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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음악—조선악단의 현상과 비판—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문화와 음악—조선악단의 현상과 비판— 文化와音樂—朝鮮樂壇의現狀과批判—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김관 金管
출처정보 인문평론 人文評論
연    도 1939-12 昭和十四年十二月
면    수 122 (122)
기사
朝鮮에 樂壇이란것이 存立해있다고 假定한다손처도 그것이 다른 文化部門——文壇 畵壇이라 불리우는것과 同樣으로 社會生活의 一分科를 能히 負擔할수있는 存續機關이냐 아니냐할때는, 慨愧한 노릇이기는하나 非文化的인 狀態에있고, 一種空中樓閣과 마찬가지의 不名譽스러운 樂壇임을 自認할수밖엔 없을것같다.
오늘날의 朝鮮의 樂壇은 文學이나 다른 文化分野에있는 사람들이 直觀的으로 드려다보고 말하고있듯, 音樂人의 無敎養과, 排他的인 히로이즘(기실은 卑屈이지만)과 職匠意識에 沒頭한 非精神主義者的인, 말하면 非文化的인 狀態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現代의 音樂의 危機가 어떠한面貌를했고 그것은 우리들의 音樂, 樂壇과 如何한關聯과 依存을 가지고있는지를 究明할냐 아니했고 또한 우리들의 音樂文化가 어떻게 되지않으면 아니되리라는 問題를 跋渉을해본일도없다.
到大體 무엇을내세워 朝鮮文化의 一翼으로서의 音樂文化라고 할것인가, 音樂會가 超滿員의 盛況을呈한다고 그것으로서 곧 音樂의 社會的 浸潤力을 證左하는것이라고 떠드는 스노비스트도 한둘이 아니기는하나 오늘날의 樂壇의 文化的位置를 正確히 認識하고 淺薄한 近視眼的인 啓蒙主義를 批判하므로써 文化와 音樂의 相關性을, 그리고 우리의 音樂文化가 透視되는 앞날에의 로—쓰를 正視하지 않어서는 아니될줄안다.
現代의 性格의 特徵은 簡單히 말하면 現代文化를 創造한精神 그自體의 危機에있다. 오늘날 어떠한 사람이라하드라도 여기에對한 明快한 判斷을 내릴수 없으리만치 精神的支柱는 分裂되였고 茫莫한것이다. 그러면 가장 精神的이라하고 가장 感性的인 藝術이라고 認定되는 音樂에는 그러한 現代的性格이 어떠한 모양으로 示現되여있고 變革되여 있는가를 爲先 밝히고 나가야할것이다.
봐레리—는 現代의 精神의 危機의 原因을 極度의 知的發展의 結果에서 說明하고있지만 기실 우리는 모든 政治的, 經濟的인 現象의 根底에서 思想이나 硏究나 推理等 知的인것의 敗北를 쉽게 發見할수있다.
봐레리—가 「精神의政治學」가운데서, 現代의 諸條件은 人間이 오늘날까지 맨든 傑作에 匹敵할만한 作品을 이제부터 製作할랴는데 있어서는 最惡의 條件일뿐더러 우리들이 成熟할 餘裕가있는것같지 않다. 그리고 우리들 藝術家가 스스로省察할때 거기에는 過去에 가젔든 美의 創造家의 하나의 特徵인 卽 持續하는 意志가 喪失된것이라고 說破하고있듯이 事實 오늘날 藝術은 存續하고 있지마는, 그것의 條件은 惡化되고 있을따름이다. 二十世紀가 始作되기전만해도 音樂을 歷史的見地에서 觀察할수가 있었고, 當代의 藝術家들이 그當時의 現在에 過去에 이러난 精神的인發展과 音樂上의 思潮를 끈임없이 連續的으로 리레—의파돈을 잡어쥘수가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容易하게 歷史와 類型을 찾어내었고 音樂精神과 文化의 에레멘트를 過去와 一致시킬수가 있었든것이다. 不過 三四十年동안에 音樂뿐만아니고 모든 藝術部門을 비롯하여 諸般 領域에있어서까지 너무나 激甚한 發展과 破壊와 創造가 휘밖겨버렸고 앞에서 말한바같은 모든 知的傳統과 音樂的傳統은 轉履되고 中斷되고 만것이다. 거기서부터 人間行動이 움즉이는 모든 領域에는 地震이 일어났고, 混亂과 錯綜이招致된것이다.
오늘날 純粹한感動과 感覺을 保有한 藝術家가 있을것같은가? 五官이 마비된 現代人은 훌륭히 騒音에 忍酎性을 習得했고 强激한 興奮劑나, 極度로 無調的인 音樂에도 귀를기우리고있다. 現代生活 그것은 오직 刺戟의 過剩이고 卽 動的인 持續하는 意志를 要치안는 刺戟의 推積으로된 音樂만이 必要할뿐이다.
흔히 말하기를 十九世紀에 있어서의 모든 藝術에의 벳트이든音樂精神은 今世紀에와서는 繪畵와 文學精神에 從屬되고마렀다고 보는것으로서, 藝術精神의 持續性을 是認할랴하지마든, 그것은 단지 皮相的見解를 버서나지못한것이다. 音樂精神 云云하기 이미벌서전에 精神 全體의 喪失을 招來하고만 오늘날 精神生活의 支柱라고 믿어오든 모든眞理 모든哲學이 白紙로 還元한以上은 어떻한 音樂이 明日을 豫見할것인가는 豫斷할수없다. 키—(鍵盤)를 뚜들기는 조고마한 音樂技術부터서가 信用할수없고, 所謂 音樂專門家란 偏狹한 一面만을 파고드는 人間에게도 全혀 希望을둘수없고, 音樂全體에 對해서도 懷疑的이요, 더크게는 文化全體에 對해서도 懷疑케된것이 오늘날 우리가 모든것을 믿지못하는 精神의 危機에 부치는 附箋이다.
現代의 文化와 文明의 均衡은 攪亂되였고 機械文明의 非常한 發逹은 音樂藝術의 文化的價値를 떠러트려바렸고 구—제빗기이가 指摘하고 있듯 오늘날의 音樂은 文明의 聯軸器에 씹히여서 屈服되였거나 혹은 文明과 다투고 있는것이 實相이다. 이것이 오늘날 所謂 現代生活에 있어 音樂이 占하고있는 狀態다. 暫時 나는 여기서 한가지의 比譬를 들어 이야기하고나가련다.
十八世紀나 혹은 十九世紀中頃까지 生存하고있던 偉大한 音樂家全部——뻬—토흐벤, 쇼팡, 슈—만, 리스트, 멘델스존, 슈우베르트, 봐그네르, 等等을 冥士한모퉁에 모아놓고 우리가 사는 地上의使者가 라디오 한개를 가지고 간다고하자. 使者는 수두룩하게 모혀앉은 옛날樂聖들 앞에서 NBC나 FODK 第二放送을 번가라서 틀어논다.
뻬—토흐벤은 自己의 「戰爭交響曲」이 스타코프스키—라는 當代一流 指揮者의 컨닥트로 演奏된다는것을 듣고 疑心하고, 쇼팡은 極東의 朝鮮의 피아니스트인 某가 彈奏하는 「녹탄」을듣고 驚愕스런 表情을 할것이다. 그때, 使者는 그들에게는 異常한物體로 비치는 魔物 라디오機械를 觀體하고, 各部分의構造를 說明하지만 그들은 도무지 理解할바를 모른다. 使者는 뻠을내고 다시 이여 말하기를, 기실인즉슨 라디오 뿐이아니고 蓄音機, 토오키, 그리고 最近에는 텔레비죤이 있어가지고, 地上사람들은 그 作用이나 用送에 對하여 熟知하고, 또한 現代의文化生活에 不可缺의 道具로되여 있다는事實을 附加한다. 그러나 역시 그것이 그들에게있어서는 根本的으로 理解할 能力은 없었다. 要컨대 音樂이가진 모든條件이 急速度로 變換한 今日에있어서 우리는 目擊者的인 特權을가진바되고 그것은 봐레리—의 말과같이 혹은 非常히 興味있는 不幸을 가진것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의 房안을 휘돌아봐서 피아노가 놓이지않었든 옛時代로 말하면, 晩餐뒤에 音樂이없다고 걱정을 할만큼 奢侈스런 生活樣式은 經驗치를 아니하였든것이다. 그러나 오날 피아노는없다 손처도 그房의 主人公은 짜즈·레코—드의 蒐集狂이던지, 그러치않으면 라디오를 아침부터 밤늦도록 걸어놓고 泰然自若할수있는 部類의 人間이기 쉬운것을 본다.
假令 내가사는 洞里近處에서는 五十야—드마다 라우드스피이커가 있어 똑같은 放送을받어도리면 때때로 나는 빠흐의伴奏로 麥酒를 마시고, 슈—베르트를 들으면서 電車를 타곤한다. 옜날에는 길가에서 촤이코프스키—나 데븃시이를 만나는 奇蹟은 當한법이없고, 바눌이 미끄러지도록 달어빠진 폭스·토롯트盤을 愛藏하는 코렉숀·마니아는 들어본 記憶조차없다.
이같이 우리들의 現代의 生活에는, 앞거리 뒷거리를莫論하고, 또는 公共의 家庭에서 辭讓없이 터저나오는 音樂의 洪水에 잠겨있음에는 놀날일이다. 皷膜우에 一定한 音波가 傳해지기만하면 滿足한 文化生活이라고 할는지모르겠으나, 오늘과같은 多量의 音樂經驗과 그것에 耽溺된꼴은 예전에는 보지못하는 現象임에 틀임없다.
所謂 現代文化라고 하는것의한 要素로서 音樂이重大한 位置를 占有하고 있음을 再言할 必要가 없지만 그것이 文化的으로 어떻한 本質을 가지고있느냐 하는 問題가 等閑視되고 단지 앞에서 이야기한바와같은 音樂的洪水——그것이 量的으로 計算되므로써, 漠然하게 社會的인 勢力이라던지 社會的인 影響力에 對해서만 神經質이되는것뿐이다. 그탓으로해서 現今 朝鮮에 있어서의 音樂은 기실은 文化住宅的인 外見에 빠진 道具에 不過한것이고 라디오니 蓄音機니 하는것들은 一種의 家具의 音樂일따름이다.
여기까지와서 돌켜 生覺해볼때, 오늘날의 朝鮮에는 眞正한 音樂生活——音樂文化가 없다는것을 是正할수 있을줄안다. 따라서 朝鮮의音樂, 樂壇도 一種의 스페시알·케이스 밖엔 안되는것이고, 單只 音樂關係者의 虛榮心이 社會一般의 音樂的無智를 巧妙하게 利用한데서 人工的으로 비저노은 空中樓閣에서 自畵自讚하고 있다는것도 是認할수밖엔 없을줄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의 朝鮮樂壇은 單只 音樂人의 生活(音樂生活)을 爲한 方便上의 機關에 미저저있고 何等 文化的使命을 가진것은 없었든것이다. 洋樂輸入以來 오날에 이르기까지 손곱작난하듯이 귀여워하는 西洋音樂은 全혀 民衆의 生活과 遊離된것이고, 따라서 正常한 發逹을 해온것도아니였다.
朝鮮樂壇의 그러한 畸形的, 特殊性에 있어서 우리가 最小限度로 希望하고 取할수있는 길은 오직 熱과誠意를 가진 態度와 그것의 運動方法을 再考할 時期에 當한것을깨닫는것에있다. 卽 正當한 藝術的衝動과 意慾의 發露를비롯하여 좁은 安全地帶에 몸을 둥켜매고 小賣商人이 하는짓이나 마찬가지의 주점스러운 習性을 解脫하고 健康한 實踐과 行動을 敢行할일,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樂壇은再出發하지 않어서는 아니될것이다.
上述한 큰意味에 있어서의 現代의 危機라든가 精神의 危機에關한 思想은 朝鮮樂壇과같은 洋樂의 模倣時期에서 맴을돌고있는 現狀에서는 아모런 現代의 危機에 隨伴하는 音樂의危機는 있을理가없다. 그러한 意味에서보면 朝鮮樂壇에서는 아직껏 傾向이니 이즘이니하는 何等의 音樂精神의 流布도 底流도 經驗한적이 없는이만치, 앞으로 가질만한 新音樂의 秩序를 創造하기 爲하여서는 自己分裂과 止揚이 없이도 오직 正當한 修業으로서만 될수있기는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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