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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우 나운규 씨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명우 나운규 씨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 名優羅雲奎氏 「아리랑」等自作全部를말함
종    류 대담 對談
필    자 나운규 羅雲奎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7-01 昭和十二年一月
면    수 136 (136)
기사
[사진] 나운규 얼굴
[사진] 저강을 건너서의 한 場面女優는全玉
[사진] 羅雲奎氏가처음發見한때의申一仙
[사진] 開化黨박일때 紀念撮影
[사진] 아리랑後篇때 光景
[사진] 님자없는 나루배 右端女優文藝峰
朝鮮映畵界의 開拓者요 先驅者이며 아울너그 天禀이斯界第一人者로 世上에 이미定評이잇는 羅雲奎氏가 이제 한사람의 映畵觀客으로 더부러(아리랑) (잘잇거라) 等十數篇의 自作全部에 對하야 率直하게 心懷를말하다

「아리랑」
問-「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이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날넝겨주오」

하는 이노래는 누가지었어요
한동안은- 그것이 벌서 십년은되었지만-그때 서울이든 시골이든 어데서든지 어린아이 자란 할것없이 모다 즐겨 부르든 「아리랑」의이 주제가(主題歌)를 누가 지었서요
答-내가 지었오이다 나는 국경회령(國境會寧)이 내고향인것만치 내가 어린 소학생때에 청진(淸津) 서 회령(會寧) 까지 철도가 노키시작하였는데 그때 남쪽에서오는 로동자들이 철로길뚝을 닥그면서「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불르드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가다가도 그노래들리면 거름을 멈추고 한참들었서요 그러고는 애연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멜로디를 혼자 웨어보앗답니다 그리다가 서울올라와서 나는 이「아리랑」 노래를 찾었지요 그때는 민요(民謠)로는 겨우 강원도아리랑(江原道)이 간혹들릴뿐으로 도모지 찾어들을길 없더군요 기생들도 별로 아는이없고 名唱들도 즐겨 부르지않고-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든 그멜로디를 생각하여내어서 가사(歌詞)를짓고 곡보는 단성사(團成社) 음악대에 부탁하여 맨들었지요
問-映畵스토리도 혼자 생각했어요 어떤데서 암시(暗示)를 받었고 또 어떤뜻을 표현하느라고 애썼어요.
答- 「이야기」도 모다 혼자 생각해 냈지요 나는 거기에 표현하려한 정신은 한개의 아모 구속도 아니받는 인간을 그리려했지요 그러자면 미친사람이 되어야하지요 미친사람눈에는세상모든권위(權威)도, 무서운 것도 머리숙일곳도 아모것도없지요 제가 웃고싶으면 언제든지 웃고 제가 하고싶은말은아모말이나 하고요-그래서 이주인공을 철학(哲學)을 연구하다가 미처진사람으로 만들었지요 이 미친사람에 누이「申一仙」 가 있었지요 누이가 옵바의 친구와 연애하는데 그 집 머슴이 누이를 탐내지요 그래서 이머슴을 미친 사람이 죽이지요 죽이고나자그사람 정신이 바로도라가지요 그래서 살인죄「殺人罪」를 쓰고 옥에 드러가는 것으로 전편「前篇」의 끝을 삼었지요?
問-그때 여우「女優」는?
答-신일선「申一仙」이지요
問-신일선이는 어떻게 발견했어요?
答-내가 부산(釜山)에 갔을적에 하로저녁은 연극구경을 갔는데 무대우에 올라서서 독창(獨唱)하는 어엽분 나어린 소녀가있더군요 그러나 그때는 막연하게 기억만 해두었다가 서울와서 이처녀작을 박이려고 생각을하자 여우를 얻을필요있어 그때 함경도함흥(咸興)에 가서 극장에있다는 그를 다려왔지요 그아버지는 서울경운동 리강전하(李堈殿下)저(邸)에서 마당도 쓸고 심부름하는 노인이고 그 옵바는 순사(巡査)다니다가 그만둔 사람이지요
問-신일선이를 배역(配役)으로 얻은것은 큰성공이었지요!
答-그랬지요 그때는 그가 처녀시대고 열성이있고 용모가 아름답고 퍽으나 유망하였지요 중도에 결혼사건만 없이 그대로 성장하였다면 지금 쯤은 큰 스타가 될것을 앗가운일을 하였지요
問-「아리랑」은 제작비(製作費)가 얼마나 드럿서요
答-三千圓
問-그돈을 뽑앗서요?
答-봉절당시(封切)에 거지반그삼천원은 다빼었지요 흥행성적이 조왔으니까 그뒤 통계를 치면 아마 여러십곱의 돈은 생겻슬걸요-모다 작품은 요도(淀)라는 흥행업자의 손에가있습니다만은-

(風雲兒)금붕어
問-「아리랑」이 그렇게도 큰센세이슌을 일으킨뒤 둘재번 작품으로 내노흔것은?
答-「풍운아」0이지요 이것은 그때 「닥크라스」가 전성하여 뛰고 다름박질하고 그런 영화를 일반사회에서 요구했으니만치 나도이런것을 착수해보앗지요
問-스토리가 어떻게되었든가요?
答-「서백리아」를 오래 방랑하고있든 주인공이 고토라고 조선에 찾어오지요 그가 차깐에서 어떤 인테리 여성을 만낫는데 그역시 외지로 도라다니든 무슨당원이지요 둘은 마츰내 어린아이하나를 얻어요, 즉 다자란사람에게는 기대할것없으나 앞으로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잘길러내자-아모조록 잘길러내서 우리뜻을 본박게 하자함에 중요한 뜻이있었지요 그래서땅우에 우리 지도도그리어 가르켜주엇고 거짓말과 속이는 불정직한 성격(性格)도 바로 잡어주었고-이런것을 거칠거칠하게 선(線)이 굵게 그리느라했어요
問-그때 女優는
答-金靜淑이었지요
問-김정숙이는 어떻게 발견했어요
答-그가 처음 윤백남씨의, 백남푸로덕슌에 있었서요. 그런것을 대려왓지요 원래는 부산(釜山)서 긔생노릇을 하엿대요.
問-한번 대려다가 한 촬영을 마칠때까지 즉 한작품을 끝낼때까지 보수는 얼마나 주나요 한 三百圓주어요?
答-그걸 경제력이 있어야지요? 피차에 그저 희생적 노력이란 생각이있으니깐? 버티어기지요 그때나 이때나 한 百圓식 주는 폭이 되지요?
問-김정숙이는 「금붕어」까지에 나오더니 이내 종적을감추더구만요. 영화계에서는 지금은 무얼해요
答-어느 시골의 「캅페-」女給으로 도라다닌대요?
問-그도 역시「연애」때문에 타락했는가요?
答-그런점도 있겠지요? 그와는 「금붕어」에도 함께나왔는데인테리여성으로의 특질이있어 좀 더 발전 할수있있든것을요?
問-「풍운아」나 「금붕어」는 흥행성적이 어터했서요
答-내가 초긔에 만든 「아리랑」「風雲兒」「野鼠」의 세篇은 일본내지인인 요도(淀)가 돈을대여하엿는데 第四作인 「금붕어」에 와서는 단성사의 도라가신 박승필(團成社朴勝弼)씨가 돈대주었어요 그래서 그때비로소 「羅雲奎푸로덕슌」을 설립하고 첫 작품으로 금붕어를 하엿는데다 좋앗서요 모다 五六倍式남었지요

「잘있거라」
問-「잘있거라」는 거칠거칠하고 남성적(男性的)작품이어서 많은 사람을 울리고 감격케하였지요 흥행성적도 좋왔을걸요
答-그것이 제작비용이 二千八百圓 드렀지요 그때는 원체 필림값이 싸고 「셋트」를 만들고 하는것이아니라 대부분이 그양들에나가 「로케-슌」으로 박여냈으니까 비용이 훨신 적게들었지요 그리고 열흘동안이란 짧은시일에 끝냈으니깐요
問-그때 여자스타-는?
答-全玉氏였지요
問-성악가 강홍식(姜弘植)씨 마누라가 된-
答-그렇지요 全玉氏와 더부러그뒤 「玉女」도 박였지요 그런데 「잘있거라」는 열여드래동안의 서울 흥행에서 벌서 제미천을 다뽑는 호성적을 내었음에 불구하고 「玉女」에와선 아조 망첫지요 비용은 四千圓식이나먹여서-그것은 셋트의 설비가불완전한데다가 눈이 푸실푸실오는겨울이고 도모지 활동이 여의치못햇서요 나는 그때일이 이처지지를 않어요 「玉女」가 단성사에서 봉절될적에 첫날 觀客틈에 끼어 가보고 그만 落望했어요 완전히 실패된 작품이 었거든-그래서 그길로 집에 도라와 이불을쓰고 두문불출하여 큰결심을 하고 일주일동안 생각해「씨나리오」를 써낸것이 저「저강을 건너서」이였지요

「저江을 건너서」의 「사나히」
問-「저강을 건너서」는 확실히 걸작 이 었지요「아리랑」에 버금갈걸작이었지요 어덴가 푸로作家 崔曙海의 作風을 연상식히는 좋은 대목이 많었지요
答-네 다행히 성공했어요 그러나 間鳥에까지가서「로케-슌」 했든 관계로 비용은 많이나서 제작비모다가 六千餘圓이 들었어요 역시요도(淀)가 대어주었어요?
問-尹逢春氏도 그때함께 갔지요
答-그렇지요 全玉 尹逢春모다, 함꼐 출연했어요
問-지금도 이처않짐은「잘있거라」 속에 북간도 어느 촌학교에서 눈바래 치는 추은날 학생들이 창가하고 체조하는 대목같은것은 참으로 좋왔어요
答-원래 그제목도「저강을건너서」 가아니고 처음에는 「豆滿江을건너서」이었지요 그러다가 그것이 자미없다고 어느측에서 말이있기에 중도에 변경했는데내생각에는 간도 동포들의 생활을 寫實的으로 그려보자함이었지요 그러나 「저강을 건너서」에는 다행히 호평도받고 내자신도 自信이 있섰습니다마는 그만 그다음작품인「사나히」에와서는 또 망첫지요
問-「사나히」는있든것이든가요
答-돈가진 집안자식이 아버지에 불평을 품고뛰어나와활동하는것인데 여러가지 장애가있어 失敗하고만작품이되었지요
問-여자스타는 누구였든가요?
答-柳新芳이라고 새로 나온이지요
仁川에놀러갔다가 내가 발견했지요 인천서 기생노릇을 하든여성입니다. 그러나 어느 여자 고 보「女子高普」를 마친 인테리여성이었지요 文學을좋아하여 스사로 붓을 드러 詩도 짓고劇도쓰느라하였고 風貌도 敎養이있느니만치 인테리의 近代的女性으로 보였지요
問-나히는
答-그때 수물세살
問-엇재서 梨花專門 文科出身같은데서 女優를 求하지못하고그저 妓生과 女給社會에서만求하러드러요? 東京서는 貴族집안 에서까지 求한다는데-假令 「入江たか子」로 말할지라도 그가 子爵의 따님이아녀요?
答-梨花出身이야 어디눈이높아서요……

「文藝作品인 벙어리三龍」
問-그다음이 저有名한 文士 羅稻香原作 「벙어리三龍」인가요?
答-그렇읍니다
問-文藝作品을 着手하게된 動機는?
答-어릴떄부터 文學을 좋아한탓으로 틈만 있으면 여러 作家의 作品을 읽느라고 努力했지요!
그中에서 가장 印象깊은 것이 이 벙어리三龍이 었어요 또그스토리된품이 映畵化하기에 알맛고 主人公이 내비위를 끄으러요
問-「벙어리三龍」 은 마치 저藤森成吉의 「何が彼女をさろさせたか」 와 비슷한 맛이있지요?
答-그래요 生覺하여보면 퍽으나 深刻한 題材었어요 그때돈이들기는 三千六百圓이엇는데 스을 너무 크게잡앗다가 아소失敗한點이있었어요 나는 至今도 생각하거니와 그것을 다시토-키로 박어보고싶어요
問-마즈막의 라스트 씬-인 불놓는 場面은 셋트로 했든가요
答-東大門밖에 나가서 大門과 마루와 안房의 제셋트를만들어놓고 여기에 차레차레 불을 질넛지요 그러고 온家屋이 타는模樣은煙幕을 使用해서 만드러냈지요, 그런데 그때 혼난일이 있었지요 집을짓되 조히와 헌겁으로만型을 만들면 너무 빨니 불에타버릴가 저어하야 그뒤에다가 두치널판장을 대이고 그리고 石油한통을 사다가 모다 골고루뿌렷지요 아모조록 오래오래 두고 골고루 부트라고-그뿐더러 그場面만은 아조 핍진하게 만들生角으로 내몸에 實地로 불이 달리는 것을 박이려고 그래서 솜 옷을지어 입은 그우에다가나도 石油를잔득첫지요 그런데그 場面은 안房에서 이불난리에울며 부르짓는 女子를 내가뛰여들어가서 救해가지고 엽리에 끼고 다라나오는 대목인데 이걸좀보세요 글세 불을 부첫드니 豫想과 어그러저 아조 일시에火藥이 爆發되듯 탁 붙겠지요내全身에도 빨간 불길이불확, 고- 나는 크게 火傷했지요 이마와 엽구리에-도 한사하고 그女子를 救해내기까지는하였지요 「카메라」가 작고만도라가는데 그렇다고 끊칠수가 있어야지요!그러서 그뒤 約한달동안을 두고알엇지큰火傷을 當했어요 그女子도 머리가타고 젓가슴 타고야단낫지요 마츰 누가 經驗있는이가있어온몸이 火光에싸힌나를 보고 그냥땅우에 구을라고하여 눈우에 마구 구으렀기에 목숨은 救했지만 至今 생각하기에도 몸서리가 치는 큰모험이었어요
問-그때 그女子는 누구인데
答-亦是 柳新芳이 었지요

「開花黨」과 「임자없는나룻배」
問-先驅者 金玉均을 取扱한 史劇「開花黨」은 興行價値로는 차치하고라도 우리 映畵史上에남긴 價値있는 事業이었지요.
答-事實 吿白하지만 史劇은 어려워요 그時代의 말씨라든지衣服制度라든지 그런데다가 史實에만 充實하자면 作品이 승겁게되고 藝術美를, 즉꿈을 집어넣자면 歷史를 僞造하게 되고요 엇잿든 그作品에서 가장 「컷트를 많이 當했어요 그리고 그 作品以後에는 같은史劇이라도李朝五百年동안의 歷史物은되도록 取扱치 말나는 注意를 받었어요
問-「開花黨」 에도 女子가나오든가요
答-나왔지요 그때는 河小楊이지요 이분은 내親舊 尹逢春君의 마누라엇지요 至今은 갈나지고 다른곳에시집갔다하지만 퍽으나 素質있는분이엇지요
問-「임자없는나룻배」에는 누가 나왔어요
答-金蓮實이와 文藝峰둘이
問-그두분은 어떻게 發見했어요?
答-團成社에있는 내親舊의紹介狀을가지고 처음金蓮實君이 찾어왔더구만 그러나얼골이 그렇게 뛰여나게 어엽분것도 아니고 演技도 特別히優秀한것은 아니엇지만 그사람은 熱誠이있어요 기어히 成功하고야 말겠다는 熱誠과 努力이있어요 그리고 文藝峰君은 그때 「演劇市場」인가 어디인가의女給노릇하는것을 내가 대려왔지요 成長할싹이 보여요 文君은 요지간 記錄映畵를 박힌다고東京드러가고 없지만
問-임자없는 나룻배 뒤에는 무었이 있었어요
答-「鐵人都」와 「鐘路」가 있었지만 다 水準아래고「아리랑」 第三篇도 돈은 五千圓이나먹여가며 일부러 申一仙이도 復活시켜가며, 그랫으나 연구時日이없며 여러가지 障碍로結局成功한作品을 만들지못하고 말었지요
問-아마 「아리랑第三篇」이 最初의 토-키었지요?
答-그랫서요 그리고이번 박히는 「五夢女」 도-

李泰俊氏의 五夢女
問-文士李泰俊氏 作品에 着手하게된 動氣는
答-훨신-예전에 내가 이 作品을 읽고 大端히좋고 자미있는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누구의 作品인줄 몰낫서요 요전까지 내記憶에는 「開闢」雜誌에서 懸賞募集에 드러온 어느無名作家의것인줄만알고있다가 비로소 李泰俊氏 原作이요 그것이「開闢」이 아니라 「時代日報」에낫든것인줄 알었어요
問-이번 作은 大作인가요? 江原道에 로케-슌도 오래단녀오고
答-相當히 큰作品이외다 于先經費만해도 六千五百圓 豫算이었는데 아모래도 超過할것같해요 至今 晝夜不分하고 撮影中인데 아마 一月의 第二週나 第三週에는 封切될듯해요
問-李泰俊氏作品은 퍽으나 人情味있고 描사가 깨끗하니까 映畵로해도 많은人氣를 얻을걸요 앞으로도 文士들 作品을 작고 着手하구려
答-그리하고 싶지만 近來에는文藝作品을 別로읽지못해요. 다만 예전 記憶으로 말하면 春園作品이면 映畵化할만하게 事件이 複雜하고 人物이 多彩하여요, 機會있는대로 만들어보려해요
問-이번「五夢女」에는 누가 女스타-애요
答-盧載信이라고 「아리랑고개」에 나왓든이지요
問-딴말이나 自作映畵를 上演하기前에 그劇場舞臺에 나서서人事한적이 있었어요?
答-있지요 大邱나 平壤같은데나 가서 각금 하였지요 퍽들 그리하는것을 좋아하더군요

女優는處女가 좋은가婦人이조흔가요
問-過去 十年동안 여러數十個의 作品을 만들어본經驗으로말하여 녀배우는 시집가고 兒孩낳은中年婦人이 좋은가요 아즉 나어린處女가 좋은가요
答-그야 處女지요
問-大河內같은 俳優는 말하기를 藝가熟練되고 人生의 實感을가진名優를 얻자면 亦是시집도가보고 兒孩도 가저본 나히도三四十된 女子가 좋다고하더구만
答-그러나 그렇지도 않지요 내 經驗으로보면 시집가노으면 그만 熱이식어요 生命같이 알든 映畵를 헌신짝같이 녁이고 그제는 男便이요 戀愛요하고 딴데만 精神을 써서 못써요 亦是 肉骨의 美도좋고 性格도 純眞하든 處女時節이 낫지요
(十二月二十五日夕 京城撮影所 「五夢女」撮影場所에서會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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