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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와 무사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향가와 무사 鄕歌와武士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안자산 安自山
출처정보 문장 文章
연    도 1939-11 昭和十四年十一月
면    수 182 182
기사
朝鮮 詩歌의 元祖는 鄕歌다. 이 鄕歌라 한 意義는 朝鮮鄕士의 歌로서 朝鮮語 또는 朝鮮韻律로 된것이라 한것이라 그런데 이 鄕歌는 처음 누가 首唱한것인가 함에 對하여는 아식 發論한이가 없다. 내 여기 對하여 講尋하여본바 鄕歌의 發生은 곧 古代 武士들이 創作한바로 된것이라 하고, 지금 그의 理由를 開論코자한다.
大抵 文藝의 發生을 議論함에는 自來 學說이 紛紛하여 心理的으로 말하면, 第一遊戯說, 第二模歸說, 第三男性吸引說, 第四自己表現說等이 있지마는, 歷史的으로 말하는데는 諸說이 一體로 돌아가 宗敎的 儀式으로 나왔다하니, 이는 何處民族을 勿論하고 同一하다 한지라, 朝鮮의 詩歌도 史記에 傳함과 같이 其 起源은 大昔 祭天하던 儀式에서 생겨난것으로 말해내려왔다. 그러나 그때의 祭天儀式으로 流行하던 詩歌는 至今에 傳하지 않고 오직 三國時代에 流行하던 鄕歌가 初頭로 적혀 傳해온것이다. 그런데 三國時代에 그 鄕歌를 누가 지어냈느냐 하면 이도 亦是 꼭 指的해 말할수 없으나, 三國遺事 卷五에 僧月明이 兜率歌를 지었다한 記事에
明奏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不閑聲梵
月明이 王에 아뢰되, 巨이 國仙徒에 麗한고로 오직 鄕歌만 알고 佛歌는 모른다 하였으니, 當時의 鄕歌는 곧 國仙의짓던 詩歌體인것이 分明하다. 또한 三國遺事에
羅人 尙鄕歌者多矣 盖詩頌人類歟 往往 能感動天地鬼神者 非一云云
이라 하니, 當時人의 詩歌는 勿論 各種이 있으나 其 根因인즉 모두 國仙體의 鄕歌를 본받아 지었으매, 當時 詩歌는 全然國仙體인 鄕歌가 基本되던것이 確知된다. 그러면 國仙이 무엇인가, 이는 花郞團의 首長이요 花郞이란것은 三國史記 列傳에 보이는 人格으로서의 武士다. 이 花郞을 武士라 함은 古代에 李仁老, 權近等 學者도 말하였고, 昭和 四年 冬에 池內宏博士의 論文과 昭和 七年 春에 鮎貝房之進氏의 雜攷 第四卷에도 亦是 武士라 한바, 이의 認識은 古今學者의 同一論으로 된것이라, 이 花郞은 西洋 武士의 花公子(Page)라는것과 同一한者다. 戰場에 나가서는 決死隊가되고 平時에는 道義를 講述하고 歌樂을 興行하여 四方에 周遊하면서 團員을 募集하는 同時에 人材를 뽑아 官吏에 登用하게 하였다.
그렇듯 武士들이 巡廻講演할 時에 唱咏하던 詩歌는 特히 武士 自己네의 獨特한 奪式이 있었던바, 그것이 곧 鄕歌였으니, 三國史記 樂志에 思內奇物樂은 原郞徒의 作이라 하고, 武士 金仁文傳에 善隸書射御鄕樂行藝純熟이라 한것이다 그런 證據다. 이럼으로써 鄕歌는 武士의 文壇에서 나온것이 分明한 事實로 推測된다.
一步를 더 나아가 花郞의 根源을 査實하면, 花郞은 眞興王十年頃에 斯多含으로부터 始作된듯하나, 斯多含傳에 時人 請奉爲花郞이라 하였으니, 花郞은 斯多含以前에 이미古制로 있던것이 確實하며 芝峰類說 또 訓蒙字會에 男巫를花郞이라 하고, 史記 南解次次雄修에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라 하고, 尙書伊訓疏에 巫以歌舞事神이라 함에 보면, 三韓時代에 歌舞로 祭天하는 一團이 巫인 同時에 그것이 卽 花郞이라 그때에 巫卽花郞은 五經通義 樂元語等書에 말한것처럼 三救創과 矛等의 武器를 가지고 歌舞하며 祭祀를行하이였으니(現代의 巫女 같이) 三韓古時의 祭官들도 다 武士됨이 알려진다. 이로써 밀어보면, 大昔에 歌樂이 처음 發生할 때부터 武士들이 그것을 主張하였던바, 朝鮮 詩歌의 根本發生은 武士들에게서 始出하여 그것이 一層 發達로서의 鄕歌가 된것이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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