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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종    류 수필 隨筆
필    자 김관 金管
출처정보 박문 博文
연    도 1939-01 昭和十四年一月
면    수 14 14
기사
『感』은 魂이고, 藝術의 眞髓고, 生命이다—라고 生覺하는 것은 별로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은 아니다. 허나 『感』이 없는 作品, 感이 없는 繪畫. 音樂이 科學的이니 레아리즘이니하는 仮定의 約束에만 拘泥하는 것을 볼때마다 寒心한 일은 없다. 오로지 藝術에 있어서만이 아닐것이다. 널리는 한나라 한民族의 文化가 그렇고, 그들의 生活에 있어서도 『感』은 本質的이고 要素的이다.
한 民族의 文化, 藝術 或은 生活가운데 드려박혀있는 特質이나 傾向은 『感』의 範疇에 있어서 理解 될것이며 批評될 일이다.
現代와 같이 複雜한 生活事象과 心理現象으로서는 知와 感은 極度로 錯雜混沌해있고 複生하여있는 탓으로, 그 區別을 判然히 할수없는 境遇가많겠지만 要컨대 感의把握과 表現이 藝術의 일일줄 알며 生의 約束일줄 안다. 어떤사람은 感性的인것을 藝術에 있어서는 强調하드라도文化라든지 生活의 面에서는 知的인 것으로서 裁斷할랴던 것이었다. 그러나 元來 藝術은 生活의 表現인때 生生할수 있듯이 여기 科學에 依한 技術이 있다손치드래도, 그것은 하나의 手段으로서 새로운 生活의 藝術을—『感』을 表現하지않아서는 아니될것이다.
말하자면 科學은 知의 世界고 藝術은 感의 世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感』이란것이 知性을 拒否한 獨立的인 靜止된 美感이란 말은 아니다. 도리어 知에 依해서 洗錬되고, 知에 依해서 高揚된 動的인 『感』이다.
輓近, 레코—드(音盤)가 자꾸만 發達하면 리알 (實除)한 演奏音樂은 要望이 없지않겠느냐는 感을 갖는 사람 들이 있다. 이것은 그럴듯한 見解이기는 하다. 그리고 또 그說을 反駁하기는 論者들의 意見에 依할것 같으면 레코—드는 實演의 記錄性만을 떠나서, 더 한걸음 앞서 나가 레코—드로서만 가질수있는 音樂도 創作할수 있으니까 實演奏는 그것 그대로 存在하드래도 레코—드는 레코—드대로 發達될 理라고한다.
勿論 옳은 말이다. 다만 레코—드가 實演奏와 比해서 어떻게 感銘이 다르냐는 點을 밝히지 않아서는 아니될줄 안다.
藝術은 『感』이라고 나는 말을 해왔다. 音樂을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또는 맨드는 사람이나가 모두들 『感』우에 서있다. 感이 音樂—藝術의 要素고 本質일뿐더러로 『感』의 約束우에 表現과, 또는 그것의(音樂)表現이있는以上, 感을 表現하는 手段으로서 音樂이 있을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레코—드는 오늘 까지는 單只 記錄을爲한 蠟版인 傾向 强하니 만치 『感』은 假像으로 흘르고 말았음에 레코—드를 實像인 實演에 對한 寫眞과 같다고 比喩를 해오게된 것이다 末技의 問題이기는하지만 레코—드로된 것은 그 本來 가진 音樂의 『感』의 濃度가 純粹하지못한 탓으로 듣고 感銘함에 있어서도 弱하다고 하게되는 것이다. 亦是 생각하면 機械的操作을 通過한 卽 科學的인 作用어 이며 『感』의 粒子를 殺傷케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그러므로 레코—드音樂의 鑑賞이나 批評에 있어선 批의 根本問題를 理解할 必要가 있게된다.
다시 말하면 實演奏의 音樂을 批評할 境遇의 呼吸에 比해서 感의表現이 現實的이 되지못하는 것이다.
大體로 『感』은 우리들의 生活에 있어서 身體的인 呼吸과 마찬가지의 機能을 가진것이고, 모든 事物의 認識과 批判의 基調의 作用을 가진 一種宿命的인 베스멘트라고 할수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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