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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토월회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그리운 토월회 그리운 土月會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연학년 延鶴年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8-08 昭和十三年八月
면    수 214 (214)
기사
延鶴年(遣稿)

土月會가 大正十二年저 東京을中心으로한 關東大震災直後에 京城朝鮮劇場에서 第二回公演의 「레퍼트리」로 「윌헬름, 마이야스텔의명작 「알트하이델베르히」를 上演하든것도 지금 回想하매 벌서 十五年이라는 歲月이지나갓다.
十五年! 十年이 거의 一世紀와도 비길수있는 長久한時日이라할진대 十五年이라는數는 거의 一世紀半이나되는 歲月이라고 하야도 過言이아닐것이다. 이동안에 朝鮮社會의變遷이라는 것은 참말로 隔世又隔世의感이있다. 現實의車輪이얼마나 눈이핑핑돌어가도록 回轉또回轉하였든가 그러나 부지럽시 여기서 이런論談을하라는것이 나에게맷기어준 課目이아니어니 더길게 느러놀것이없고 다만 우리들이 「하이델베르히」를 上演하든 그當時의追懷를 注文마튼대로 몇마디적어보기로하겠다.

土月會는 周知하는바와같이 當時東京에留學하고있든 純眞(스스로 이같이말하는것을容恕하라!) 한靑年學徒들의 新劇運動團體이였다. 「뻐-나드쇼-」의 「그女子는 그男子에게무어라고거짓말하였나? (朝鮮釋名「오로라」) 「체호프」의「곰」(朝鮮釋名 「結婚申請」 作者名不詳「飢餓」 朴勝喜作 「吉植이」以上 四個의 一幕物을가지고 七月에第一回公演의幕을열었다가 開演初日밤「오로라」에 登場한主役 朴勝喜군이臺詞를 까먹고 이저버리였든 같닭으로 演劇中徐에 退場하야버리어서 不得已幕을내리고 觀客에謝過를하고 이까닭에 朝鮮劇場과의 步割契約은 解除되고一夜舘貰百八拾圓이라는 새契約밑에公演을繼續하게되어 이 때문에 土月會의物質的으로바든傷痕은 甚大한바있었다. 아마四千圓餘의 負債를질머젔든것으로 記憶한다. 이때문에 이負債를 어떻케하면조흐냐?하는 討議를하다가 土月會同人朴勝喜, 金復鎭, 金基鎭, 그리고 나 이네사람이 千圓式무러논느냐 或은 다시公演을하야 어떻게든지 收入을 만히맨드러서 이負債를 버서볼道理를하느냐 이렇게 두가지로議論끝에 華竟다시 公演을하자는 決論에 一致하였기때문에 八月부터 「하이델베르히」의 公演準備를 하기 시작해 가지고 九月七日(?)인가에 第二回公演의幕을 다시 朝鮮劇場舞臺에서 열였든것이다. 그러므로 불이야불이야 準備한演劇이 였든것인만큼퍽無理한點이많었든것은勿論이다.

그러나 놀나지를마시오 우리는第二回公演에서 (「하이델베르히」 外에 「카츄샤」도 上演하였었지만) 七千圓餘의收入을 어덧섯다는것이다. 七千圓! 큰돈이였다. 어떻게하면 四千圓의負債를 갚을가-勞心焦思하든 學生들이 인저는걱정을노았고나!했다. 負債를갚하서도 二回公演의 經費全部를 除하고도 餘裕가있을만했다. 그러나 그仔細한것은 前記兩金과 나의周知하지 못하는바이다. 모든것을 經濟的責任을지고 二回公演을 準備하든朴君이都맡어가지고 金錢問題는 處理했든까닭이다.

그런이야기는 그만두고 좀色다른 이야기를하기로하자. 「하이델베르히」는우리로써 이처지지안는 演劇이다. 웨그러냐하면 이演劇에 協力해준사람들은 지금 거의全部가 朝鮮社會에있서 各其그部門에 따라서 一流의地位에있는 사람들이많은까닭이며 또이演劇의舞臺가 朝鮮에新劇있은以後로 처음보는豪華奢侈를極한(!)立體的舞臺이어서 確實히劃期的인무었을 劇界에寄與한바있었든것이까닭이다. 登塲人物은 主役「하인리히」에 朴勝喜, 「케-티-」에故李月華이였고, 侍從長에 延鶴年 「튜트」에金基鎭, 「케라-만」에李壽昌, 博士에 李白水. 國務大臣에 李素然等이었고 舞臺裝置에는 彫刻家에金復鎭畵家요 또現在新聞揷畵界에 巨星인夕影安碩柱, 杏仁李承萬兩氏가 畵家金昌鉉, 尹弘烈(?) (朱乙人)等諸氏이었고 「프름터-」를보아준사람이 懷月朴英熙氏이었다. 이만한사람들이 뫃여서 했으나 于先 그때에있어서는 보기드문것이었을것은 疑心하지는안는다. 지금생각해도우수운것은 舞臺正面에圓柱두개를세우고서(第一幕宮內殿內塲面)觀客席을등지고서 그圓柱속에들어가안저서 朴英熙君의 臺詞를읽어주든일이다. 그圓柱가 잡바지지아니했으니 망정이지 만일 쓰러젔드면 朴英熙君온登塲人物以外의人物로서 朝鮮두루막을입고 「칼스부르그」天國의宮殿에 突然히나타났었을런지도 몰렀을것이다.

또한가지 이演劇에도 學生들과樂士가많이登塲한다 이것을해준사람들이 當時徽文高普와 培材高普在學生諸氏이였다. 優先樂士로는 洪永厚氏의令侄洪載裕, 洪性裕兩氏(現在有數한 「바이오리니스트」이었고學生으로登場하여준이들中에서 記憶에남는人物에 現天風堂樂房主人金相根氏, 洋行한舞踊家趙澤元氏, 每申社會部長鄭寅翼氏의 令弟로不幸히培材를卒業하기前에 疾病에 걸리어作故한이 寅葉이 있다. 그때는 모도들書生이오 學生이었지만 十五年後의지금은 반짝반짝 빛나는사람들이 많이생겼다. 질거운 일이다.

지금十五年이 지난오늘날前土月會 朴勝喜君과는손을나는지 十五年, 니어그는地方으로 太陽劇場을끄을고다니는사람이되있고 나는무었이될려는지는모르나 十五年前에 가젔든熱情에 못지않은情熱을가지고 中央舞臺의再組織을하야가지고 前日十五年前에土月會에關係가깊든 人物의三四人과다시뫃여서 議論해가면서 이追憶깊은 「하이델베르히」를 革新一回公演으로 上演하고 있게되었다. 人世의離合集散이無常하다하지만, 無常하지않은것은 人情그물건이다. 十五年前에 「하이델베르히」를보면서깃버하고 슬허하든人情이나 오늘날「하이델베르히」를보면서 느끼는人情이나 그것은變함이없시 同一할줄로생각한다. 나는 讀者여러분中에 萬一十五年前에 土月會의 「하이델베르히」를본일이있는분으로서 오늘날府民舘에서 「하이델베르히」를 보고어떠한느낌을 느끼었는지 十五年前과 지금을 比較해서 朝鮮劇界에 어떠한 變遷을發見하였는지 그것을 들리어주는분이있으면 반가웁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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