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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목 주시하는 3대 쟁패전―명월관이냐, 식도원이냐―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만목 주시하는 3대 쟁패전―명월관이냐, 식도원이냐― 萬目注視하는三大爭覇戰―明月舘이냐, 食道園이냐―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 +++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2-04 昭和七年四月
면    수 50 (50)
기사
-삼십만드리어경영 하는명월관과 수십만원의 식도원의 어느이 승리할가-

서울 창덕궁궁궐의 큰길을고 한참 나려오느라면 양제이층에 조선식을 병하여 지은 크다란집한채가 잇스니 이것이 명월관이요  남대문통(南大門通) 일정목의 전차길에서 바로드려다 보이는곳에 금색찬언하게 간판을놉히부친 크다란 반양제 집한채가 잇스니 이것이 식도원(食道園)이라.
명월관과 식도원은 반도에서 서로손곱는 큰 료리점들이다.
료리점이라하면 이밧게도 국일관(國一館) 도 잇고 송죽원(松竹園) 도 잇고  태서관(太西館) 도 잇지만은 력사가 무척 긴-점과 투자한자본이 만헛든점과 료리를 잘만드는 점에잇서 서울서는 명월관과 식도원을 그중낫게친다, 이제 이두료리점진영(陣營) 을 해부하여 보리라.

〔明 月 館〕
資金은三十萬圓, 一年賣上二十萬圓
명월관은 삼십만원이나 드려서 경영하고잇는 개인의 영업긔관인데 음식점영업에 삼십여만원을 던젓다면 놀날일이라 아니할수업다.
현재 본점이드러안저잇는 토지의 평수가일천이백여평으로 갑을 한평에 백원씩치면 그것만 십이만원이요 만일 오십원씩치드라도 륙만원에 달하며 양식과 조선식으로 지은 건물총평수가 륙백여평에 달하는 터이니 어지간이 큰집인것을 알수잇겟다.
이밧게 음식만드는 긔구와 손님방에 가처논 비단방석과 수노은 평풍과 장고가야금, 거문고. 젓재, 피리, 등속지 모다치면 삼십만원이란말도 괴이한말이 아닐것이다.
이러케 크다라케 버리고안즌 이료리점에서는 그러면 얼마나되는 영업을하고잇는가 즉 얼마나 음식을 팔고잇는가.
최근에 조사한바에 의하면 음식점영업이란 세월이 조흔와 그른가잇서서 갓지아니하나 평균 일년에 이십만원 한달잡고 일만오륙천원 하로잡고 오백원씩은 팔닌다고한다, (이것은 무교졍 부근에잇는 지점것지 합한계산인데 지점건물은 자긔소유가 아니라 매월 오백원씩주고 엇은 셋집이다. )
그리고 명월관 본지점을 합하야 사용하고잇는 사람수가 얼마나 되느냐하면 일백이십여명을 헤인다, 물론 이속에는 손님을 안내하는 -이와 음식을 만드는쿡과 인력거 차부지다들엇다.
명월관은 력사가 깁다 이십여년전에안순환(安淳煥)씨가 경영하든것을 긔미년 이듬해에 전긔안씨로부터 흥산주식회사(興産株式會社)에서 매수하엿다가 다시현재 경영자인 리종구(李鍾九) 씨가 삼만원을주고 사드려(긔구와 상호「器具와 商號」만이고 가옥은 별물이다.)
이래열두해동안을 경영하여 내려오는데 음식은 고유한 조선료리에 다가 서양료리식을 가미하여한다.
이럭저럭 약사십만원의 큰돈을 명월관을 중심삼고 운전하고잇는 리종구씨는 엇더한 사람인가하면 원래 잡화상과 주식취인소(株式取引所)를하엿섯고 녯날 구한국시대에는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를마추엇다, 원적이 서울인데 그아버지는 륙군정위(陸軍正尉)요 군관학교교장(軍官學校校長)을 지낸 리규진(李圭振)씨로명문의 출이엇슴을 알수잇겟다.
명월관은 장차 엇던인물을 더욱 배치하고 엇더한방법으로 손님에게 써-비스하야 료리점게에 패권을 잡으랴는고?
미상불 흥미잇는 일이다.

〔食 道 園〕
經營者는安淳煥氏, 資金二十萬圓
그러면 한편 식도원(食道園)은 엇더한가 식도원은 실로 조선료리계의 원조라할 유명한 안순환(安淳煥)씨가 출자주의 유력한 일인이요 로 정웍익(鄭元益)씨가 실제 경영하는 중이라 한다.
아마 료리방면에 다소라도 소양이잇는 이처노코 안순환씨를 모르는이가 드무리라 녯날 구한국에는 상감님이 잡수시는 음식을짓는 국수(國手)엿다, 그 궁내부(宮內府)에는 조선팔도에서 음식 잘짓는 그방면의 재인들이 만히 모듸어 잇섯는데 그중에서도 안순환씨는 특출하여 나종에 음식짓는곳의 무슨벼슬지 하엿다, 그러다가 합병통에 세월이 글너지자 혼자 독립한 영업을 버릴작정으로 궁내부를 나와서 처음 황토마루부근에 집을 어더가지고 조고마한 료리점-조선식 료리점으론 시조라할만하다-를 경영하다가그것이 불이낫다, (불난집터를 김성수씨가 사가지고 거기다가집을 지엇스니 그것이 오늘우리들이 보는 광화문통 네거리의 동아일보사다)그러자 다시 명월관을 경영하다가 십여년전에 남대문통에 식도원을 건설하고 지금 경영하는 중이다.
식도원도 투하자본(投下資本)이 수십만원을 넘으며 일년매상고가 명월관보다 못하지안타고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백여간의큰집이요 그토지도수백평이라 시가(時價)로처도 이토지급 건물의가격이 거액을 산할것갓다.
식도원의 사용인원은오십여명을 너머헤인다든가 드른즉 안순환씨는 풍류객으로 갓을쓰고 팔도 유생(儒生)들과 더부러 각금 시회(詩會)도열고 승지강산을 찻기도하여 풍류(風流)를 아는 오십여세의 중로인이라하는데 년전에는 안씨족보를 위하여 수만원을 던지엇다고 지전한다
식도원의 자랑은 음식과 건물에도 잇겟지만 내외국 손님들이 만히와주는데 특색이잇겟다, 아마 외국서온 손님들로 조선정조(朝鮮情調)를 맛보자고 식도원을 찻지안는손님이 드무리라, 주단으로 라노흔 방석우에 매란국죽을 그린평풍밋헤서 금란일다, 옥화로다, 하는 긔생의 장고소리를 드러가면서 도연히 속가튼몃시간을 보내게한다함이 식도원의 특색이리라.
동경에는 관광국(觀光局)지잇서 돈만흔나라 부자들을기에 분주한데 조선서 다소라도 외국인의 주머니를 털게할수잇는 긔관이라면 이러한 료리점이 아닐가.

어느이勝할가?
명월관과 식도원은 어느것이 칭패(稱覇)할가 력사와 음식만드는 우열과 손님에게 써-비스하는 태도와 운전자금과 건물과 경영하는 사람의 수완에 려 이것은 결정될판인데 아무튼 수삼년만더 두고보면 알어질것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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