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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음악회 수첩―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수필―음악회 수첩― 隨筆―音樂會手帖―
종    류 수필 隨筆
필    자 홍난파 洪蘭坡
출처정보 신세기 新世紀
연    도 1939-09 昭和十四年九月
면    수 112 112
기사
「音樂會手帖」이라고 해서 映畵의 일홈으로 지레짐작해서는 아니된다 近來에 자조열리는 音樂會에 가보면 數많은 聽衆中에는 聽衆으로서의 禮儀나 道德에 關하여 程度에 지나치도록 無關心함을 우리는 자주 發見하게된다.
音樂을 들으려는것도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겠지마는 그러나 여기에는 여기相當한敎養이 있어야될것도必要한 일일것이다. 젓먹이 어린애를 더리고와서 남의 演奏中에奇聲의 伴奏를해서 聽衆의 눈쌀을 찌프리게하는것도 無知의 하나가 아니될수 없지마는 그보다도 어떤때는 演奏家가 心血을 傾注하여 熱演하는中間에 拍手를하여 至今까지의 感興을 餘地없이 깨트려주는 無知한 階級의 聽衆도없지는않다. 이것이大體 어떠한 意味의 拍手에 属할것인지? 萬一 音樂會聽衆에對한 어떠한法律이 制定된다면 이러한種類의 拍手者——犯行者——에게는斷乎한 處分을 않을수없을것이다.

演奏가 끝나면 그結果의 良否는 不問하고 依例히 拍手의 벼락이 퍼붓는다. 再演을請하여 演奏者가 이에應한다면 그보다 더 多幸한일이 없지마는 或어떤때는 演奏者가 聽衆의歡呼에對한 答禮만하고 再演을拒否하는데서 意外의 喧騒가 일어나는 적도있다. 그러나 이것은 決코 聽衆을 無視하거나 輕蔑하는것은 아닐것이다. 그러함에도 不拘하고 聽衆은 더욱더욱 拍手를 퍼부어서 期於히 再演을 强要함으로써 一種의 勝利感을 느끼는것도 같다. 이것은確實히 그릇된惡風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三演 四演까지를 强要할때는 聽衆의 心理나 敎養程度까지가 疑心스러지지 않을수없다 그러나 이러한 種類의喧騒는 어느便으로 보아서는 演奏者에 敬意를 表함이라고 善意로解釋할수도 없지않음으로 容恕할수도 있겠지마는, 이러한 弊風的群衆心理를 逆用해서 속맘으로는 곳 다시演奏를 하고싶으면서도 일부러 스테이지에 얼골만내밀고 目禮를 하고 들어감으로써 聽衆의拍手를 더욱 誘發시켜서 가장自己의人氣가 굉장한듯이 自矜하는 卑劣한行㔟를하는 演奏家가 없지도않음에는 噴飯의程度를 지나서驅逆이날 지경이다. 이러한演奏家를 應懲할 法規쯤도 생각할必要가 있을줄안다.

어떤때는 演奏가 채 끝나기前에 지레짐작으로 拍手를하는 一群의聽衆을 보게된다. 「벱버—」의「舞踏會의招待」라거나「끄리그」의「쏠베지의 노래」等에있어서, 樂曲이 그終結을 보이는듯이 暂時 假終止狀態에 들어간다. 그럴때면 依例히 大部分의 聽衆은 拍手를한다. 이때에 演奏家는 自己가演奏하는 그樂曲에 忠實하기 爲해서 못처럼 聽衆이보내는 好意의拍手도 全然 無視하고 다시 演奏를 繼續한다. 勿論이때에 지레짐작으로 拍手를하든 사람의 赤面도 赤面이요 無知도 無知겠지마는 이때에 演奏家의立場으로 생각한다면 聽衆의好意나 體面을 생각해서라도 그자리에서 일어서서 聽衆에게 答禮를하고 들어갈만한 雅量이나 融通性이 없을것인가? 「舞踏會의招待」나「쏠베지의 노래」에 있어서 最終部에 附加되어있는 後奏야말로 最初에出現되었든 前奏의 再現인만치 그것을 省略해서 안될 理由도없고 또事實上 聽衆이 拍手를 始作한 그때에는 그樂曲이 이미 完了된것으로 보아도 無妨한것이다. 그러므로 根本的過失은 聽衆側에 있지마는 己往이 같이된 以上 固執不通으로 後奏數小節을 期於히 더演奏한다는것은 오히려 滑稽劇에 가까운것으로 至今까지의演奏에서 주고받고한感興을 우숨판으로 抹消해 버리게되는것이니 當初에 이러한危險性이있는 樂曲을 演奏하려거던 거기에對한 臨機應變的態度를 미리決定해가지고 나오는것도 無妨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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