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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악극단 황군 위문 회고 좌담회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조선악극단 황군 위문 회고 좌담회 朝鮮樂劇團 皇軍慰問回顧座談會
종    류 좌담 座談
필    자 청산철․김상진․김해송․김정구․이인권․장세정․이준희․서봉희․포훈․향산광랑 靑山哲․金尙鎭․金海松․金貞九․李寅權․張世貞․李俊嬉․徐鳳姬․蒲勳․香山光郞
출처정보 신시대 新時代
연    도 1941-07 昭和十六年七月
면    수 192 192
기사
[사진] 바른편으로 부터 金貞九 金海松 徐鳳姬 李蘭影 張世貞 李俊嬉 諸氏
[사진] 北支○○病院에서
[사진] 北支○○部隊(徐州) 兵站廣場에서
[사진] 北支○○部隊慰問ㄱ\演奏를 마치고
[사진] 右李寅權 左金尙鎭

出席者
靑 山 哲 (總帥)
金 尙 鎭 (企劃)
金 海 松
金 貞 九
李 寅 權
張 世 貞
李 俊 嬉
徐 鳳 姬
陸軍少佐 蒲 勳
香 山 光 郞
本 社 側
★六月十六日 밤
★半島호텔에서

第一步를北京에
記者 바쁘신데 이처럼 와주시니 대단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말슴을 시작하시지요, 여러분이 지난해 봄 北支 皇軍을 慰問하고 오신데 對한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요. 우선 떠나시게된 동기부터 말슴하여주시지요. 金尙鎭氏.
金尙 우리가 北支로 가게된 동기는 北京 每日新報支局의 초빙을 받어서 半島愛國號 자금모집을 위한 公演과 皇軍慰問을 할예정으로 가게되엇지요. 우리 一行이 떠나기는 지난해 四月七日날 이었는데 隊員이 五十名이 었든지요.
金海, 아니요 그때 한 六十名되었을걸요.
金尙 北京每新支局의 초빙을 받어가기는 했스나 가서보니 아무런 계획과 준비가 서있지 않었고 또 每新支局長의 이름도 별로 알려있지않고 해서 첨에는 퍽 不安하드군요. 그래서 靑山氏가 每新支局에만 맡겨서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이 나서서 교섭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데 그곳에서야 우리樂劇團을 알어주어야지요 그래서 軍의 승낙을 얻기가 퍽 어려웠었습니다. 그래 할수없이 第一次로 四月二十日 北京一流劇場인 新新戱院에서 一般公演을 했지요. 그랬드니 그제서야 朝鮮樂劇團이 이렇다 하는것을 알어주드군요. 그래서 湯山(사변전까지 송미령 별장이 있든곳)에 있는 牧野部隊에서 慰問演奏를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한 결과 그곳에서 많은 환영을 받었습니다.
記者 湯山은 어데든가요.
香山 張家口 들어가는데에 있지 아마
金(尙)湯山은北京에서 八十里나 떨어저있는곳이고 해서 지금까지도 좀처럼 慰問隊가 찾어가지 않은곳이어서 그결과가 더욱 좋았든것같습니다. 끝난후兵隊들과가치 보리밥과 장국을 맛있게 먹고 돌아왔습니다. 北京演奏를 끝내고 天津으로와서三개소의 慰問公演도 재미있게 마치고 막 돌아오려구할때 뜻밖에 濟南警察署에서 「十七日 濟南公演決定至急回答」이런 電報가 왔겠지요.
記者 電報가 있기前에 아무교섭도 없었든가요.
金尙 그러믄요, 그래서 할수없이 天津공연을 끝내고 돌아가게 되었으니 諒解하여 달라는 電報를 치고 그대로 돌아오려고 했지요. 아 그랬드니 朝鮮樂劇團이 濟南에와서 慰問을 하지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뜻의 電報가 연달려 오니 이걸 어쩜니까 이것은 필시 天津公演의 評判이 좋와서 그랬나부다 생각하고 이왕온김에 또 가보기로 했지요 그래 朝鮮의 기정 코-쓰를 희성하고 濟南으로 갔습니다. 가서 알어봤드니 그곳 朝鮮人會에서 마음대로 결정하고 電報를 첬드군요, (笑聲)
記者 北京, 天津, 濟南에서 몇회나 위문 공연을 하시었습니까.
金尙 北京에서 두번, 天津에서 세번 濟南에서 두번, 濟南에서 放送한번을 했습니다. 끝날 무렵에 이번에는 徐州에서 濟南과 꼭같은 式으로 부탁을 하여 왔었습니다.
記者, 徐州에서도 역시 警察署에서 電報가 왔었습니까?

金(尙) 네 그곳에서도 역시 朝鮮人會에서 결정해가지고 警察署와 部隊에 교섭까지 끝내논후이었습니다. 그때 萬一 가지 않었드면 朝鮮人會의 立場이 퍽 딱하게 되었을번 했었습니다.
그때 南京 訪問을 갔던 愼飛行士가 그곳에 着陸한다는 통지를 받고 그곳 官民이 성대한 환영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었답니다. 그래 모두섭섭하든차에 우리 一行이 찾어갔드니 굉장이환영을 해주 드 군요.

慰問한푸로그람
記者 대개 어떤 푸로그람으로 公演을 하시었든가요.
金尙 東京에서 흥행했던 푸로그람을 그대로 했었습니다.
記者 東京서 한 푸로요?
金尙 네 아리랑뽀이스와 저고리씨스터, 軍歌, 歌謠曲, 舞踊, 輕音樂 等이지요.
金海 대개는 輕音樂에서부터 始作하여 愉快한것을 많이했고 또 그런것을 좋와하는것 같드군요 때로는 鄕土的인것도 했습니다.
記者 張世貞氏는 무슨 노래를 많이 부르시었습니까?
張世 「軍國의어머니」를 불렀습니다.
金尙 張은 東京, 名古屋, 小倉 等地에서 공연했을때에도 「軍國의어머니」를 노래하여 大歡迎을 받었으니까요. (寫眞北支〇〇病院에서)
記者 李蘭影氏는 무슨노래를 부르셨습니까?
李蘭 저요? 「御國의어머니」를 많이 불렀어요.
記者 金貞九氏는 「王서방」을 부르섯겠지요?
金(貞) 네 王서방의 故鄕에를갔으니까요. (一同笑聲)
記者 그리고 朝鮮民謠도 노래해 보셨습니까?
金尙 네 朝鮮民謠는 아리랑 뽀이쓰들이 나와서 흥 나는대로 불으지요 또 뒷이여 저고리씨스터의 鄕土的춤, 그 衣裝부터 人氣를 끄니까요.
記者 그럴겁니다. 色동저고리에 쪽도리를 쓰고 춤을추니 이상할겝니다.
金海 대단히 환영을 받었습니다. 들으시는 兵隊들이 벙글벙글 기쁘게 대해주니 演奏하는 저이들도 절로 흥이 났습니다.
記者 徐鳳姬氏는 노래를 불으시었습니까 또 舞踊을 하시었습니까?
徐 노래를 볼렀서요.
記者 李俊嬉氏는
李俊 ………
金尙 李는 조선의 타끼인데 아 여지 그걸 모르섰습니까? 男子役으로 아조 有名합니다.
記者 아-그렇습니까 어쩐지 活潑하시드군요, 그러니까 생각이납니다 扶餘回想曲때 구다라 오도꼬(百濟男)시었지요.
李俊 네,
記者 대개 어떻언노래가 많은 갈채를 받었습니까. (李蘭影氏를 바라보며)
李蘭 軍人들이니만치 씩씩하구 힘찬 노래를 좋와하기는하나 그 보다도 「軍國의어머니」를 불으면 어쩐지모르게 좋아해요.
金尙 그들이 예상했던 以上으로 國語가 능난한데다가 노래에 哀調가 있어서 퍽 갈채를 받었었지요, 內地에서 오는 어느歌手의 노래에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 야단들이지요, 더욱 張世貞이「軍國의어머니」를 불을때는 만장이 조용 해지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咸興에서 유가족들을 모아놓고 李寅權과 張世貞이 兄妹가되어가지고 「白衣의勇士」를 노래하였슬때는 흙흙 느껴우는이가 많었습니다.

皇軍앞에나서는기쁨
記者 그렇언때는 웃기는것보다 차라리 슬픔을 자어낼수있는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蒲少佐 내가 中隊長때의 경험인데 병정의 마음을 긴장시키는것은 부모나 집일을 늘 잊지않게 하는것이었습니다. 어느때 촌의 적은 신사를 늙은 할머니가 참배하는 사진을 크게해서 보이며 고향에서 너희들을 보낸 부모는 늘 너희들이 무사히 나라에 봉공하도록 밤낮없이 이렇게 빌고있다는것을 이야기 하였드니 긴장하여 일층 더 일을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記者 哀愁를 자아내는 노래같은것은 어떠할까요.
蒲少佐 그러헌것은 생각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戰場에서의 心理狀態란 이런데에서 생각하는것과는 전연 다르니까!
記者 梨花專門慰問音樂隊가 할빈 陸軍病院에 들렸을때 鄕愁라는 노래를 불렀었는데 그노래를듣든 白衣의勇士들이 모두 울었었다는데 그것은 그때의 감정이 감상적이어서 그렇겠지요.
蒲少佐 그것은 신경과민이 되어서 그렇게 울었을 것입니다.
記者 슬퍼서란것보다도 노래에 열중 하여서 이겟지요.
金海 그렇겠지요.
蒲少佐 그런때의 눈물은 훌륭히 봉공하지않으면 父母에게 미안하다는 긴장한 마음에서가 아닐까요.
金海 울리는것이 없으면 또 웃길수도 없으니까요.
金海 두시간이면 두시간 보는동안 만은 모두를 다 잊어버리게 되니까요
香山 (張世貞씨를 向해)제일처음 병사의 앞에 스기는 어데였습니까.
張世 東京이든가요.
金尙 東京이었습니다.
香山 그때의 감상이 어떠하였습니까.
張世 ………
李俊 나아가기 전에는 보통 관객을 대할때와 생각이 달렀었습니다만은 무대에 나선 후에는 별로 다른줄을 몰랐어요.
香山 보통 관객앞에서의 公演보다 기뻣었습니까?
李俊 네 기뻣서요.
香山 張世貞씨는………
張 감개무량할 따름이었읍니다. 徐州에서 할때와는 감상이 달렀서요.
李俊 徐州에서할때는 좀더 안타까운 기분이 많었어요.
香山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金尙 보통 관객을 대할때보다 더 감격하게됩니다.
香山 그렇시겠지요.
金尙 끝난후 사진을 가치 찍는다 싸인을 조른다 주소를 묻는다 하여소란하였습니다 만은 그러는 사이에 다정하게 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李寅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고 하여 모르는 사이에 감격하고 긴장해지고 하였습니다.
金海, 일반관중을 대하는때와 병사를 대하는 때와는 퍽다름니다. 일반관중을 대할때는 관람료내인 관중이거니하는 생각이 앞서서 어덴지 모르게 상업적인데가 있으나 병사들 앞에 나설때는 보잘것없는 藝術이기는하나 마음껏 하여 萬分之一이라도 보답하여야겠다는 생각뿐이어서 더 활달한 기분으로 거침없는 연주를 베풀게 됩니다.(靑山哲씨 出席)

皇軍에게서 오는 편지
蒲少佐 戰地에서 오는 편지가 있을 때엔 회답을 띄웁니까?
金尙 네 企劃部에서 띄웁니다.
蒲少佐 企劃部에서 띄우는것보다 받는 개인개인이 써서 보내는것이 좋지않을까요. (寫眞北支〇〇部隊(徐州)兵站廣場에서)
靑山 답장을 써서 慰問袋에 넣어 보내기도 합니다.
李俊 집으로오는 편지는 받는대로 답장을 써서보내요.
蒲少佐 많이 내어주십시요 전지에는 편지를 받는것도 대단히 질거운 일의 하나이니까요.
記者 公演中 재청같은것이 있었습니까.
金尙 퍽 紳士的이어서………별로, 없었습니다.
靑山 병사들 사이에 女子들의 人氣란 대단 합니다. 濟南에 들렸을때 女子들을 일일이 紹介하였드니 대단히 좋아하며 그뒤도 늘 만나고싶다는 편지가 있습니다.
香山 藝術이란 참으로 좋은것입니다 그려! 藝術家의 옆에만 있어도 그렇게 환영을 받게되니.
記者 오고 가는 途中에서 병사들을 맞나는일은 없으셨습니까.
靑山 많었습니다, 車간에서 경비병과 친해저서 키타-같은것을 하든지 하면 여기저기에서 경비병들이 모여들어 잠간새에 큰모임이 되곤 한였습니다.
記者 전지에서는 처음만나는 병사와도 곧 친하게 된다드군요. 그리고 위문단이 탄 차가 五分間만 정차하여도 경비병들이 가까이와서 우리들도 위문에 달라고 졸라댄다지요. 언젠가. 朝鮮文壇代表가 慰問을 갔을때도 文人들인줄을 모르고 병사들이 가까이 와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일이 있었다드군요(笑聲)

자조가야할 皇軍慰問
香山 上海方面으로 慰問行을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靑山 봄부터 上海朝鮮人民會長李甲寧씨 께서도 오라는 통지가 있었고 그곳 오케支店에서도 오라고는 합니다 마는 가게되면 香淃까지는 가야하고 그렇게 가자면 二個月은 걸리니까요.
記者 그렇지요 가시게되면 자연 그렇게 될겁니다.
香山 병사들이 그렇게 환영하오니 기회를 만들어 가시는것이 좋겠지요
蒲少佐 병사 들은 故國에서 慰問오는 분들을 무척 반가워 합니다.
靑山 병사들의 환영에는 참으로 감격하였습니다.
蒲少佐 慰問隊가 자조 오는것을 좋와하나 現地軍으로서는 여러분이 모르는 쓰라림이 있습니다. 찾어오는 위문단을 멀리 떨어저 있는 第一線에 보낼때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보호할 경비병을 딸리게되고 기타 어려운 문제가 많기 때문에………앞으로 가는때는 될수있는데로 第一線 가까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都會地로 가는것도 좋으나 거기에는 늘 기회가 많으니까요.
記者 第一線에서는 상고-안에서도 위문 연주를 한다지요.
蒲少佐 第一線에서는 쌍방이 다 원만하게 하기는 어려워요. 어쨋던 즐길수있는 위문대라면 될수있는대로 자조 위문을 가는것이 좋습니다.
香山 병사들이 그렇게 즐거워하면 가고도싶으시겠지.
靑山 자조 가보려고 합니다.
記者 병사들과 접촉하셨을때의 감상은 어떻하섰습니까? 金海松氏!
金海 祖國을 위하여 몸과마음을바치기에 인색지않은 병사들을 대할때마다 감개무량해지드군요.
靑山 朝鮮안에서는 十餘年이나 같은 地方 같은 스테지에서 같은 관중을 대하게되니까 演奏者들도 머 別다른 感情이없습니다. 그러나 이번慰問演奏란 他國이었을 뿐더러 처음 대하는 관중들앞에 나선다는데 일종의 흥미를 가지며 긴장 했습니다. (사진北支〇〇部隊慰問演奏를 마치고)
金海 그리고 志願兵을 만났을때는 어떻게 반가웠든지 몰랐습니다.
記者 감격하셨겠습니다 그려
金海 네 무어라 말 할수없이 반가웠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도 당신들이 이렇게 먼곳을 찾어와 주실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습니다.
靑山 天津에서는 〇〇部隊에서든가요?
金尙 네 〇〇部隊였습니다.
靑山 〇〇部隊에서 공연을 끝내고 다음날 天津극장에서 연주를 할때는 半島분들이 많이와서 환영해주시며 대단히 반가워하여 주시었습니다.

襲擊받었든이야기
記者 慰問다니시는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金海 徐州에서 돌아오는밤에 습격을 당한일이있지요 어데선지 모르게 돌멩이가 윙-윙-날러와서 퍽 놀낸일이있습니다.
靑山 〇〇서도 습격을 당한일이 있습니다 마는 그날로 돌아오지 않으면 예정이 모두 틀려버리게 되기때문에 끝나는대로 짐을 챙겨서 실어가지고 떠나왔습니다.
金海 돌이 차창을 뚫고 들어오는데 퍽 놀랬어요. 그러나 경비해주시는 병사 여러분들이 열심이 보호하여 주시어서 무사히 돌아왔었습니다.
李蘭 서주에서는 잘때 멀리서 총소리도 들려왔었지(張世貞씨를向해)
張世 응 그래그래…… 멀리서
金海 銃소리가 없어도 들려오는것만 같애요 무시무시한게 어째(笑聲)

싸인의 人氣
香山 싸인을 많이 하셨지요.
靑山 女子들의 싸인을 단연 많이 받어가드군요.
記者 아무리해도 女子들의 人氣가 많겠지요.
金海 병사들이 많은곳에서는 그렇지요만 간호부가 많은곳을 가면 女子는 어느구석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지요 그곳에서는 단연 男子들이 대 환영을 받습니다.(笑聲)
蒲少佐 싸인은 橫書입니까 또는 從書입니까.
靑山 제각금다름니다
記者, 이곳병사를대할때와現地병사를대할때와의감상은어떻하셨습니까.
靑山 우리의 공연을보시고 조선의 인식을 새로하시는 분이 무척 많었습니다. 현지에계신 대부분의 병사가內地에서 바다를건너 바로 대륙으로 가신분들이어서 오늘의 조선에대한인식이 부족하여 지금도 호랑이가 나오는 미개지로 알고 계신분이 많은데 그곳에서 왔다는 우리樂劇團이 意外로 國語를 능난히 쓰며 예기했든 이상의 연예를 베푸는것을 보고 그곳도 그렇게 進步되었나하고 무척 감격해 하신분이 많이계셨습니다.
記者 그러헌일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의 조선을 인식하고계신분이 극히소수에 불가하다는 말을 늘 듣습니다.
靑山 이건 京都에서의 일입니다만은 우리가 들었든 旅館에서 小使아이가 첫날 우리公演을 와보고 그이튿날은 主人을 졸라가지고 뵈인일이 있습니다. 主人이 와서 우리公演을 보고 나서는 감격해서였든지 그 다음날부터는 대우가 전연 달러진두군요.
金尙 그리고 大阪에서도 放送을 끝내고 放送課長을 中心으로 座談會가 있었는데 그때 당신들의 예술을 재인식했다고 하며 퍽감격 해하였습니다.

半島의認識을새롭게
香山 扶餘回想曲을 內地에 널리公演을 하실생각은 없으십니까?
靑山 그러도 싶습니다 마는……
香山 그러헌 기회를 따러 조선의 인식을 차차 고처 나갈수도 있으니까요.
蒲少佐 그러니까 여러분은 될수있는대로 國語로 글을 쓰고 國語사용을 예행하여 內地人과의 사이의 소통을 하로바삐 없애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演藝 方面에서도 관객의 대부분이 국어해득자일때는 국어를 主로한 푸로를하고 촌같을데에 국어를 해득한분들이 적을때는 조선말을 많이써서 한다는式으로 도회나 촌에서나 일률적으로 하지말고 그때 그장소를 따라 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靑山 우리 악극단에서도 五, 六年전부터 國語使用에 유의를하여 지금은 曲目의 三分의一쯤 국어물을 하고있습니다.
蒲少佐 北支皇軍慰問에서 돌아와서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할일은 없습니까?
靑山 많이 있습니다.
蒲少佐 그렇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에는 문외한인 나도 조선연예같은 것을 보면 기분이 침울해지는 편이 많었으니까?
靑山 그렇언 경향이 많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지금 차차 고처가고 있습니다. 요지음 푸로그람에는 哀調를 띄인것보다도 명랑한것을 더 많이 넣었습니다.

印象깊었든가지가지
記者 慰問가셨을때 인상깊었든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차례차례로……
金尙 戰線이란 참으로 우리가 상상도 할수없는 어려움이 많두군요 이번에 병사들과 접촉하여 배운것도 많었고 皇軍들께 感謝하는마음이 일층 더 커젔습니다.
李俊 天津에서 였든가요 아조 꼼짝도 못하는 重病의 兵隊가 우리들의 노래를 라듸오로 들었노라고 하며 꼭 한번만나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이상한 충동을 받어 그 重病의 兵隊를 맛나본일이있습니다. 붕대로 왼몸을감고 누어있는 白衣의勇士가內地가 그립다하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며 무척 반가워 하겠지요 기쁜낯으로 慰勞를 해드려야할 그장소에서 어쩐지 작고 눈물이 나겠지요 그래서 울며울며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돌아온후에도 그에게서 병이나어서 쾌하다는 글을받은일이 있는데 만나서 울며 이야기하든 그때일이 당초에 이처지지 않습니다.
記者 네 그러시겠지요. 張世貞씨도 그런일이 있으셨습니까?
張 ………(寫眞 右李寅權 左金尙鎭)
金尙 北支에서 돌아온후부터는 왜 그런지 주위의 內地人들과 좀더 친하고 싶고 솔직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다고 한답니다.
靑山 공연을 끝내고나면 병사들과 개인개인의 접촉이있는데 사진도 가치찍고 싸인도 서로 주고받고 그러는것이 그때그때의 이처지지않는 한 재미였습니다.
記者 반향이 컷었습니다 그려, 감격하셨겠지요. 李蘭影氏는……
李蘭 (金尙鎭氏를向해)北京이었든가요, 병사들과 회식을한것은……
金尙 우리들을 위하여 특별히 만찬을 베풀어 주셨섰지- 참 그때아마 난생 第一맛있게 먹었는지두 몰라 왜 그 사진도 가치찍어 주었지
記者 그럼 여러분이 위문을받으셨군요
李蘭 네 도리어 우리들이 위문을 받은 셈이지요.
記者 徐鳳姬씨도 이야기를 해주십시요.
徐 ………
香山 무슨 이야기든지 인상깊었든 이야기를………
徐 北京에서 였습니다.(수집어하며) 어떤 병정이 가까이와서 한떨기의 흰꽃을 주어 받은 일이 있어요.
香山 무슨 꽃이었든가요.
徐 글세요………
金海 카네이숀이라고 해두지요.
李蘭 응 그때 그꽃?
記者 그래서요(徐鳳姬씨를 向하여)
徐 그꽃을주며 自己를 생각하고 가지고 가 달라구요 (笑聲)
香山 들에 피는 꽃이었든가요.
徐 네
香山 그꽃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徐 가지고 오는동안 다-시들어버렸서요.
金海 원 저런
記者 꽃의 미라를 만드러서 가지고 오시지 그랬어요. (笑聲)
徐 다른것이 었드면 언제까지나가지고 있었을것인데 (笑聲)
香山 돌아오신후 그에게서 편지가있었나요.
徐 없었어요.
記者 혹 戰死나 하지지 않었슬까요.
徐 늘걱정이돼요.
香山 一生을 通해 잊처지지 않으시겠지요.
徐 때때로 생각이납니다.
李蘭 어쩌문(笑)
記者 위문여행중 괴로우신일은 없으셨습니까?
金海 旅館等의 설비가 좋지못하여 不便한일도 많었습니다마는 戰地에 와있다는것을 생각할때에는 괴로움을 다 잊어바리고 지내왔습니다.
金貞 부끄러운 말슴입니다마는 떠나기 전까지는 第一線에 대한 인식이뉴-쓰映畵程度이었습니다. 그러나 戰地에 가서 병사들의 노력하시는것을 역역히보고 나도 있는힘을 다하여, 그들을위로한다고 했습니다
靑山 참으로 저 金君은 열심이었어요.
記者 말하자면 일종의 직역봉공입니다 그려.
李寅 예상이상으로 병사들이 대환영을 해주시니까 피로함을 모르고 지내었습니다. 天津에서는 志願兵傷兵中에 고향분이 저를 찾어주어 어떻게 반가웠든지 몰랐습니다.
記者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제는 밤도 깊고 하였아오니 이로 끝치겠습니다. 날도 더우신데 오래동안 유익한 말슴을 많이 들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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