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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연극배우고 演劇俳優考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안영일 安英一
출처정보 신시대 新時代
연    도 1943-03 昭和十八年三月
면    수 112 112
기사
[사진] 黃 徹/ 徐一星/ 卞基鍾/ 朴永信/ 兪慶愛/ 金陽春/ 金仙草

朝鮮演劇俳優의이모저모

演劇하는 사람의 世界란 아름답고 華麗하고, 魅惑的이며 夢幻의 세계와도 같다. 그것은 演技者의 創造하는 苦憫과 生活허는 神秘性이 舞台와 客席이라는 거문 帳幕을 가로놓고 想像하기 때문이다.
演技者의 世界는 神秘한것도 아니고 華麗한것도 아니다. 演技者가 生活허는 行程이란 眞實로 어려운 길이다. 多樣한 現實의 寶庫속에서 산 人間의 典型을 맨드러가는 創造의 苦憫-그것이야말로 演技者마니 가질수있는 神秘의 世界일것이다.
이 神秘의 世界를 憧憬하고 나오는 演劇人의 무리가 그世界를 征服하지못한채 無力하게도 退陣하는 現實을 얼마든지 볼수있는 것이다.
이러한 事實로 미루어 보드래도 演技者의 世界가 얼마나 어렵고 苦難의 길이라는것을 알수가 있을것이다.
朝鮮에 새로운 形態의 演劇運動이 存在한지 이미 三十有餘年-그동안 얼마나 많은 演技者의 무리가 이神秘의 門을 두드리다 散華했는지 헤아릴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비단 演技者의 世界에만 限한것이 아니라 演劇運動全體의 나가는길이 多事多難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손치드라도 三十年이라는 거이 同年代의 歷史를 가지고있는 文學運動이 四十代, 五十代의 文學人을 所有하고있는 事實에 比하야 二三人의 特殊한 演劇人을 除하고는 四十代의 演劇人을 거이 한사람도 갖지못했다는것은 얼마나 섭섭한 일이냐.
이러한 事態의 根源을 우리는 어디서 찾어야 할것인가-.
勿論, 그것은 文學은 個人의 世界를 基盤으로해서 存在할수있는데 反하여 演劇의 世界란 綜合的인 集團을 中軸으로해서만 成立할수있다는 型態的인 差異에도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根本的인 要因은 못된다.
보다根源的인것은 文學을 探求하려는 意慾的인 文學精神과 演劇의 世界를 彷徨하는 神秘스러운 幻影的인 그림자와의 差異에 있는것이다.
그러므로해서 이땅의 朝會暮散하든 演劇運動의 歷史는 한결같이 二十代의 演劇靑年的인 情熱에 넘치는 運動이였었다. 演劇靑年的인 情熱이 意慾이 식고, 生活이라는 거친波濤가 몰려올때 그들은 安易헌 世界로 隱遁을 했든것이다.
이것은 眞實로 悲劇이다. 얼마나 많은 演劇人이 이 神秘의 門을 두드렸다가 다시 潮水가 몰려왔을때 그물을 타고 흐터저 버렸을 것인가-.
나는 이러한 回想을 거듭하며 付托을 받은대로 國民演劇運動의 先驅的인 役割을 하고있는「阿娘」「高協」「現代劇場」「星群」「靑春座」等 五個劇團에서 活躍하고있는 演技者-特히 지난 演劇競演大會에서 演技賞을 受賞한분-을 中心으로 이글을 쓰기로 하겠다.

★男優陣★

「阿娘」의 黃澈氏, 나는 黃澈氏의 演技를「사랑에속고 돈에울고」에서 처음보았다. 大端헌魅力을가진 演技者라고생각했다. 舞台를 支配할수있는 여러가지 技功을 가진 분이다. 台辭를 말할때 語尾를 異常스럽게도 半音을 높인다. 그곳에도 아마 觀客을 魅惑시키는 秘密이 있는상도 싶었다.
나는「成吉思汗」을 演出하는 機會에 黃澈氏의 演技者로서의 秘密을 아렀다. 그는 自己를 빛낼수있는 演技技術을 그리고 平面的인 說明的인 演技體系를 버리라고 努力했다. 낡은 創作方法을 버리고 새로운 演技의 世界를 찾으려고 힘썼다.
그를 흔이 才操있는 演技者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才操뿐이 아니다. 새것을 探究하랴고 苦憫한다. 그는「成吉思汗」에서 重厚하고 野性的인 東洋的性格을 形象했고,「幸福의 啓示」에서 纖細하고 銳利하게도 心理의 內面的인 世界를 通해서, 이世代에 살고있는 새로운型의 人間을 創造했다.
다음은 그를 기다리고있는 知性의 世界다. 그는 知性의 나라를 찾음으로해서 外形의 世界에서 內面的인 높은 演技方法을 確立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星群」의 徐一星氏와 더부러 朝鮮의 最高演技水準을 確保할수있을것이다.
그리고 黃澈氏의 苦憫의 다른 한面은 劇團經營者로서의 그것이다. 한個의 演技者가 劇團을 經營한다는것은 眞實로 어려운 일이다. 藝術과 經營이 二律背反하는 只今에 있어서랴-.
나는 그가 演技者와 經營者와의 關係를 合理的으로 解決하는날 더 큰 演技者가 될것을 믿고있다.
「高協」의 朴學氏는 우리 劇壇에서 보기드믄 知性的인 面貌를 가춘 演技者다.
演技는 하나의 技術이아니다. 演技를 한 개의 「흉내」로만 알든때는 지났다. 肉體와 言語의 科學的인 修鍊과 아울러 現實을 直觀할수있는 基礎를 가져야한다. 그러한 點에서 朴學氏는 누구보다도 뛰여난 現實透視力과 그것을 肉體的으로 形象化할수있는 修鍊을 쌓은 사람의 하나다.
그는 戱曲이 設定하는 人物을 現實의 多樣한 生活속에서 배우라고 한다.「이役은 이러 이러한 性格과 이러 이러한 感情을 가진 人間」이라는 假設을 세우지 않는다. 웨냐하면 그것은 類型의 世界이기 때문이다.
「街頭」의 陳程, 「柊柏꽃피는마을」의 点錫, 「氷花」의 村上船長等等은 다 成功한 役이다. 그러나 「氷花」의 村上船長은 異議가 있다. 그것은 勿論 演出者의 責任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朴學氏에게 難이있다면 台辭의 語調다. 話術에 柔軟性이 적다. 그러므로 그는 演技의 幅이 좁아지는 것을 警戒해야 허리라. 그點에서 「氷花」의 村上船長은 그의 演技의 幅을 넓히는데 좋은 結果를 맺었다.
朴學氏에게 바라는바는, 人間의 創造라는것은 決斷코 觀念的인 理解에서가 아니다 無盡藏한 現實속에서 찾어야 한다는것을 記憶해 달라는 것이다.
말하는 才操와 몸을 다르는 努力을 게을리하지 않을때 朴學氏의 存在는 더 빛날것이다.
「星群」의 徐一星氏는 老鍊한 演技技術의 所有者다.
徐一星氏의 舞台는 언제든지 믿음직하다. 그가 登場을 하면 舞台가 째이고, 安心이 된다. 「前進座」의 河原崎長十郞氏와같은 感銘을 주는 演技者다. 다같이 重厚하면서도 河原崎氏가 歌舞技的인 殘滓를 버서나지 못한채있는 代身 徐一星氏는 보다더 柔軟하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의 演技者的 才能을 말하는 同時에 그의 多年間 精進해온 代價일 것이다.
「山되지」의 張德大는 좋았다. 自由奔放한 演技였다. 徐一星氏의 演技力의 集大成이라해도 過言은 아닐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外形的이요 表面的인 演技形象이였다. 더많이 內面의 世界로 파고드러갈 陰影의 世界가 있지않었나-. 張德大는 適切한 性格의 表現이면서도 깟닥 잘못하면 類型의 世界로 誘惑을 當할 危險性이 있는 演技다.
그리고 歷史劇에서 볼수있는 不自然하고도 異相한 인토네이슌-大端히 귀거실르게 들리때가 많다 李曙鄕氏와 같은 有能한 演出者를 맞이한 氏는, 自己의 演技者的인 財産을 다시한번 再鍊成할 必要가 있지않을까.
台辭와 動作이라는것은, 演技者의 觀念的인 世界와 現實과의 科學的인 距離測定에서 創造할수 있는것이지마는 어데까지든지 戱曲이 規定하는 人物 그것이야만한다.
그러한點에서 徐一星氏가 一層 더 演技創造에 對한 理論的인 探究가 있기를 바란다. 그때는 自他의 追從을 許諾치 않을것이다.
「靑春座」의 卞基鍾氏는 우리 劇壇의 大先達의 한분이다.
演劇이란 決코 才能있는 몇개의 技術者의 모함으로만 創造되는것이 아니다. 演劇의 참다운 創造란 眞摯한 人間性을 土台로해서 그우에 다시 技術的인 再生産을 必要로 하는 것이다. 誠實한 人間性의 發露가 없이 참듼 國民演劇이 開化할수 없다.
卞基鍾氏야말로 藝道精神의 指標가 될 분이라 한다.
도리켜볼때 演劇이라는 神秘의 門을 두다리다 차디찬 갈바람에 쪼끼여 간 사람이 얼마나 많었을까. 그들은 演劇이라는 한개의 虛榮兒를 안고 灰色의 天地를 헤메이였든 것이다. 情熱이 식고, 바람이 귀를 여윌때 그들은 따뜻한 뒷골목으로 逃避를 했든것이다.
이러한 現象은 只今 우리를 周圍에 얼마든지 있는것이다. 그들은 演劇을 사랑한것이 아니라 演劇人이 되기를 보다더 渴望했든 것이다.
이러한 어지러운 가운데서 卞基鍾氏는 꾸준히 싸우면서 精進해 왔다.
그가 거러나온 事蹟에 對한 評價는 別問題다. 나는 그의 意慾을 그의 情熱을 산다. 그것만으로도 넉넉히 우리劇壇에 큰功獻이 있다고 보겠다.
그분에게 나문것은 좋은일을 할것-그것뿐이다. 歷史的으로 남을 演劇을, 眞摯한 演劇을 해야한다. 藝道精神을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직혔다는것은 理論的인 問題다. 남을것은 藝術이다.
卞基鍾氏가 惡戰苦鬪해서 직혀온 그 精神을 살리는데는 좋은 演劇을 하는데있다. 그精神과 그意慾과 그情熱만 있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할수있을게다.
國民演劇의 指標가될 永遠한 價値를 가질수있는 演劇을 爲해서 挺身해주기를 바란다.
常識的인 世界에서 科學的인 演劇創造의 世界로 한거름 더 나가야한다.

★女優陣★

「阿娘」의 永信氏는 最高의 育을 받은 演技者의 한분이다. 두애기의 어머니요 善良한 안해이다.
어진안해요, 어머니인 그가 女俳優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渡世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리라는것을 잘알고있다.
그러나 朴永信氏는 그 어려운길을 眞實하게 것고있다. 참으로 壯한일이다. 魅力있는 音聲, 圓滿한 肉體, 어데던지 品있는 얼굴-참으로 얻기 어려운 演技者이다. 흔이 女俳優라면 不健康한 異質的인 感情을 免할수가 없는데 朴永信氏에게는 그러한 不健强한 感情을 갖일수가없다.
그것은 곧 演技者가 가질수있는 敎養이다.
朴永信氏에게는 敎養이라든가 또는 先天的으로 받은 肉體的인 條件外에 演技者로써 가져야할 感性的인 面貌를 兼備했다.
그는演技者로써 幅이 大端히 넓은분이다. 그것은 正히 演技者로써 敏感하다느니 보다도 自己의 肉體的인 條件을 어떠한 世界에든지 適應할수있게 修鍊했다는 證左이다.
그렇다演技者는 萬能의 特性을 가진 樂器와도 같기때문이다.
朴永信氏에게 바랄것은 役을 빨리 捕捉한다는것이 敏感하다는以外 類型에 빠질 危險이있다는 것이다.
演技는 模倣이 아니다.산人間을 創造하는 藝術이다. 謙遜하게 精進하기를 바란다.
「高協」의 南宮 蓮氏—.
南宮 蓮氏는 現代劇場의 劉桂仙氏와 더부러 中堅女俳優中에서 가장 有望한분의 한사람이다.
「街頭」의 月中月, 「柊柏꽃피는마을」의 点順等 다 成功한 役이다.「氷花」의 소-니야도 好感을 갖게한 役이였다.
그는 참으로 長足의 發展을 하고있다.「氷花」에서도 朴學氏나 李載德氏나 南宮蓮氏가 登場하면 舞台에 新鮮한 맛이 돌고, 산人間이 躍動하는 느낌을 받었다.
南宮 蓮氏의 演技는 生生했다. 소-니야같은 人間이 實在할지 안할지는 別問題로 치드라도 그는 그人物의 感情을 살렸다. 다른 演技者보다 새로웠다.
「柊柏꽃피는마을」의 点順도 近年에 보기드믄 好演技라고 생각한다. 大體로 朝鮮의 女俳優가 妓生이나 女給같은 役을 잘허는 理由는 어데있을까-. 아마도 그것이 女俳優自身의 生活과 가까운距離에 있다는것이 큰 原因이 아닐가한다.
南宮 蓮氏는 좋은 素質을 가진 女俳優다. 그의 武器는 아마도 肉體的인 魅力일게다. 朝鮮의 女俳優는 出世을 일즉하는데 演技者로써 失財하는 動杆가 많다.
南宮 蓮氏는 누구보다도 有望한 演技者다. 自重하고 끊임없이 努力하고 工夫를 해야한다. 工夫를 안하는 演技者는 墮落이다. 스타-, 씨-스템을 謳歌할 時節은 아니다.
自己의 才能과 肉體的인 魅力이 衰退될때 그 演技者는 破滅하고 마는 것이다.
「星群」의 兪慶愛氏-누구보다도 年少하고 누구보다도 健實한 技術을 가진 女俳優일게다.
「山돼지」의 찬집도 好演技였지마는 東洋劇場에서 그의 存在는 빛났다.
女俳優란 所謂스타-가 되기를 所望한다. 그것은 戱曲이 設定하는 人物을 表現한다는 意慾보다도 女俳優 自己自身의 美貌를 觀客에게 보히자는 慾望, 그것이 앞을 스기 때문이다. 이러한 醜惡한 雰圍氣가 얼마나 오래인동안 우리劇壇을 低廻하고 있었든가-.
그러나 兪慶愛氏는 그러한 속에서 참된 人間을 創造하기에 努力했다. 人間을 創造하는 技師가 되려고 애썼다. 人間을 創造하지 못하는 演技者는 참된 演技者가 못된다.
끝으로 兪慶愛氏에게 바랄것은, 善良한 사람은 이렇게 演技하고, 惡한 사람은 이렇게 演技한다는 하나의 技術을 버리고 참으로 피가 흐르고 感情이 용소슴치는 人間을 맨드는 方法이 어떠한것인가를 배워야 할것이다.
「現代劇場」의 金陽春氏와 劉桂仙氏는 現代劇場의 기둥이 되여있는 演技者다.
金陽春氏는「黑龍江」과 「黑鯨亭」에서 接한일이 있다. 둘다 印象이 흐릿해서 可否를 指摘하기에 因難하나 좋은 演技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추나무」의 「由喜네」는 퍽 印象的이였다.
젊은 女俳優가 老役을 演技할때 더구나 農村劇에 있어서 흔이 볼수있는 것은 시골老婆가 입을수있는 衣裳에다, 얼굴에는 朱銅色을 좀 바르고, 머리에는 분가루를 뿌려, 外形的으로는 그럴뜻하나 舞台에 있어서는 그女俳優自身 그대로요 산人形에 지나지 못하는境遇가많다.
그러나 「대추나무」의 「由喜네」는 그렇지가 않었다. 生活의 體臭를 느낄수가 있었다. 나는 金陽春氏가 산人間을 맨들려고 努力한 그誠意를 사고싶다.
演技者라는것은 그래야한다. 人形을 맨들듯, 模倣하는것이 아니다. 人間을 創造못하는 演技者는 藝術家가 아니다.
劉桂仙氏는 至極히 才操있는 演技者다. 「黑龍江」「黑鯨亭」에서 劉桂仙氏의 演技는 빛났다.「대추나무」의 由喜도 熱演이였다. 그러나 劉桂仙氏의 都會的인 感覺과 線의 纖細함이「由喜」라는 人物을 파고드러가도 오히려 近代的인 都會的인 感覺을 處理할 道理가 없었다.
그러면 이곳에서 演技者의 個性과 肉體的인 條件이 絶對로 役의 限界를 엿볼수가 없는가하는 問題에 逢着한다. 勿論 絶對는 아니다.
그렇지마는 演技者의 創造的인 手段이 自己自身 그것이라는 宿命的인 課題를 어찌할 道理는 없을것이다.
劉桂仙氏는 이러한 副次的인 問題에 맛부디처 이를테면 損을 했다. 그러나 劉桂仙氏가 中堅女俳優中에서 뛰여난 才能의 所有者라는것을 잊지는 않는다.
끝끝내 努力하고 좋은演技者가 되도록 精進해 주기를 바란다.
金陽春氏와같이 이르는바 스타-라는 아름답지못한 世界를 떠나야 한다.
「靑春座」의 金仙草氏는「山風」에서 처음 接했다.
朴永信氏와 더부로 第一級의 線을 가고있는 演技者라는 印象이였다. 朴永信氏와같이 안에서는 어진안해요 밖에서는 眞摯한 演技者라는것은 容易한듯 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演技者는 人生이라는 問題를 解明 할수있을때 더욱 빛날수가있고똑바로 人間을 잡을수가 있을것이다. 人生을 모르는 演技者는 不完全한 演技者다. 人間的으로 成熟해야한다.
그러한 意味에서 金仙草氏는 成熟한 演技者다. 人間感情을 잡을줄아는 演技者라고도 할수있다.
「山風」의 어머니는 强靱한 性格을 맨드는데 成功했다. 心理와 感情을 通해서 具象化되는 形態로서의 어머니를 똑바로 잡었다. 그럴때 그人物은 舞台에서 躍動하고 그感情을 觀客에게 具體的으로 傳達할수가 있었다.
그러나 金仙草氏의 演技는 多少 生硬했다. 商業主義演劇에서 얼른 演技技術이 빠지기쉬운 經驗主義的인 才操를버리고 새로운 演技術을 確得해야 할것이다.
끝으로 後進들의 指標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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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 演技者를 많이 남기여 놓은체 이글을 막게된것은 實로 遺憾이다.
다른機會에 豊富한 材料를 얻어 男優論, 女優論을 따로 써볼 作定이다. 演劇이-그리고 演技가 한결같이 手工業的인 經驗의 世界에서 씨름을 하고있다는것은 섭섭한 일이다. 우리는 體系를 갖고 理論을 가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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