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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 이야기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승희 이야기 承喜이야기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최승일 崔承一
출처정보 여성 女性
연    도 1939-06 昭和十四年六月
면    수 66 66
기사
[사진] 최승희 씨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 총 4매

S兄—
그애가 느진가을의 금강산「로케숀」을 맛치고 불야불야 「푸린트」를 한개 맨들어 가지고 「요꼬하마」에서 질부환(秩父丸)을 타고 「아메리카」로향하야 태평양을 건는지가 발서 일년반이나 되었읍니다. 참으로 세월은 빠른것이외다. 형도 아시다싶이 동경에 있는 「아메리카」대사관에 소개로 지나에 매란방(梅蘭芳)을「아메리카」에 소개한 유명한 뮤직마네쟈 「바킨스」란사람과 일년수입(年收入)십오만딸나(弗)의 보증(保證)으로 우선 상항(商港)에서 제일회공연을 하게되였는데 이때발서 눈치빠른 「아메리카」의흥행회사에서는 서로 쟁탈전이버러젓던것입니다. 아시다싶이 「아메리카」에는 두개의 큰흥행회사가있읍니다. 하나는 「메토로포리탄·뮤지칼쀼—」이요 또 하나는 「NBC」라는 흥행회사입니다. 「메토로」는 저—유명한「메토로포리탄·오페라타우—스」를 위시하야 전국에 수백개의대극장을 가지고있는회사이며 「NBC」는 전국에 라듸오방송국을 수백개나 가지고있는 회사입니다. 「리리폰쓰」와「그레스무어」는「메토로포리탄」의 전속이고「에르만」은「NBC」의 전속입니다.
이두회사에서 서로 「바킨스」를통하야 승희를 전속으로 초빙하려고 하였던것입니다 여기에 잠간 소개할것은 「메토로포리탄」은 순전한 「아메리카」사람의 경영이고 「NBC」는 유대인(猶太人) 계통입니다. 승희는 드듸어 「메토로포리탄」의 전속이되여가지고 「로쓰안젤쓰」를 것처 「뉴욕」에서 「데뷰」하였는데 「메토로포리탄·푸레센트」로 우선 반개년 게약을하였던것입니다. 그리하야 조선의무희최승희는 세게적예술가와 억개를 견주어가지고 당당하게 「뉴욕」에서 「데뷰」하엿던것입니다. 여기에 또한 잠간 말슴할것은 이것도 시대가 박괴인탓인지 예전에는 모든 무대예술가들은 먼저 파리에서「데뷰」를 하여야 세게적 수준에이르렀다고 하던것이 요즈음에는 「뉴욕」에 와서 「데뷰」를 하여야 비로소 「세게적」이라는 간판(看板)?을 엇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야 세게의 방방곡곡에서 이 등용문(登龍門))의 시장(市場)?을 동경하고 모히는 무수한예술가들이 「뿌로드웨이」의 뒷골목에서 십전짜리식당을 뒤지는것입니다
승희의 「뉴욕」데뷰가 끝난다음 그곳 비평가들의 비평을들은 그때 더러 소개된것도있고 하여서 여기에는 그것을 약합니다마는 나는 그후에「아메리카뮤직」잡지에서 이러한 감상문(感想文)을 읽었읍니다.
『——지금에 세게는 무용빈곤(貧困)시대이다. 「이사도라당캉」이 죽었고 「안나바부로바」가 죽었고 「아르젱틔나」가 죽었고 「니진스키」가 죽었다. 이때에 조선의무희 최승희가 「뉴욕」에 등장하였다는것은 혜성(彗星)과같은 존재이다. 그는 우리들의앞에서 환상(幻想)의 세게—동양(東洋)의 문(門)을 열고 우리들을 들어오라고 최대(最大)의 유혹(誘惑)을 주었다.』
S兄—
사실 지금에 세게는 확실히 무용빈곤시대입니다. 지금에 사라있는 사람으로 최고(最高)의 력사를 가진사람이라고는 「윅크만」과 「사카로푸」뿐입니다. 그러나 오호라 이들은 늙어서 인제는 제자들이나 길늘수밖에없이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대담히도 말합니다. 동양무용만은 빈곤을 느끼지않는것입니다. 웨 어째서?하고 형은 놀래실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대답합니다 인도(印度)에 「샤카」가있고 조선에 최승희가있다는것입니다. 두사람은 기이(奇異)하게도 똑같이 동양의 정서(情緖)를 등에다 질머지고 세게의 무대(舞臺)를 전부 점령하고있다는것입니다.
여기에 인도무용가「샹카」이야기를 잠간하겠읍니다.
「샹카」는 독일에가서 「위크만」에게 서양무용을 배웠읍니다. 그는 인도에 도라와서 신흥서양무용을 소개하며 오래동안 서양무용에 몸을밧첫읍니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으로 경제적으로 큰곤경(困境)을 치르게되였읍니다. 그는 자기고향에서 인도무용을 열심히 연구하였읍니다. 그리고 다시 구라파로 건너갔읍니다. 그리하야 그는 인도춤을 추었읍니다. 그는 차차 비평가(批評家)들의 입술에 오르내리게 되였읍니다. 그는 인도의 향(香)들을 무대우에 피우고 인도의악공(樂工)들에게 인도의 음악을 시키고 인도의춤을 추었읍니다 그는 차차 제일류「스테지」에서 「리사이탈」을 가지게되였읍니다 지금은 세게적무용가로 자타가 공인하게되었읍니다. 자—이만하면 형도 짐작하실것입니다. 어쩌면 그러케도 그의 발버온것이 동생최승희와 똑같읍니가?
최승희의 이야기는 시작도하기전에 남의 이야기를 먼저 기다라케 느러놋읍니다 마는「샹카」의 무용을 나는 보지도못하였읍니다 허나 조금 더—쓰겠읍니다.
「샹카」의 무용은 순수(純粹)한 인도무용이 아닙니다. 그의무용은 정확한 서양무용 「스텝」에다가 인도「리듬」을 실어서 반주음악도 다시 편곡을 하여가지고 한개의 새로운 창작(創作)으로 「샹카」가 세게에 내여노흔무용이 되였읍니다. 여기에 남도(南道)육자백이와「아이 아이 아이」를 섞은맛이 나는것이며 한지방의 민속 예술(民俗藝術)이 더구나 무대예술(舞臺藝術)이면 국제성(國際性)을 띠워가지고 소위 국제화(國際化)한다는것입니다. 같은 무대예술에있어서도 연극(演劇)은 그렇게하는것이 어려운노릇이고 거진불가능한일이지마는 음악과 무용만은 능히 그러한역활(役割)을 하게될수있다고 나는생각합니다.
승희도 처음에는 서양무용을 배웠읍니다. 조선에와서 서양춤을 추었읍니다. 음악도 서양음악이였읍니다. 나는 모든예술중에 문학은 배우는것이고 회화(繪畵)는 보는것이지마는 음악은 듣기만 하는것이기때문에 남의나라의 음악들 듣고서 좋고 나뿌다는 생각을 □□게 될만큼 되기는 참으로 어럽다고 생각되는데 황차 이 란해(難解)의 음악에다 맛추어 추는춤을 구경한다는게 흥나기가 대단 어려운노릇이였읍니다. 그러나 우리남매는 초토항전(焦土抗戰)을하였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고말었읍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고장음악과 우리고장춤을 생각하고 연구하였읍니다. 사실 우리는 가여웠읍니다. 원 순서대로 하자면 먼저 우리고장노래와 우리고장음악과 우리고장춤을 배우기도전에 남의나라음악을 연구한다는데 잘못된것이아닌가하고 생각하였읍니다. 그애는 서양무용기본연습에다가 조선 「리듬」을 실어가지고 춤을 추어보았읍니다. 여기에 새로운 형식(形式)과 새로운 게승(繼承)이 생기면서 잔해(殘骸)만 남었던 조선의춤이 력학적(力學的)으로 전개(展開)되면서 「아이데아」가 과학적(科學的)으로 귀결(歸結)을 지어서 재래에 희미하던 춤의매듭을 끈코 잘느기에 퍽 수헐하였읍니다. 또한 효과적이였읍니다. 죽은 스페인(西班牙)무용가「아르젱틔나」는 역시 이와같은방법으로 스페인의무용을 재편성(再編成)? 하야 세게의무대를 휩쓰렀던것입니다. 이것을 스페인사람들은 순수한 스페인무용이아니라고 배격한사람도 있지마는 세게의 무용비평가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하였읍니다. 여기까지 쓰랴니까 참 생각나는일이있습니다. 작년인가 한설야(韓雪野)군이 「최승희에게주는글」를 어느잡지에 썻는데 최승희의춤은 순수한조선무용이 아니라고하면서 역시 이러한문제(問題)를 논한일이있읍니다. 그것이야 다— 각각 자기생각이 다르니까 무슨태도로 비평을 하던지 관게가 없는일이지마는 한가지 고소(苦笑)를 금치못할구절이 생각나는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하면「최승희는 춤을출때에 야옹하고 사람을노리고 잡어먹을듯이(?)춘다는구절이 기억되는데 아마 한군은 그때 검무(劍舞)나 「움지기는씨스팀」같은춤만 보았지「조선풍주엣트」나 「초립동이」같은춤은 보지못한듯하므로 한마디 적어두는것인데 「뉴욕」의 무용비평가들은 이러케 또 비평하였읍니다.
「참으로 최승희의 무용은 다종다양(多種多樣)이다. 타악기(打樂器)로 추는「검무」(劍舞)같은 씩씩한 무사(武士)의춤도 추었다가 유연(悠軟)하고 호장(浩長)한 「신라의 벽화」(壁畵)같은춤도 추었다가 「초립등」이같은 참으로 허리가 부서지게 웃기는춤도 춘다는것은 한개의 큰경이(驚異)라고 할수있다. 우리는 여태껏 춤을보고서 그러케 허리가 부러지게 우서본적은없다」
이만하면 한군은 눈을부릅뜨고 추는춤 검무(劍舞)만을 보고 야옹춤을춘다고 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S兄!
이제는 다시 승희의 무용행각이야기로 옴기겠읍니다.
그애게 「로스안젤스」에서 공연을하는밤에 이런일이 생기였읍니다. 「로스안젤스」에 있는 일부(一部)의 인사들과 지나인학생들이 남의 무용회장입구에서 배일(排日)마크(?)를 팔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찰서에서도 금할수도없었다고 하였읍니다. 파는사람들이 자선단원(慈善團員)들이였기때문이라고합니다. 그후에도 전화로 협박이 들어오는등하야 『아메리카』의경관이 무대뒤화장실을 지켜주게까지되였었읍니다. 이리하야 「메토로·포리탄」에서도 「이래서야 공연을하기가 곤란하니까 게약을 파기하자」고 하였읍니다. 사실 게약서에는 정치적리유(政治的理由)와 기타불가항력(不可抗力)에 의하야는 게약을파기할수가 있다는 한조목이 들어있었던것입니다. 이렇게 되고보니 자연 공연회수가 주러지는동시에 선전이 소극적이였읍니다. 그러나 다행히 「뉴욕」공연에 비평은 앞에멫마디소개한바와같이 최고최대(最高最大)의 절찬을 받었읍니다. 그러자 여름이왔읍니다. 여름은 그애에게는 휴양(休養)과 사려(思慮)와 창작(創作)의 시간이였읍니다. 그때 그애에게서 이러한 편지가 왔었읍니다.
「……옵바 저는 동경있을때에는 그들이 좋와하는 조선춤을 발견하였읍니다. 그러나 이곳에와서는「서양사람이 좋와하는조선춤」을 발견하였읍니다. 그러나 저는 정신을차리고있읍니다. 동경에 있을때에는 동경사람들이 좋와하는 조선춤을 얼마던지 영합(迎合)하야맨들고 서양에와서는 서양사람이 좋와하는 조선춤을 얼마던지 영합하야 창작한다는것은 한편으로 맛당한일이라고도 생각할수가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사도(邪道)에 빠지기가 쉽다고 생각을하면서 조심조심합니다. 그러고 또한가지 절실히 늣기게된것은 조선춤에 반주를 피아노로 한다는것이 이곳비평가들에게 문제가 되였있읍니다. 「조선춤을 피아노에 춘다는것은 서양춤을 조선장고에 추는것과 만찬가지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문제도 좀 달리 생각할수가있지마는 일리(一理)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아니라 조선악기를 가지고 (타악기반주(打樂器伴奏)로 추는춤에는 재청을하여도 피아노반주로 추는춤은 조선이나 일본내지에서 좋와하던춤도 별로 좋다는말이없습니다. 비평가들도 타악기를가지고 추는조선춤만 가지고 비평을합니다.…」
그렀읍니다. 나도 이 「서양사람이 좋와하는 조선춤」을 발견하고 새로히 맨든신작(新作)을 어서 보고십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우리는 최승희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알수가있다고 생각됩니다. 무턱대고 좋아한다고 영합하야 만든것이라면「레뷰」나 「바데」와 다를것이 무었이겠읍니까? 맛치 관객을 웃기고 울니기위하야 현실에 있거나 없거나 재미와파란이나 많게맨드는신파연극이나 다를것이 없는것이 아니겠읍니까? 그애는 왼 여름동안 무엇인가 맨드렀읍니다. 그리하야 이번에는 「NBC」와 하반기(下半期)게약을하고 「뉴욕」에서 제이회신작발표회를 열었읍니다. 『푸로그람』을보니 신작이 태반이였읍니다. 이것은 그애가『아메리카』에가서 소위 서양사람이 좋와하는 조선춤을 맨든것입니다. 발표회가 끝난다음 「뉴욕」의무용비평가들은 또 절대의호평을 주었읍니다. 이리하야 그후 나는 그애에게서 이런편지를 받었읍니다.
「……옵바 「뉴욕」에서조선의산천 조선의한을 조선의구름을 꿈꾸면서 축음기로 령산회상(靈山會像)을듯고 조선의민요(民謠)를 들으면서 조선의정서(情緖)를 끄러 안으면서 안무(按舞)를 한다는것은 한개의 신비(神秘)스러운 감정(感情)입니다. 나는움니다. 나는울어요 나는좋와서 울어요……」
제이회창작발표회까지 호평을 받음으로 같은유태인게통인파리의 『뮤직바네지멘트』에서 「NBC」을 통하야 게약하자는 청이왔읍니다. 파리를 중심으로하야 구라파열두나라를 십이개월간에 순회공연하자는의견서(意見書)이였읍니다. 게약을한뒤에 승희한테서 이런편지가 왔읍니다.
「……오빠 기뻐하여주십시요. 저는 「아메리카」에와서 경제적으로는 실패를하였지마는 예술적으로는 성공을한세음입니다. 다행히 비평이 좋와서 기쁩니다. 인재 래년 일월(昭和十四年一月)부터는 파리에서 구라파에서의 최초의 「데뷰」를하고 구라파열두나라를 순회합니다. 맛치 녀학교에서 배운 서양지리(西洋地理)를 실지견습을 하는것같읍니다. 옵바 도리켜 생각하여보면 「아메리카」에서 실패한 첫째리유는 방해이였고 둘째리유는 동경에있을때 충분한 시간을두고 「아메리카」에향하야 선전이 부족하였던것입니다. 그러나 십오반딸나의 꿈만은 깨여젓지요마는 그리실패랄것도없읍니다. 무었보다도 기쁜것은 돈을주고도 사지못할것은 각방면의 호평입니다. 래년봄을 파리에서 마지할것을 생각하니 참으로도 기쁩니다……」
이리하야 그애는 작년十二年十七日에 대서양(大西洋)을 건넜던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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