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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시감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영화시감 映畵時感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나운규 羅雲奎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7-01 昭和十二年一月
면    수 182 (182)
기사
今年 一年은病과 싸웠다. 싸호는동안에 갓금 治療에對한 自信을 일허버리는때가 있다. 이런때마다 映畵를製作할 慾心이 百倍나 더해진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무었을 남겨놓는가 十年싸워서 남긴것이라고는 한데 모아놓고 불질어 버리고싶은 作品 몃個가굴너 다닐뿐이다. 文人들이 全集을 發行식히는데 比하면 얼마나 슬푼일이냐 그러나 붓과 조히만으로되는 文人들이 作品과 돈과機械로 그리는 우리들의일 과는形便이 다르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진 最大苦痛이다. 共通으로 맛보는 쓰라린事情이 다 용소슴치는 製作慾을 藝術家로써 이表現慾을 滿足식힐수 없어서 가슴을 치며 거리로 彷徨하는 동무들을 나는 數없이안다. 그들을 爲하여서라도 朝鮮映畵를 어느 水準까지끄러가서 完全한 市場을 얻고싶었다. 商品으로써 이朝鮮內 市場만으로는 朝鮮映畵 의 將來도 現在도 없다 이런意味로 原作을 좋은것을 求하려고 퍽 애를만히 써보앗다. 外地에 보내는 朝鮮映畵를 만드는데 아무러게처도 朝鮮사람의 손으로된 이야기가 必要햇기때문에 여러方面으로 求해밧다. 主로 短篇몃개를 읽었으나 내머리가 뒤젓슴엔 지는 모르나 最近에것 보다는 오래된 作品中에 더조흔것이 있는것같다. 그러나 그조타고 生覺하는 作品들은 映畵化할수없는 事情이 너머도만타. 至今에 우리가 손대지 못할 딴生命이 있는것같다.
十餘年前 아직철없는 學徒였을때에 어느無名作家 地方 靑年이 短篇하나를 읽은일이 있다. 十年後 至今와서 그 作品이 머리에 남는 記憶이라고는 五夢女라는 題名이 였던것과 確實치 못한이야기에 줄거리 뿐이였다. 作者의 일홈은 勿論이거니와 어듸發表되었던것조차 모르겠다. 이 作品을 映畵해 보려고 原作을 차젓스나 차즐길이 없었다가 누가 李泰俊氏作品에 그것이 있던것같다고 하기에 李氏를 차저같더니 그의 處女作이라고한다. 그 無名作家가 이러게 되었는가 하고 生覺할때에 반갑기도 하였으나 그가病中임을 슬퍼아니할수가 없었다. 病으로 弱해진 내몸을 두번 쉬여 넘어간 城北洞이(谷)속에서 病으로 누어있는 그이얼골을 마조보고 안젓다. 十年前五夢女를 쓰던 生活하던 그가 그때에 五夢女를 읽던 기운차던 내가 病人에 心中은 病人이라야 안다. 이것이 마즈막 作品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決心이 血脈을 每日찔느는 注射이 힘으로 억지로 땅을밥는 내가 여인몸에 말소리까지 힘없는 그를 마조보고 안젓다. 나는 내가 病人이란말을 참아못햇다. 그가 내여주는 스크랍책 속에서 五夢女를 다시보앗고 그속에 五夢女와 가치부튼 新聞쪼각지들이 十餘年前 그이肉體를 그려놋는것 같다. 이땅엔 十年風雪이그를 그러게 만드럿고 나를 이러게만드럿다. 미리生覺햇던 檢閱 問題로 고칠 몃군데를 말햇고 쓸슬한草堂에 그를남겨 노코 도라왓다. 부대 健康이 恢復되소서.
五十萬圓 資金으로 映畵會社가 된다고떠든다 이때까지 이런風說에만히속앗기때문에 또떠들다가없어질테지 이것이 地方에서 第一 처음 新聞 記事로 읽었을때에生覺이다.
其後서울와서 各方面으로 들니는 이야기를 綜合하면 風說만이 아니고 現金 拂込까지 되였다고한다. 얼마나 반가운일이냐 우리가 十年동안 애타게바라던 일이 成事되는 것이다. 映畵는 大資金으로 될수있는 일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반가운 이야기와가치들니는 風聞이意外에 헷말이였다. 所謂 그들에말노(在來映畵人)(旣成映畵人)은 한사람도 아니쓴다는것이다 다른 事業도 勿論그러치만 더구나 映畵事業은 技術者가없으면 되지 못하는 事業이니 그럴理가없다고 生覺햇더니 그會社創立 事務所에서 發送한 宣傳文이 確實이 이것을 말해버렷다 그發表로보면 旣成映畵人을 아니쓴다는 것이 아니라 旣成映畵人이라도 朝鮮서 映畵일하던 사람은 아니쓰고 東京가서 映畵會社에있던 사람이면 쓴다는것이다. 勿論 그들이 이런말을 함부로하고 다니게된 責任이 우리들에게도있다. 十餘年에 貧困한 映畵事業이 아모發展도 없은責任이 우리들이 無力에있었다고 하면 그責任은 百번도 더지겠으나 그들中一部에 사람이 말하는것같흔浮浪者라느니 非良心的이라느니 無識하다느니 하는 말에는 聽從할수가없다. 映畵人은 大學出身아니면 아니된다는 理由로 映畵를모르는 사람이 말이요 우리들동무가치 세워서 鍾路거리로 것기면 우리들 동무보다 더浮浪者 라고 남들이 손가락질할 사람이 그속에있지않은가 勿論 其中一部엣사람이지만 이런風說을 날니는 그會社가 그래도 創立되기를 누구나다 바라고있었다. 그것은 우리가일하지는 못하더래도 그會社의 成不成이 朝鮮映畵의 將來에 큰 波紋을 이르키겠기때문이다. 어느 座席에서 나는 그때其會社重任마튼분에게 이런말을 햇다. 世上의 注目이 큰만큼 責任이重합니다. 누구를 쓰거나 技術者들에게 조흔設備를 주십시요 나는 다른 會社에 일을보고 있으면서도 이會社의 創立과 將來 進行을 몹시걱정햇다.
그러는中에 스탄박 監督이 들니게 된다고 함으로 우리 들은 가치 모여서 短時間이나마 무슨 利로운 말을드를가해서 가치마지해려고 電話로 그會社에 通知햇더니 그들은 水原까지 쪼차가서 스氏를 獨占해버렷다. 旣成映畵人은 浮浪者가 되여서 한 자리에 안기도 슬타면 그만이 겠지만 그가 서울있는 時間不過 晝夜밖에 없는中에 우리들에게 준時間은 不過二時間밖에 아니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그들이 그會社를 기여히 完成하고 말니라는것을 믿었다. 四五百圓式 써가며 만흔 映畵人 에게미움을 받어가면서 까지도 自己會社宣傳을 하려드는 그들이事業에 將來를 樂觀햇다. 그러나 이모든것이 꿈이요 이모든일이 水泡로 도라같다. 朝鮮映畵株式會社는 없어젓다. 깨여젓다 망햇다이한 事件이 朝鮮 映畵의 將來에무었을 주나하고 生覺할때에 그들이 罪가 크다 억지로 직히려는 적은 自己이니 地位와(實力없는) 世上을 分別치못하는 썩은名譽欲때문에 自己들보다 나은事業家와 技術者들을 摘對하고 었절줄 모르고 갈팡질팡 하다가는 나종에 에되지도 안은 허수아비 權利다 툼으로 흐터저 버렷스니 그들은 作亂이라고 웃어버릴넌지 모르지만 罪없이 罰밧는 朝鮮映畵界만가 엽지않은가 그대들은 손발을 씨서 버리고 남이 되면그만이지만 所謂 그대들이 浮浪者社會라든 이社會를 짓발버 주고 갈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훌륭한 紳士로 自處하는 그대들이 그대들 身勢로 우리들 浮浪者때는열갑절 스무갑절 떠애써도 將來에 보이는 압길은 캄캄할뿐이니 얼마나 잘한 일인가 生覺이나 해보시요. 드르니 서로 黨派를 지어가지고 뿔뿔히 헤여저가서 따로따로 映畵製作을 한다니 紳士이體面이나 직히려고 한 作品중 料理집에 가쓴 셈치고 하겠다는 그따위 作品은 朝鮮과 朝鮮映畵界는 바라지안습니다. 이것은 斷言할수 있읍니다.
이번作品背景이 咸北西水羅라는 곳임으로 처음에는 脚本에 對話全部를 咸北地方말노 썼다가 여러사람에 다읽어 보아도 도모지 무슨뜻인지 모른다. 東京 사람이 大阪말음 알어듯는것과는 아조딴모양이다.
「아즈바니 도사부 잘 드능구마」
이러케 써노면 他地方사람은 못아러 보는 모양이다.
「아저씨 거짓말 잘하시네」
로 아러드를 사람이 없는모양이다. 그래서 어느地方 사람들이나 아러듯도록 고치려고 해밧스나 그것도 쩔둥바리가 되는것같애서 할수 없이 中央言로 해버렸는데 이러케 해노고보니 地方色 이라고는 아조아니난다 로케숀 咸北까지 갈수없어서 처음咸南 어느 地方까지 갈가했는데 咸南은 海邊으로 元山부터 西湖津 까지는 要塞地임으로 그보다더 北으로가야될터인데 그리는 동안에 日氣가 너머치워젓슴으로 江原道北部地方에 建物이 咸鏡道갔드란 生覺이나서 通川庫底로 定하고 一行이 出發해서 現地에가보니 建物이 咸鏡道와 平安道의 中間을 딴것 같은것임으로 될수있는대로 建物背景을 避하고 自然 背景만 백여 가지고와서 建物은 全部셋트로 하기로 하였는데 第一問題되는것이 셋트짓는 사람自身이平生보지 못하던 집임으로 아무리 圖面대로 하려고애쓰나 咸北風이나지 안는다. 더구나 房안에 놋는 세간을 서울서는 求할수가없다. 솟(鼎)은 中國人것을 사왔는데 그쪽것보다는 띄가낫고 항아리는배가 적어서 배를 부르게만드는데세 사람이 사흘이나 애썼고 其他모든것이 아무리 애를썼스나 잘맛지는안는다. 이번일노 보아서 作品에 地方色을 낸다는것이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며 아무리 他地方에서 애를써야 그地方사람에 눈으로보면 틀니게 보일것이다.
多幸이 이번作品은 地方問題가 그다지 큰問題는 아니니 이대로 지나 보낼수가 있으나 作品에따러서는 큰苦難이 있을줄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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