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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웃고, 많이 울던 지난날의 회상 무대생활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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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많이 웃고, 많이 울던 지난날의 회상 무대생활 20년 만히웃고,만히울든 지난날의回想 舞臺生活二十年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배구자 裵龜子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5-12 昭和十年十二月
면    수 128 (128)
기사
[사진] 배구자 공연

첫舞臺에발을드려놓기는
나는 여듭살박게않되는 아즉도 철모르는 어린나이에 그만 일가친척을 따라 東京으로 건너가게 되였음니다.
그렇게되니 자연 공부도 東京에서 하게되였음니다 아즉 소학교에단이든 그때의나는, 삼촌되는 이가 그때 東京에서 일홈이 높은 연극오페라극단사람들과 친근하게 접촉이많었었고, 더구나 天勝씨와는 퍽친한사히가 되여서, 늘 내가있는우리삼촌집으로 그런이들이 찾어오곤하였음니다.
그래노니 나는 삼촌의귀여움을받게되는한편 또 이 天勝씨의 귀여움도 무한히 받었담니다,
그런후로는 나도 어린마음에 자연히 나를 귀해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이天勝氏를 따르게되였음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이 어룬들의 앞에서 재롱도부리고 노래도 불으며 짓겨려도보았고 웃어도 보았담니다.
그때부터 天勝씨는 늘 어린나를보면은
「너는 퍽 영리하게 생겼지?······네가 장차로 연극이나 음악이나 무어나 하 나 배우면 크게 성공 할것 같다!엇대!그런데로 나가고십지는 않으냐?······」
하며 어린나에게 농담삼아 깨우처줌은 물론이지만 내 삼촌되는이에게도
「저애는 극예술 방면으로 공부를 식혓스면 좋을듯하네, 가장 재조있어 보이 고 장래성이 많은듯하네」
하며 은근히 또는 간절히 부탁하고 권고도하였담니다.
이러한 환경밑에서 자라나든 어린나는, 그엿코 삼촌의 도음과 天勝氏와여러분들의 권고와지도밑에서 비로서 첫 무대(舞臺)에 나서게되였으니.
그때가 바로 내나이 十三歲되는 아즉도 어린少女 시절의 일이였음니다.
무장야(武藏野)넓은 벌판으로 훗훗한 春風이 나슬거리고 「蒲田」의菜蔬밭에 노랑꽃이 가득히될때 이른봄 어린少女 裵龜子!는, 그때「丸之內」삘딍안에 있든天勝씨가 하는 「有樂座」의 一員이 되였음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苦難도 많었고 曲折도 많었든 舞臺생활 二十年間을 거러오게되는 첫출발이었음니다.

三年間의米洲生活
이렇게 有樂座에서 무대에 처음으로 올나슨나는 그때는 순전히극(劇)방면에대한 扮裝만을 하여왔었음니다. 天勝씨외 여러선생님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한편, 나는 또한 극방면以外에 音樂에다도 취미를 갖이게 되였음니다.
그래서 지금도 日本에「關屋信子」라면「쏘푸래노」에 있어서는 넘우나 유명하고 세게적으로 명성을 듯고 있는 信子女史의 문하에서, 성악에 대한 工夫도 시작하였담니다.
미약하나마, 이 극단에있으면서, 일본 극게에나 또는 오페라게에 미미한힘과 몸을밧치고있든 나는 그후 얼마않되여 뜻을 크게품고 米洲에건너가기로 작정하였으니, 그때의 어린 마음에도 한번훌융한 극이며 또는 무용이나 음악을 좀더 구경하고 배워보리라는 뜨거운 리상과희당을 품고, 있었든 것임니다 그해가 바로 東京大震災가 이러나든 이듬해이였음니다.
[사진] 배구자 공연 [사진] 배구자 공연
물론 米國으로 건너갈때에도 나의 유일한 지도자인 天勝씨와 같이 떠나게되였음니다.
망망한 大海 太平洋의 물결을굽어보며 甲板우에 올나서서 그리운 故鄕의 하늘밑을 바라보며 멧萬里박게 異域의땅으로 떠나든 그때의 내가슴은 무한히 뛰놀았담니다.
처음으로 미국땅에발을 드듸니 나의눈에는 모든것이 넘우나 놀납기만 하였고 호화롭기만 하였음니다
처음에는「로스앤젤스」라는데서 무용을 비로서 배우기시작하였음니다 그곳에서 얼마간 배우다가 그곳을떠나 「뉴-욕」에 가게되였으니 나의겻헤는 언제나 은사 天勝씨가 떠나지를 앓었음니다.
「뉴-욕」에있는「오 -무」극장에 드러가게된 나는 여기에서 붙어는 본격적으로「무용」을 연구하기시작하였음니다.
극과 음악으로 길우려지든 나는 미국에 건너오면서 부터 여러 이곳사람들의 권고와지도도 있고해서 순전히 무용으로 돌아스게 된것임니다.
처음에 떠날때의 내생각에는 서양(특히미국)무용이나 극은 말할수없이 훌융한것뿐이겠거니. 하고 넘우나 지나치는 긔대와경의의눈으로 대하였든 나는 비로서그곳의 무용이나 오페라등을 구경하고 별로히 나로서는 신통한것을못보았으며 우리의예술보다 훨신 더훌융한 무엇을 긔대하든바와같이는 맛보지못하였든것임니다.
나는 이곳에 건너와서야 비로서 내 의 예술을사랑할야는 아니, 조선의 특유한 전통적 예술을 찾어보겠다는 극히 미약하고 초보적이나마, 막연한 감상과 포부를 갖이기 시작하였음니다.
나는 미국에있는동안 그곳의 예술을 마음것 鑑賞하였으며 또한열심히 연구하고 배웟음니다.
물론 公演도 여러번 하였음니다 그럴때마다 異國사람들에게서 무한한 환영도 많이받었담니다. 었떤때에는 무대에서 돌아오면 벌서 내방앞으로는 무수한 꽃따발에 간단한 편지를 붓처 보내는 양키-들의 선물들이 쌓이고는하였담니다.
물론 그런속에는 나의 예술에 진심으로 동정하야 엇던점은 잘되엿느니, 엇던점은 좀 이렇게 하엿드면 하는 간곡한 평을하는 편지도 많었지마는 엇떤사람은「귀여운黃色人」이니, 「재조있는 코리안!」이니하며 갑싼 동정의 선물을 던지는이들도 있었단민다.
[사진] 배구자 공연 [사진] 배구자 공연
그밖에 또 별별 편지가다-많지요, 소위「러부레-타-」에 속할만한 편지들도 더러 끼워저있는일이있담니다.
이렇게 환영을 받고 층찬을 받게되는때는, 내가 생각하든바와같이 무대에나서서 마음대로 잘 추게된때이였음으로, 그런때의나의 깁뿜이란참으로 무대에나스는 사람이 않이고는 도저히 늣끼지못할것임니다 그러나, 그렇게깁뿐일이있는반면에또이렇게쓰라릴때가있담니다.
「내 이번에 나가서는 이렇게 하려니!」하든 긔대에 어그러지게 마음에않맛게 췃슬때에는 관중에게 흥미를 못주고박수를믓받는것도 붓끄러운 일이지만 내자신의 양심으로도 여간 붓그러운일이않이며 이럴때의무대 실패의 비애란 이루 말할수가 없담니다.

弟子養成의苦心
삼년이란동안을 「하와이」에서 최후의공언을 남겨놓고는「미주」를 떠나 돌아오게되였든것임니다.
미국에서 돌아온나는 곳 조선에 나와 조선무용 연구와 발표에 뜻을두고 이방면으로 여러선생님들의 지도를 많이받어왔음니다.
그러나 나의앞에는 늘 골쌀이 찡겨지는 가슴압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이땅의 무용가만이가질수있는 「제자양성」의 곤난함이였음니다
지금도 그러한형편이니 그때야오즉하였겠음니까? 간혹 퍽재조 도 있고 장래성이 보이는 지원자들이 많건만도 리해성이도모지없는 조선가정은 그들에게 자유를주기는커녕 도리혀 조소와 멸시를 던저왔었음니다.
그럴때마다 나의마음은 퍽도 쓸쓸하였음니다.
그러나 리해성이없고 여러가지로 까다로운 이땅의환경 속에서 그래도 우리의무용을 캐여보리라! 는 결심을 품고 오늘날까지 간신히고난의 가시덤불길을 거러온셈임니다
참으로 도리켜보면 울기도 멧번이였고 웃기고 여러번이였음니다
지금도 내손밑에서 무용을배우는 사람이 녀자가 十五人에男子까지合하야 한三十名됨니다마는, 그들중에는 따뜻한 父母의품속을 떠나고또는 폭은한 가정을 뛰여나와 끌어 올으는 순진한 예술욕에서 나슨 가장 귀엽고 장래성이많은 사람들뿐이람니다.
그中에서도 姜德子같은 사람은상당한가정의 따님이고 또한 女子最高學府까지 나온녀자로서 그에 굳은의지와 빛나는 예술성은 실로내마음까지가 튼튼하담니다.
그러고 대부분의 座員들은 나의 친척되는집의 사람이많담니다.
그中에도 裴朝子같이 나이 六,七歲의어린少女도 다-훌융한 재조와 착한 아이여서 제扮裝道具는 모조리제손으로 거두고하니, 나는이제 늙어가는 몸이지만 저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무한이 깃부담니다,
新 邊 感 語
오랫만에 조선내의 공연도 잠간 동안이고 이제 日本全國의 다섯군데 大都市마다 巡廻하며 공연하기로 되여서 떠남니다만 이 어리고 귀엽고, 장래가빛나는 저들座員들을 데리고 길을 떠남니다, 그러나 박게서 생각하는바와같이 그렇게 호화스럽고 깃뿐일만은 않이람니다,
여러座員 과 한방에서 같이자며 추울때이면 혹「감긔」나 들지않을가? 「추워나하지않을가!」하는 마음으로 밤에도 멧번이고 깨여나서는 이불을 되덥허주기도하며, 「베개」도 바로베워주기도 하노라니, 나의 생활이란가정의 어머님노릇이요 엇떤때는 「어멈」노릇도 한담니다.
이렇게 하여서라도 저들을 고이へ키우고 재리우는 것만이 나의 할일인것같음니다!
오로지朝鮮舞踊에다
나는 오늘날까지 二十여년을 무대에서서 하두많이 춤을춤니다마는 그중에서 가장나의 마음에드는것은 朝鮮舞踊일쭐로암니다. 조선무용가운데서도「아리랑」과 「방아타령」일것임니다.
이러한 조선정서를담은 춤을춰보고 나는 결심하였음니다. 조선무용을 연구하지않으면 않되겠다는것을 더욱깨달었음니다.
民謠아리랑의 무용화는 나로서도 그중자신있는 춤이였음니다. 지금내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연마하는 여러신진녀우들의 앞날에는 나로서도 긔대하는바가 많음니다. 이제무대생활 二十年! 도려다보니 까마-득한 오랜일임니다! 이제다시금 과거를도라다보고 현재의 선(立)데를굽어보니, 아마도나의 一生은무용에다 끝을막을것 같음니다.
(東京으로떠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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