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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도─속 백결선생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신라의 성도─속 백결선생론─ 新羅의聖徒─續百結先生論─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유자후 柳子厚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40-02 昭和十五年二月
면    수 54 54
기사
社會改良家로서의東里生
新羅의文化는 三國에 冠絕하였을뿐 만 아니라 우리東方全體史中에 가장 藝術文化의 國格이였었읍니다 그리하여 新羅는 그 有爲의文化를 잘消化하야 對外關係에나 對內의國家로 勇徃邁進하든나라이였음은 史乘이說明하는바로서 다시 贅呶할必要가 없거니와 이러한反面에 있어서 極度로膨脹하는 物質文化는 個人生活의 自體를 너무나 奢侈放逸에 흘으게하여 極瑞의 個人主義가 蘭芽蔓延하였었읍니다 이것은 新羅의歷代帝王이 禁奢侈의 節目을頻發한것으로보아 잘알수있는 것으로 우리 朴東里先生의出世하기前부터新羅의 個人自奉主義는 意外로 惡風敗俗을 가저왔었읍니다 卽무엇인고하니 生産의能力이減衰된 老齡에達한 父母를殉葬하는 무서운風習이이것이였었읍니다 이것이 物質文明의極度의反響으로 徒衣徒食하는老朽를除去하는 卽 生之者象하고 食之者寡의 經濟政䇿이였었는지는 알수없으나 이는 分明히 文化國인新羅에있어서 最上의不倫이며 最大의不德인 滅倫壞常의 일이아니면아니였읍니다 東里朴文良先生은 이것을 倫理道德에 있어서 瞬秒間이라도 猶豫할수없는 問題라하여 殉葬其親의惡風을 一掃코자하여 自己 스사로가 在官時代에있어서 爲先爲親의 模範을보이면서 아모리 不生産年齢의 老朽한父母일지라도 殉葬함은 絶對로不可하다하고 朝野에向處하여 그 몇번이나 大聲叱咜하였었읍니다 勿論 朴東里先生以外에도 新羅의聖徒들이繼承支持하여 矯正改良한것으로 先生時代로부터 孝心의 培養이 復活興起하여 距今一千一百餘年前 新羅四十二代興德王時代에와서는 놀나울만치 父母에對한孝心이 發達되였었읍니다 이 証據로는 三國遺事五卷에 孫順의 埋兒가 이것으로 孫順의 집이 몹시 艱難하야 老母를 잘奉養치못하는 가운데에 어린子息이있서 每樣 그 늙은어머니의 밥을 빼서먹으니順이 그어머니를 奉養하는마음으로 그안해에게 말하되 우리가살면 兒孩난 또날수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求치못할지니 어머니의밥을 恒常 兒孩가奪食함으로 어머니가 恒常주리시니 이子息을 파무더바리고 어머니의 배를 불러듸릴수밖에없다議論하고 醉山北郊에가서 埋兒하랴고 땅을파는데 奇異한石鍾이나오는지라 順의夫婦는 驚異하여 이는 兒孩의福이라하고兒孩와 石鍾을지고 다시 집으로 도라와서 鍾을 들뽀에달고 꽝꽝치니 그 소래 淸亮透遠하야 大闕안宮中까지들려 마츰내 興德王께서 드르시고 右左로探知한後말삼하기를 昔者에 郭巨는 孝心을가저 埋子하다가 金釜를 얻었다하드니 지금 孫順은 그老母를 배불이기爲하야 孝心으로 不得已埋兒하려다가 石鍾을 얻었으니 郭巨의孝心이나 孫順의孝心이 同一한것으로 하날이 感動하신것 이라하시고 屋一區와 매볘五十碩을주어 그 純孝를 褒尙하였다 云々하였으니 이 事實을推想하여보건댄 老母의 飽腹을 爲하여 埋兒하려하였다 함은 殉葬其親하든 風習에比하여 옳은일이냐 그르일이냐는 別問題로 差置하고 如何間 殉葬其親하든 新羅의風習이 그와같이逈變하여 그 純孝의마음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함은 東里先生의 首唱敎導의 矯正轉換으로서 萬代의 老父母의마음을 깁겁게하고 千秋의子孫이孝心을 皷吹扶植하여 문어저가는 調常을바로잡어 不孝의新羅의社會로하여금 孝誠의 新羅의 社會로 善變善化케한것이였으니 東里先生의 社會改良의 聖的德化는 實노 偉大하다 아니할수없읍니다 이 一大偉業은 新羅社會의 萬般改良을 가저온것입니다 孝子는 百行之源이라하였으니 藝術富强과 其他百般의 文化的新羅의延壽는 이 孝的新羅에서 胚胎成長된것이아니면않일것입니다

音樂家로서의百結先生
天, 地, 人, 三位間에있어서 不平의狀症을 삺여본다하면 千態萬狀으로서 이에對한 漏泄作用과 調處手段과 慰宣方法이 또한 千泰萬狀일것이다
하날이 不平이있으면 風雨와雷霆으로써울며 땅이不平이있으면 地動과噴火로써울며 山이不平하면 崩落으로써 바다가不平하면 怒濤로써 짐생이不平하면 咆哮로써 새가不平하면 슲운소래로써 가지가지로 不平을漏洩하여써 調處와 慰宣을 가저오는것입니다
靈覺이없는 自然界와 覺만으로 生活하는 禽獸世界에있어서도 이와같이 不平이있으면 그와같이 調處와慰宣를 가저오거든 하물며 靈과覺을俱備한 萬物의靈長이오 宇宙의主峯者인 人生生活에있어서 어찌不平이없으며 不平이있으면 엇지 調處慰宣의 手段方法이 저 自然界나 禽獸世界에 比할것임니까 實노 우리人生의 不平이란 그 種類가 多樣多端한것이며 그 調處慰宣의方法이 多面多岐한것입니다
그 不平을當한사람의 性格如何와 그 不平을當한 時機如何와 그 不平을當한 處地如何와 그 不平을當한四國情勢如何의 差異分殊에依하여 참으로 形々色々의 長短深淺을 가려오는것으로 或은술노 或은우름으로 或은 怒炎으로 或은슲움으로 或은詩로 或은文으로 或은춤으로 或은노래로 或은樂器로 以外에도 許多한手段方法으로 不平을 調處慰宣코자하는것입니다 이手段과方法은 사람과 때의 古今이없이 大槪相似한것으로 우리 人生生活에있어서 가장 高尙優雅한 不平處理方法은 詩文音樂이 古今을通하여 가장 아름다운 慰安의課程으로 相傳되는것이않일가함니다
東里朴文良先生은 自己의道義을 行할수없는朝廷에서있음은 盜祿窃貴하는 千古小人의 行事라快斥하고 萬斛의不平과 千秋의 遺恨을 心胸에抱懷하고 一朝에飄然히 下野를 快意하야 掛冠封印한後에 棄官歸鄕操를 지어 揭上에 놓여있든 거문고(琴)를 당겨 不平을 詠彈하니 曾往에없든 傑作雄曲이였었읍니다 元來에 무엇이고 懇切하고 乏眞한至境에들어가지못하고 卽 그때와 일과 熱의 三合一體의權現的神秘의造化가없이 하는일은 아모리 努力에 努力을 다─한다할지라도 到底히 그 속속드리참것을가저올수없는것입니다 더구나 音樂이라 하는것은 다른 것보다도 더욱히 그러한것으로 東里先生이 曹徃에없든 傑作名曲을 詠彈하게된것은 元是 東里先生의 音樂的天才도 있었으려니와 그 當한때와 그 當한일과 그 當한心情이 三合一體되여 棄冠歸鄕에 不平一曲이 乏眞造化의 名曲을 가저온것 이였었읍니다 이 때 先生의 詠彈하든操辭를 그대로紹介하면 이러한것입니다
天會縱生
人會窮顯
天會得君
天會失君
得非市利
失非在傷
就豈幸々
去豈幸々
樂無別樂
得天生會爲樂
東里先生이 이 棄冠歸鄕操를 詠彈한後로는 世上事와家間業을 一切 浮雲流水에붙이고 거문고를 오직 唯一無二의 良朋志友로 喜怒哀樂을 每樣 이에 依託하여 彈解慰宣하였었읍니다
先生은 棄官下野한後 貧寒이到骨하며 衣百結而如懸鶉의 生活을하게 되였었읍니다 卽 입은옷이 갈기갈기 찌어저서 百番이나 얼기설기 매여입고 있었음으로 時人들이 부르기를 百結先生이라 하였었읍니다

百結先生의 確樂
東里先生이 百結先生의 號를얻은後로는 先生의生活이 더욱히 寠且莫甚하야 살림이 날노 때로 말이못되였었읍니다 그러나 百結先生은 泰然無心하야 조금도 告苦露蹙함이없이 다만 唯一한보엇인 一張琴으로慰安의生活을 自悠自適할뿐이였었읍니다
장찻 歲色이薄紗하여 四面이웃집에서들은 送舊迎新의名節을잘쉬우랴고 떡쌀찟는방아소래 連鳴不絶하는가운데에 오즉 百結先生의집에는 一掬의粟과 半勺의米가없어 過歲할길이 果然茫然하였었읍니다 百結先生의夫人은 하도 氣가맥켜서 先生을바라보고 말하되 이웃집은 다─ 過歲하려고 방아질을하는데 우리집만 홀노 방아소래가없으니 어떻게 過歲하겠느냐고 한즉 先生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면서 仰天嘆息하며 夫人을 慰勞하며말하되『生死有命하고 富貴가在天하니 其來也不可拒오 其往也不可追니 亦何傷고』하고 이에 거문고를 당겨 杵聲卽 방아소래를쿵쿵타면서 夫人을 도라보고 우스면서 말하기를 이만하면 우리집 방아소래가 어떠하냐하였었음니다 이 曲調는 먼저 棄官歸鄕曲에比하야 더욱 絶曲名調로서 百結先生의 平生을 通하야 惟一한得意의造化曲이였으며 音樂史上無二의 神秘曲이였었음니다 이神秘造化의樂曲을 當時의世上사람들이碓樂(華海師全에는 確樂이라하였음)이라하여 千秋에 煮膾하는 것으로 俗言에방아풍류(風流)가 이것임니다
偉大한思想과 淸高한精神을 가진 道義의權現인偉人이 이와같이 貧寒이 到骨하였엇다함은 一見 新羅歷史에있어서 一點汚辱이안일가 하는生覺을 後人으로하야금 想起케하는 바가업지아니하나 깊이깊이 仔細히生覺을 들여본다하면 이러한偉人 百結先生의 存在는 도리혀 新羅歷史에있어서 偉大한자랑꺼리의 存在가아니면 안일가함니다 百結先生이 新羅의 偉大한存在로서 確樂卽방아風流가 百結先生의 總評價를持示하야 新羅唯一의 音樂家로 아니 우리東方의無二의音樂家로 萬古에傳香케된點이 先生이 新羅를政治하야 東里先生의芳名을傳하였음보다 그 얼마나偉大한것인지 알수업는 바임니다 萬若 東里先生의號로서 先生의道義가 當時 新羅朝廷에 通行됨이있엇다하면 百結先生의 號로서 彈琴確樂이 萬古淸風은 우리音樂史에 실어오지 못하였을것임니다

隱逸聖徒로서의百結先生
우리사람의 生活에있어서 非常한激變과 非常한衝動이 이러날때에는 반다시 어떠한方向으로나 反動的現象을 불너오는것입니다 그리하야 或은 急傳直下로 或은 突進勇邁로 自己의生活을 失敗에서 더욱 失敗로落價하거나 或은 失敗에서 돌처 成功으로 轉換하여오는것이 自古로 分岐되여있는 浮沈消長의 兩大課程일것임니다 前者는 人生生活에있어서 消極的墮落인 沈滯的現象이오 後者는 人生生活에있어서 積極的反正인 革命的現象일것임니다 이것은 人慾的인 富貴貧賤의 分岐와 人道的인 善惡義不義의 差別노 種々色々의 名稱現象을 가저오는것으로 前者는 個人主義의 利害關係를 多分으로濃厚하게把持하고 나오는現象이오 後者는 全體主義의 休戚關係를 大量으로 深重하게把持하고 나오는現象일것임니다 그러므로 前者의成功은 그壽命이短狹하고 後者의 成功은 그壽命이廣遠한것임니다 그런데 前者인 富貴的個人 成功에 汲々하는 무리가있고 後者인 道義的全體成功에 熱々한무리가 있으니 前者는 거의 小人卽凡人들이取하는 成功이오 後者는 모다 君子卽超人들이 願하는成功으로 前者는肥巳를 主로하고 後者는潤國을 主로하는것임니다 이와같이 後者인 超人들의 願하는道義的成功이있다하면 이는 全體主義로서의 君國의 最大幸福을 携進齎來할수있는것이다 때에있어서 이러한 超人들의 道義的生活의 擴充이 全體化的인 運命와氣數를 가저오지못하고 非違的卽不遇生活을하게되면 가삼에품은道와 마음에잠은 義를 滿身抱負한채그대로 宣布의鍾과 實行의鐸을 거두어미고 飄然한 一節으로 山林江湖사이로 閑雲野鶴을 좃거나 斗屋半窓에안저서 琴酒詩文으로 不平을雄鳴하거나 秋月春風에 虛徐하면서 牧童漁翁으로 花唱風嘯하는것이 그들의 惟一無二한 慰安의方法으로 隱名晦跡하야 潜居抱道하며 遯世는無悶하야 獨立不懼하며 魁然無徒하야 高蹈全志로써 專性泰氣하는 것임니다 그리하야 三公으로 더부러 不換不爭하며 우으로 天子에게 不臣하고 아래로 諸候에게 不事하는 高跳의精神과 廣蹈의 主義를 修鍊把持하고 있다가 自己의正義正道가 宣布實行할 時期가 到來하고機運이 滋熟하면 몸을 뜰처나와 帝王의 輔翼으로大象의師表로 稀世絶代의 勳功偉業을세우며 終是不遇하면 採藥拔薇하면서 水石을欣玩하며 彈琴嘯咏으로 天外에棲心하야 長徃永邁에 一■을 不暇하나니 中國의 巢父 許由 善卷伯夷叔齊 榮啓期 嚴子陵 介子推 老子等이며 우리東方에 神誌 百結先生 南郞述郞永郞 安詳 東京老人 李資玄 郭輿 安置民等이다─ 이 무리로서 이러한 超人들을 일홈하야 隱逸이라 或은 聖徒라 일컷는것임니다
우리新羅의 東里朴文良先生이 當時朝廷에서서 自己의道義를 宣布하랴고 非常히 誤々諍々하다가 뜻대로되지아니함을알고 飄然히下野할際에 自己가 恒常 思慕하든 中國孔子時代의 隱逸聖徒인 榮啓期에 故事를 志友하야 거문고를 끌고다니면서 自己의 不平을 풀며 同時에 最樂을삼았었음니다 그러면 지금 榮啓期라하는 隱逸의 對한記錄을引證하는 反面 解釋에서 우리百結先生이 思慕하든禮許와 百結先生이 隱逸道를大成한 遺粕殘滓를 玩味하여 볼가함니다
皇甫謐의 高士傳에 考據하여보면 榮啓期라하는이는 隱逸노서 道義를極悟한道人이였엇는데 恒常 鹿褒帶索卽포 사슴껍질로 옷을맨드러입고 색기오래기로 허리띄를 맨드러띄고안저서 거문고를타며 노래하기를조와하였었는데 때맟암 孔子께서 泰山에올나노시다가 도라오는길에 榮啓期先生을 차자보시고 禮畢坐定한後에 무르시되 先生이여 先生은 무엇을 그리 질겨하는요한즉 榮啓期는 타든 거문고를 멈추고 對答하되 나의 질거움이 甚히만타 하날이 萬物을賦生한가운데에 오즉 우리人生이 가장貴하거늘 내 이제사람으로 이世上에 태여났으니 이것이 한樂이오 男女의別에 男尊女卑한故로 男兒를貴하다하는데 내 또한 男子로 태여났으니 이것이 둘재의樂이오 人生이 日月을보지못하고 襁褓를 免치못한者있거늘 내 임의 行年이 九十이나되였으니 이것이 셋재의樂이오 가난한것은 선비(士)에 떳떳한일이오 죽엄이라하는것은 百徃의맡임이니 떳떳한데居하야써맡임을 기다리나니 무엇이 집걸지아니 하리오하였음니다 孔子께서 이말을드르시고 아─ 참으로 先生은 어진사람이라하시고 그 性靈의造化와 그高風의 樂趣를 譽讃不巳하섯다 하였음니다 이 中國五千年에 唯一無二하다는 最高大聖人이신 孔子의心眼으로 이와같이 禮讚을優拂케하든 榮啓期先生이였었음니다
우리 百結先生이 孔子를思慕치아니 하고 이 榮啓期先生을 思慕하야 道義를進修하고 妙理를退弘하였었음은 孔子의聖賢道보다 榮啓期의 隱逸義가 더욱 偉大하였음을 恒常思慕한것이 아닌가함니다 그리하야 恒常 거문고를안꼬안저서 南風의薰調를或타며 淸商의妙曲을 或發하야 平心舘氣의 優雅和樂을 가저오면서 一世에 逍遙超越하야 天下의사이를 含笑睥睨하면서 當世의 塵責을 不受하고 永遠한性命을 樹立하야 高風의寄心과 淸流의記志로 宇宙外에飄逸하야 帝王의門을 다시 두다리지아니하고 隱逸의極構를 當世에宣傳한분이였었음니다 萬若 子子로하야금 우리新羅의 衣百結如懸鶉하고 彈琴自慢하든 百結先生을 봄이있엇다 하면 鹿褒帶索하고 彈琴自慢하든 榮啓期先生에 對한 禮讃에서 一節이 더하였을것이오 萬若 孔子로하야금 우리百結先生의 確樂을들음이있엇다하면 榮啓期先生에 對한禮讚보다 二節이더하였을것이라 推想되는바임니다 나는 敢히말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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