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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악 조선의 요람시대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양악 조선의 요람시대 洋樂朝鮮의搖藍時代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홍난파 洪蘭坡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9-08 昭和十四年八月
면    수 124 124
기사
洋樂이 朝鮮에 들어온지도벌서 半世紀가 넘었다고하지마는 그러나 西洋宣敎師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讚美歌類를 除外한다면 本格的으로 洋樂을 輸入한것은光武年代에 舊韓國陸軍樂隊의 創設을 이의 嚆矢로 볼밖에 없을것이다. 그리고보니 내가 音樂工夫를 始作하던 二十五六年前 이야말로 내自身의 音樂搖藍時代인 同時에 또한 朝鮮樂界의 搖藍時代가 될것이다.
그때에도 임이 斯道에 先覺者가 數三人이 있었으나 筆者의 恩師인 金仁湜先生이야말로 民間樂界에 있어서는 唯一의 先覺者요 先驅者였던것이이다. 그분이 어떠한經路를 밟어서 音樂工夫를始作했는지는 내가 잘알지못하지마는, 如何間 提琴이나 風琴을 獨學에依하야 어느程度까지 그演奏法을 解得했고 또 이것을 數많은 音樂靑年에게 傳授하야써 洋樂朝鮮의 土台를 築造한것만은 事實이다.
距金二十八年前 내가 처음으로 提琴을 사가지고先生의門을 두드리던때는 大京城안에도 提琴을 所有한者가 二三人에 不過했었고 또 이사람들로 말하더라도 어떤 偶然치않은 機會에 이 珍樂器를 손에넣기까지는 했으나 一時的 好奇心밖에는 別로 어떤目標를 세우고서 正格的으로 이것을 工夫하던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때에 있어서 나는 一金七圓五拾錢을 주고서 提琴一個와附屬品全部와 乃至「호—만」敎科書까지를 작만해가지고는 그當時 朝鮮正樂傳習所 西洋樂部에 正式으로入學하야 金先生의 指導아래에서 二年동안 專心勉學해왔다
至今은 빠이올린이니 提琴이니 하지마는 그當時에는 이樂器를 四絃琴이라고 일커렀고 또 俗名으로는 洋깽깽이라고도했다.
처음으로 提琴을 所有하던날의 그기뿜이란 아마 나의 一生을 通해서도, 가장큰 기뿜이 아닐수없었으니 나는 이樂器를 손에 넣게되자, 敎科書의 圖表에 依하야 調絃을 해가지고는 밤이 새이는줄을 몰으고서, 運指法과 用弓法을 練習하야 讚頌歌나 普通唱歌類(그當時「學部唱歌集」)를 대강 흉내 내보았다. 하룻밤에 이런짓을 할天才가 어디있으랴고 反問하지는 말라 나는 그때에는 임이 簡單한「도레미」唱法은 解得했고 또 風琴에 依하야 讚頌歌中의 大部分을 複音으로 演奏할수도 있었던만큼, 이基礎 智識을 土台로해서 一夜中에 四絃琴奏手가되고만것이다.
金仁湜先生에게서 私淑하기 二年前에 나는 二十錢짜리 玩具樂器와 거기添付되어 있는 二三枚의 數字譜에依하야「도레미法」을 解得하고 이것을 다시 讚頌歌의 本譜와 對照하야, 讀譜法의 一部를 解得하였으니 이것이 나의中學一年時代인 十二歲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當時의 學制는, 至今과, 判異하야 나는 中學一年에서 金仁湜先生의 講義로 樂典大要를 工夫하게 되었고 또唱歌時間에는 簡單한 複音唱歌까지도 試唱해보았으니, 그것은 그때 그學校學生의 大部分이 耶穌敎의 雰圍氣속에서 자라난 基督敎信者의 子弟들이었음으로써이다. 이러한 點에서 생각할때에 내가 音樂에 對한 趣味를 가지게된것이다. 여기에 조그마한 素質이라도 가추어 갖게된 直接動機와 原因이 基督敎的雰圍氣속에서 生長한데 唯存하다는것을 否定할수는 없다.
大正二年九月一日(?)에 提琴工夫를 始作하야 그해크리스마스까지에 「호—만」敎科書第一卷을 마치었다. 그리고十二月二十三日(?)밤에는 세부란스醫專主從의 크리스마스祝賀式에 初舞台를 밟었다. 勿論 伴奏같은것은 있었을理없으려니와 그보다는 伴催라는것이있는줄을 알까닭도 없었다. 音樂工夫 四個月만에 獨奏를했다는것이요 새사람의 귀에는 고지들리지않겠지마는 그當時에는 이것을 音樂으로들을려는것이 아니다 四絃琴이란 或은洋깽깽이란一種珍奇한 樂器를 求景식히는데그첬던것인만큼 E線과 A線의 兩絃으로 演奏한「깰롭」의 一曲이, 聽者의 拍手를喚起했을것은 疑心할餘地가 없었다. 더구나 十三歲의 紅顔少年이 이것을演奏함에 있어서리요.
이와같은 周圍의環境과 社會의形便이 그날부터 나를 제법一個의 바이올린이스트를 만드러 주었다. 그리하야 나는 處處의 敎會에가서 一年에도 數三十回의 演奏를했고 그다음해겨울에는 金先生을 爲始하여 그의門弟를 中心으로한 音樂會에 出演한때는 「호—만」第三卷을 工夫하던때이니 京城에서 有料公開의 音樂會란 이것이 嚆矢이며, 그當時에 京城안에散在한 音樂靑年을 糾合하여 金先生의 指導아래에서 「京城讚揚會」란 男聲合唱團을만드러 가지고 「헨델」의 名曲「할렐루야」를 合唱한것이 그다음해 겨울이었으니 이「京城讚揚會」야말로 後年에 全鮮各敎會와 學校의 合唱隊의 濫觴 되었던것이라.
그當時의 京城에있는 音樂家로는 金先生을 筆頭로하여 李尙俊, 金亨俊, 崔東俊, 廉光燮, 安鍾健氏等이 中心이되었으며 그外에는 龍山에日本陸軍樂隊 仁寺町 (파고다公園옆)에 舊韓國陸軍樂隊가 있는外에 學校音樂의 大本營인 梨花學堂이 優秀한 閨秀樂人養成에 努力해왔음은 特筆할만한 事實이다.
大正元年에 朝鮮正樂傳習所가 創設되고 그附隨機關으로 西洋樂部란것이 並置되어있어서 初代敎師로 金仁湜氏가 數年동안 多數한 音樂靑年을 訓育해 내었으니, 廉光燮, 安鍾健, 筆者等이 先生의 寵愛를 받은사람들中의 한部分이며 大正四年初에 金先生이 辭職하자 筆者가 그後를 繼하야 三十間 奉職할새 提琴界의 名將 蔡東鮮氏가 그때 筆者에게서 音樂修學의 첬거름을 始作한 분이다
四絃琴이란 낯 서투른 樂器를 들고다니다가. 派出所에서 取調를 받던일이나 有料音樂會席上에서 當時一流聲樂家가「나는곱기」나「어떤집식구세사람」等의 漫謠를 불러서 再請三請을 받던일이 至今에 생각한다면 抱腹絶倒할 事實이지마는, 十年前만해도 「만도링」에 휘파람을 마추어서「枯れすすき」나「大同江邊浮碧樓」를 得意滿面하야 演奏하던일을 回想하며 現時의半島樂壇을 比較해 생각할때에 時代의 偉力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럽게 놀래지 않을수없다.
그러나 「나는곱지」거나 「枯れすすき」를 演奏하던 樂歌도 그時代에는 또한 先覺者요 指導者였던 同時에朝鮮樂界를 이만큼이라도 開拓한데있어서 斤候의功을 세움이 컷다는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글을抄하는 筆者도, 至今에는 단지 호랑이 담배먹던時代의 옛이야기하는셈치고 우서버리지마는 音樂을 工夫한다고집안亡할子息 생겼다고 恨歎하는 父母가 게신가하면 料理店술床옆에서 獨唱을 해라 洋깽깽이를 해라 하고는 광대나 풍각쟁이 待接을 하는이가 있고 모처럼 東京等地에서 音樂을 修學하고 도라온댓자, 獨奏會는 姑舍하고 스테이지를 밟을 機會조차 가질수 없던 어젯날을 생각할때에 이같은 沒理解한 逆境에 處해서도 오히러 不搖不動하고 오직 所處의 目標를 向하야 突進한 몇몇先輩야말로 우리는 때때로 그의 回顧談을 들을때에 同情의 눈물조차 禁할수 없음이 있다.
이러한 生覺을 할때마다 나는, 우리樂界의 先覺者인 金仁湜先生의 功勞야말로 壯且大함을 잊을수 없는 한편으로 今日의 音樂靑年들이야말로 坦々大路를 濶步하는만치, 좀더 努力하고 勞作하야써 이땅의 樂壇에 不滅의 金字塔을 쌓기에 躊躇함이 없기를 切望하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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