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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음악연구소 방문기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코리아 음악연구소 방문기 코리아音樂硏究所訪問記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초적동 草笛童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5-10 昭和十年十月
면    수 146 (146)
기사
조선에는 훌융한 音樂家들이 많다. 세게樂壇에서 일홈을날니는이도 있고 또는 音樂藝術에 뜻을두고멀니 海外에나아가오로지 이에 온몸을바치는이들도 수없이많다.
山川이 아름다운 이땅에사람들은 노래를조와하고 詩를조와한다.
그들은 노래로 詩로 이땅의 情緖를 어내고 조선에 鄕土味를읍조린다.
우리社會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동안수많은 天才的音樂藝術家들을가지고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우리社會는이音樂藝術家들에게 너무나 無關心하엿고 너무도 冷情하여왓섯슴이사실인가 한다.
우리社會의 모든文化部門이 다-그러하지마는, 이音樂藝術家들中에서 오즉 한사람이나 우리들손에서 길너낸적이 있었든가? 아마도 생각컨댄 그러치못하엿슴이사실인가 한다.
이 天才的인 音樂家들은자긔의자라난땅에서 배우지를못하고 남의손에서 길니운사람들이 않이엿든가?
그래도 「조선이나흔 음악가」라고 할수있을가?
더구나 이와같이 세상에널니알이워지는 음악가들은 그래도 不幸한者中에서 幸運한사람들 이라고나할가?
그들은 남달니 富裕한家庭과 남달은 조흔環境을 특히가진者들에게만 限함이엿스리라. 이밖에 수많은 音樂藝術家들은 솟아오르는 노래와 詩를 불너보지못하고 「無名」의 두字를 부드켜안고 다만不遇한 이땅의환경을 서러하엿슬것이다.
그러한 無名의音樂藝術家들이 우리社會에는 수없이많다. 그들은 배움의길을 찾겟다고 발버둥치는 현상이다.
「藝術의고을!」 「音樂의鄕」에오즉 한個의 音樂學校를 못가젓슴이 이엇찌 이땅사람들의 한가지로 아쉬운 일이안이리요!
이제 記者는 코리아音樂硏究所를 찾는 理由도여기에 있으며 이귀여운存在의 자세한 內面을 널니 세상에 알니우는 所以도 이에있는가한노라.
이땅에 오즉하나인 이코리아音樂硏究所를 記者가 처음찻기는 秋色도 바야흐로 무르녹어가는 九月下旬의 어느날이엿다.
京城市內堅志洞에 잇는 코리아音樂器會社文藝部로코리아音樂硏究所長으로 게신朴榮根氏와 同音樂硏究所의 聲樂科講師로게신 李升學氏를찾엇섯다.
두분에게 案內바더 硏究所事務室로 들어스니, 한편구석에 노혀있는 피아노건반우으로는 백초가튼 열손가락이자즈게 느리게움즉이며 아름다운音향이 고읍게 흘너나오고있다 그엽에는 二十歲를 넘은젊은사나히가 가즈런히 서서 피아노에 마춰 가느다란목소리로 나즈막하게 부드러운목소리를 내고있다.
난데없는 訪問客이 들어옴을 보자 그들젊은 녀인과젊은 사나히는 슬며-시 엽방으로 사라저버린다.
記者는 찾어온 所任을 다하기爲하여 朴榮根氏에게 뭇기를 始作하엿다.
記 「코리아音樂硏究所가 언제부터 생겻슴니까」
朴 「네, 약수개월 됨니다마는 아즉은 모든 설비도 불충분하고 머-이러타고 자랑할만한것이 없슴니다」
記 「이硏究所의趣旨를 말슴하여주십시요」
朴 「朝鮮音樂界를바라보면 한개만이라도完全한硏究所가업고 그것이업슴으로써 音樂的素質을 豊富히가지고 잇스면서도 自身의素質을 完全히發揮할만한 촨쓰를 주지못하는것을 實로遺憾으로 생각하여오든바, 이에痛感한바잇서 今般코리아蓄音器會社文藝部內에 本硏究所를 創設하고 無名音樂藝術家들을 爲하야 時宜의期會를 開放하기爲함이오며 더욱이 이것이 弊社의社會的良心에 立脚하여 레코-드藝術의 文化企業的妥當性을 充分히 發揮하여보려고 奮發하는 最大의役割인同時에 弊社文藝部員等이 朝鮮樂壇에 바치는 良心의 全部임니다」
얼마후 朴榮根氏는 事務에 밧분일이있었음인지 엽헤안즌 李升學氏에게 나의무름을 맛겨버리고 자리를이러스며 甚히未安하다는 人事의말을 건니우면서 총총한거름으로 나가버린다.
이에 記者는 다음의質問을 李升學氏에게 건니우게 되엿스니 먼저 그와의 問答記를적기前에 잠간 이분의 履歷을간단하게 紹介할가한다
李升學氏는 올에二十五六에 不過하게보이는 얌전한 紳士風의사나히이다. 氏는 일즉이 咸北明川에서나서 어려서부터 東海바다의 먼水平線넘어로 떠도는 白鷗를바라보며 아름다운목소리로 노래를늘불너왓섯스며이여 東京으로 건너가 東洋音樂學校聲樂科를 優秀한成績으로 卒業하고 도라온이다.
氏는 故土에발을 드듸면서 이땅의수만흔音樂徒들을 발아보고 今年二月에 泰和女子舘에잇는 朝鮮音樂家協會事務所를 비러서 男女三十餘名을 가르치고 잇스면서, 밧분줄도몰으고, 이번 새로생긴 코리아音樂硏究所에도 聲樂科의 講師로잇는분이다.
記 「이코리아音樂硏究所와 코리아레코-드會社와는 어한關係를 맷고잇나요」
李 「이會社와 硏究所와 直接關係는 없슴니다. 다만 講師라든가 이硏究所에잇는 여러분이 이會社와直接關係가 잇는분이 만흠으로 다만 이硏究所를 이會社文藝部事務室에 두엇슬뿐이지요, 그러나 間接으로는 서로關係가 잇다고하겟지요,
記 「그러면 이硏究所는 今後도늘 이會社內에잇지는안켓군요」
李 「네 그럿슴니다. 지금은 모든準備도 不充分하고그럿슴니다만 장차로는 事務所도 새로히 훌융한데 옴길作定이고 모든설비도 充實히 할여고 함니다」
記 「科는 무슨科무슨科가잇나요」
李 「本科와別科와를 두웟서요, 그래서 本科에는 三期制로되엿슴니다. 一期는 六個月로定하엿고 이三期를完全히卒業하면 音樂學校三年에서배우는것을 다-배우게되지요, 一期(처음六個月)에는 音樂에 對한基礎知識과 發聲法등을 배우고, 第二期와三期에들어가서는 音樂에對한것을 비로서 根本的으로 배우게 되지요」 그리고 別科는 隨意로 되여잇슴니다」
記 「敎授方法은?」
李 「勿論個人敎授이지요, 音樂은다른것과달너서 學校에서도 個人敎授를 할수박게는 업서요」
記 「멧時부터 始作하나요」
李 「一週二回로午後五時부터 十時까지 하는데 한사람압헤 꼭꼭 三十分式敎授하지요」
記 「本科는 무슨科들로 나노여잇고, 別科는 무슨科들이 잇나요」
李 「本科에는 聲樂科, 提琴科, 피아노科, 作曲及樂理科等의四科로 나노여잇고, 別科에는 朝鮮音樂科, 兒童音樂科, 기타-科, 의三科를 두엇스나, 아즉은 志願者는 업서요」
記 「그러면 本科의各科에는 멧사람씩이나 잇나요」
李 「聲樂科에는 十四名이 잇는데 女子가四名이고 그外는男子이고 提琴科에는 二名인데, 一名은女子이고, 피아노科에도 二名이고 作曲及樂理科에도 二名이잇슴니다」
記 「그硏究生들은 대개 엇떤層의 사람들인가요」
李 「學生들도잇고, 敎員이나, 會社員들도잇스며, 特히音樂을硏究하기爲하야 地方에서 우정올너온사람도 六七名잇서요, 그런데 이硏究所에 志願한사람들은 대개 音樂의 素質이모다 조흔사람들이야요」
記 「現在硏究生數는 얼마나되나요」
李 「二十名임니다, 그러나압흐로四十名쯤을 限定하고는 더뽑을作定임니다」
記 「처음入所할때에는 어떠한 手續을 하나요」
李 「처음入所金이二圓이고, 每月月謝金으로金參圓만내지요, 그러고 入所期限은 隨時로 할수잇슴니다
記 「이硏究所를一年半에卒業하고는 무슨特典이업슴니까」
李 「별로히업슴니다 그러나 그中에서 特出한才質을 認定하는사람에게는 코리아레코-드 吹込藝術家로 採用하기로함니다」
記 「이硏究所의 組織을 간단히말슴하여주십시요」
李 「顧問에 金文輔, 金武森, 金永煥 세분이 게시셔 간접으로 우리 硏究所를 指導하고 硏究所長으로는코리아蓄音器會社文藝部長으로게신 朴榮根氏가 게시고, 그外에 擔任講師로 十人이잇서서 各科를마터가르치지요」
피아노科에게신 李興烈氏는 咸南元山出生으로 東京東洋音樂學校피아노科를 優秀하게나온 훌융한 피아니스트의한사람으로 전번金文輔氏獨唱會에서피아노 伴奏로그의 手腕을發揮하엿스며금후는 서울에게시면서만흔硏究를싸흘분이라고하며, 이한분이 피아노科를마터서가르키고, 바이오링科에는 東京帝國音樂學校를 나오신 李永世氏와 東洋音樂學校를나온이로 現在는 코리아蓄音器會社文藝部에게시는 尹樂淳氏의두분이 잇고, 聲樂科에는 東洋音樂을나온 李升學氏와 東京日本音樂學校를나온 朴景嬉孃의 두분이잇서 가르치고, 作曲及樂理科에는 亦是李興烈氏와 延專을나온柳基興氏두분이 마터가르키며 兒童音樂科에도 柳基興氏와崔玉禧氏가 作定되엿스며 기타-科에도 李英根氏로 정하여잇다고한다.
어찌되엿든 이音樂硏究所는 압날에 장차發展을압두고 지금 準備途程에잇는 朝鮮의 唯一한 音樂學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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