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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터잡은 안기영―사랑과 방랑의 순례는 종언―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한양에 터잡은 안기영―사랑과 방랑의 순례는 종언― 漢陽에터잡은 安基永―사랑과放浪의 巡禮는終焉―
종    류 대담 對談
필    자 +++ +++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7-05 昭和十二年五月
면    수 38 38
기사
米國에린스 호와일音樂學校를 優秀한成績으로맛치고 錦衣還鄕하야 朝鮮女子最高學府인 梨花女子專門學校에서 音樂科의敎鞭을 잡고있으면서 한때 半島의 졂은이들의흠모를 한몸에 을고있든 朝鮮이나은 高名의音樂家安基永氏 그가한번百萬長者의 귀여운님으로태여나 梨花學園서 文學과 노래를 질기든 金顯順孃과노래로 매저진 情熱의로맨쓰를 실고 멀리멀리放浪의길을 떠나매 말성조와하는 우리 社會는 한때물틋이 엇든것이다
그들의 사랑의放浪도 三年동안으로 終幕을맛치고 이漢陽城에도라온지도이미 一年이넘엇건만 그들의그림자를 우리樂壇에서차저볼수없서 언제나마음섭섭히생각하고있었더니 이제다시高等音樂學園에서 未來의 大音樂家를 養成하기爲하야 安基永氏가 敎鞭을잡고있다는風聞이 봄바람을타고 서울長安을 돌고있으니이엇지 반가운 소식이아니랴
四年前피는四月의봄날 梨花學園의敎鞭을던지고 사랑의오뇌와 無限한希望을품고 伊太利 미라노 로 向하려는 安基永氏를 실흔 國際列車는 伊太利 미라노로가는길을 몰낫든지 할빈, 北平, 上海東京만을 거처다시 漢陽城에자리잡고있는 高等音樂學院敎壇으로 安氏를옴겨주었으니 氏를敎援로마지한高等音樂學院을爲하야 반겨할것인가 가려든伊太利行을一時中止한 安氏自身을爲하야 섭섭해하여야할것인가
北岳山에 진달내이 滿發한四月中旬어느날記者는 嘉會町二○八番地高等音樂學院에安基永氏를차젓다
[사진] 左가安基永右가 沈英燮氏
校庭에 들어선 記者는 이敎室 저敎室에서 흘너나오는 피아노 소래와 아름답고도 우렁찬合唱소래에 귀를을리여 한참동안 情神없는사람모양으로 멍허니서서귀와마음을 이리로저리로 옴기게되엿든것이다 職員室에 서슴지안코차저든記者를安氏는반겨마저준다
未來의 音樂家를培養하시기에 가진精力을 다하신다하오니 感謝하외다 그래 언제부터 高等音樂學院에서 敎鞭을 잡게되엿나요라고 質問의첫화살을던짐애 氏는수집은 여자모양으로 약간 얼골을 붉히면서 천만에요지난三月初旬부터입니다
마음만으로는 힘애쓰려 합니다만 學生들한테 滿足을줄만한才能을가저야지요라고微笑와함께말한다
記—어케되야 이 學院에 오시게되엿습니까?
安—朝鮮있을때는 알지못하엿스나지난멧해사이 放浪하는동안 中國사람도배워주어보고 日本內地聲樂家들과도접촉하야본바 그들聲帶가 朝鮮사람들보다는퍽못하다는것을 알게되엿습니다 그러니 東洋에있어서는 朝鮮사람이 가장좋은聲帶를 가젓스며 가장豊富한音樂的素質을 가젓것만 모든 不偶한周圍環境—一般이 음악을잘理解못하야누구나 自己子女가音樂을 專工하겠다하면 讃成안할뿐아니라極反對하는것이이常例으며 또배흘려하여도 배흘만한 音樂學校가없으니 自然그들의熱望과天才的音樂素質도 그냥 까라안마는것입니다
그래 저는언제나 이의졂은 音樂家들을爲하야音樂學校를 設立하려하엿든것입니다 然이나 그것은마음뿐이엿지 實現하기는 어려웟든것이외다 저는 누구를배호줄줄은안다할지나 무엇을創設한다든지 經營한다는 經濟學的頭腦를 갓지못하엿스니學校를 設立할려면 爲先 計劃家企業家 資本家들이나와주어야 할것인데 어대그리쉽사리됩니까?
그러든中 昨年녀름에 朝鮮서처음으로音樂學院이 設立되엿기에 그후부터는말은안하야도 그學院의앞날이 빗나기를 저윽히 바라얏든것입니다그와갓치 그學院의앞날을 爲하야 늘 念慮하며注視하든中 지난三月初旬에 이高等音樂學院 設立者요院長인沈影燮氏가차저와서 朝鮮音樂의眞正한發展을爲하야 갓치손잡어달나하든것이외다 나는 朝鮮音樂界를 爲하야 그와같이 猛活動하시는 沈影燮氏의情熱에 感激하엿든것입니다 그래곳속마음으로내힘애써볼려고決心하고 沈氏와갓치 손잡고 나아가기를應諾하엿든것입니다.
記—그럼 이제 부터는 自己自身의 工夫보다는 後輩를 培養하기에盡力하렵니까!
安—제自身도一層더工夫하여야하겠읍니다 事實저의實力으로 누구를 배워준다는것은 붓그러운 일이외다 그래後輩를 바로 指導하기爲하야서라도저自身이더배워야하겠읍니다 이제부터는 어떠케하면 앞날의偉大한音樂家를내일수있겠는가는대對하야 깁히硏究하야 될수있는대로 그들後輩를잘指導하야볼가합니다
記—音樂을더 硏究하기爲하야 洋行할려든마음은?
安—그마음은 지금도식지안헛습니다 그러나 그問題만은現在形便을보아 좀더保留하야두기로하겠읍니다
記—그럼이 高等音樂學院에서 後輩를길느기에만힘쓸려합니까
安—녜 그리할려고決心하엿습니다 이學院에서 가라치는外에 멧분을 個人敎授도합니다만
記—이學院에서는每日멧時間式이나敎授하게됩니까?
安—一週日間 사흘은 午前九時부터午後四時까지 그리고남은 사흘은 午前中만하고 午後는 個人敎授합니다
記—梨花女子專門音樂科와 이學院의差異는?
安—나는 늘말하엿습니다만 梨花女專音樂科는 修道院에不過합니다 그저音樂을一學科目으로 取扱할뿐이지 그리 힘쓸려고도하지안습니다 그러나 이學院은 音樂만을 가라치는 機關이니 全精力을다하야 가라치며 學生들도音樂에熱中한 또한音樂에素質을 가진분만이모여왓기에 進步도빠르고 가라치기도 興味있소외다 무엇무엇하야도 朝鮮에서는 音樂學院으로서이音樂學院하나뿐이니까요
記—職員들 멧분이나되며 무슨科무슨科있는지요
安—잠간기달리십시요 沈先生님 各科責任敎授는엇더케되엿든가요 (沈影燮氏한테로가면서)
沈氏가快活한 우숨을 우스면서登場한다.
沈—아-밧브신데오섯습니다 나는벌서 參席하고 십헛스나 두분의滋味있게하는이야기의 妨害犯이될가念慮하야 그저가만 求景만하엿지요 그럼나도말參與할 資格이있을가요……
記—그럼요 그래學院이야기좀하야주십쇼 언제 創立되엿든가요
沈—昨年六月初旬에 創立되엿지요 今年三月에와서는學院을 一新하기爲하야 職員도 모다變動하엿습니다 學院의質을좋게할려면 爲先훌늉한先生들을 모시여야하겠어요
記—勿論 그러하겠지요 安基永氏 李升學氏같은 高名의 聲樂家를 敎授로 모시엿스니 榮光스러운일입니다 그래職員及講師그리고 科責任은 엇더케되엿든가요
沈—先生들만은좋은분들모실려고 무척애를썻습니다 現在專屬職員으로는聲樂科에 安基永氏 李升學氏 玄濟明氏 鈴木美佐保氏 바요린科에安聖敎氏 蔡東鮮氏 피아노科JB스토우되니-- 其外時間講師로서는 淸水幹三氏 金世烔氏 宋錫夏氏 H후-스氏 淺原敏子 異河潤氏 安藤芳亮氏 金管氏 五十嵐悌三郞氏 李鍾泰氏 吉澤實氏 本管伸光氏 여러분이있읍니다
記—좋은先生님들 많이게십니다 學院에서무슨硏究發表會같은것은 열지안습니까?
沈—네今年六月初旬에는 安基永氏獨唱會를열고 六月下旬에는 全學院敎員及學生 演奏會를開催하기로內定되야 벌서부터準備하고있읍니다
記—그것참 좋은일입니다 그런대 요사히 젊은이들가온대는李升學氏人氣가大端한모양입니다그려 聲量이豊富하고 人物잘낫기로……그래李氏 獨唱會는엇더합니까.
沈—今年가을에 校舍까지新築되면李升學獨唱會도 열게될듯합니다
記—沈先生 學院이야기 잘드럿습니다이전安基永氏戀愛放浪談을 듣기로하겠읍니다
沈—하…하…하… 그럼 그리하시짖요
記者는자리를옴겨조용한곳에자리를定하고 安氏가 過去걸어온 평탄치못한戀愛放浪談을 기듯로하엿다
X
記—金顯順氏와사랑을속삭이면서 멀리멀리 戀愛放浪을떠나든때는 언제엿든가요
安—世上에서는 모다 손에손을잡고 갓치떠낫다하나 實狀은 처음은저혼자떠낫든것입니다 그때의나의 오뇌란말할수없었소외다 언제나男女를勿論하고 한남자한女子를 가저야한다고 主張하야오든 나로한번에두女子를……하나는妻로 하나는戀人으로 갓게되니 良心的苦悶이란 참으로 견댈수없었읍니다 그냥있다가는 말나 죽을地境이엿서요 그래 처음은 顯順이도몰느게 露西亞로들어갈 마음으로 爲先 哈爾賓에있는 邊鴻奎氏한테 갓대엇지요 내가京城驛에서 남모를 괴로운가삼을안고 남에 눈을피하야 北行國際列車에 몸을던진때는 野櫻구경으로 젊은 男女들은 모다昌慶苑으로—물밀녀가든 昭和七年四月中旬어느날밤이엿습니다 지금도 그때의나의 외로운그림자가 눈앞에연연합니다
記—그래 顯順氏는엇더케되엿든가요?
安—哈爾賓 鴻奎氏宅에 오고보니 顯順이를 그리워하는마음이 一層더하야저黙黙히있을수가있어야지요 그래 곳그곳에있다는것을 顯順이한테편지하엿지요 그리하얏드니 곳 서울을떠나 哈爾賓으로온다는 電報가왓겠지요 나는 新京서맛나려고 新京까지나와 新京서두리맛나 곳 北平으로 向하엿습니다 北平에는 顯順이옵빠되는 顯宅氏가있기에 顯宅氏에게서돈변통을좀하야볼가하야 갓든것인대 意外에 失敗를 당하고 말었지요 그래 顯順이는 北平顯宅氏한테있고 나만먼저 上海로가기로하엿든것입니다 上海에가서 職業을 곳 求할수는없고 가지고간 돈도 다써버리니 그야참하엿든것입니다 그리다가 個人敎授를밧는이들이멧사람있게되야 근근히生活은 이여가게되드구만요 生活을 하게되니다시또현순이생각이나기에 上海로불너왓지요 바로
(第九頁에)
(第三十九頁에서게속)
그해九月에 映寫公司名俳優로 朝鮮사람 金熖氏盡力으로 映寫公司배우들이 個人敎授햇지요
記—金熖氏는엇던映畵에
安—金熖氏는 母性之光等 여러作品에主演하야 그人氣야말로大端하엿지요 그래 全中國名俳優투표에一等當選되야 映畵之皇帝라는 榮譽스러운 映畵名을 갓게되엿지요 그는 中國名女俳優王人美氏와結婚하엿서요
記—그래映寫公司俳優들은 오래敎授를밧엇서요
安—그들은그듬해五月까지단니엿습니다 그러니 六月부터는 다시收入없는 生活을 하게되엿습니다 그때부터 上海가 지긋지긋실습디다 그래 할수없어 顯順이가 親家에 애절한편지를하엿드니 돈二百圓을 보내여주엇드구만요 그돈으로 곳東京으로向하여 一年半後다시 東京서 朝鮮으로오고말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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