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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축음기 한화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조선 축음기 한화 朝鮮蓄音器閑話
종    류 논설 論說
필    자 취정학인 翠汀學人
출처정보 신시대 新時代
연    도 1941-10 昭和十六年十月
면    수 118 118
기사

現代科學文化의 結晶의 하나요, 映畵, 「라디오」로 더부러, 娛樂界 三寵兒의 하나로 自處하고있는 蓄音器(俗稱留聲器)는 어느때 어느곳, 누구의 손으로 發明이되었으며, 또한 어느때 어떠한 徑路로 朝鮮의 들어와 어떻게 消長이 되여왔는가? 從來로 朝鮮映畵에 關하여서는 수없이 紹介宣傳되고 議論批評되었왔으나 그의 姉妹格인 蓄音器에對하여서는 都是 紹介되었있지않음은 實로 怪異한 일이라고 생각치않을수없다.
「소리」를 蓄積하여 無限으로 再生시킬수있는 (勿論「레코-드」도 壽命에는 限이있어 普通 二百回밖에 더 使用할수 없으나) 珍奇한科學의힘을 가지므로 一世를 風靡하든 蓄音器도 發聲映畵의 出現과「라디오」「테레비죤」(이것은 아직 一般으로 普及되지는 않었으나)等의 發明으로 말미암아 次々로 이들 競敵에게 밀리게되어 敗色이 濃厚하나, 그래도 燦然하든 過去의 餘光으로 衰彩를 極力 掩蔽하고 現狀의 維持와 塗糊에 發惡을 다하여 昨年같은해에는 一年동안에 朝鮮內에서 消化된 數量이 實로 一百三十萬枚라는 朝鮮蓄音器界 未曾有의 最高記錄을 짓게되었다. 그러나 時局의 進展에따라 外國依存品인「레코-드」原料의 入手難이 尤甚한 우에 또 不要不急品이라는 아름답지않은 烙印을 찌켜 蓄音器와 및「바눌」의 製造가 禁止되어있으니 제아모리 最後의 發惡을 다한다고하드라도 急角度로 沒落의 過程을 밟을것은 明若觀火의 일이다. 그러나 아직껏 娛樂界 寵兒의 地位를 잃지않고있는限 그의 存在를 世間에 紹介함도 그닥지 無益한 일은 아닐줄믿는다.
蓄音器와「레코-드」는 西紀一八七七年(明治十年)에 저 너무도 有名한 科學者요, 發明家인「토-머스·에디손」이 發明한 「포노그라푸」라고하는 蠟管이 그 嚆矢이다. 이 蠟管은 長圓形으로 된것이었으나 그뒤 數次 改良을 거듭하여 西紀一八八七年(明治二十年)에는 獨乙人 「에밀·밸리나-」의 손에 平圓盤으로 改良되였고 그뒤 最後로 「에디손」의손에 依하여 더 改良되어서 平圓盤이 一般에게 普及되어 實用化하여젔다. 그後 質에있어 더 硏究와 改良이 進捗되어 現今에는 거이 肉聲에 가까운 結果을 보게되어있다.
「레코-드」는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 그 價格이 低廉하고 蓄音器와 아울러 移動藏置가 極히 簡便할뿐外라 그 操作 또한 簡單하여 呑乳稚兒라도 能히 把持戱弄할수있으며 또한 映畵나「라디오」等과달리, 能動的으로 隨時繼續하여 操演聽取가可能한等의 特異點을 가젔으므로 朝鮮과같이 娛樂設備가 普遍化되지못한곳에서는 唯一한娛樂器具로 珍愛되어 坊々谷々 널이퍼저있다.


蓄音器가 朝鮮에는 어느때에 들어왔는가? 蓄音器의歷史가 日淺하고 또 여기關한 文獻이 不備하므로 詳考確證키는 因難하나 大體로보아 明治二十年(即 蓄音器가發明된지 十年後)에 처음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散在한 文獻을 들추어보면, 明治二十年에 朴定陽氏가 舊韓國全權大臣으로 米國에 갔을적에 隨行하여간 李完用, 李夏榮兩氏가 當時 米國서 盛히 宣傳되고있는 平圓盤과 長圓形의 蠟管을 보고 珍奇하게 생각하여 長圓形에다가 伺候의말슴을 吹込하여 李太王께 獻上하였드니 試聽하시고 極口讚嘆하섰다는것이다. 그러니까 平圓盤은 아니라하드라도 이것이 蓄音器가 朝鮮에 들어온 처음이고 따라서 朝鮮말로된「레코-드」의 嚆矢이라고도할수있다. 그러나 朝鮮말盤이 本格的으로 나오기는 明治四十三年 宋萬甲, 朴春載等의 朝鮮舊歌謠를 吹込한「이-글」(鷲)표 판에서 시작되었다.
暫時 눈을 돌려 內地쪽을 바라보기로하자.
內地蓄音器界에 關하여도 別로 이렇다할 文獻이 없으므로 仔細치는않으나 散在한 記錄을 參考하여보면 明治十九年(西紀一八八六年) 여름에 米國에가있든 陸奧宗光伯이 歸國선물로 가지고온 蠟管機가 內地에 蓄音器가 처음으로 들어온 紀元이고 朝鮮보다 一年먼저인듯하다. 그뒤 明治二十三年六月에「에디손」最後의 完成品인 蠟管機「에디폰」을 駐日大使의 손을거처 宮中에 獻納하여온일도있다. 이보다 먼저 明治十二年十月中句(「에디손」이 蓄音器를 發明한지 二年後)에 東京江木小學校에서「멘텐홀」이라는 사람이 蓄音器의 原理와 構造에 對하여 幻燈을써서 講演한일도있고, 翌年三月下句에는 英人「에드윈」이 自己가 만든 模型蓄音器를 가지고 東京商業會議所에서 實驗하여보인 일도있어 事實 蓄音器가 內地에 알녀지기는 質物이 들어오기보다 훨신 먼저인듯하다.
그리고「레코-드」가 商品으로 內地에 輸入되기는 明治二十九年 橫濱 F·W호-」商會가 처음으로 始作하였고 同三十二年六月에이르러 東京淺草三光堂에서 처음으로 吹込을하게되었다. 이當時에는 이미 平圓盤이 盛히 流行되고있었으나 蠟管機가 輸入되어 아직 日淺할뿐外라 平圓盤製作은 當時技術로보아 여간 困難함이 아니었으므로 不得己 舊式인 蠟管吹込을 한 것이다. 그리다가 同三十七年에 米國서 技士들이 와서 비로서 平圓盤吹込을 하게되었고 同四十四年에는 相當히 優秀한 商品을 市場으로 보내게 되었으며 大正十四年에「라디오」가 出現하자「올소포닉」電氣吹込이 始作되었다.
朝鮮말盤「레코-드」는 우에서 暫時 말한바와같이 明治四十三年에 朴春載宋萬甲等이 비로서 舊歌謠를 吹込하였는데 이盤은 日蓄이 「이-글」표(鷲印」「닛보노폰」이라는 一面用 「레코-드」이였다. 昭和二年에「콜럼비아」會社가 進出하여 이것을 買收擴張하여 제비표 「닛도-」와 적지않은 競爭을 하게되었다.
이같이 朝鮮말판이 競爭에까지 이르게되었으나 朝鮮內에서는 아직껏 製作計劃이 서있지못하고 때때로 內地서 나와서 歌手를 募集하여 다리고 들어가서 吹込하는 狀態이었었다. 그後 차차로「레코-드」가 널리 普及됨을따라 商品價値가 一般에게 認識케되자 昭和七八年頃에는「레코-드」製作熱이 相當히 膨脹되여 雨後竹筍같이 여기저기서 製作計劃이 發表되었으며 爲政當局에서도 이現象에直面하자 後來의 放觀主義를 버리고 取締規則을 制定하게되었다.


朝鮮內에서 製作計劃이 처음으로 서게된것은 昭和六年이었으니 即同年末에 大橋某가「시에론」會社京城支店長으로 就任하여 金泳煥, 李瑞求等과 握手하여 朝鮮盤製作을 計劃하고 翌年봄에「시에론」第一回吹込을 하게되었다. 그後 朴英鎬等을 加入시켜 陣容의强化를 꾀하여 昭和十年가을까지 相當한 活躍을 繼續하였으나「고-라이」또는「大日本파라마운트」等으로 改名轉身하는동안에 슬몃이 그形體를 아주 감추고마렀다.
「시에론」과 거진 때를 가치하여 昭和七年에 朴興奎가「태평·레코-드」를 始作하여 第一回吹込은하였으나 資金其他 여러가지事情으로 잇해후인 昭和九年봄에는 本社直營으로 넘어갔다. 그後 柳尙中이가 다시 이것을 引繼經營하였으나 利益을 못보고 後退하게 되었으며, 昨今은 李相泰가 다시 引繼하여 相當히 活躍하고 있는 모양이다.
「태평」보다 一年뒤저 昭和八年末에 그의 姉妹판인「麒麟」이 나왔었으나 슬몃이 사러저버렸고 또 昭和七年에「포리돌」支店이 생기면서「포리돌」盤이 나왔었으나 王平의 죽엄으로 문을 닫게되었다. 昨今다시 新經營者가 나와 再興을 꾀하는 모양이나 아직 活躍을 보여주지 못하고있다.
「빅타-」와「콜럼비아」는 다가치 巨大한 外國財閥을 背景으로 朝鮮蓄音器界革剏的役割을 다하여왔음은 우에서 말한바와 같거니와 昭和二年 會社의 創立을보아 即時 各々 京城에다 支店을 設置하고 旣爲買收한「제비표닛도-」를「빅타-」로,「수리표 닛보노폰」을「콜럼비아」로 改稱하여 朝鮮蓄音器界를 制覇하게되었으며 昭和九年여름에는「콜럼비아」의姉妹品인「리-갈」도 나오게되었다.
이같이 各種「레코-드」가 簇出하여 한참 競爭이 어울리는 판인 昭和八年九月에 李哲이가 帝蓄京城支店을 設置하고「오-케·레코-드」를 製作하는한편 歌手演奏團을 組織하여 全鮮各地로 巡演宣傳을하며 昭和十一年頃부터는 京城에다 吹込設備를 常置하고 後來와같이 歌手一行을 이끌고 內地로 吹込旅行을가는 繁弊를 더는한편, 隨時로 吹込을하여「히트」를連發하니 朝鮮蓄音器界에서는 적지않은 恐怖를 일으키게쯤되었다.
우에 列擧한것은 大槪 主要하다고 認定한 몇가지이나 이밖에도 昭和八年가을에 얼골만 잠시 내여놓았든「SY」,「돔보」,「닛도폰」等을 비롯하여 昭和九年 朴孤松의손에 誕生되여 翌年가을에「뉴-코리아」로 改名되었다가 一年만에 사러진「코리아」며, 昭和十年봄에 文湖月이 두서너달보여준「미리온」其他「락키-」,「쇼-와」,「오데온」,「테-루」,「쇼-칙구」等々의 소리판이 있었다는것도 빼놓을수는없다.


朝鮮蓄音器界는 우에서 말한바와같이 길지도않은 歷史를 가젔음에도 不拘하고, 許多한 波爛과 重疊한 曲折을 맛보며 깎기고 부드치고 한끝에 現在는 겨우「빅타-」,「콜럼비아」,「리-갈」,「태평」,「오-케-」,「포리돌」의 여섰가지가 남어있으나 朝鮮에는 製作設備는 없고 모두 內地工場에서「푸레스」하여 오고있다. 吹込도「오-케-」가 數年來로 京城서 吹込하는外에 年前까지는「빅타-」와「콜럼비아」가 隨時로 吹込機械를 가저다가 京城서 吹込하는일이 있었으나 近來에는 볼수없게되었다.
朝鮮에 商品으로 流入되는「레코-드」는 年百三十萬枚나되고 (外國서直輸入하는 일은 없고 모두다 內地서 들어온다) 그中에서 朝鮮말판이 約四割이나 되는데 現在들어오는「레코-드」의 種類를보면 다음과같다.
日本빅타-蓄音器株式會社
「빅타-」 (京城支店取扱)
株式會社日本蓄音器商會
「콜럼비아」「리-갈」「락키-」(京城支店取扱)
大日本蓄音器株式會社
「태평」「크리스탈」「닛도-」(京城支店取扱)
帝國蓄音器株式會社
「帝蓄」「오-케」(京城支店取扱)
日本포리돌蓄音器株式會社
「포리돌」(京城支店取扱)
講談社 「킹구」「日本테레훈켄」(日本樂器店取扱)
朝鮮「레코-드」界는 우에서 말한바와같이 겨우 여섯종류가 不絶히 競爭을하고있는 形便이나 우에서 말한 發聲映畵,「라디오」의出現,「테레비죤」(아즉 普及되지는 않었으나)의發明等 事變의進展과 時局의推移에따른 材料의入手難, 蓄音器와밑「바눌」의 製造禁止等々 蓄音器一般에 關한不利條件이 重疊한우에 題材難 內地盤優秀品의 出現等々 特殊한不利環境에휩쓸려 몹시 閑散한 形便이다. 다만「오-케-」는 帝蓄의 巨大한 財力을背景으로 多數한 歌手와 樂工을 招集하여 旣成地盤을維持하는한편 地方演奏와 멀리 內地, 滿洲, 北支等地로 巡廻演奏를 거듭하고, 쉬일사이없이 京城公演을 하여 아직까지 活氣를 띄우고 있으며「태평」또한 新經營者를 마저「오-케-」에 對抗하고있을뿐이다.
끝으로「레코-드」의 內容을보면 當初에는 朝鮮舊謠가 爲主이었으나 昭和十年以後로는 淺薄한流行歌가 牛耳를잡고있으며 近年 多少淨化는되었다고할수있으나 아작도 內地껏에比하면 低級하기 짝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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