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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색의 명감독들—고 나운규․심훈․김유영—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출색의 명감독들—고 나운규․심훈․김유영— 出色의名監督들—故 羅雲奎․沈薰․金幽影—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안석영 安夕影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6 昭和十六年六月
면    수 242 (242)
기사
[사진] 羅雲奎氏, 沈薰氏, 金幽影氏 총 3매
映畵人協會가 생기고 映畵人이 登錄이되고 映畵機關들이 合同을하고—이러는때에 感舊之懷가 없을수없다.
「네프」한조각과 허러진 캐메라한대로 映畵를맨들든 先輩의 아까운夭折이 슬프기도하고 또앞으로 朝鮮映畵의 큰發展을 내여다볼때 先人의片貌가 생각이 안날수도없다.
그들의個人生活은 그때의 映畵界의 環境이 비저준 까닭이요 그들의 遠大한抱負가 그들이 간뒤에 더욱이 큼을 깨닫게되니 그들의 발자최가 빛난다 아니할수없다.
三旬九食과 流離一瓢子의물도 그生活을지랑하야 그 큰結晶을 지워놓고 간것이 그것이 幼穉하고 그것이 散漫한것이라해도 그때를두고말하면 壯快하다 아니할수없다.
지금에도 그들의 메카폰 쥔 여윈얼굴 그의音聲이 눈과귀에서 떠나지안는다
얼마나 그들이 괴로웠으랴 그들이殞命할瞬間에 그들의눈동자에는 메캬프한男女들의 樣子가 寫眞박혀있었다
그이들中에 얼른 손을꼽자면 羅雲奎, 沈薰, 金幽影三君이있다.
一, 羅雲奎君
아리랑, 들쥐, 五夢女 其他 數많은 映畵를 남겨놓고간 羅雲奎君, 그는 永遠히 放浪兒이였다. 이放浪性이 큰 그릇을 못만든原因도되지만 또그의 性格의所産인 映畵들을 우리들에게 보혀준바도된다. 가난을 달게알면서 그는 半島에映畵의씨를 뿌리고갔다.
이것은 그를 映畵라는것을 두고말함이요 그의映畵의內容에있어서는 그 니히리틱한것이 自身을 크게 오래 살도록못한感이 없지않다. 萬若그가 그테밖을떠나서 더큰世上을보았든들 오늘날까지의 朝鮮映畵에서 憂鬱性을 일찌기 除去하게되었는지모른다.
그것은 그가 主觀的인立場을 固執한까닭이요 그테밖에서 智識을가저오고자 努力했드면 그의作品들은 지금도 生生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功勞者이다 그映畵가 어떠한映畵라는것을 지금 새삼스럽게判斷하는것보담도 映畵를 自己맘대로 주물러보았고 그다음으로는 後進을 많이내여논 그두가만해도 功勞가크다아니할수없다
二, 沈薰君
다음으로 沈薰君이있다.
新聞記者出身으로 映畵監督이되여 映畵를맨들다가 如意치않어서 小說을쓰고 또 映畵를 맨들려다가 갔다.
지금에 이沈氏가 살아있으면 그快活한性格 그의博識으로해서 오늘날 朝鮮映畵의寵兒가 되었을는지모른다.
情熱이過人함이 그의壽命을 短縮시킨感이있으며 그의 豪酒가 그의藝術的인事業에 支障이 있었는지도모른다
지금그의所生이 크게자랐으나 그아이들의 머리를쓰다드머줄좋은 아버지를잃은게 가엽기 이룰데없다.
「먼동이틀때」하나로 監督修業을마치었고長恨夢에 守一로出演한것이 그가映畵우에얼굴을 印친것의하나다.
그의美貌는當代에 有名하였고 決局 愛情의生活로 끗났다.
三, 金幽影
金幽影君은 昏街와 火輪과 流浪과 愛戀頌과 水仙花로 一生事業을 끗냈다.
雜誌編輯으로 隨筆로 그 넘치는才操를보였고 水仙花에있어서 朝鮮女性의 기푼맘을그리랴다가 未完成品으로 夭折했다 그는 그보담 더큰 空想이있었으리라 또한 그는 그보담더큰 野望이있었으리라. 그러나 자기몸이 흙으로 돌아간 뒤에는 그것은 한꿈에지나지 않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적은 映畵界에 이金君이 없는것이 損失이다 그가살았으면 그는獨特한境地를 開拓했을것이고 많은活躍이있었을것이다.
언제나 그 黃色얼굴에 웃음을띠우고 그 긴머리를 너풀거리며 거리를것는 그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꽃피고 버들이 드리운 봄거리에 그가없는것도 섭섭하거니와 金君亦是 아들의將來를 북도들 아버지인까닭에 그것이 더욱 그를아는사람의念頭에 떠오르게한다. 그러나 사람의壽命은 허는수가없다 그殞命하는때가 그의一生의 끗날이거니하면 그뿐인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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