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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15년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무용 15년 舞踊十五年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최승희 崔承喜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40-01 昭和十五年一月
면    수 300 300
기사
무용생활十五년─참으로 세월이란 빠른것이다 내가 十六세되는해─즉 대정십사년봄─날짜도 니처지지아니하는 三월二十일 무용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못하고 생전에 처음하는 구경으로 옵바를 따라서 장곡천정 공회당으로 석정막(石井漠) 선생의 무용회를 구경하러갔든날밤 사면이 새캄안 무대우에 푸른빛붉은빛 연주빛이 이리가고 저리가는것을 따라서 다─뜨러진 둥둥거리에 사르마다만 입고 남자와녀자가서로 붓잡고 허우덕허우덕 어듸를 오르랴고하는 모양으로 무용을하는데 그것이 나종에아니「山에오른다」는 춤이였고 그다음에「食慾을끈다」「因人」등 그외에 멫가지를보고서 무엇인지 모르게 가슴을 찌로고 또 생각하게하고 또 힘차기도하고 아름답기도하여 고만 정신이 팔니였읍니다. 옆에 안젔든 옵바가「너─저것좀 배우지안켓니?」「배우면될까?」「되지 너는 체격도 조아질수가있고 또 음악도조화하고 학교에서 율동체료도 잘하였으니까된다」「저걸배워서 무엇하오?」나는 옵바에게 물었다 「무엇에 쓰는것이아니라 배워가지고 조선에도 저런 예술운동이 있서야한다.」
사실 그때 막 고등녀학교를 졸업은 하였지만 「예술운동」이 무엇인지도 몰났다. 옵바가 밤났 친구와가티들 예술운동 예술운동하니까 그것이 인생을위하야 좋은길이고 사회를 위하야 좋은일이거니 하고만 생각하였지 무엇을 어떻게 하는것인지도 몰났었다. 그러나 나도 좋은것을 배워가지고 좋은일을하면 그것은 좋은것이아닌가? 하고 생각이되였음으로 우선 배워보기로 결심을 하였으면서도 사실이지 그날밤에 잠은자지를 못하였다. 웨 그러냐하면 나는 학교를 졸업할임시에 꼭 음악가가 되고자하였다 또 나는 다른과정 보다도 음악에 재조가 있었든지 김영환선생께서도 「승희는 음악학교엘가지」하었읍니다. 그러므로 잠을자지못하고 생각하게된거슨 다른것이아니라 음악보다 무용이나흘까? 하고 생각되면서 또 왼일인지 나의 어린생각에도 음악을배워서 무대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부르는것이 났지, 벌거벗고 춤을춘다는것은 좀 천하게도 생각이되였었다. 그러나 예술에는 귀천(貴賤)이없다는 옵바의말을 드르니까 그럴듯하고 또 이튼날아츰 옵바의말이「조선에 음악가는 여지것 훌늉한사람이 만히났으나 무용가는 한아도 나지를 아니하였으니 네가 그선구자(先驅者)가되라」는 권고이였기때문에 그것도 그럴듯하여 석정선생을 따라서 동경으로 가기로하였든 것이였다. 또 이박게도 또한 가장 여태까지 아모도 모르는 중대한사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른것이 아니라 내가 녀학교삼학년때부터 가세가 급각히 몰낙함을 따라서 월사금과 학비도 없어서 학교도 못다닐 지경이여서 학교에서는 월사금면제까지도 하여주섰으며 집에는 먹을것이 없어서 먼 친척의집에 가서 어린아해들의 학교과정의 연습을 식혀주면서 조조히 밥을어더먹을수박에 없게되였으며 이렇게 고생을하면서 졸업을하고나니 웃학교를 가고십흐나 더구나 음악학교를 가고십흐나 학비가 없으니 어쩌는수가 없었으나, 다행히 여러선생님이 생각하여주서서 교비생(校費生)으로 동경으로 음악학교에 입학을 식혀주시겠다고 하었은지라 마음에 한없이 깁뻣으나 나이 열여섰살박게 아니되니까 아즉 웃학교에 올나갈 나희가 모자라는것이였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일년만 집에서 놀고있으면 래년에는 보내주신다고 하였으나 말슴은 고마우나 일년을 그냥 집에서 논다는 것도 재미없은 일이기로 녀자사범(女子師範) 에를 시험을 치렀드니 입격은 되였으나 여기서도 어린아해가 어떻게 어린아해를 가리키겠느냐고하면서 일년만 집에서 놀다가 오라고한다. 그래서 그날은「내가 웨나희가 모자라나」하고 나희한탄을하면서 집에와서 울고있든날밤, 바로 그날밤 옵바하고 석정선생의 무용회를 갔었든것이였다.
이렇게되고보니 집안 살님에 보태여가는니 라고도 옵바가 다달이 얼마식 가지고 드러오는 원고료(原稿料) 박에 없은것을 뻔연히 알면서 공부도 공부이지마는 한식구라도 없어지는것이 말하자면 제밥버리 제가하는것이 상책이라는 마음이 복바처서 울면서도 용기를 내여서 석정씨를 따라가게 된것이였다.

떠나는날 아츰이였다. 왼집안이 눈물빛이였다. 내가 망내딸임으로 부모님께 귀염도 만히 바덧었은데 무용공무도 공부이지마는 생활이 넉넉하야 유학을 보내는 형식으로 보낸다고 하여도 섭섭한일일터인데 더구나 부모형제가 우선다각각 제가 버러먹고 지낼곳을 찾는 마음으로 동으로 서으로 헤여진는듯이 작별을하게되니 이아니 서러울일이랴! 부모님은 떠나는것 보기실타고 정거장에도 아니나오섰다. 옵바 혼자서 나를데리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나는 석정선생이 타고게신 이등차실로 드러가서 감안히 안저있었다. 옵바의 눈에도 눈물이 글성글성하였다. 나도 고개를 파묻고 울었다. 옵바도 내맘알고 나도 옵바맘을 알것마는 왼일인지 설어웠다. 예술도 예술이려니와 왼일인지 생활에 핍박을받어서 쪼겨가는듯이 생각이 되였다고 나종에 옵바가 그렇게 편지하였다.
기차가 막─정거정 푸라트홈에서 남쪽을 향하야 움지기려할때 힐낏 내여다보니까 집에 게신줄 알었든 어머님이 손을 내여저으시면서「안돼안돼」하시고 기차를 쯔차오섰으나 나도 읏지할도리가 없었으며 옵바가 어머님을 부축하여 이리켜듸리는 것을 창문으로 내여다보고는「왼일일까 왼일일까」하고 초조하고 궁금마음으로 현해탄을 건넜든것이였다 나종 옵바에게서 편지가왔는데 학교녀선생님 두분이 집에와서 어머님을 뵈옵고 반대를하였기 때문에 쪼차나오서서 나를붓들냐고 하섰든것이라고 하였다. 아아 그때 내가 어머님께 붓들니였드면 나는 소학교에 년선생님이 되였섰겠지? [사진] 춤추는 崔 承 喜 ……(東京劇場에서)
석정선생문하에서 삼년간수업(修業)하는 동안이란 참으로 내일생을통하야 제일깁브고 행복스럽고 유쾌하고 질거웠든시절 이였다. 끗없는 희망과 한없은 이상을 가지고 모든것을배웠다. 무용의 기본연슴은 물론 밥짓는법, 반찬맨드는 법, 빨내하는법, 음악을듯는법, 또 피아노 치는법 그외에도 틈있는대로 의상을 맨드는법, 의상의빛을 고로는법까지 배웠다.
이리하야 반년이 지난다음에 나는 처음으로 무대에 서게되였다. 그해가을 석정선생의 신작무용발표회에 여러연구생들과함께 방악좌(邦樂座)무대에 서게된것이 나의처음「데뷰」이였다. 이처지지도 아니한다. 나는 다른 두연구생과함께「금봉어」라는 소곡을추었다. 다행이 실수도 하지아니하고 또 전문비평가들 말슴이 장래가있다고 칭찬하여주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가고 이태가 지나갈싸록 나에게 한가지고 민이 생기는것이있으니 석정선생이 너무도 무용회를많이 갖게되여 오늘은 대판 래일은 명고옥 이렇게 도라다니게되는때가 말이 있게됨을 따라서 선생의 창작력이 적어질뿐아니라 처음에 독일에서 도라와서 맨든작품과 그후에 맨드는작품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점점 예술적으로 퇴보를 하는것과같었다. 그것은 나의어린 소견에도 「선생은 돈을아시게되였다」하고 혼자 한탄을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정신이 시일이 갈싸록 나의 기대와는 점점 어그러저가는─ 커다란 고통이되여지는동시에 한편으로 수다식구를 데리고 무용을하여서 생계를 니어가는선생을 동정하면서도 나의 번민은 점점 날이갈싸록 커지는 것이였다. 이런사연을 길게적어서 옵바의게 보내이면서 어듸 외국으로 공부를하러가게 되였으면 좋겟다고 당돌하게 말을하여보았다. 그러나 옵바는 늘 격려하는말을 써보내이면서 좋은기회가 있기를 기대리고 참고 있으라는 답장이왔다. 그러나 드디여 고향으로 도라올날은왔다. 그날은 다른날이아니라 석정선생의 처제(妻弟) 석정소낭(石井小浪)씨가 남편으로 마지하여 따로히 연구소를내이고 나아가게되는 그때 석정선생과 석정소량과의 사이에 언쟁이났는데 우리들 대다수의 녀자연구생들은 소낭씨의입장에 동정을하야 말하자면 동정동맹 파업을하고 다─각각 자기집으로 도라가게 되였든것이였다. 나역시 공부라고 불과삼년도 하지를못하고 조선으로 도라온대야 그것을가지고 소위 신무용운동을 한다는것도 너무도 대담한일이고 하여 여러가지로 생각한결과 어쨋든 집에가서 당분간 놀고있다가 기회가있으면 외국으로 한번 가보는것이고 그러치아니하면 동경으로 더─배우러와도 소용이없으니 그냥서울에 있어서 결혼생활이나 하는수박게 없다고 혼자서 작정을 하고서 서울로 도라왔든것이였다. 제일 놀낸사람은 옵바이였다.

독립무용공연회를 하랴고 고향으로 온것도 아니건마는 당분간 놀고있으며 학비문제로 외국에는 갈수도 없고하든차에 경성일보에서 말이있어서 자기가 배운것을 연습도하여 볼겸 얼마나 자기가 무용을 창작할수가 있을까 하는점도 자기자신이 자기를 시험도 하여볼겸 경성일보주최로 공회당에서 제일회무용발표회를 열였었다. 조선에 아즉 순수예술무용이 없었든탓이였든지 각방면에 평판도 크고 또 반향도 상당히 있어서 무용연구소라는 상설기관을 한아맨드러서 갔게되였다. 그러나 제일회제이회를 하여가는 동안에 한가지 고통이생기여가는것은 역시 연구소를 유지하여가는 문제이였다. 그러나 어떻게 노력을하야 一년에 춘추로 한번씩 신작무용회를 갖게되였으며 또 신작무용회를치르고는 지방으로 순회공연도 가젔었다. 그러나 경성에나 지방에나 첫번공연회를 가젔을 때에는 조선에 없든것이니만큼 무엇인가하고 한번 보러았든손들이 회를거듭하여 갈싸록 첫재 흥미를 늣기지못하는 탓이는지, 내자신의 력양이 부족하야 그렀음이였는지 보러오는 손들이 늘지를아니하고 오히려 주러드렀든것이였다. 이리하야 경제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작고 위기를 당면하여가노라니 첫재 닥처오는것은 연구소의 허다한식구들의 생활문제와 유지문제이였다. 그러니 매일장천 옵바와가티 타개할방침을 생각을하니 이연구소를 유지하여가려면 첫재 무조건하고 희생적으로 원조와동정을 하여주려는특지가가 있어야 할터인데 이것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였다. 사실 누구의소개로 그러한 특지가가 있기는하였으나 멧번맛나를보면 처음 맛나서 이야기하든때보다 이야기가 달나지는 것을보고는 옵바가 압장을나서서 반대를 하였든것이였다. 어느날 옵바의말이 「하는수없다. 너는 싀집을가거라」「가려야 어듸 갈떼나있소」이것이 나의대답 이였다. 그래 나의 나희 스무살이였다. 열여섰살에 무용을배워가지고 열여덜살때에 독립무용공연회를갓고 스믈살적에 싀집을 가게되다니 생각만하여도 나의무용생활이란 주마등(走馬燈)격이였다. 이렇게 일즉이 서드러가지고 이렇게 일즉이 자최를 감추게되다니 하면서 혼자서 한탄도하였으나 하는수없는 일이였다 나의무용생활이란 아츰에 일즉이 피였다가 금방 사라지는 나팔꽃같구나 하고 생각도 하여보았다. [사진] 粉裝室에서愛女와戱弄하는女史
「저기 좋은 신랑감이 한사람이 있는데 너─맛나보려느냐?」하면서 박영희씨댁에서 처음 맛난이가 남편 안(安)이였다. 옵바의 소개하여주는 말을 듯건대 그는 건장하고 머리가 조코 집안이 굼지는아니하고………하다는말이였다. 단지 험이러는것은 나희 아즉어리고 또 대학를졸업을하랴며는 인제도 삼년이나 있어야된다는것 이였다. 사실 결혼문제가낫으니 말이지 옵바뿐아니라 나자신도 결혼문제를생각할때에는 때때로 가슴이 답답한 적이 있었다. 일생을 결혼을 아니하고 예술에다가 몸을밧처, 이렇게 생각도하였으나 어린생각에도 인생으로써 밟어야할일은 정당하게 밟으면서 예술을위하야 노력을하여 훌늉한예술가가 되여야 그것이 참으로인격과예술이 갔추을예술이 이라고 할수가있지 개인의생활의 일부분을 희생하여가지고 예술가가 된다는것은 왼일인지 절늠발의 예술가와 가티 생각되였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자신을 도리켜 생각할때 「나」도 무대에서 벌거벗고 춤을추는사람이라 누구가 나를 보고서 나를 세상에서 흔히 이르는 「충실한안해」로써 마지할사람이있겠는가?」 이것이 나의 결혼문제에있어서는 최대의 고통이였다. 옵바의 말은 이러하다 「결혼을 한뒤에도 무용을 게속하여보아라 마는 역시 유지가 골란일것이니「안」을낭은 동경으로가서 공부를 계속하게하고 너는 싀집에 드러가서 싀부모 봉양하고 살어라 결혼후에 두사람이 다─사회적으로 훌늉하여진다는것은 좀 어려운일일것이다. 한쪽이 잘되랴면 한쪽이 희생을 당하여야한다. 너는 이왕 실패을한 세음치고 네남편만은 힘있은대로 내조를하야 그사람으로 하여곰 훌늉한 인물이되게하여라」 [사진] 柊林에서 右·로버─트테일러 中·崔女史 左·프란쇼─트, 톤
그이듬해 우리는 청량사에서결혼식을거행하였다. 옵바의 말대로 한다면 결혼후에나는 곳 시골로 내려가서 싀어머님을 모시고 사르면서 농사나보살피고 안은 곳 동경으로가서 공부를 계속하여야 할것인데 그렇게하려고보니 이번엔 안이 말을아니듣는다 「옵바가 실패를 하였기로 나조차 실패하라는법이 있소 이번엔 내가 하여보리다」 참으로 의외의일이였다. 의례히 자기는 동경으로갈터이니 당신은 시골로 가라고 할줄알었더니 이와는 정반대의 말을하니 한때는 어찌할줄을 몰났으나 어듸 최악의경우까지 하여보자는 용기까지 오르게되여 결혼후에 두회의 신작발표회를 갓게되야 조선에서도 합 칠회의 신작무용회를 삼년동안에 가지게된셈이였다. 결혼후에 옵바의 지능과 안의지능을 합하야 계속을하여 보았으나 점점 경제적곤란만 더하여갈뿐이였다 그동안 임신을하야 나는 임신칠개월의 무거운몸을 가지고 제칠회 신작무용회를 개최까지도 한 위험하기 짝이없는 비통한 사실도있었다. 이렇게 되고보니 인제야말로 하는수없이 안은 동경으로 다시 공부가기로하고 나는 첫딸을 나아가지고 시골싀집에 나려가있었다. 안은 동경에가서도 늘 하는편지가 다시 동경으로와서 재출발을 하자는것이였다. 재출발재출발 말이 재출발이지 넓은동경에가서 첫재 여간한 돈을 가지고는 엄두도 못낼뿐아니라 첫재 최승희라는 이름까지 잊어바리게된이때에 다시가서 권토중래를 하다니, 그것이 될상십지않었다. 그러나 한가지 방법이있는것은 다름이아니라 그전에는 읏지돼서 탈퇴를 하였든간에 이제와서 다시 받어서 연구소에 두어주신다고만 하면 그것쯤은 의지가되여서 좋으리라고 생각한것이 다른것이아니라 다시금 석정선생의문을 두드리는수밖에 없이생각이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안에게하였드니 안이 곧 편지하기를 석정씨가 다시 쾌락을하였고 또 매월생활비도 다─내이기로하였으니 곧오라고 하 면서 돈칠십원을 붙처왔다. 그제야 나도 용기가났다. 사실말이지 그러한 석정선생의 호의가 없었든들 나도 절대로 떠나지를아니하였을것이다. 외그런고하니 안은 그때 도라간 싀아버님의 은급을가지고 공부를 하게되였는데 나까지 어린애를 데리고 가서있으면 자연생활비도 많이들터이고 그러느라니 서로 고통인데다가 안의 공부도 아니되고 나의무용도 아니되여서야 두가지가 다─손일것이니까 절대로 가지를아니하랴고 하였으나 석정선생이 그만큼 호의로써 나를마저주신다기에 기뿌고 좋와서 당장 떠나기로 작정을하고 서울로 올나와서 서로의지도되고 또 무용도 서로연구를할겸 나와고생을 처음부터 가치하든 김민자(金敏子)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기로 작정을하든 몇일전 산후에 섭생을 잘못하였든 탓이였는지 기침이 작고나면서 한열이 왕래를하고 가슴이답답한데 하도 이상스러웁기에 안국동 임경재씨에게 가서 진찰을 받었드니 천만뜻밖에 늑막염(肋膜炎) 벌서 물이 많이고혀있다고 하면서 당장에 물을 반사발이나 빼여내이고보니 그야말로 청천에벽력이라 당분간 동경을 못가게되는것도 큰일이려니와 그보다는 무용이란 몸전체를 움지기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인데 설령 병이 낫는다고 하드라도 무용을 게속하면 재발되기가 쉬운지라 나의 무용생활이란 이로써 아조 마즈막인가보다고 생각이되면서 그래도 만일 다시 공경엘가면 동경에서 여러무용가들과 가치억개를 견우어 한번 자기의힘을 시험하여보리라는 희망까지도 하로아츰에 꿈이되고말었다. 그리하여 부득이 동경행을 중지를하고 전심전력 병을치료하기에 정신이없었다.
석달후에 겨우 병은 전쾌가되였다. 그동안에도 안은 동경으로 될수있으면 얼는 오는것이 좋겠다 고하였다. 동경엔 좋은의사도 많이있고하니까 병곳치기에도 편리하지안느냐고 하였으나 염려되는것도 병에 재발이라 동경가서 만일 다시 무용을 게속하다가 늑막염이 재발이 되는날이면 그때가서는 목숨까지도 건질수가 없을것인지라 나는 만만하니 임선생께 작고 다짐만 받고있었다 임선생말슴은 「다시 무용을 하여도 관게없을것 같읍니다. 아조 재발이아니되리라고야 어듸 보증을 할수가 있읍니까?」 이리하여 우리집안식구이나 나자신부터도 다시 무용을 시작하러 동경으로 간다는것을 여간 주저하지아니 하였다. 그러는중에도 안은 독촉이 성화 같다 「녀필종부라니 가렴으나」 하는 옵바의말을 듣고서 「자─생명을내여걸고 재출발을 하여보자」고 최후의결심을 하고서 소화七년十一月의어느날 첫눈이 부슬부슬나리는 경성역에서 남행열차에 나와 나의 딸을 업고있는 민자는 웅크리고 앉어있었다.

비오는동경역에 어린애를 업은민자와 같이 조선옷을걸치고 내리인 우리를 마저준 사람은 안이였다. 철모르는 열여섯살때에 다팔머리에 조선옷을 입고 내리든 칠년전의 나의그림자와는 퍽도 그동안 험한파도를 건는듯이처량스럽고 신산스러운자태로써 동경에 막버리하러한 남편을 찾어서 냄비쪼가리 박아지쪽을들고서 내리는 농촌의 부인네들 틈에 끼여 내리였다. [사진] 昭化十二年二月渡歐告別舞踊上演次로 東京으로부터 京城驛着
그러나 놀나운일이 또한가지 생기였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석정선생이 내가 다시 연구소로 들어오는것마는 찬성을하였으나 우리들의 생활비를 전수히 책임지겠다는말슴은 없었다는것이였다. 그것은 나종에 알고보니 안이 나로하여금 용기를얻어서 어서 건너오게하느라고 거짓말을 한것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다시 고향으로 도라갈수도 없는 일이다 죽으나 사나 얼마동안 지나보는수밖에없었다. 다행이도 나의가정을 짐작하신 석정선생이 유치원아해들의 무용연습을 나더러 통맡어서 식히라고 하시면서 그수입은 전수 나더러 가지라고 하시는말슴이였다. 그것이 한달에 겨우 삼십원, 안에게 학비로오는 은급이 매월삼십원, 함해육십원남저지를 가지고 네사람이 생활을 하여가지아니하면 아니되게되였다. 그러나 다행한일은 날이가고 달이갈싸록 내가 석정선생의 무용회에 나가게되면 옛날에 나를알든들이 나를반기여주고 또 내가 추는춤에 앵콜을보내이여 나를격려하는것이였다. 그래서 석정선생이 나아가지를 아니하는 다른데에도 나개인의 자격으로도 차차 나아가게되였다. 그리하여 二년동안을 경제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한없는 고통을받으면서도나는 나의무용을 지지하는 을 길르기에힘썼다.
二년동안이나 두고 제일 근심하든것이 늑막염의 재발이였는데 다행이도 아모 이상이없이 지내왔다. 참으로 임명재씨는 나의은인이다 일생에 이치지안는 은인이시다.
자─이만하면 내가 단독으로 신작발표회를 한다고 하여도 자신은있었으나 역시 내개인으로는 엇쩌는수가없었다. 그것은 다름이아니라 내가 석정선생의 문하생이기 때문에 석정선생의 양해와후원이 없으면 도저히 할수없었든것이였다 다행이 편론가 삼산평조(杉山平助) 씨가 여러가지로 선생의양해를 받어주어서 소화구년 五월에 일본청년회관에서최승희신작 무용발표을 열었든것이였다.
잊혀지지는 아니하는 그날! 그날은 마츰 대판을 음습한 태풍(颱風) 때문에 대판에 물란리가나고 집이문허지고 하든날이라 동경에도 여간 이만저만한 폭풍우가아니였다. 아츰부터 내리퍼붓는 비가 왼종일 끗칠줄모르고 바람에섞기여 댓줄기같이쏟어진다. 우리는 저녁때까지 집에웅크리고 드러앉어서 하나님만 원망을하고 앉었섰다. 그러나 어쨋든 회장으로 가보자 단한사람이라도. 하자. 이렇게 결심을하고 신궁의원으로 향하였다 전차에서 내리여 회관을향하여 거러가면서보니까 때는 오후네시가 지날낙말낙하였는데 벌서 회장앞에는 우산을 든 군중이 렬을지여가지고 느러서서있다 나는 너무나 감격에넘치여 고개를 숙인채 울면서 회장옆문으로 드러가고 말었다.
제일회공연이 끗나자 곧 개조사 사상산본실언(山本實彦)씨의 주선으로 신흥과 계약을하여 반도의무희(半島の舞姬)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이어서 각지방으로부터 초빙공연이있어서 거의 매월수십회의 공연이 있게되였다. 이것이 불과 몇달동안의 일이였었다. 그리하여 우리는그이듬해 영복정(永福町)에다가 무용연구소를짓고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또 한가지 마즈막으로 남은문제는 내가 늘 념원(念願)하든 양행문제이였다. 그러나 내가 결혼전에 양행을하려는것은 순전히 공부하러가려고 하였든것이나 이번에 가고자하는게획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한거름 더─나아가서 내가 맨든조선춤을 세게에다 한번 소개하여보고자하는 야심이였다 「나는 세게에 유명한무용가들의 맨말석이라도 좋으니 해외에 나가서 조선춤을 한번 추어보고자하는 것이 나의소원임니다」 하고 나는 어떤 신문기자에게도 말한일이있다.
그러자 소화십이년봄에 아메리카 대사관의 소개로 한사람의 아메리카 흥행사가 나타났으니 그는 이름을 「바킨쓰」라고 하는사람이다 「바킨쓰」는 저 유명한 매란방(梅蘭芳) 이를 아메리카에 소개한 사람이다. 그와나와는 우선 일년간계약으로 전아메리카를 순회공연하기로 하였다. 가을에 떠나자든 것이 자연 이일저일하여 소화十二年十二月二十九日에 횡빈부두에서 질부환(秩父丸)에 몸을언젔다. 물론 나혼자의 독무회이기때문에 제자도 데리지아니하고 독무만 한삼십개 추리여가지고 「산푸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도착하든길로 곧 그곳극장에서 아메리카에있어서의 제일회공연을하여 다행히 평판이좋았다. 이어서「로스앤젤쓰」에서 공연을하고 뉴욕으로가서 공연회를 맛게되였는데 여기서 잠간 이야기할것은 아메리카에는 두가지의 흥행회사게통이 있는데 한회사는 저 유명한「메토로포리탄」 오페라하우쓰를 경영하는「메토로포리탄·뮤직칼·로」이고 또한 회사는 NBC라는 라듸오 방송국을 많이 가진 흥행회사인것이다 이두회사의 사람들이「산푸란시스코」에서 나의 무용회를 구경하고 서로 자기네의회사와 게약을 하자고 하여 「바킨쓰」를 중간에넣어 가지고 게약을 하게되는데 나는「메토로포리탄」하고 게약을하여 우선 육개월동안 게약으로「메토로포이단푸레쎈트 라는 「렛텔」을 가지고 전미국을 순회공연하게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일지사변때문에 미국사람들의 심정이 지나사람을 동정을하게되여 점점 배일의 공기가 농후하여저가면서 일화 비매동맹을하게되는 판이라 그러나 만란을 배척하고 우선 세게제일의 도회 뉴욕의 낄드극장」에서 제일회공연을 열었다. 그날밤 나는 만감이 교회하였다. 동양사람으로도 대체「메트로포리탄」과 공연게약을 한사람은 모든예술가중에서 한사람외에는 여태것없었다 「사람이란 꿈을 꾸고사는데 그꿈이 현실이되는수가 있는게로구나」 하였다. 다행히 「산프란시스코」로부터 「로스안젤스」로 또 뉴욕에와서도 비평가들의 비평이 조왔다. 「구라파」의 「파리」니 「백림」이니하여도 지금의 모든예술가들은 전부 뉴욕에 집중되여있는니만큼 이뉴욕의 비평가들의 붓끗이 그들 예술가들의생명을 좌우하는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안과 공포를 늣기게하는것은 레의배일문제이였다. 그들은 나더러 라듸오 방송으로 배일연설을 하라고 전화로 협박을하기도하고 공연회의 있을때마다 회장앞에서 일화배척(日貨排斥)의 「마크」을 파는등 하는수없이 뉴욕에있는 일본총령사관에서는 나의신변을 걱정을하여 주어서 뉴욕경시청에다가 말을하여주어서 나의신변을 경관이 보호하기로되여 무대뒤화장실에까지 경관이 드러와서 직히고 서게쯤 되였으니 그회가 무사히 진행될리가 없었다. 듸대여 「메트로포리탄」에서는 정치적 리유에의 하야 부득이 귀하와의 게약을 파기한다는통지가왔다. 그렇다고 거기서 곧 구라파로 건너간다는것은 여간 위험한일이아니였다. 적어도 어듸든지 반년이상의 선전이 필요하다는것이다. 그러기에 뉴욕에 있는 가령「크라이슬러」같은이도 一년후의연주회입장권을 一년전에 미리 팔고있으며 거기따러서 여러가지 선전을하고 있는터이라 미국에있어서의 나는 나의선전도 부족하거니와 구라파에있어서는 더구나 선전이 불충분한지라 어떻게하든지 미국에 머무러있어서 좀더 공연을갖고 구라파로 가랴고하였든것이였다. 그리자 어느날 NBC(유대인게통의 흥행회사)에서 사람이와 가지고 가을씨슨부터 갓치하여보자고 하면서 자기회사의 게통으로 구라파에도 각국에 흥행회사가 많이있으나 구라파 십이개국의 순해공연을 게약하여주지아니하겠냐는 주문이였다. 우리는 쾌락을하여 가을씨슨에 또다시 뉴욕을 시작하여 다른도림들로 다니면서 공연을 게속하였다 게약과동시에 그들은 구라파에다가도 선전을 시작하는 모양이였다. 그리하여 파란많은 미국무용공연을 꼭 一년만에 맛추고 소화십삼년 十二월十七日에 대서양을 건느는 불란서가 자랑자는 세게의일의 기선「노르만」호에 몸을실었다. 그리하여 이듬해一月卅一日에 파리에있어서 구라파 최초의공연을 치르고 그후로는 매월 평균십오회(하로걸너큼씩)의 공연을 갖게되여 부랏셀, 원, 부다페스트, 해아(海芽)를 비롯하여 구라파의 남 이타의남불란서의 유망한곳이란 다─도라다니는중 세게무용가콩쿨 이「부랏셀」에서 열리였을때 심사원도 되였고 구주에있어서의 나의공연은 탄탄대로이였다. 이것이 오늘까지 지내온 간단한 나의 이야기다. 그러나 세상이란 알수없는일이 벼란간 생기는 일이있어서 그전부터 으르렁대이는 구라파의 천지는 전운이 휘덮이여 일촉즉발의 위험한형세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가을씨슨에 육십여회의 무용회를 전구라파에 갓기로 하였든것이 전쟁의 돌발로 나는 그때 남불란서의 해안지대에서 피서를하고 있었는데 부득이 대사관 의알선으로 제삼피란선상근환(箱根丸)을 타고서 귀국의길에 오르게되였다. 나의타고있는 배에는전해군대신 대각대장(大角大將)을 비롯하여 재게의명사들과 각국에 주재하였든 외교관들의 가족이였다. 상근환이 태서양을건너서 뉴욕으로 드러오랴할 때 배안에서 무선전화로 누가 나를부른다. 나가바드니 뉴욕에있는「메토로포리탄」의마네저 이였다. 반갑게 인사를주고 받고하고서「염려말고 미국에서 무용공연을 더 하고가시오. 미국은 아즉 안전하오. 원체 당신은 실력이있으니까 배일문제도 문제가아니오 또 당신의 무용을 가지고 배일문제의 오해가 생기지 안토록 노력을 하십시다」하는 전파이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금 뉴욕에 발을듸려놓고 우선 령사관에 드러가서 짐을풀고 전아메리카에 무용공연을 또다시 「메토로포리탄」의손으로 치르게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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