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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의 이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분서의 이유 焚書의理由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홍난파 洪蘭坡
출처정보 박문 博文
연    도 1939-06 昭和十四年六月
면    수 7 7
기사
專門으로 工夫한다는 音樂에 對해서도 別로 큰 自信이 서지 않고, 그위에 學籍를 두었던 音樂學校에서도 中途退學을한 다음부터는, 文學에 뜻을 두고 그 第一着手로 泰西文藝의 飜譯物을 無秩序 無系統하게 주서읽기 始作하던때도 어느덧 二十餘年前의 옛날이 되고 말았다.
露, 佛, 獨, 英等 여러나라 文豪의 大小名作을 아무 멋도 모르는채 二百卷 가량이나 耽讀한 나머지에는, 그中에서 가장 感銘깊었다는것 몇卷을 골라서 이것을 우리의 말로 重譯하기 始作했다. 지금 生覺하면 몹시도 大膽하고 주저넘은 짓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決코 이것으로 滿足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創作을 해보겠다고, 新聞雜誌等에다 되는대로 短篇, 中篇等을 發表했다. 쓰는 내 自身도 내 自身이러니와, 이따위의 中學生들의 作文類를 실어 주는 新聞이나 雜誌의 編輯者도 무던히나 原稿難에 쪼들렸던것 같다.
이런것을 數三年 해오는 동안에는 그中의 몇個는 書店에서 出版도 되었다. 그러나 이런 大膽不敵의 짓을 언제까지나 恣行하게 내버려둘 賢人들만이 이 世上에 있을理는 없었다.
十五六年前 어떤해 舊正月의 일이라고 記憶된다 그 當時 文名이 높던 某々文人들과 어떤 친구의집 舍廊에서 歲拜床을 받게된일이 있었다. 高談峻論이 끄칠줄을 모르며, 一杯一杯復一杯에 메터—가 相當히 올라갔을때, 내 옆에 앉았던 樹洲 卞榮魯君이, 例의 깐죽거리는 語調로 質問인지 揶揄인지 分間할수 없는 銳舌을 내게로 向했다.
「너는 音樂이나 하면 했지, 주저넘께 小說은 다무엇이야, 그래 開天地 通萬古해서 두가지 藝術에 大成한 天才가 누구란 말이냐?」
하고 제법 핏대까지 올리며 달겨들듯이 말하자, 나는 이 不意의 急뻔취에 實로 啞然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내자식의 體而을 생각한들 樹洲란놈에게, 一擊에 KO를 當할수는 참아 없어서
「웨 없니?」
하고 反問하며 대들었다.
「그래 누구야?」
「누구? 바그너—도 모르니? 詩人이요 音樂人인 바그너—말이다.」
「壯하다! 그래 네가 그런 不出世의 大天才란말이지?」
여기에는 나로서도 有口無言일밖에.

歲拜床을 물리고 윳노리판이 벌어졌다. 卞君이나 내나 醉中談으로서 그以上 더 曰可曰否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날밤 나는 자리에 누었을때, 조금前에 卞君에게 論迫되던 일을 생각하매 한편으론 분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해서, 그날 하룻밤을 轉輾反側으로 새워 버렸다.
아침에 일즉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는, 그때 한참 出版해보려고 끼고 돌아다니던 創作集『噴火口上에서』(?)의 原稿뭉치를 불살러 버렸다. 泰始皇의 焚書以上의 大罪惡인듯이 떨면서, 이것이 灰燼이 될 때까지 나는 그것을 默々히 死守했다. 그리고는 다시 音樂의 길로 돌아서서 至今까지 걸어왔다. 아무不滿, 아무悔恨이 없을뿐 아니라, 오이려 가뜬한 몸과 맘으로 一路直進했다.
樹洲에게는 應當 이러한말을했다는 記憶조차 없을것이다. 그러나 至今에 다시 生覺해보면 그는 나에게 賢友이면서도 원망받을 사람이다. 焚書를 하고 붓을 꺾지 않았든들 四十平生에 一代의 傑作은 못낳았다 손치고라도 音樂家로서의 나의 無才能爲한 편보다는, 좀더 나은 存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때도 全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내 自身의 너무 하잘것없음을 反省할때에, 自慰之䇿에서 나오는 發惡心일것이요, 나는 藝術의 어느部門, 科學의 어느部門을 擇했거나 大成못할 小人임에 틀림없다는것을 생각할때는, 樹洲의 뻔취에 아무 痛痒도 느끼지 않는 反面, 저윽이 感謝와 苦笑를 不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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