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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경성 양지 『예술가 교환』 좌담회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상해․경성 양지 『예술가 교환』 좌담회 上海․京城兩地『藝術家交驩』座談會
종    류 좌담 座談
필    자 +++ +++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9 昭和十六年九月
면    수 162 (162)
기사
主催
上海劇藝術硏究會
京城․三千里社

出席者
上海劇藝術硏究協會側 朴 巨 影
×
朝鮮映畵人協會長 安 鍾 和
朝鮮演劇協會長 李 瑞 求
現代劇場代表 柳 致 眞
國民演劇硏究所長 咸 大 勳
朝鮮映畵文化硏究所長 李 創 用
舞踊家 趙 澤 元
朝鮮演劇協會理事 金 寬 洙
高麗映畵社宣傳部 金 永 壽
京城日報社學藝部 田 中 宏
同 須 田 靜 夫
本社側
金 東 煥
朴 啓 周
日 時, 八月三日午後六時
場 所, 京城雅叙園홀

金東煥—오늘저녁은 上海劇藝術硏究會와 本社와의 共同主催로 朝鮮과 大陸과의 藝術交驩을 말하는 座談會를 開催하려합니다. 特히上海로부터 上海劇藝術硏究會總務로 계신 朴巨影君이 入城하여 上海朝鮮人文化團體와 朝鮮의 諸文化團體와의 提携를 爲해 活動中인바, 그 提携를 爲한 雙方의 意見을 交換하여 써 朝鮮文化의 大陸進出等을 꾀하며, 이러한 우리의 文化部面의 活動을 通해서 我國의 最高指標인 大東亞共榮圈建設에 多少의 도음이라도 된다고하면 이는 正히 우리의 共通된 感激이 아닐수 없을것입니다. 그런데 于先 朴巨影君을 여러분에게 紹介하고 이會를 進行하려합니다.
朴巨影—매우 奔忙하심도 不拘하시고 이처럼 參席해 주셔서 感謝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金東煥氏가 말씀하신대로, 上海에는 八千名이라는 半島同胞가 居留하고 있는데, 事變以後 思想客들도 모두 轉向했고, 實業界에 있어서도 敏腕을 보이여 朝鮮人으로서의 地盤도 커서 外國人에게 匹敵하는 地位를 갖고있으며, 더욱 貧弱하나마 우리의 손으로 組織된 文化機關도 있어서 如何히 하면 朝鮮內의 先輩들과 握手하고 連絡을 取하며 또는 指導와 援助를 받을수가 있까하는 諸希望을 품고 京城을 찾아왔습니다. 上海의 우리文化團體라고하면 그리 크게 떠들 程度는 못되지만 最近 一二年內에 매우 活潑한 움지김을 呈하여 各方面의 聲援도 자못 큽니다. 上海에는 現在 朝鮮人으로 組織된 新聞社, 雜誌社, 俱樂部, 靑年會, 映畵舘, 幼稚園, 劇藝術硏究會等 諸團體가 있어서 모두 軍當局과 總領事舘, 朝鮮總督府上海出張所當局의 支持로 時局의 線에 沿하여 運營되여 가는데, 海內와의 連絡도 함께 要望하는바입니다. 그런데 爲先 朝鮮의 諸文化團體의 動向과 現狀을 拜聽코저 합니다.
金東煥—朝鮮文化의 現狀報告에 있어서 演劇部門부터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演劇協會의現狀
李瑞求—朝鮮에는 從來 많은 演劇團體가 있었으나 統制機關이 없었기 때문에, 自由行動을 取해왔고, 또 組織에 있어서나 上演脚本에 있어서도 自由主義的傾向에 處해있었으므로 不健全한 演劇行動이 많았던것은 否定할수 없는 事實로서 이를 統制하고 强化하여써 新體制에 即應한, 이를테면 演劇을 通하여서 國家意識을 더욱 굳게 把握케 하고, 國民生活의向上을 꾀하려는 意味에서 昨年十二月에 演劇協會를 創立하였습니다. 創立當時에는 九個劇團만 承認했으나 現在는 二十二個劇團이 當局과 本協會의 承認밑에서 健全한 步調를 옮기고 있는바, 特히 現代劇場에서는 國民劇이라는 健實하고도 時勢에 適切한 演劇行動을 取하여서 劇界의 한 龜鑑이 되여줄뿐아니라 特히 演技者의 質的向上을 爲해서 國民演劇硏究所까지 創設하여 現在 六十名의 俳優를 養成하고 있습니다. 極히 簡單하나마 大略 以上에 말씀드린것이 우리協會가 年間 걸어온 걸음입니다.
金東煥—다음엔 柳致眞氏가, 現代劇場이 標榜하는 國民劇「黑龍江」公演에 關해서 말씀해주십시오.
柳致眞—「黑龍江」은 제自身이 지은 作品이기때문에 무에라 말씀드리기가 거북합니다. 마는 國民劇이라는 그自體에 關하여서 몇말씀 드리고저 합니다. 國民劇은 現時局에 鑑하여 社會의 關心의 的이 되여있는데, 그 內容에 있어서 藝術意識이라는것도 喪失치 말아야 하겠지만 그와 함께 國家理念의發揚에 資함이 있지않아서는 안될것이외다. 그러나 그것은 自然的發生, 即, 人間本能의 苦惱로부터 步一步로 國家의 大理想에 到達하는 自然的發展이라야 할것입니다. 無論 國民演劇은 리알에 立脚하여 그 理念을 浪漫에까지 發展시켜야하겠지만 그 方法에 있어서는 두가지 方向이 있다고생각합니다. 其一은 線이 가늘고 纖細한 主로 曲線의 美를 表現하는 幻想的인 東洋畵的手法이오, 其二는 그와 反對로 線이 굵고 直線的인, 이를테면 西洋畵的인것입니다. 「黑龍江」은 後者를 擇한 素朴하고도 野性的인것을 리알한 것에 取扱하여, 大陸氣質의 다이나믹크한 迫眞力을 浪漫에까지 發展시키려 한것입니다. 無論 여기에서 말하는 浪漫은 김이 빠진 노스탈쟈가 아니고 沸騰하는 理念의 昇華를 가르침이외다. 以上에 말씀드린것이 우리 現代劇場의 演劇行動이올시다.

移動劇團에對하여
金東煥—이번에는 演劇協會內에 새로 組織된 「移動劇團」에 對해서 金寬洙氏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金寬洙—移動劇團은 全혀 文化의惠澤을 浴하지 못하는 農村, 鑛山 漁村等의 勞務者들에게 健全明朗한 演劇을 주어서 그들에게 慰安을 주고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勤勞에 對한 感謝, 惑은 明朗한 氣分으로 動勞에 處하게하여 生産擴充을 꾀하며, 및 地方文化의 確立과 아울러 愛國思想을 涵養, 時局認識의 徹底化等을 期하려 함인데, 于先 團員을 募集했던바 志願者 六十餘名中에서 男子十一名, 女子五名을 選出했으며 더욱 지난 六月二十五日부터 一個月間 講習會가 있었고, 現在는 每日 午後마다 猛練習中입니다 . 그리고 八月十日에 試演會와 壯行會를 擧行한後, 八月十五日부터 京畿道를 爲始해서 巡演하려합니다. 入場料는 無料로 하려하였으나 運營上 困難이甚하기때문에 鑛山經營者側에서 負擔하면 勞務者들은 無料로 觀覽케 될것이지만 其外는 될수있는대로 最廉價로 하려합니다.

國民劇硏究會의槪况
金東煥—이번엔 國民演劇究硏所의現狀에 對해서 咸大勳氏가 함씀해주십시요.
咸大勳—國民演劇硏究所는 現代劇場의 姉妹團體로서 主로 俳優養成과 및俳優의 質的向上을 爲主하는데, 지난 五月十五日에 開講하여 第一期修業은 八月十五日까집니다. 講師는 軍, 官, 民의 權威者를 網羅했으며, 特히 學界의 權威者와 各方面의 指導的地位에 있는 藝術家諸氏를 動員하였고, 應募者一百八十四名中에서 六十名만을 選拔하여 第一期硏究生으로 入所시켰습니다. 敎授課目은 國語, 國史, 世界情勢, 藝術全般, 俳優術 演出術, 戱曲, 舞臺, 美術, 音樂, 舞踊等이외다.

映畵協會의現狀
金東煥—다음, 安鍾和氏가 映畵協會에 對해서 함씀해주십시오.
安鍾和—朝鮮의 映畵는 二十年이라는 長久한 歷史를 가지고 있는데 協會가 創設되기는 昨年十月이였습니다. 現在映畵製作所는 朝鮮映畵株式會社, 高麗映畵社等을비롯하여 十個會社가 있으며, 昨年當局의 映畵令에 依해서 映畵人技術者登錄制가 實施되여 第一期에 六十名, 第二期에 二十名, 都合 八十名의 技術者가 登錄되였습니다. 技術者라하면, 監督(演出者), 撮影者, 演技者(男女俳優)等을 總稱함인데, 登錄받지못한者는 映畵製作에 全혀 關連할資格이 없습니다. 다음 映畵文化에 關해서는 李創用氏가 따로 말씀하겠기에 略합니다마는 近者에 와서 各映畵會社合同問題가 盛히 떠들어 一般의 注視의 的이 되여있으나 아직 그 實現을 보지못했으며, 앞으로 新體制의 旗帳밑에서 좋은 解決을 보리라 믿습니다.

朝鮮映畵界의動態
金東煥—映畵製作과 配給等에 對해서 李創用氏가 말씀해주십시오.
李創用—映畵人協會는 아직演劇界와같이 第二世養成機關도 없고, 또 活動하는 時日보다 休息하고있는 時間이 더 많이 있게되는듯싶게 보여져서 그 成果란 大端히 微微한 觀을 呈하고 있습니다. 事實 朝鮮에 十個映畵社가 있다고 해도 一年에 製作本數가 五六本에서 不過하며, 今年같은해는 三四本의 製作도 볼수없으니 이렇다하는 進步를 보여주질 못했습니다. 여기엔 그 한가지 理由로는, 企業家의 立場에서 볼때, 映畵會社合同問題라는것이 크게 關連되고있는것입니다. 資本家편에서는, 現在 盛히 問題化되고 있는 映畵業者統制에 依한 合同運動의 今後歸趨를 보아서 製作에 着手하겠다는, 即 合同된다면 구태여 巨額을 던져 映畵를 製作할것이 없다는 見地에서 休業狀態에 있습니다. 無論 當局이 合同問題를 提示한것은 朝鮮映畵界로 하여금 보다 훌륭한 發展과 向上을 爲해서이고, 따라서 國家理念에 基調하여 育成하자는것이기 때문에 吾人은 그 目的을 向하여 協力邁進해야 할것입니다. 內地에는 松竹만해도 千餘名의 映畵人을 抱容하고있으며, 全日本을 통털어 놀라운 數者를 헤이는 映畵人이 있어서 巨大한 足蹟을 남기고 있지만 朝鮮에는 不過八十名으로써도 全혀 微微한 狀態에 處해있다는것은 吾人으로 하여금 再反省을 促하게 하는바입니다. 配給에 있어서는 內地, 滿洲, 北支까지도 손을 뻗고있으나 上海方面에는 아직 配給되지 않었습니다.

國民舞踊의公演
金東煥—다음, 舞踊에 있어서 趙澤元氏가 말씀해 주십시오.
趙澤元—우리 舞踊家는 諸藝術團體에 比하여 그數爻가 적으니만치 活動亦是 매우 微微합니다. 朝鮮舞踊界의 先驅者요 元老인 韓成俊氏가 數月前에 文化賞을 탓고 崔承喜氏가 歐米行脚으로부터 歸國하여 歸國公演이 있었으며, 朝鮮서는 嚆矢라고할 國民舞踊이 朝鮮演藝協會主催로 저와 및 石井舞踊所의 內地女子들이 出演했었는데, 이는 內鮮一體의 史實을 主題로한 「扶餘回想曲」으로, 京城서와 大邱에서 公演해서 많은 成果를 얻었습니다.

上海朝鮮人文化團體의 動向
金東煥—다음은 朴巨影君으로부터上海諸文化團體의 報告를 듣기로합시다.
朴巨影—上海라고하면 이름은 크지만 우리의 文化活動範圍는 極히 幼稚한편에 屬할것입니다. 金璟載氏를 副社長(社長은無)으로한 五十萬圓全額拂込의 華文版(日刊新聞) 「上海時報社」가 純全히 우리朝鮮人의 손으로 經營되여나간다는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며, 同社 營業局長, 編輯局長等 幹部는 모두 朝鮮人입니다. 그리고 朝鮮文雜誌로는 前에 李甲寧氏主宰下에 發刊되던 月刊「光化」가 그間 休刊되여 있었는데 今番 金璟載氏가 光化社를 引繼해서 相當한 基金으로 續刊하게 됐으며, 上海에는 아시다싶이 朝鮮文活字가 없기 때문에 前朝鮮中央日報社의 活字를 全部購入하여 上海로 가져갔습니다. 其外 金璟載氏가 四十五萬딸라를 投하여 從來 外國人이 經營하던 「우이리스大戱院」을 買收하여 三層洋舘의 映畵舘이 亦是 우리의 손으로 上海라는 國際都市에서 堂堂히 外國人과 어깨를 겨루고 나아갑니다. 其外에는 우리 「上海劇藝術硏究會」, 上海朝鮮文化人으로 組織된 「上海鷄林俱樂部」, 「上海鷄林靑年團」이 있고, 또 우리 손으로 經營하는 「上海養正幼稚園」等이 있습니다.

上海의中國人文化團體
柳致眞—中國人의 文化團體로는 무엇무엇 있습니까.
朴巨影—中日文化協會, 이것은 本部가 南京에 있는것인데 汪精衛, 禇民誼, 林伯生, 阿部前大使等 諸氏로 組織된 日支提携, 善隣友好共同防共의 三大原則에 基하여 組織된것이며, 映畵製作會社로는 「藝華影業公司」, 「新華影業公司」等이 있고, 劇團으로는 「天馬」, 「中國旅行」, 「天風」等이 있는데, 우리가想像하던 以上의 演技와 또는 藝術的芳香이 무르익은 그러한 劇을 우리에게 보여주어 實로 그水準이 外國에 比하여 遜色이없다고도 보았습니다. 그外에도 我國側의 上海每日新聞社, 大陸新報社, 雜誌로는 「大陸往來」, 「楊子江」等이 있고, 其他, 藝文會, 長江會 上海歌人社, 上海新報, 新申報等, 文化團體가 있습니다.

朝鮮과大陸과의藝術의交流
金東煥—어떻게 하면 朝鮮의 演劇映畵, 舞踊, 文學等을 大陸에 가져갈수 있을가? 即, 大陸에 있는 朝鮮人에게 海內의 文化를 傳하여서 彼此의 文化交流를 보자는것에 忌彈없으신 意見을 提示해주기를 바랍니다.
朴巨影—上海에있는 朝鮮人들도 늘 그리운것이 海內의 消息이고, 또 이렇게 해서든지 半島의 映畵, 演劇, 文學, 舞踊에 接하고싶다는것이 共通된 希望으로 朝鮮映畵의 上海輸出, 또는 朝鮮劇團의 上海에 招聘等을 提唱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點에 關해서 意見交換이 있었으면 합니다.

演劇進出의難點
李瑞求—昨年에 放送協會에서 演藝團(노래, 춤, 經演劇, 漫談)을 組織해가지고 上海를 爲始해서 中支, 北支等地의 皇軍과 海外同胞慰問次로 巡演하려고 했었는데, 無論 營利를 目的함이 아니고 損을 볼지라도 좋다는見地에서 하려했었으나, 現地에 相對하고 갈 人物이 없어서 中止했습니다. 上海만은 當時 李甲寧氏가 나서서 모든 것을 周旋해주고, 또 上海에서의 損害도 負擔하마했었으나, 그것은 上海뿐이고, 徐州, 靑島, 濟南, 天津, 北京等地는 누가 그렇게 나서서 周旋해줄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上海한곳만 갔다오자면 그것은 엄청난 時日과 經費가 들기 때문에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金寬洙—數日前 朴巨影氏도 協會에 오서서 朝鮮劇團도 上海에 招聘하고싶다는 말씀을 하섰는데, 現在 朝鮮內의 諸劇團은 滿洲의圖們, 延吉, 龍井, 牧丹江, 甚至於, 佳木斯와같은 奧地에까지도 들어가게 되는것은 交通이 便利해서 中途에서 하루도 쉬지않고 낮에는 汽車에서 자고 밤에는 公演할수있는 關係로 損을보는 일이 없으나 上海에는 來往하노라고 中途에서 虛費하는 日字가 벌써 十餘日을 잡아먹게되고 上海에 가서도 八千名朝鮮人이 한사람도 빠지지않고 總動員해서 入場한다해도 三日間收入으로는 團員一同의 旅費도 모자랄 形便이니 其他 道具運搬, 食費, 經費, 宣傳費等은 너무도 엄청난 赤字를 보여주므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損을 現地同胞에게 짐지운다는것은 慰問의 精神에서 背馳되므로 全혀 不可能한 일이아닐까 생각합니다.
咸大勳—그렇더래도 上海만을 目的하지않고, 最初 上海에서 公演하고 다음 徐州, 靑島, 開封, 天津, 北京等地로 巡演하면서 돌아나온다면 上海에만 갔다오는것보다는 그리 損이 없으리라고 보는데요.
李瑞求—何如間 上海를 爲始해서 徐州, 靑島, 開封, 天津, 北京에서 모두 周旋해주는 相對者가 있다면 演劇의 大陸行도 안될理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大陸輪出에의映畵使命
李創用—映畵에 있어서는 俳優派遣이나 또는 道具運搬等이 必要없고 單只 필림만 보내면 問題가 解決되기때문에 演劇에 比해서는 顯著한 差異가있어서 朝鮮映畵의 大陸進出 即, 現地上映은 매우容易한데 問題는 上海映畵配給統制機關인 中華映畵社의 斡旋을 잘받도록 할것과, 또 한가지는 映畵는 演劇과 달라서 그 觀客이 朝鮮人에게만 限해지는것이 아니고 內地人이나 外國人도 볼수있기때문에 單只 問題는 이映畵면 外國人에게도 羞恥스럽지않다는 自身이 있는 映畵라면 足할것이외다. 自身이라는데는 여러가지 解釋이 붙지만, 例컨대 內地映畵의 「馬」라는 映畵는 映畵藝術 그自體로서는 훌륭히 잘됐고 成功한 作品이지만 이映畵가 滿洲에서의 上映은 禁止되였습니다. 웨그런고하니「馬」에는 內地의 一部農村의 너무도 甚한 貧困相을 描寫한것이기때문에 滿洲人이 日本農村에對한 誤解를 가지지 않을까하는 點에서였습니다. 이러한 見地에서 朝鮮映畵亦是 藝術的인 成功도成功이려니와 外國人에게 보혀서 朝鮮을 誤解하지않을 그러한 좋은 作品을 보내지 않아서는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舞踊의容易性
趙澤元—그러한 點에서 舞踊의 大陸進出은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舞踊은 言語의 藝術이 아니고 動作의 藝術이기때문에 演劇처럼 朝鮮人에게 限해서 觀覽시킬것도 아니고, 또 人員도 照明 音樂人까지 合처서 六七人이면 足하기 때문에 그리고, 道具도 別로 없기때문에 上海等地의 進出까지도 매우 容易하며, 映畵나, 文學과 같이 貧困相이나 또는 誤解될 그러한 點을 外國人에게뵈이는것이 없기때문에 諸點에서 보아서 無欠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朝鮮의古典 舞踊이라고 할지라도 各國人의 口味에도 迎合될수 있는것이여서 좋다고 봅니다. 特히 上海에는 아직까지도 朝鮮舞踊家가 公演해본일이 없기때문에 그곳 朝鮮文化人들의 企劃에서 中國人에게도 朝鮮에 이러한舞踊藝術이 있다는것을 알려주고, 이로써 舞踊藝術의 交流도 꾀할수있다고 생각합니다.

大陸에의取材
李創用—如何튼, 舞踊이나 演劇이나 映畵等을 大陸에 進出시켜 大東亞共營圈內의 各文化를 交流시킴은 가장 意義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우리 映畵企劃者側에서도 大陸을 舞臺로 한 映畵製作의 意慾이 있는데, 朴巨影氏, 어디 上海에 取才할 材料가 없겠습니까.
朴巨影—거 매우 좋은 意見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떠한 意圖에 迎合되는 素材를 要求하시는지요.
李創用—말하자면, 上海에 있는 朝鮮人이 皇軍을 도와서 매우 感激한 場面이 있었다든가, 또는 時局에 適切한 朝鮮人의 赤誠場面等인데, 亦是 映畵의 素材가 될수있다는것을 無視하지않은것으로말입니다.
朴巨影—그것에 對해서는 앞으로 材料도 蒐集해서 供給하려하며 또 그런點에 特히 留意하려합니다.
安鍾和—그러한 現地의 取才로서 映畵를通한 文化의 交流를 꾀하는 것은 매우 有意義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大陸과文學
金東煥—文學에 있어서는 오늘 저녁에 朝鮮文人協會幹事長朴英熙氏와 每日新報社學藝部長白鐵氏가 參席키로 했었는데 事情에 依해서 두분 다 不參하게된것은 매우 遺憾된일이지만. 文學에 있어서도 言及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朴巨影—제 생각엔 中支의 從事文人派遣이 있어서 大陸文學, 戰線文學, 開拓文學等에 朝鮮文人의 筆耕을 開拓시킴이 좋다고 보는데요
咸大勳—今年 北支第一線 皇軍慰問文壇使節로 金東仁, 朴英熙, 林學洙三氏가 當時 山西省의 最前戰線인 運城까지 갔다와서 「戰線紀行」, 「戰線詩集」等이 發刊되였었습니다마는 中支方面에도 갔다옴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金東煥—中支의 從軍文人, 勿論, 內地文壇에서는 數次의 派遣이 있었으나 아직 朝鮮文壇에서는 없었는데, 文人協會에서 그 方面에 活動해주어서 文學을 通하여서는 東亞共榮의 大理想을 樹立함에 조금이라도 도음이 된다고하면 매우 좋을바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豫定한 時間도 이미 지났으니 이것으로 閉會하려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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