리라는것은 꿈에도 믿지를아니하였다. 金이 그를 따라나슬것이라고 생각도되지않았다. 그만치나 그를向하는 나의執念은 强하였었다.
그後 두사람이出奔했다고 大書特書한 뉴―스를보고上海서同居한다는것을 알게되었을때야 나는 비로소 모든것을 깨끗이斷念하고 눈물을먹음고 앞으로살아갈方途를 計劃하였다.
哈爾賓서 돌아온뒤 不健康한데다가 懷姙四個月! 세食口의 눈앞에 떨어지는 그날의生途가 莫然하지않은가? 할수없이 「피아노」를 六百圓에 잡혀가까스로 延命할道理를차렸다.
그러자 그후 南京에서 첫번便紙가왔는데 서울에있어서의 新聞雜誌들의 성가신것을피하야 이곳으로왔다는말과 苦生이自甚하다는말이 적혀있었다. 그의 편지를읽은나는 그래도 마음이 不安해저서 「피아노」 판돈에서 五十圓을보내주었다. 그리고 樂壇에나스게되면 必要하니 禮服, 구두들을 보내라하였기에 그것들도 全部보내주었다.
그後 여러가지를 잘받았다는 편지가 큰딸暎植이한테로왔었다. 金은 北平에 있다는말과 자기는 이미더럽힌몸이니 다시돌아갈수없다는말과 자기를잊어버리라는사연이씨워있었다.
이때 나의生活에는 적지않은 威脅이 날로 닥처들었다. 그래서 우선 집을팔아서 阿峴親庭近處의 조고마한집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그동안에여러가지借務를整理해버렸다.
그가떠난지 여섯달만인 十月十三日에 어린아이를 또 낳게되었다. 이름을 忠植이라지었고사나이였다.
그동안까지는 피아노판돈 집판돈을가지고 生計를껄어왔고 解産準備도하였다. 上海로 가끔 生活費를請求도하였으나 아무應答도없이 오히려 離婚해달라는말만 하였다 그말에는 내가 不應하였다. 그뒤에 東京으로 그들이왔을때는 큰딸 暎植이를보내라고하였다. 그말도 勿論들어줄까닭이없었다.
二年이지나갔다. 生活의方途는 딱 매켜젔다. 나한몸이라면 아모 念慮를할必要도없지만 홀어미하나를 依支하는 나어린세生命을 어찌하는가 무슨일이있드라도 그들만은 幸福하게 그리고 사람구실을하는 人物을만들어주어야할것이다.
나는 그해九月에 百方으로 주선을하야 現在있는女學校로 臨時敎員이되어 또다시 職業戰線으로 나왔다. 十二月에는 正敎員의免許狀이나와서 오늘까지 敎員노릇을하면서 세아이를 거두어길러온다. 勿論 薄俸을가지고 네식구가 살아가기는 눈물겨웁게悲慘하다. 그러나 마음을가라않히고 다잡아가면서지내는 오늘의 生活은 平和스럽게 생각된다.
安氏와金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關心을가질 必要는없다. 또 내마음을흔들리고 싶지도니않다. 나는 지금내마음을 가라앉인내마음을 흔들리지아니하려고 努力한다.
現在 큰딸아이는 女高普二學年이되었다. 成績이좋아서 校費까지얻게되어 弱한나의負擔을 훨신 덜어준다. 둘재 華植이는 普通學校五學年에다닌다 普通科를마치는대로女子師範을보내거나 不然이면 工塲의職工도좋다. 다만 사람됨에있어서 善惡의길만 가릴줄알면 그뿐이다. 셋재 忠植이! 男子다운男子가되게하고싶다. 아직 어리지만 健康하고 愚鈍한것같지않다. 山에서돌을쪼고 밭에서흙을갈더라도 面目이뚜렸한 男子만된다면 나는 滿足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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