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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 영화 「너와 나」를 말하는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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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지원병 영화 「너와 나」를 말하는 좌담회 志願兵映畵「君と僕」를말하는座談會
종    류 좌담 座談
필    자 +++ +++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9 昭和十六年九月
면    수 112 (112)
기사
[사진] 志願兵 訓練所에서 監督·俳優의 打合場面
[사진] 高井氏
[사진] 日夏氏
[사진] 井上氏
[사진] 金永壽氏

朝鮮軍司令部報道部製作 ◦ 陸軍省報道部 • 朝鮮總督府後援
-板垣將軍도登塲- 日夏英太郞(舊名許泳)監督

出演者
朝鮮軍報道部 高井邦彦
京都新興キネマ 日夏英太郞
仝 井上淺茅
高麗映畵社 金永壽
本社側 朴啓周
日時․七月二十六日午後六時
場所․京城半島ホテル

朴. 한창 撮影進行中이어서 매우 奔忙하실텐데 이처럼 時間을 내셔서 參席해주시니 感謝합니다. 그런데 今番製作中인 映畵 「그대와나」는 朝鮮軍의 製作이니만치 그 製作意圖에 對해서 責任指揮者로 게신 高井氏가 먼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대와나」의製作意圖
高井. 事實은 企劃에 있어서 日夏氏가 擔當했기때문에 日夏氏가 말씀하시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우리軍의 意圖는, 事變以後 銃後半島民衆이 여러方面으로 盡忠報國함이 內地人에게 못지않게 커서 이 놀라운 赤誠의 한面이라도 內地人에게 알려서 內鮮兩民衆이 손을 잡고 步調를 더욱 같이 함으로 名實共히 一體를 이루려는 意慾에서 爲先 志願兵으로서의 赤誠場面을 映畵化하려 한것이외다.
日夏. 高井氏의 말씀과같이, 半島民衆도 훌륭한 日本人이라는것을 生活을 通해서 나타내고있는 部面을, 아직 朝鮮을 認識치 못한 內地同胞에게 알리려함에 있습니다. 지금 國家는 未曾有의 難局에 處하여 國民의 總力發揮로 高度國防國家建設에 當해야 할 것을 要求하는 此際에 半島人의 愛國熱과 皇民化運動等 朝鮮의 實情을 傳함으로써 內地一般大衆의 朝鮮에對한 認識을 是正向上시키고 따라서 半島靑年層에 軍人精神을 더욱 昻揚하여 써 國家推進力의 擴充을 꾀하려함에 있습니다. 이렇게 함에는 무엇보다 國民과 가장 接觸面이 많고, 및 明朗한 娛樂性으로 消化시킬수있는 映畵藝術을 通해서 示唆시킴이 捷徑이라 생각합니다.
金. 그런데 처음 어떤 動機로서 今般 이 映畵를 企劃하게 되었습니까.
日夏. 저는 朝鮮서 中學을 마치고는 곧 東京에 건너가서 二年間 學校에 다니다가 映畵界에 발을 들여놓은지 十六年만인 今年二月에 처음으로 朝鮮에 나오게 됐지요. 如斯히 朝鮮을 오래 떠나있었든 關係로 朝鮮에 對한 知識이 白紙이다싶이 되여, 朝鮮을 알려는 慾望에서 지난二月 紀元節날 城大總長條田氏를 찾아갔더니 「朝鮮을 알려면 志願兵訓練所에 가보라」하시며 當時 學務局長 塩原氏의 幹旋과 朝鮮軍의 好意로 訓練所에 가서 志願兵들과 함께 共同宿食을 十日間 하는동안 感激과함께 깨다름이 커서 이를 映畵化하려고 企劃했으며, 飯島正氏와 같이 「君と僕」라는 씨나리오를 完成하여서 「映畵評論」誌에 發表하고 곧 製作에 着手했습니다.
朴. 어느날부터 크랑크를 開始했던가요?
井上. 지난 七月七日부터 始作했습니다
金. 앞으로 얼마동안의 日子를 消費해야 完成케 됩니까.
井上. 九月中旬까지는 걸릴것입니다. 十月에는 封切할 豫定이니까요.
朴. 「君と僕」라는 映畵題名은 어떤 意味에서 採擇했어요.
日夏. 「きみ」, 即「그대」라는것은 一般內地人의 總稱이오, 「ぼく」, 即 「나」는 一般朝鮮人의 總稱으로서 그대와 나는 굳게 손을 잡고 大東亞共榮圈의 礎石이 되자는것을 意味한것입니다.

內鮮俳優의演技差異
朴. 이번 映畵 「그대와나」에는 朝鮮人男女俳優들도 登場했는데, 內地人俳優에 比하여 演技差異가 있습디까.
日夏. 글쎄요. 差異가 있다고 했다가는 지금 撮影中인데 忿慨하면 야단이게요?(一同笑) 勿論 俳優도 俳優나름이겠지만 日活의 小杉勇이나 東寶에 大日方傳같은 名優가 登場하니만치 演技水準이 꼭 같다고는 할수 없으나 어쨋던 朝鮮俳優의 演技도 놀라운程度며, 內地俳優에 못지지 않다고 驚嘆할 點도 있었습니다.
高井. 演技는 그렇다지만 國語發音에있어서 매우 差異가 있어서 錄音에 큰打擊인 모양이드군요.
日夏. 네, 세리에 있어서는 매우 困難을 받습니다. 그래서 每日밤 세리練習을 시키느라고 야단이지요.
金. 그래도 우리 高麗映畵社專屬女優金信哉는 演技로나 세리로나 괜찮지요?
日夏. 네, 金信哉는 잘 해요.
金. 이봐. 朴君. 지금 日夏氏의 對答을 부디 잊지말고 記事中에 넣어야하네.
朴. 자넨, 남의 座談會에 와서도 제會社 宣傳만 하려드나? (一同笑)
高井. 宣傳部長의 職責을 다하시려는모양인게지요. (또 一同笑)

製作中의苦心
朴. 內鮮兩俳優의 出陣이니만치, 그리고 朝鮮에 와서 로케-하는 關係로 困難받는 點이 많습니까.
日夏. 朝鮮俳優에 있어선 아까 말씀한 세리가 第一 困難받는 일이지만 그外 로케-에 있어서 豫想밖에 多方面의 援助를 받게되어 매우 進行이 順調롭고 때로는 豫想했던것보다 더速하게 進行되기도 합니다. 今番製作에 動員되는 人員이 俳優까지 合처서 每日 一千人以上인데, 俳優들이 全部 市外 楊州郡에 있는 志願兵訓練所에서 合宿하기때문에 市內로케때에는 人員과 諸道具 運搬에 京春鐵道를 臨時增車, 或은 發車回數를 增加하는等, 實로 如間 便宜를 보아주는것이 아닙니다. 映畵製作을 爲해서 汽車가 臨時增車되는 例는 內地에서도 이때까지 없은일이며, 더욱이 京電會社에서도 市外로케時에 電燈을 加設하여주는等, 그리고 衣裳에 있어서도, 和信, 三越, 두百貨店에서 分에 넘는 後援을 하여 주는데는 感激하여 마지않는바입니다. 以上에 말씀 드린것은 民間團體의 後援이지만 軍에 있어서도 前無後無한 援助를 아끼지 않는데는 實로 感泣을 不禁하는바입니다. 特히 兵丁들이 必要한 場面이 있어서 軍司令部에 가서 交涉했더니 安井中尉는 「멀 그렇게 어려워 하는가. 六十名만이 아니라 더 必要하면 더래도 보내주마」 하시고, 또앞으로 戰場々面의 撮影이 있는데 그때는 戰車, 機關銃, 其他 諸武器까지도 빌려주시겠다하여 그 便宜에 對해선 이로 말할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 困難한 點이 없는바는 아니나 軍, 官, 民의 聲援과 援助에 우리는 오히려 苦도 樂으로 體驗케 됩니다.

「그대와나」에 板垣大將도登場
日夏. 오늘이 마침 志願兵訓練所에서 今年度 陸軍特別志願兵訓練生의 第一期修了式이 午前十時부터 南總督을 비롯하여 板垣軍司令官, 李恒九李王職長官, 川岸朝鮮聯盟事務總長, 鈴川京畿道知事等 諸閣下의 臨席中에 盛大히擧行되었는데, 映畵「그대와나」속에도 志願兵의 卒業式인 修了式場面이 必要했었던바, 마침 그 式이 擧行되므로 撮影하게 되였지요. 우리가 가진 캐메라와 錄音機外에도 高麗映畵社의것까지 動員시켜서 錄音機二臺, 캐메라四臺, 밋첼, 발보, 아이모, 호엘等에依해서 板垣大將과 南總督諸氏를 필림에 거더넣게 된것은 實로 우리로서는 큰 收獲이오 映畵 「그대와나」에 있어서도 두분 將軍이 等張되였다는 것은 至上의 光榮이라고 생각하는바입니다.

俳優의交換도映畵史上前無
朴. 금번 製作하는 「그대와나」에는 內地의 여러 映畵社의 俳優들이 出演하는 모양인가보든데요?
日夏. 네, 日活의 小杉勇, 東寶의 大日方傳, 大船의 坪內美子, 三宅邦子, 滿映의 李香蘭等, 여러 映畵社의 男女俳優들이 出演하는데, 이렇게 여러映畵社의 俳優가 한映畵製作에 出演해준다는것도 內地映畵史上에서는 最初라고 할수있는 現象입니다. 內鮮俳優의 共同出演도 內鮮一體의 運行에 한業績이라 보겠지만 內地俳優의 交驩도 實로 有史以來 처음보는 現象이라 생각합니다.
金. 崔承喜氏도 出演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언제 오시게 됩니까.
高井. 崔承喜氏도 出演하기로 決定했었는데 무슨 事情에 依해서 그만 두기로 되였습니다.

「그대와나」의스탑
朴. 映畵 「그대와나」의 스탑는 누구누구신가요?
井上. 스탑는 다음과 같습니다.
企劃 日夏英太郞(舊名許泳)
脚本 飯島正, 日夏英太郞
指導 田坂具隆
監督(演出) 日夏英太郞
演出補 武村健治, 牧山 茂
撮影 森尾鐵郞
撮影補 塚原浩二, 高山彌七郞
撮影助手 沈在興, 李秀根, 金大雄
錄音 土橋武夫
照明 村田幸吉
照明撮 天野 進
製作擔當 井上淺茅
音樂 佐藤長助
演奏 中央交響樂團

日夏氏가監督이되기까지
朴. 다음, 日夏氏의 身上談이나 듣기로합시다. 꽤 오랫동안 內地映畵界에서 活躍하신 모양인데, 몇해동안이나 그方面에서 일보셨으며, 처음 映畵界에 발을 들여놓게되신 動機로부터 始作하여 今日에 이르기까지의 經歷을 말씀해주십시오.
日夏. 머, 이야기꺼리가 돼야죠. 제故鄕은 咸興인데, 咸興서 商業學校를 第二回卒業生으로 나오자 곧 東京으로 건너갔었지요. 東京서 大學다니는동안 文學을 즐겨서 이를테면 一個文學靑年이었지요. 그러다가 大學을 채 마치지못하고 곧 映畵界에 뛰쳐들어 갔는데, 그러니까 내 映畵生活이란 無慮 十四年間이라는 長久한 時日에 亘한것이었습니다.
金. 失禮입니다만 今年에 年歲가 얼마시지요?
日夏. 서른넷입니다. 그러니까, 二十歲時에 映畵界에 들어선셈이지?
井上. 그래. 二十歲때일꺼야.
日夏. 처음 들어간 映畵社가 マキノ푸로덕슌이였는데, 처음엔 타이틀로부터 始作해서 現像, 캐메라, 그리고 俳優까지 해보았고, 現在는 脚本과 監督의 일까지 보게되니 映畵에 關한 一切의 일은 다 해본셈이지요. マキノ푸로덕슌이 解散되자 マキノ時代부터 내 先輩였던 二川文太郞監督을 따라 松竹映畵社로 자리를 옮겼었지요. 二川文太郞氏는 當時는 有名한 監督이었습니다.
井上. 그럼, 지금은 二川文太郞이라면 모를사람이 많지만 그當時야 훌륭한 監督으로 名聲이 높았고, 그분밑에서 길러워난 俳優도 많았었지.

朝鮮映畵에對한批評
朴. 朝鮮映畵를 보신 感想이나 말씀해주십시요. 映畵評말입니다.
日夏. 近者에 본 朝鮮映畵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特히 「授業料」라든가, 「집없는天使」는 朝鮮映畵로서는 前에 볼수없던 매우 優秀한 作品으로서 씨나리오의 構成도 제 位置를 잃지않은것들이라 보았습니다.
朴. 너무 高麗映畵社作品만 자랑하시면 金君이 제會社것이라구해서 自慢할지도 모릅니다.
金. 엑끼, 이사람! (一同笑)
日夏. 어쨋던 그러한 點에서 앞으로의 朝鮮映畵에 對한 企待가 더욱 큽니다. 그리고 朝鮮映畵는 實로 長足의 發展을 呈하고있다는것을 否定할수 없을것입니다.

朝鮮映畵의發展性
朴. 朝鮮映畵의 今後發展策에對해서 貴意見을 拜聽코저 합니다.
日夏. 글쎄요. 매우 어려운 問題를 끄집어 내시는데요. 朝鮮人을 爲한 朝鮮映畵를 製作하라는것이 一般의 소린가본데, 저는 朝鮮映畵는 朝鮮만을 相對하지말고 內地까지도 相對로한 企劃이 朝鮮映畵의 發展策에있어서 한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高井. 그問題에 있어선 저亦是 朝鮮人에게 時局을 啓蒙시키고 또한 內鮮一體의 精神을 具現함에 있어서도 內地안에 있는 內地一般大衆에게 朝鮮의 實情을 紹介하여 써 雙方이 손을 굳게 잡게하기 위해선 朝鮮映畵의 特殊性을 認定하는 同時에 朝鮮映畵의 存續의 必要를 切感하는바입니다. 이러한 點에서도 朝鮮映畵는 勿論 朝鮮의 文化와 風俗, 其他의 情趣와 鄕土色을 尊重해야겠지만 이것이 內鮮一體를 目標하는데서 出發하여야하며, 따라서 朝鮮만을 相對로 할것이 아니라 內地와 大陸까지를 相對로 製作하여야할것이라 봅니다. 即 말하자면 발은 朝鮮에 두되 손은內地와 大陸에 내어 밀라는 것입니다.
金. 그點에 있어서는 우리 映畵社에서도 朝鮮映畵는 國家意識에 沿하여서 朝鮮의 諸性格을 필림에 거더넣되, 內地와 大陸과의 握手를 前提로 한 映畵企劃을 企圖하여, 이에 飛躍的活動을 하려하는바입니다.
朴. 오랫동안 여러가지 말씀을 들려주셔서 感謝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閉會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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