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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악단인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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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반도 악단인 만평 半島樂壇人漫評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홍종인 洪鍾仁
출처정보 동광 東光
연    도 1931-06 昭和六年六月
면    수 36 36
기사
머리말
半島의 봄에 새로 피는 樂壇의 꽃을 거두어 보겟다는 것이 이 붓을 들려든 初意엿으나 이왕이면 하필 이 봄의 樂壇에 限하랴. 半島의 樂壇 그것이 아직 봄도 일은 봄에 서릿발 덮인 굳은 땅속에서 간신히 머리를 들고 잇는 셈이라면 새삼스러이 꽃이니 봉오리니 열매니 골을 것 없이「스테이지」에 오르고내리는 묵은 사람 새 사람들을 한꺼번에 들어 論해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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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내가 그려보려는 樂壇과 樂人의 範圍는 어느 程度의 것이냐 하는 것을 먼저 말해둘 必要가 잇을 것이다. 간단히 樂壇이란 槪念的解說을 붙인다면 音樂人의 社會的 集團的 存在이라할까, 用語에 未及한 點이 잇을는지 모르나 이만큼 말해둘수도 잇음즉하다. 그러면 樂人이란 範圍는? 말하자면 李東伯인들 李花中仙인들 아무리 市塲의 商品的 行勢를 한다고 해도 樂人임은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말하고저하는 樂人은 樂壇을 構成하는 樂人-좀더 俱體的 條件을 짓자면 西洋音樂 그 範疇內의 樂人을 말하는 것이 樂壇이란 이름을 그릇치지 않는 穩當한 方便일까 한다. (만일의 誤解를 念慮하여 나도 朝鮮의 民謠, 古樂, 舞踊等의 藝術的 價値를 認定하고 愛賞하는 한 사람인 것을 말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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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半島 樂壇의 形態를 槪括的으로 간단히 한마디 하고싶다. 樂壇의 起源-西洋音樂의 流入을 멀리 耶穌敎의 輸入에서 시작하얏다고 볼 것이다. 그런데 그 發展過程과 現勢로 보아 같은 藝術部內의 繪畵나 文藝에 比하여 그리 뒤떠러젓다고도 할수 없으나 결고 活潑한 發展的 步調를 못 가진 것만은 事實이다. 一般 社會生活과의 交涉과 文化的 評價로서의 樂壇은 아직 溫室內의 花草라고 말할까……. 한마디 더 붙여 말하자면 우리의 樂壇은 音樂이 廉價의 道樂이나 歡樂의 對象에서 벗어나고 또 樂人들이 自己陶醉의 境을 벗어나지 못하는 限에는 좀더 健全한 發展을 못 볼 것이다. 이러케 나는 斷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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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기가 좀 까다라와진듯 하다. 그런데 話題에 들어가기 전에 말하여둔다. 이 글이 評이 될는지, 印象記가 될는지, 雜談이 될는지, 여기까지 써가는 나도 保證치 못하겟다는 것이다. 그러고 혹 가다가 飛行機도 태우고 千길萬길 굴엉에도 떠러치는 일이 잇을는지 모른다. 어쨋든 듣고 본 사람으로 記憶에 남은 사람들에 關해서 될수잇는대로 한마디씩 성큼성큼 뛰어가면서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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却說, 그러면 어느 길로 부터 들어갈가. 貞洞 고개부터 넘어서는 것이 좋을듯하나 길에는 順序가 잇으니 南大門안 太平通부터 내려훑어가는 것이 人事일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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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仁湜氏 半번대 툭불그러진 이마에 크다란 검은 눈알을 둥실거리며 慇懃히 貞洞讚揚隊 맨 뒷줄에 서잇다. 孫女?같은 十七八歲의 梨花專門 處女兒들이 앞에 서서 명주실 같은 모기소리를 뽑고 잇을때 혼자(두세명의 한파-트 는 잇으나) 뱃달줄 같은 굵다란 소리를 뽑는다. 그러다가 어떠케 音이 틀리는 일이 잇으면(어느 練習때의 일)새없는 처녀들이 돌아본다. 先生님은 곁눈도 안 파고 다시 고처 한다. 이이야말로 우리 樂壇에는 使徒 같은 樂人일 것이다. 十五六年前 音樂會라면 湯藥의 甘草같은 名歌手이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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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亨俊氏 역시 太平通의 한 사람, 甘草같은 사람. 再昨年엔가 靑年會서「퀄텟」에 나온 「테너-」의 그는 完全히 목소리가 쉬이고 말럿섯다. 벌서 나이가 나이니까. 그리고 年前 公會堂에서 貞信코러쓰「오! 伊太利 내 사랑」을 指揮하는 것을 보앗다. 노래보다는 그의 「제스추어」가 오이려 活氣잇지 안엇든가. 이제는「테너-」金亨俊 先生보다「피아니스트」 金元福 女史의 아버지로서 斷然 더 有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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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尙俊氏 書店에 가면 曰 무슨 唱歌集 曰 무슨 集, 曰, 曰 이 많다. 아마 朝鮮의 音樂出版物로서는 이 兩班의 것이 大多數일 것이다(本是 적은 中에) 그중에는 不完全하나마 音譜化된 朝鮮俗謠集類는 確實히 그의 功績의 하나로 헤일바다. 後輩에게 參考로라도 씨웟을 것은 勿論, 그의 努力을 적다 할수 없다. 그러나 이 兩班이 무슨 망년에서나 온 것인지 더러운 잡소리를 모아 出版까지 한 것은 「中等某學校唱歌集」을만든이의 솜씨라고는 同日에 論할수 없는 惡戱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날의 한 存在로는 남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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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通길을 거처가든 길이니 지금은 樂壇에서 이아기할 사람은 아니나 옛날에 梨花學堂 건너편 培材學堂에서「맨도린」에 쉬파람불며 또「풀륫」불며 唱歌 가르키든 하이카라 先生님 崔東俊氏가 잇섯든 것도 記憶에 남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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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내려가든 중간에 군소리 같으나 樂壇의 發展 過程을 밟아가면서 樂人들도 階段잇게 찾아보는 것이 좋을듯 싶지만 그러자면 일이 크게 되니 생각나는대로 順序 없이 써내려가련다)

尹克榮氏 벌서 朝鮮을 떠난지 三四年 되는듯 싶다. 모르거니와「푸른 하늘 銀河水」라는 童謠「반달」은 잘 알면서도 尹克樂이라는 이름은 記憶치 못하는 사람이 많을줄 안다. 벌서 六七年前 日本 童謠의 直譯이 많이 流行하며 어린이들의 雜誌에 童謠曲이 많이 실리울 때 이 노래가 한번 發表되자 크게 流行하엿다. 확실히 어떤 때는「푸른하늘」의 時代를 지엇섯든 것이다. 哀想的 氣分을 많이 가진 이 노래는 多少 日本式 情調가 없지는 않으나 創作曲으로 童謠 作曲에 한 機軸을 지은 귀어운 노래다. 氏는 방금 間島 龍井村 某學校에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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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基永氏 寂寞하든 우리 樂壇에 男子 聲樂家로의 그의 出現은 확실히 樂壇의 驚異이엇다. 體格이 좀 적고 생김이 神經質的인 點과 强한 高音에「액썬트」가 좀 끼인 點으로 一部에서는 多少 不滿을 가지는 이도 잇는 模樣이다. 그러나 發聲에 正確히 자리를 잡앗고 音域이 넓고「테크닉」이 卓越한 點等으로 그를 따르는 이가 아직 없을 것이다.「레가-토․피아니씨모」의 唱法은 특히 그가, 長技로 하는 것이겟다. 그러고 情熱的이다. 歌手로서뿐 아니라 근래 作曲家로서 囑望되는바 또 크다. 그의 作曲集一輯(旣刊)과 二輯(發刊準備) 朝鮮民謠集(近刊)等은 우리들의 노래로 先進國樂壇에 내오놓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싹아져가는 우리의 情緖를 完全히 살리엇다. 米國서 돌아오면서 梨花專門音樂科 敎授로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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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濟明氏 安基永氏와 같이 테너 歌手로 우리 樂壇의 雙璧이다. 聲量이 比較的 豊富하고 柔한 것이 特長이나「테너」로서는 多少 音域이 좁은 것이 遺憾이다. 最近은 못 들엇으므로 여러가지 말할수는 없으나 延專音樂會 때와 其外 몇번 들엇을 때 번번히 그의 選曲이 그리 좋은 것이 없어 그의 技倆을 알수 없엇다. 그런데 昨年 五月「모리쓰홀」에서 外人側 主催로 열리엇든 音樂祭에 비로소 그의 가진 天分을 다 맛볼수 잇엇다. 壯重한 그의 소리는 그의 體格과 같이 男性的이엇다. 주제넘은 말 같지만 그의 音色은「테너-」보다는「바리톤」에 가깝지 않을까? 延專樂隊와 延專合唱隊의 指揮者로 그의 活動은 실로 크다. 역시 米國 出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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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寅善氏 「세부란쓰」에서 醫師 공부를 하면서 蓄音機로 많이 배웟다는 才幹 많은 테너 歌手다. (부츠夫人에게도 指導를 받고 한때는 安基永氏 한데도 배웟다지만)音이 퍽 곱다. 어느 해 가을이엇든가 公會堂에서 專門學校 音樂大會에「헨델」의「라르고」와 또「리고렛」을 듣든 記憶이 깊다. 非專門家이나 實力以上의 人氣를 가진 歌手로 그의 將來는 期待할바 많다. 그러나 지금 세부란쓰病院 醫師로 잇는 그가 어느 程度까지나 더 音樂專門을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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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泰浩氏 日本 어느 音樂學校를 나온 테너. 平壤서「그리익」의「쏠베지」노래를 들엇다(이 노래는「쏘푸라노」가 할 노래로 생각된다) 伴奏는 定評 잇는 崇專「말쓰버리」敎授이엇는데 拍子조차 틀리엇섯다. 그리고 音色이 우선 사람의 自然 發聲을 떠나서 지어내는듯하엿다. 高音은 모두「피아니씨모」로 하는 모양이나 오이려 假聲에 가까웟다. 다시 日本 留學간다는 말을 들엇으다 前途가 잇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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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載鎰氏 平壤서 이름이 높다. 그만큼 노래를 해온사람으로 더구나 地方色을 내이려는 「모란봉歌」(平壤名勝)에 外國軍歌 曲調를 빌러서 한다는 것은 羞恥다 하겟다. 最近에 그의 노래를「레코-드」로 들으니「염소」소리같이 목이 움쳐들어간 소리로 들렷다. 그러므로 音의 變化가 없을 것은 勿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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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哲氏 언젠가 天道敎記念舘에서 無伴奏로 童謠를 하는 것을 들엇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를 聲樂家라고 할수 없다. 아직 音樂家인지 作曲家인지 聲樂家인지 모르나 音樂을 아는 사람, 音樂을 가르키는 사람으로 얌전한 同德女高普 先生님인줄 記憶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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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每日申報에「獨唱法」이라 하고 크다케 쓴 蔡奎燁이란 이름을 보앗다. 年前靑年會舘에서 獨唱會를 한다기에 갓더니 小學校 唱歌曲같은 曲에 音程을 바로 못 잡앗다. 伴奏者(獨孤璇氏)가 내종에는 자취를 감추니「無伴奏로는 못 하느냐 하는 것이 音樂家間에 한 문제가 되엇소, 그러면 한번 試驗하겟소」하든 것을 보앗다. 그 때 그 사람 이즈음 유성기에 亡國調「아리랑」歌手로 街頭에 몹시 進出한 것도 한 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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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子 歌手들은 이만하고 女流歌手를 들어보자. 女流歌手!故尹心德孃이 생각난다. 확실히 그는 훌륭한 天稟을 가지엇섯다. 그러나 終末의「死의 讚美」만은 計劃的「吹込」이엇는지는 모르나 音樂家로서의 選曲도 作歌도 아니엇다. 讚美못할 것을 남기고 간것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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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慶姬女史 現在 朝鮮內에 잇는 女流歌手라고 이러타 할만한 사람을 세이기어려운 중에서 女史가 家庭人으로「스테-지」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퍽 可惜한 感을 준다.「알토」로 그 豊富한 聲量이며「벨,칸토」의 唱法等 獨特한 것이엇다. 上海서 갖 돌아왓을 때 한번 들려준 獨唱會는 樂壇에 큰 衝動을 주엇섯다고 생각한다. 發揮될 天才와 工夫가 다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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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聖德孃 梨花를 마치고 米國갓 다 와서 母校 音樂科 敎授로 잇다. 專攻은聲樂. 그런데 歸國한지 벌서 三年되나보다. 그러나 이때나 저때나 하고 苦待하고 잇서도 아직 그의 아름다운 소리를 안 들려준다(그의 형님이 心德氏 이엇으니 물론 血統的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졋겟지) 六月에 結婚式을 한다니 아마 그때나 紀念으로 獨唱會를 열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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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命順女史 소푸라노 歌手로 相當한 實力을 가진분이다. 樂壇이 흥성치 못하여 이런분들이 자주 나오지 못하게 되면 自然 天分을 버리게 될 것이다. 아직 洗鍊되지 못한 點도 없지 아나보이나 熱잇는 좋은 목소리로 自信잇게 부른다. (악을 쓴다고 하는 사람도 잇으나)發聲도 좋다. 神戶 關西音樂學院 인가를 나왓다고 들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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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顯順孃 安基永氏에게 個人敎授를 받는 中에 다시 音樂을 專門할 생각을 가지고 今年 梨花 文科를 마치고 다시 音樂科에 다닌다. 그만큼 天稟도 타고낫고 그도 自信을 가진 모양이다. 事實 그 소리는 퍽 곱다. 어린 아이들이 재낭스서 부르는 듯한「스위-트」한 목소리다. 아직 學生이나 그의 美音은 이미 評이 잇다. 앞으로「콜로라튜라 소푸라노」로 名歌手의 이름을 널리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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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命淑女史 昨年 中央保育을 나온 귀어운 목소리를 가진「소푸라노」다. 아직 鍜鍊되지 못하엿섯으나 校內音樂會其他 두어번 들엇을 때 印象이 깊다. 그러나 그동안 어떠케 되엇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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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磐石孃 平壤 南出峴 讚揚隊中의 明星같이 빛나는 한 사람이다. 알맞은 聲量에 은실같이 매끄러운 音, 天分은 가추가지엇으나 아직 歌手로서의洗鍊이 不足할뿐, 즘더 精進하엿으면 확실히 期待할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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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薰模女史 아직 朝鮮에서(平壤以外) 公開된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名歌手다. 平壤 女高普를 마치고 日本 가기 前에 몇 번 들엇다. 기운찬 맑은 목소리를 가지엇섯다. 高音에 올라가서 더 潤澤하엿다.「名歌手」로 囑望되든 그가 日本 건너가서 國立高等音樂學院에 籍을 두엇다가 帝國音樂學院으로 옮아서 今春 卒業하자 곳 母校에 拔擢되어 敎鞭을 잡고 잇다. 今秋에는 演奏旅行을 할터이라니 實로 우리 樂壇에 새로나타나는 慧星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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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流歌手로 六七年前에 듣든 韓琦柱女史며 金永淑孃의 記憶도 희미한 中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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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手들은 그만큼 널어놓고 器樂으로 넘어가 우선「피아노」로부터 찾아가기로 하자 風琴만해도 좀 나을 것이나 千圓以上은 주어야 쓸만하다는 「피아노」이니 學校에서나 재주잇다고 稱讚을 섬으로 받앗단들「피아노」를 가질수 없고 가까이 할 機會도 없는 貧寒한 天才들이야 설읍지 않으랴. 더구나 所謂 令孃들의 虛榮의 對象. 結婚의 一種「렛테르」가 되는 데 이르러서야 이런 關係로「피아니스트」가 적은듯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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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煥氏 「피아니스트」로서는 우리 樂壇의 길을 열은 사람이다. 朝鮮人으로 東京音樂學校本科를 나온 이가 이 사람 혼자뿐인줄 기억한다. 그가 學校를 卒業할 때 正式으로 卒業證을 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問題가 되엇섯다 한다. 그러고 내종에 證書를 주면서 總督府學務局에 잇으라고 굳게 勸하엿으나 그는 終始 拒絶하엿다한다. 理由가「우리 音樂家-藝術家는 劒을 찰 사람이 아니다」라는것이엇다고 (當時는 文官도 佩劒하든 長谷川武斷政治時代) 그는 말한다. 그러고 그의 述懷談 또 한가지-學校를 나오든그해의 高宗帝生辰御宴이 石造殿에서 열리엇을 때 그가 御前 演奏를 하엿다. 이것이 피아노 御前 演奏가 처음이 아니엇을까 한다. 그러고 下賜된 金一封이 一金三千圓也라. 그가 出演하야 돈생긴 처음이요 마지막일 最高額일 榮光을가졋다고 한다. 그는 以來「피아니스트」로 各方面의 많은 尊待를 받아왓다. 더구나 日本人側 말하자면 大官집 出入이 더 많앗다. 이제는 오이려 音樂 社交家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느 편으로는 就職자리나 學校入學의 請을 대도 꽤 잘된다는 말이 잇다. 한때는 소나 말같이 音樂會마다 京鄕으로 끌려단니더니 지금 淑明한곧만 先生으로잇다. 樂界의 恩人같은 功勞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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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愛息女史 梨花專門音樂科 敎授로 잇으면서 간혹 校內音樂會에나 나올뿐, 家庭살림이 분주한 탓인지. 스테-지 우에서는 좀처럼 볼수없다. (그모양으로 지난다면 이미 닥거둔 技倆도 退步 않으리라고 누가 保證할까 이분뿐 아니라) 再昨年 가을엔가 梨花 講堂에서 열리엇든 조그마한 會合에서 그의 愛蘭民謠曲을 조용히 들엇다. 가볍게 들리는 그의 音은 퍽 爛熟하엿다. 年齡이 벌서 三十六七되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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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孤璇氏 오늘 와서는 그도 좀 해서「스테이지」에 안 나설 것이다. 벌서 그 앞에 배운사람들(그級)이 그 以上進步하엿으니까. 女學校 先生으로 多年經歷者이다. 지금은 中央保育 學監이라고 들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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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義孃 梨專 音樂科를 나온지 三年?퍽 實力 잇다고 한다. 獨奏보다는 伴奏하는 것을 많이 보앗다. 그만하면 퍽 能熟한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더 感激하여보이는 듯한 沈着味가 적어보인다. 技倆이 좋은 까닭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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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鳳京孃 亦是 伴奏者로 中央樂友會를 中心으로 오래전부터․一 에게 낯닉은 사람이다. 梨花 出身. 이번 米國 간다니 더 많이 배워 올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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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俊氏 技倆으로서 이만하면 相當할줄 안다. 演劇塲 幕 뒤에서 (崔承喜舞踊 헝거리안의 狂想曲) 하는 것에도 그의 奏法에는 퍽 情熱이 숨어 잇음을 엳볼수 잇엇다. 그러나 누가 그를 돌보지 안는다. 天才的 怪僻에서 나온 것인지 그의 生活은「집씨」的이다. 다만 아는 것은 피아노와 술?뿐. 平壤서 光成高普時代부터 시작하야 延專서 金永煥氏에게 指導를 받고 日本도 갓섯든듯하다. 그가 좀 機會를 만들엇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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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玉賛孃 今年 梨花音樂科 出身卒業音樂會에서 그가 演奏한「문라이트쑈나타」는 해마다 듣든중 가장 좋앗다한다. (親友 崔虎永氏말) 그때 나는 못들엇으나 平素 伴奏하는 것을 보아도 곳曲의 全體의 空氣를 吸收하여가지고 無難히 하는데 그의 才能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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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花音樂專門學이라는 地位에 잇는 만큼群少音樂家(音樂敎員?)를 해마다 몇명씩은 내보낸다. 그러나 해마다 나오는 그들이 다어데로 가는지. 물론 朝鮮이 아직 그들을 歡待하기에 너무 不足한바도 잇겟지만 그들이 다녀가는 자취가 樂壇的으로 너무도 微弱하지 않은가. 自身으로서의 努力 問題겟지. 昨年 出身으로 母校 助手로 잇다는 이가 曺恩卿, 林性羲孃 等이 잇어 硏究中이라 한다. 그러고 今年 出身으로 蔡善葉, 李順永, 이런 이 들도 퍽 才幹잇는 솜씨를 가졋다고 한다. 또 朴順德孃의 卒業作品「사촉도」노래는 簡潔하게 要領을 잡은설어운 描寫曲이엇다. 그러고 明年 卒業 朴賢淑, 金信福孃, 이 두사람의 實力이 또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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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慶浩氏 「피아니스트」로 이이를 잊을수 없다. 技術이 非凡하다. 어떤 曲이든지 첟솜씨로 어렵지 않게 쉬이 해치운다. 理解力이 豊富하다. 그외에 餘技가 音樂으로 이것저것 안하는 것 없고 그림도 그리고 文學도 하고 運動도 햇고 대강한 것으로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崇專을 마치고 南京金陵大學으로-京城으로-(中央樂友會의 管絃樂隊는 全혀 氏의 努力으로 된 것이다) 방금 米國留學中, 今年 卒業하고 明年 梨花로 나온다고 들엇다. 그동안 퍽 修鍊되엇을터이니 그의 歸國은 梨花의 새빛이 되고 우리 樂壇의 한 기둥이 될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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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福女史 昨年 東京 國立高等音樂學院에서 優秀한 成績으로 나온 이분을 잊어서는 안된다. 昨年 卒業期 讀賣新聞社 主催이든 新進音樂家 紹介 音樂會(高等音樂學院에서 六名, 上野에서 六名)에 母校의 피아노 名手로 代表되엇섯다. 그만큼 그의 實力은 뚜렷하다. 대개 音樂家의 生命은 天分 곳 技術問題다. 그러므로 聲樂은 別問題로 하고 器樂에 들어서「피아노」나「바요린」은 더구나 어렷을 때 家庭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러가지로 이러한 還境을 가지기 어려운 處地에 잇는 朝鮮人中에서 金女史가 音樂家아버지 (金亨俊氏)를 가젓섯다는 것은 큰 幸服이 엇다. 元來 天才가 잇어 編髮少女때부터 그 아버지의 伴奏를 하든 그가 階段를 밟아서 좋은 先生의 指導를 받앗으니 技術이 능난할 것은 물론이다. 그는 우리 樂壇의 자랑이 될만한 地位에 잇다. 아직 그가 젊고 또 같은 音樂家(바이올리니스트 洪性裕氏)를 남편으로 가졋다는 것이 더욱이「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活躍의 길을 넓히게 할 것이니 그의 前途는 實로 祝福되엿다. 방금 貞信女學校에 在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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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올린」으로 넘어가보자. 一九二〇年頃만해도 音樂會에서 所謂「軍艦마-취」等을 天然스러이 하엿다. 그러고 萬歲前만해도「이올린」이란 것이 보기 드물든 것이 그후 大流行하야 이제는 中學生 中에서도 相當히 잘하는 사람이 잇다. 널리 普及된 理由로는 樂器가 輕便하고 比較的 적은 값으로도 손에 넣을수잇다는 편도 잇겟으나 元來 피아노 와 같이 樂器 中에 基礎가 될만한 것이라 當然한 普及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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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東鮮氏 現在 朝鮮안에 잇는「이올리니스트」로는 技術家로, 藝術家로 첟손을 꼽아야할 사람이겟다. 約九年前 東京 明治會舘에서 열렷든 學友會 庭球部主催의 音樂會에서(早大時代)눈을 감고 銅像과 같이 그린듯이 서서 獨奏하는 그의 印像이 아직 깊이 남아 잇다. 그후 獨逸 가서 修業하여온 그의 技術은 더 圓熟하여왓다. 한 音 한 音이 모두 朗朗히 곱게 내는 그의 均齊된 音色은 多情한 魅力을 가지엇다. 그러고 그를 藝術家로 敬意를 表할 것은 그의 演奏가 모두 아름다운 音樂的 情緖를 뵈어줌이다. 請에 依하여 天分 잇는 사람에게는 個人敎授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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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蘭坡氏 永厚라기보다 蘭坡라는 號가 더 널리 알리워진사람, 樂壇에서 벌서 오랜 사람이다. 얼마전 그의 글을 보니 醫學을 마저햇드면 醫學博士하나는 되엇을 것이엇고……新聞編輯局局長도 되엇을 것이고…… 等等 무엇 무엇「되엇을 것」이 많앗든 만큼 多方面으로 自信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作曲도 相當히 多作, 兼하여 理論도한다. 그러나 常識 以下의 幼稚한 理論(東亞報上의「音樂과 階級意識」?에 對하여서는 그 幼稚의 一面을 若干 反駁한 사람이 잇으므로 더 말 안는다) 으로는 그의 評價가 떠러질 念慮조차 없지 않다. 이올린 技術만은 能한 사람, 어떤 때의 演奏는「이런 曲쯤이야」하는듯이 쉽사리 해치운다. 個人敎授도 많은 弟子를 가졋고 지금도 不斷히 後輩養成에 많은 努力을 하여 樂壇勢力을 가지게 된만큼 우리 樂壇에서는 重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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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虎永氏 「라켙」과 이올린筩을 들고 醫學을 다니다가 東京 東洋音樂을 마친 사람. 이이는「스테이지」의 演奏는 번번히「엑싸이트」에서 失敗한다고 하나 個人敎授로 잘 가르킨다는 이름이 잇는 사람이다. 技術도 相當하다고 하나 音樂家로서 精進할 熱이 없는 것이 큰 缺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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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炳玿氏 「절름발이」少年天才 提琴家로 이름이 널지 알리워졌다. 大曲을 網羅하여 獨奏會를 열엇든 것이 벌서 十五歲때(?) 이엇다. 그의 奏法에는 多少 고쳐야 할 버릇이 잇다고 그 方面사람들의 評이 잇으나 그의 完璧에 갓가운 手練은 놀랄만 하다. 技術로는 堂堂한 領域에 들어가 잇다. 演奏는 끝까지 情熱的이다. 그러나 家貧하여 뜻같이 더 修業치 못하여 天才를 충분히 充分히 發揮치 못하는 그의 不遇는 樂壇損失이라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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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正淳氏 年少樂人으로 安君과같이 相當한 技倆을 가졋다. 今春 쳗 獨奏會를「모리쓰,홀」에서 들엇다. 小學校時代부터 시작하여 現在도「뿌-쓰」夫人의 指導를 받고 잇는만큼 練磨된 솜씨는 技巧的 効果를 많이 나타내엇다. 快活한 曲이 좀 더 長技인 모양. 그에게 한가지 注意할 것은「스테이지」우에서 좀 더 정성스러운 態度를 가지고 觀衆에게 눈을 팔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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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性裕氏 昨年 東京 高等音樂學院을 나온 相當히 熟鍊된 手腕을 가진 校內 代表的 名手엿다. 그의 叔父 되는 洪蘭坡氏 밑에서 어렷을 때부터 시작하엿고 이어서 階梯를 밟아서 音樂學校를 다닌 機會를 가추 가진 사람이다. 그러고 繼續하여 아직도 東京서 硏究中이라니 앞으로 그의 天才는 마음껏 發揮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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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聖敎氏 昨年 東京 日本音樂學校를 나온 秀才. 昨夏 獨奏會를 열려고 朝鮮 들어온다고 해서 그의 先生 (日本人)이 그가 愛用하든 提琴을 빌려까지 주엇든만큼, 그의 技倆과 人物이 아울러 信任받앗다. 그러나 섭섭히 獨奏會를 열을 機會를 못가지고 다시 渡東하엿다. 來靑閣에서 어떤이의 助演을 한번 하엿는데 着實한 奏法을 보여주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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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勳氏 獨逸서 外人과 結婚하여 가지고 年前에 한번 들어왓든 咸興人. 獨奏會에서 約 四十分間의「멜델쓴」의「콘체르트」와 自己의 作曲等을 들려 주엇는데 그만큼 그의 實力은 相當한 領域에 들어갓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大曲 難曲만을 하엿다고 無條件하고 敬意를 表할 것은 못된다해도 그가 努力하어온 자취만은 充分히 放意를 表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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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貞植氏 東洋音樂을 마치고 獨逸 건너간지 八年. 東洋人으로 그곧 音樂學校를 正當히 卒業한 첟 사람이다. 「우르즈부르그」音樂學校를 마치고 獨逸樂壇에서 獨奏會를 한지도 벌서 三年前이엇고 伊太利 羅馬에서 五六十名의 管絃樂隊 伴奏로 獨奏를 한 일도 잇어 이미 歐洲樂壇 한 存在라고 하여도 過言이 아닐것이다. 年前 獨逸 新聞의 評을보아도 「藝術의 最高峰에 섯다」고 斷言하야 技術家로, 藝術家로 大家의 領域에 서잇음을 말하엿다. 現在는 同校의 講師로 잇으면서 同 學校 管絃樂을 指揮하고잇어 「다르비취, 케」라는 이름으로 朝鮮人을 代表하야 萬丈의 氣熖을 뽑고 잇다. 世界의 樂人을 저울질하는 音樂國獨逸에서 그가 그만한 地位에 서잇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오늘까지 피눈물 나는 努力을 쌓아왓다는 點에 十二分의 讚辭를 보내는 同時에 朝鮮의 世界 存在를 깊이할 한 사람으로 敬意를 表하여 좋을 것이다. 아직 二十八歲의 溫厚한 靑年으로 머지 않아 世界的 樂人의 列에 서서 東洋에 君臨할 것을 믿는다. 어떠면 今秋에 잠간 朝鮮을 다녀간다고도 傳하나 保證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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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昭君女史 일즉히 上海「마니라」로 다니며 工夫하여온 朝鮮의 단 한사람이든 女流提琴家 지금 어대 잇는지 樂壇에서는 消息이 杳然하다. 輕妙한 그의 奏法은 퍽 고왓섯다고 記憶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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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올린」 하는사람은 퍽많으나 이만하고 끝으로 「첼리스트」로 단 한사람인 安益泰氏를 紹介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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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益泰氏 昨年 東京音樂學院 卒業은 거이 조선사람으로 代表햇다고 할만치 卓越한 우리 젊은 樂人으로 차잇엇다. 곳 金元福, 洪性裕, 安氏等, 이이의 演奏는 熱과 感激에 차잇다. 「첼로」의 樂器의 價値를 처음 조선에 紹介한 사람이라고 할만치 그의 技倆을 「첼로」가 가진 技能을 充分이 보여줄만큼 圓熟한 境에 들어갓다. 방금 米國 留學中인데 그만한 熱을 가지고 勤工하는 이로 前途가 開拓되지 않을수 없다. 信賴할만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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紙面이 더 許하지 않을 것 같다 團軆를 말하지 않고는 樂壇의 한半 가량을 파묻어 두는 것 같으나 부득이 이만하되 한 말로 하자면 管絃樂隊로는 中央樂友會가 朝鮮을 代表할 것이고 다음에 延禧專門과 崇實專門이 잇으나 좀더 進步됨즉 하면서도 아직 期待같지는 못하다. 絃樂도 「퀄렛」 같은 모임이 잇음즉하나 아직 없는 것은이상한 感이 잇다. 平壤에 욜린 (鄭友鉉) 「비오라」 (咸希一) 「첼로」 (金得泳) 「피아노」 (宋敬信孃)의 모임이 잇어 相當한演技를 보여주는 것은 한 異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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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樂으로는 合唱隊로 우선 梨花의「글리크럽」을 먼저 칠것이나 女子들만 가지고는 가물에 안개비 같아서 안타깝고 씨원치 못하다. 中央保育合唱도 洪蘭坡氏의 指揮인 만큼 볼점이 많앗다.「메일 코러쓰」로는 역시 延專, 崇專이 學校인만치 꾸준하다. 混聲合唱으로는 玄濟明氏 指揮의 中央樂友會 合唱隊, 安基永氏 指揮의 聲友會가 잇으나 兩者가 다 人員問題로 健實타고는 못하겟다. 좀 더 充實한「코러쓰」하나쯤은 잇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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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樂壇의 權威로 網羅되엇다는 音樂家協會는 組織 當初부터 그 發展이 疑●視되는 點이 많더니 公約햇든 今春의 音樂會는 今月末에 연다고. 좀 더 誠實한 活動이잇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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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서툴은 音樂知識으로 評이 評같지 못한고 印象이 印象같지 못한 바가 많을듯 싶으니 妄言을 容赦키를 바라며 擱筆한다.

(一九三一, 五, 一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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