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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생활 10년기 제3회―「아리랑」과 나와―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배우 생활 10년기 제3회―「아리랑」과 나와― 俳優生活十年記 第三回―「아리랑」과․나와―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전택이 田澤二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7 昭和十六年七月
면    수 148 (148)
기사
★「아리랑」과․나와 田澤二
★女優放浪記(次號發表) 金陽春

「아리랑」과․나와
—演劇俳優에서映畵俳優—
田澤二
[사진] 田澤二氏
배우생활十年記라는 課題를받었을때 나는 저옥히 놀냈다. 十年이란, 그리 짧은 時日이아니다. 내가 其道에 몸을담근지가 벌서, 그렇게됐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러워지며 感慨가 無量한바있다.
사람이란 때에따러 機會과「쇼크」를받어야 過去를追憶도 하게되고 따라서 反省도하게되는상싶다. 내가 只今 그렇다. 이번 編輯子의請托은 오래동안 過去를 잊고살어오든 나로하여금 지난날의 즐거웠든 일이며 괴로웠든일을 한꺼번에 뭉처서 眼前에다 갔다놓는 感이 없지않다.
가만이 눈을감고 過去를회상해보면 어물어물하는동안에 歲月이 휙휙 지나간것도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壁에붙은 日曆을 안탑갑게 한장두장 넘기듯이 오랜 歲月이 흘른것도같다. 勿論 이렇게 생각키우는것은 過去生活이 平垣치못했든탓일것이다. 이 苦道에서 十年동안을 헤매는 동안에 참말 괴로운일도 많었고 즐거운일도 많었다. 허나 그땐 죽고싶을만치 안탑갑고 쓰라렸든 일이 只今와서 도리켜 생각하면 도리혀 즐거운 追憶으로 남어있는일도 한두가지가 아니며 또 그와는 反對로 그땐 그렇게 슬프게 격지않었든일이 只今와서는 몹시 슬프게 생각되는일이 한두가지가아니다.
이것이 모두 사람만이 가질수있는 아름다운 면인지도모른다.
〇 〇
내가 배우가되기는 지금으로부터 十二年前이다. 맨처음으로 夜明歌劇團이라는 劇團에 잠간 몸을담것다가 곧 金小浪氏와申不出氏등과 協力하야 內外劇團을 만들었다. 그때는 演劇이 좋고 나뿐것을 탄하는 觀衆이 아니고 그저 演劇이라면 덮어놓고 모여들때다 이團體를끌고 三四箇月동안을 地方으로단였다. 그때 나는 紅顔의少年이라 그저 舞臺에 나가서 演劇을하는것을 唯一한樂으로 알었다.
그後 新舞臺 黃金座를거치면서 비로서 演劇이 무엇이며 따라서 배우라는것이 무엇을 하는것인지 알여고 애를썼다. 그와同時에 내自身을 其道에다 묻처버리기로 決心을했다. 이때도 배우라면 광대라고 손구락질을하든때다. 父母가 한사코 말니든때도이때였고 멸시를 받은때도 이때다. 그러기때문에 才能있는 동무들이 많이 물너났다. 어떤親舊는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고 또 어떤親舊는 이를악물고 물러났다. 나는 때때로 물러간 그들을 생각하면서 安否을 근심하는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當時 이땅에는 文化人을 알어주는 民衆이 없었다. 그後 나는 演劇行動을 中止하고 映畵界에 나갈 心思로 機會를 엿보고있든차에 朝鮮劇場支配人으로있든 金漢君을 알게되여 映畵界에 進出하게되었다. 바로 그때가 昭和九年인데 故羅雲奎氏를맞나 黃金町 뒷골목 적은 가개집웃층을 얻어가지고 漢陽映畵社라는 看板을걸었다. 資本主가 있어서 그런것이아니고 먼저 看板부터 걸고 求할心思였다. 애쓴보람이있어서 故人이된 車相銀君을맞어 「江건너마」을 製作하게되었다. 인젠 카메라가없다 그래 協議한結果 經費를주리고 人件費를 통없이하고라도 먼저 카메라를 장만하자하야 各方面으로 알어보든차에 마침朝鮮에 뉴-쓰를 찍으려왔든 藤井이가 카메라를 팔겠다는 말을듣고 불야불야 釜山까지 내려가서 사가지고왔다. 그카메라는 낡은「べルボ-」였다. 그래가지고 간신이 일을始作한 세음이다. 나는 그때 容洙役을 맡어하였는데 어찌 떨리든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처음이기때문에 監督의말두 떠러지기전에 카메라편을봐서 NQ를낸것도 그때다. 完成後 團成社에서 封切을했는데 興行成績이 良好하였다. 이에勇氣를얻은 車君은 다시 三萬圓을投資하야 漢江通梨泰院에다 撮影所를만들고 東京에서 錄音機며 라이트를 사드리는한편 배우들도 專屬契約을맺고 「아리랑第三篇」을着手하였다. 제딴은 허울좋게 同時錄音인데 三箇月동안이나 애써 만들어놓고보니 말소리가 들리질안는다. 發聲映畵란놈이 말을못하니 큰탈이다 게다가 畵面조차 안개낀하늘처럼 뿌-엿코 누가누군지 分間할수없게되었다. 監督을한 雲奎氏는 勿論 全員이 그만 입을버리고 서로 얼굴만 처다보게되었다. 撮影을한 李信雄氏는 어찌 기가매켰든지 卒倒를해서 病院엘가느니 야단법석이였다. 남은 이런 기매킨困窮에 빠젔는데 한편京城撮影所에서는 朝鮮最初의發聲映畵「春香傳」이니 뭐니 해가지고 우리들을 비웃는듯이 團成社에다 올렸다. 누구나할것없이 朝鮮映畵界를爲하야 하는 努力인줄알면서도 그때는 京城撮影所패들이 어찌 밉든지 모주리 한바탕해내고싶었다. 그러나 技術이 不足하니까 할수없는일이였다. 그래 우리는 하는수없이 李創用氏의 힘을빌어 몇군대를 다시 撮影하고 錄音을 해가지고 東京가서「시아게」를하였다. 이러는동안에 우리는 남의빗을 相當이 지게되었다. 일을 繼續할수없게되여서 뿔뿔히 헤여지는수밖에 別道理가없었다.
그後 나는「沈淸傳」 「靑春部隊」「國境」등에 出演하면서 몇해를보냈다. 이러면서도 나는 漢陽映畵社의再建運動을 게울니하지않었다. 좋은作品을 내놓았건 못내놓았건 全財産을 우리映畵界에받친 車君을爲하야서도 그런義務를느겼든것이다. 社會에서 不良者들이라고 멸시를하든 우리映畵人들을 理解하고 私財를 던진 그勇氣만해두 나는 장하다고 생각한다.
얼마를지난후 金甲起氏를맞나 漢陽映畵社를살리였다. 그리고「歸着地」를만들었다. 그때 金甲起氏는 映畵에對하야서는 全혀 門外漢으로써 필림이 어떻게생겼나하고 생필림통을 여러본일까지있는분이다. 그야 어느나라를 勿論하고 過渡期엔 그랬겠지만 우리映畵界에는 참말 映畵를 理解하지못하고, 나왔다가 失敗를하고 물러간 사람이 어지간이 많을것이다.
映畵人 自身들의 誠意가 不足한탓인지 또는 企業家들이 映畵事業을 理解하지못하는 탓인지 하여간 三十年歷史를가지고도 요모양이니 寒心하 짝이없는노릇이다.
〇 〇
最近에와서 出演한作品을 적어보면「城隍堂」「福地萬里」「授業料」「돌쇠」「집없는天使」「안해의倫理」「半島의봄」등이다.
이렇게 한作品 두作品出演은 하나 여짓것 한번이라도 自己가맡은役을 滿足하게 해치워본적이없다.
아직도 카메라앞에서 自己自身을 지못한다. 完全히 自己를잊고 作中人物로 化하여야할텐데 그것이 힘이든다. 언제나 발뒤축을 땅바닥에 떡붙이고 서서 悠悠히演技를 할지 疑問이다. 하여간 一生을通하야 단한번만이라도 훌륭한 演技를發揮하고 죽었으면 願이없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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