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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경연대회의 인상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연극경연대회의 인상 演劇競演大會의印象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임화 林和
출처정보 신시대 新時代
연    도 1942-12 昭和十七年十二月
면    수 90 09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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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群」, 「阿娘」, 「現代劇場」, 「高協」, 「靑春座」等 다섯劇團의 公演가운데서 내가 본것은 「星群」을 빼놓은 네劇團이다. 다 보지 못하고 競演大會의 感想을 말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본것만을 通한 印象을 적으라는것이 本誌의 付托이니 遺憾이나 다른 道理가 없다. 以下에 네번 公演을 본 片々한 印象을적어 競演大會所感에 대신코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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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娘」의 「幸福의啓示」는 年前「高協」의 「정어리」以後 朝鮮演劇의한 頂點이 아닌가하는 感이 들었다 「高協」의 「정어리」는 成功의 與否는 別問題로 하고 當時 沈滯不振하든 劇壇에 一條의 淸新한 潮流를 導入한 公演이었음은 틀림없었다.
素朴하나마 寫實主義를 未熟하나마 藝術的熱意로, 局面을 打開해볼랴는 精誠이 分明히 느껴졌다.
劇硏座의 挫折後, 卑俗한 商業劇이 一世를 風靡할때 「高協」의 「정어리」는 틀림없이 朝鮮演劇이 한거름 앞스는 契機었다.
그뒤의 「高協」이 劇壇에 끼친 功積이라든가, 高協의 成長은 오로지 이 한거름 大膽하게 내어 듸딘 出發點에 歸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朝鮮演劇의 길이 새로운 方向으로 轉換된以來, 各劇團이 여러次例 試驗한 公演中, 아즉 新時代의 演劇으로서의 여러가지 條件과 그것을 綜合하야 한階段 앞으로 내미는, 그러한 公演은 갖어지지아니했다.
要컨대 참말 意味의 國民演劇에 가까운 藝術이란것은 여태까지의斷片的인 試驗가운데서 나타나지아니했다.
「高協」의 「街頭」,「동백꽃핀마을」 「阿娘」의 「成吉思汗」, 「三代」, 「現代劇場」의 「黑龍江」, 「北進隊」等이 모두 國民的인 主題를 取扱하였음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은 劇壇의急激한 轉換期에 이러난 一種의 模索이요, 斷片的인 試驗의 域을 넘지아니했다.
새로운 主題가 附會된 觀念으로서가 아니라, 自然스러운 內容으로서 떠올르고, 모든素材가 收合된 資料로서가 아니라 調和된 綜合으로서 演劇에 生命을 賦與하랴면 朝鮮演劇은 粗雜한 主題劇에서 一步 더 나아갈 必要가 있었다.
그것은 公式性의 克服이면서, 同時에 公式의 藝術的再生産이다. 公式을 藝術的으로 再生産할랴면 그것은 現實에서 再發見되어 形象으로서 確認되지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演劇으로부터 觀衆을 說服하는 魅力을 빼아서 가버리고 마는것이다.
「阿娘」의 「幸福의啓示」는 未熟하면서도 새로운 演劇의 이러한 要求에 酬應한 거위唯一의 公演이었다.
이러한 功績의 太半은 勿論 戱曲에게로 도라가는것이다.
이戱曲이 藝術的自然性을 가질수있는 첫재의 理由는 主題的으로 前提를 두지아니하고 씨워진데 있다.
고쳐말하면 이演劇은 이러이러한 內容을 가지고 進行되는것이니, 그렇게 알고 보라는 條件이 붙어있지 아니했다.
그러면서도 演劇을 戰時下現實의 한가운대를 꾀뚫고 進行되고, 戰時下 國民生活이 解決하지 안으면 아니될 여러가지 主要한 課題를 處理하면서 發展해갔다. 한사람의 젊은 醫師가 誠實한 學究生活에서 시작하야, 無醫地帶의 慘憺한 現實로 드러가면서, 그가 逢着하는 여러가지 事實을 通하야 意外로 우리는 周圍에 解決을 要하는 雜多한 課題가있음을 發見하고, 그것의 處理가우리의 成長에 얼마나큰 關係가 있음을 새삼스레히 느낄수가 있다.
非衛生과 迷信과 無智를 克服해야하고, 그것을 爲하야는 能力있는 모든 사람, 醫師고, 官吏고, 個人이고, 團體이고 間에 모든 힘을 集中하야 한다. 그러기 爲하야서는 어버이고 안해이고 間에 도라볼수 없는것이다. 그러나 이戱曲의 生命이 되여있는것은 이러한 곧에 보다도, 過去의 新主題를 取扱한 作品은 大槪 여기에 머믈렀다—이러한 任務와 그것을 遂行하기 爲한 犧牲의 原動力으로서, 觀念을 依支하지 않고 人間의 誠實이란데 뿌리를 박은데 있다. 槪念에 달뜬 人間이 아니라, 誠實한 사람만이 任務를 錯誤없이 遂行할수있고, 犧牲을 動搖없이 忍耐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自古로 忠誠이란것은 사람의 높은 誠實이 었고, 또한 忠誠된 사람 이 집에 있어서나 他人사이에 있어서나 어진 사람일수 있었든것이다.
이 戱曲의 主人公이 惡人을 侮悟식힌것은 說敎가 아니라 誠實한 行爲였으며, 複雜한 愛情關係를 處理한것도 甘美한 言語가 아니라 誠實한 精誠, 그것이였다는事實은 特記할必要가 있다.
그가 生에對한 一切의 希望을 잃어버린 한 女人에게 들려주는 會話는 言語이기보다도 마음이요, 마음이라기보다도 最大限으로 誠實한人間그것이었다. 그會話는 우리가 사람의 입에서 들을수있는 가장 아름다웁고 眞實한 한토막이었다.
事實 한마디의 말이 絶望하지 아니할수없는 女人에게 곧人生에의 希望을 傳播할수 있다는것은 明白히 믿기어려운일임에 不拘하고, 이演劇에서 우리가 그것을 自然스럽게 느끼는것은 이때문이다.
偶然히 어느 섬으로 왔든 한醫師의 行跡이 이렇게 클수가 있다는 것은 人間의 조고만 誠實하나가 얼마나 큰힘을 가졌는가 하는點을 證明하는 事實이다.
誠實이라는것은 모오든 不調和한 것을 調和시킬수가 있고, 모오든 더러운것을 美化할수있다는 信念을이戱曲은 우리에게 말하고있다.
朝鮮의 戱曲 가운대서 이만치 사람을 所重하게 다르고 이만치 아름답게 볼줄아는 例는 極히稀少하다.
이 戱曲이 가지고있는 唯一한 缺陷인 劇的壓縮力의 不力이란 한點을 計上하고라도 競演大會第一位에 屬하기에 不足하지 않은 作品이다. 分明히 이 戱曲은 現下 朝鮮演劇의 한 階段을 劃하는것이다.
여기에 安英一氏의 演出은 美麗한 것이었다. 「成吉思汗」을 通하야 아름다운 表現의 秘密을 아는 演出家로서 安氏를 보아온 우리는 그가 또 心理表現의 確實하고 堅固한 能力을 所有하고 있다는데 놀라지 아니할수없다. 마치 優秀한 小說을 읽는것처럼 「幸福의啓示」의 舞台는 人物의 配置와 運動이 自然스러웠고 性格의 特長과 心理의 流動을 捕促하는데 氏는 纖細했고, 銳利했다. 三幕과 四幕一場의 心理의 날카로운 葛藤과, 纖細한趨移는 凡庸한演出家의 能히 하지못할 場面이다.
이 아름다은 다틈, 그 다틈을 通하야 모든 사람이 智慧로워지는 心理의 流動을 그는 익숙한 水夫가 여울을 지내듯 따라간것은 놀라운 일이다.
第一幕의 整制된 美 거기서 追求하고있는 時間의 흐름, 二幕二場의 어른애가 죽는밤의 驚動과, 緊張과, 激情과 嚴肅과 悲愴과 第四幕 一場의 愛情과 善意와 智慧와 仝二場의 繪畵的美는 먼저 말한 諸部分과 더부러 競演大會中의 壓卷이었다.
「幸福의啓示」는 安氏의 作品中의 第一位에 屬하는것이며, 그의 뛰어난 才能과 技術을 多方面을 通하야 發現한 作品이였다.
裝置는 金一影氏의 技術을 代表할 作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相當히 設計세우기 困難한 條件아레서 그만큼 成果를 나타내인것은 그래도 氏의 貫錄을 보히는것이었다. 朝鮮집의 構造와 表現이 若干 難點이있다, 하겠으나, 舞台의 美觀이나, 演出의 支障을 가저올 程度는 아니였고, 第一幕과 四幕은優秀했다. 더구나 이두場面을 通해서볼수있는 戱曲과 演出에 對한 裝置의 協力이라는것은 크게 評價할必要가있다.
演技에있어 黃澈氏의 醫師, 裵勇氏의科長 太乙民氏의 愛國班長, 巡査部長, 金永信氏의「醫師의어머니」等은 다 傑出한것이었고, 崔承伊氏의 「香姬」는 能爛치는 않으나 熱演이었다.
그中에서 黃澈氏의 「醫師」는 氏의 演技의 豊饒한 一面을 더해가는 契機였으며, 朴永信氏의 「어머니」는 老鍊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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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가 뜻하지않고「現代劇場」의 再生의 公演이 된것은기뿐일이다. 오랫동안 困難한 狀態에있는 同劇團이 이번 公演을 期해서 再起한것도 事實이거니와 藝術的으로 이 公演이 「現代劇場」의 眞面目을 드러내게한것은 여간 多幸함이아니였다. 거기엔 무엇보다도 柳致眞氏의 戱曲의 功勞가 大端히 컸다.
「黑龍江」, 「北進隊」等에서 볼수있든 主題에의 無定見한 追從과 거기에 따르는 作家의 焦燥와 不安이 여기에서는 모두 鎭靜되었다.
作家가 消化할수있는 題材의發見과 그것을 處理할수있는 作家의 內的準備의 成熟이 어느때나 作品을 失敗에서 救한다는 例를 우리는「대추나무」에서도 볼수가 있다.
「대추나무」는 柳致眞氏의 意義있는 出發點이된 「버드나무슨洞里風景」과 가치 그의 劇作家로서의 地位를 다시 保障하는것이고, 그를 오랜동안의 「스램프」에서 救出한作品이다.
同時에 創立公演以後 도무지 低迷不振하든 「現代劇場」을 安定된路線으로 引導하는 作品이기도했다.
그것은 作者가 「黑龍江」에서 失敗한것처럼, 滿洲開拓民의 主題를 滿洲現地에서 차즈랴하지않고 朝鮮農村의 깊은 現實속에서 찾을랴고한 至極히 正當한 態度에 基因한다 그것은 作者가 消化할수있는 題材의 發見인 同時에 主題가 胚胎해있는 根源의 捕促이다. 다시말하면 主題가 現實과 調和될수있는 焦點의 發見이다.
農村現實의 頂點! 거기에야말로 멀리 滿洲曠野에 펼쳐있는 開拓民의 運命이 連結되여있는것이다.
이連結點을 把握하는데 成功한때문에 「대추나무」는 國民的主題를 藝術的構造의 큰 破綻없이 能히 正面에서 받어드릴수 있었든것이다.
「대추나무」는 그런 意味에서 健全한 主題劇인 同時에 在來의 農村劇의 傳統을 相當한 程度로 살리는 데 成功한 作品이다.
그러면서도 이作品이 보다 높은意味의 藝術作品에까지 이르지못한것은 첫재는 出發點에 前提를 가젔든 때문이다.
滿洲開拓民先遣隊에서 도망해온 靑年이 無條件하고 滿洲를 그리워하는데서 이 作品이 出發한것은 作者가 이戱曲의 主題를 前提로서 擇한때문이다. 主題가 逐次로 劇의展開를 따라 自然스럽게 成熟해가지않고 하나의 미리 理解해둘 前提로서 주어질땐, 劇的發展의 自然性을 害칠뿐아니라, 主題그것은 闡明을 大端히 妨害하는것이다. 當然한 事實일지라도 前提로서 주어질때 觀衆이란 觀念으로 밖게는 보지아니한다. 觀衆이란 어느때나 作者가 前提없는人生의智慧로운 이얘기군으로 나타나기을 希望하는것이다 이點에서 「대추나무」는 分明히 觀衆으로부터 誤解될 要素를 가지고있었다.
다음으로는 이른바 劇的技巧를지나치게 濫用한 點을 들지 않을수없다. 演劇이란 本來 꾸민 이얘기인데다가 技巧가 지내치면 볼때는 仔味있다고 하면서 불만켜면 이내 그럴수가없다!는 感을 이르키는것이다. 말하자면 不自然味를 느낀다. 卽이러날수있는 事件이나 있을수있는 人物의 이얘기가 아니라 맹그러진 事件이요, 일부러 끄러온 人物의 이얘기가 되고만다. 이러한 缺陷은 作家가 人生의 길은 眞實을 追求한다는 藝術의 高貴한 目的에對한 用意가 充分치 않은 때문이다.
「대추나무」의 主題로 보아, 보다더 細心한 注意와 藝術的用意를 가지고對해야 할「東旭」의 性格을 追求하지않고 事件의 展開에 作家의 注意가 專혀 傾注된 理由가 여기에있는것이다.
그러므로 「대추나무」는 文學藝術로서의 戱曲이라기보다도 上演脚本으로서의 性質을 多分히 띠고있다. 이런現象도 所謂「座附作者」면 別問題거니와 獨立한 劇作家로서 본다면 그다지 반가운 現象이 아니다.
「대추나무」의 會話가 性格과 心理表現에있어 놀라울만치 無力하고 言語로서의 洗鍊과 文學的加工에있어 不足한 理由도 또한 이곳에있는 것이다. 웨그러냐하면 作者가 專心한것도 事件의 發展을 爲한 對話에있었지 性格과 心理를 表現하기 爲한 會話에 있지않었기때문이다.
徐恒錫氏의 演出이 相當히 努力했음에 不拘하고 所期의 成果를 걷우지 못한것은 遺憾이었다. 勿論그責任의 殆半은 拙劣한 演技와 粗雜한 裝置에 도라가는것이나, 人物의 配置와 運動에 있어 演出者의 基本信念이 나타나있지 아니한것도 事實이었다. 單純한 舞台의 構造上에서만 아니라 人物相互間의 必然한 關係에서 各人物이 차지하는 空間上의 位置란 거이 演出의 全運命을 決定하는것이다.
이러한 位置의 確立이란것은 먼저 舞台의 安定感을 주고 못주는分岐點이 되는것은 勿論이거니와, 그것은 또한 人物에 對한 演出者의理解程度를 告白하는 事實이기도하다 人物에 對한 깊은 理解만이 舞台上에서 登場人物의 適切한 位置를 發見할수있는것이다.
더구나 人物들의 不絶한 運動을 通하야 一貫한 秩序를 賦與하는 일은 一層더 困難한것이다. 絶對로 事件發展의 如何에서가 아니라, 人物의 心理的變遷의 刻々의 相貌를 敏捷하게 捕促하고, 行動에있어 性格의 意義를 充分히 理解할수있는 사람만이 行動을 通한 人物의 一貫한 秩序를 發見할수 있는것이다. 사람의 行動의 動機란 항상 그런곳에있기때문이다.
演技는 崔世榮의 徐成大氏, 鄭泰植妻로 紛한 金陽春氏가 第一 좋왔고, 劉桂仙氏와 더부러 좋은素質을가진 女俳優로서의 面貌를 보였으나 劉氏의 演技는 더節制를 必要로하지않는가 하는 느낌이 있었다. 좋은 演出者가 하로바삐 그의 演技의 秩序를 形式해줄 必要가 있다. 웨그러냐하면 劉氏의 演技는 能爛하다느니보다는 新鮮하고 素朴하기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좋은 演技가될 여러가지 素材를 先天的으로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單純히 新鮮하고 素朴하지않으랴면 秩序를通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기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自然스러워질수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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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協」의 「氷花」는 林仙圭氏의戱曲을 全昌根氏가 演出한 作品이다. 現下 南方建設과 더부러 北方 守護의 소리가 높은 今日, 「高協」이 이러한 戱曲의 上演을 企圖한것은 實로 時宣에 適한일이라 할수있다. 한사람의 朝鮮靑年이 蘇聯을 憧憬하야 越境入露했다가 蘇聯現實의 失望을 느끼고 도라오는 過程을 그린 作品인데, 이상하게도 觀衆의 興味를자아내고, 多少나마 感銘을 주는 點이 이러한 主「테-마」以外의 要素이었다는것은 興味있는 일이다.
主人公이 故鄕에 두고 온 老母에 對한 愛情이, 露領에서 맛난 姜砲手와, 그 어머니의 母性愛를 通하야 觸發되는데가 그가 歸鮮하는 望鄕의 動機가 되어있고, 凡朴한 望鄕心이란것이 이 演劇의 主要한 雰圍氣가 되여있다.
母性愛와 望鄕心! 이두가지가사람의 生活에 있어 如實한 人情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人情과義理란것이 「氷花」의 主題와 어떠한 關係가 있을까?
林仙圭氏의 戱曲은 이두가지의關係를 設定하는데 成功하지 못하였다. 그 두가지가 水火와 가치 隔離되어 있으면서도 演劇은 進行되어간 理由는 두가지 要素가 機械的으로 接合되어있음에 不外한다.
要컨대 이 戱曲의 基本內容이 될 主題는 漂浪하는 朝鮮人의 哀愁와 平凡한 人情을 演劇化하는 하나의 手段에 不過하였다. 다시말하면 政治的主題가 人情劇의 事件을 進展시키는 背景으로 取扱되어있었다.
主人公이 露領서 脫出하는 原因이 그곳의 現實에 있다고 생각되어야함에 不拘하고 더많이 故鄕과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에 있다고 理解되는것은 이때문이다.
意圖와 結果의 矛盾, 主客顚倒의 甚한 例라 아니할수없다.
이 演劇이 善良한 意圖에도 不拘하고 이러한 結果를 나흔 理由는 主題와 正面에서 맛붙지 않은데 있다 主人公이 入露하는 動機가 더 鮮明適確해야할것은 勿論 그리고歸鮮을 決意하는 原因도 一層 더 現實的이요, 또 確實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렇지 않으면 演劇을 通해서 主題가 發見되는대신, 主題가 人物을 끄을고 다니는 結果에 이르는것이다.
作者는 이러한 缺陷을 避하기 爲하야 新派劇의 手法을 導入한것이 上記한 結果를 낳고 말았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氷花」가 어느程度까지의 緊迫力과 現實感을體得한것은 專혀 演出의 惠澤에 依한다. 全昌根氏의 「따이나미즘」이 이 演劇을 人情劇에서 救해낸것이다. 精緻하지는 않으나 寫實的인, 均制的이지는 않으나 强固한 構成力은 全氏의 演出의 重要한特色이다.
그대신 裝置는 平面的이요, 裝飾的이어서 演技와도, 演出과도 乖離되어있어 演劇의 不統一을 助長하고, 散漫味를 더했다.
演技에 特出한 사람이 없었든것은 遺憾이다. 겨우 姜砲手한사람이 重厚한 面目을 維持했을다름, 沈影氏의 演技가 荒粗할뿐 그의 演技의 特長인 熱情이 誠熟한 秩序를 獲得해가고있지 못함은 再三 考慮할 餘地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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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春座」의 「山風」은 「靑年座」의 舞台로서는 好感을 느낄수있는 公演이었다. 競演大會에 臨하는대 相應하는 誠心과 用意가 느껴젔다.
그러나 이러한것이 具體的으로나타나뵈이기는 主로 戱曲과 演出에서 였음은 遺憾이다. 무엇보다도 演技가 낡은 新派로부터 解脫하지아니하면 아니된다.
俳優들이 戱曲을 理解하는데 全혀 誤解에서 出發하고 있는 境遇가 再三 보히는것은 딱한일이었다.
固定化된 新派的人物의 類型을가지고 모든 人物을 解釋하는것은 비단「靑春座」에 限하는 일만 아니다 이劇團처럼 全面的으로 느껴지는 例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責任은 어느 程度까지 戱曲이 지지아니하면 아니된다. 「山風」은 部分的으로는 自然스러웁고, 現代的이면서도, 基本的으로는 新派的이고 新小說的이였다.
奇嶇한 運命가운데서 자라난 두男妹가 十餘年뒤에 邂逅하는데서 버러지는 悲劇을 中樞로 하고 展開되는 이戱曲의 構造는 말하지 아니해도 新小說의 世界요, 그들의 어머니의 最後는 新派의 大圍圓 그것이었다. 「山風」이 어쨌든間에 新派요, 新小說이란말은 決코 아니다, 그世界에서 개끗이 버서나지 못한것은 또한 隱蔽할수없는 事實이다.
宋影氏의 作品으로서 이러한것에 接한다는것은 甚히 遺憾된일이다.
羅雄氏의 演出이 아니면 아마 보다더 「山風」은 新派가 되였을지도 모른다. 羅雄氏는 原作者의 이런點보다도 더많이 現代的이요, 藝術的인 要素를 살릴랴고 努力하였다.
「山風」이 그만치나마 寫實的인面貌를 維持할수 있엇든것은, 宋影氏의 寫實的인 手法에도 緣由하지만 主로 羅雄氏의 演出方針에 依存하는것이다. 氏의 演出은 이公演에있어 分明히 커-다란 功獻이었다.
그러나 羅氏의 演出이 沈着한 대신 構成力이 不足하고, 自然스러운 대신 精巧하지 못한것은 依然히 缺陷이었다.
모든 演出家들이 原作者들보다進步的인것은 즐거운 일이나, 性格과 心理捕促에있어 「루-즈」한것은 改善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裝置는 構成은 좋은 便이었으나, 色彩가 多分히 俗된感이 있었다.
그러나 戱曲에 充實할랴고 努力한 點은 높이 評價할 必要가 있다.
「氷花」에서 볼수있든 裝置가 舞台의 綜合的要素의 하나이라는自覺을 떠나서 獨行할랴는 傾向이 往々히 느껴지는 現在, 「山風」의 裝置者의 平凡하나마 謙虛한 態度는決코 黙過될것이 아니다.
演技는 少年둘이 出衆하게 잘 했고, 金仙草氏가 硬直하나 無難한便이 었다. 忘言多謝
—(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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