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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무대의 기억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첫 무대의 기억 첫舞臺의記憶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홍난파 洪蘭坡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9-12 昭和十四年十二月
면    수 322 322
기사
演奏會의 첫舞臺를 밟기는 二十六年前 내가十六歲되던해 크리스마스 祝賀音樂會에 無伴奏의 獨奏를 한것이라고 記憶된다. 그러나 그때의일을 至今回想하면 그것이 나의 處女舞臺에 틀림은없지마는 그러나 이것은 演奏람보다도 그當時 아무도 듣고보지못하던 珍奇한 樂器를 求景식였음에 지나지 않었을것이고 그後로부터는, 각금각금 이珍樂器를 손에 들고 舞臺에 올으기는 했지마는 亦是 아무런 感銘도 없는 아무런 스베니아도 찾일수없는 一種의 兒戱에 지나지않었다고 생각한다.
한便으론 工夫하며 한편으론 가르치며 하다가 二十一歲때에 東京으로 건너가서 東京音樂學校에 入學을하야 正規의 敎育을 받는 同時에 가끔가끔 열리는 校內校外의 演奏會에 드나들기 시작한 뒤부터 비로소 音樂演奏란 어떤것인지 짐작이나 하게되었다.
못처럼 들어간 東京音樂學校도 本科로 進級되자마자 一身上 事情으로 中途에 退學한後 집에돌아와서 一後가깝게 놀고지나다가 다음해에 다시 渡東한때는 大正九年 늦인봄이었다. 그해에는 波蘭土에 大飢饉이 있어서 波蘭土 飢饉救濟에 여러가지 事業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날때에 마츰 東京있는 岳陽會란 團體의 主催로 「波蘭孤兒救濟大音樂會」가 그해九月에 神田 日本靑年會舘에 열렸는데 그때나는 米洲로부터 新歸朝한 作曲家 石川義一氏와 無名作曲家 太田忠(지금은 映畵音樂作曲家로 活躍中) 君과함께 이演奏會에 出演할 光榮을 얻었다. 이때만하더라도 東京天地에 音樂홀이라곤 東京音樂學校奏樂堂과 이日本靑年會舘의 二個處뿐으로 日本靑年會舘이라면 그當時 一流樂人들의 獨擅場이었던것이다. 定員 千三百人인즉 至今의 京城府民舘大講堂보다 조금적었을것이다. 포스터―가 걸리고 프로그람이 發表되고──하니, 東京音樂學校의同級生들은 모두다 눈이둥그래저서불어워했다. 그中에도 첼로科의高勇吉君은 路上에서 나를 만자자연방 고개짓을 해가며 「君 偉いね, 學校を止めてよかつた. 僕も早くそんな處へ出たいね」하고 불어워했다.
岳陽會란 某銀行重役들의 俱樂部名이다. 그런만치 그네들의 背景이나 地盤을 利用해서라도 千三百名들어가는 이會舘을 채우기에 容易했던것 같았다.
演奏會席上에는 波蘭國公使를비릇하야 內外國 紳士淑女들이 立錐의餘地가 없으리만치 드러찼다 나는 第一部第三部와 第二部第三에 두번다 太田忠君의 伴奏로出演했는데, 第一部의 獨奏가 끝나자 三請의拍手禮를 받았고 演奏會가 끝난後에는 特別히 波蘭公使로부터 感謝하다는 人事와함께 握手를받었다. 말하자면 이것이내가 音樂工夫를 시작한後 舞臺다운 舞臺를 처음밟은것이라고 할수있으며, 또그날밤의 感激이야말로 至今껏 잊을수없는것이다. 내 率直한 吿白이지마는 나는 이演奏會에서 얼마나 큰勇氣와 自負心을 얻었던지, 그일이 있은지 未久에 일부러 獨奏會를하러 朝鮮에까지 돌아왔고, 또朝鮮사람으로서의 最初의獨奏會를 그해十月에 鍾路靑年會舘에서 열었음도, 至今생각하면 호랭이 담배먹던時節과같은 隔世의感이 없지않다. 無知보다 더 두려운것이 없다는말도 있지마는 그때의 그프로그람으로 獨奏會란 서투른用語를半島樂壇에 披露하던일을 생각하면 이제는 부끄러울時節도 이미 지난만큼 오직 끝없이 그 時節이 그리웁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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