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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오락―그들의 회고담(2) 조선성악회 김창룡――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취미 오락―그들의 회고담(2) 조선성악회 김창룡―― 趣味 娛樂―그들의 懷古談② 朝鮮聲樂會 金昌龍―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 +++
출처정보 매일신보 每日新報
연    도 1937-05-04 昭和十二年五月四日
면    수 8 (八)
기사
그들의 懷古談②
三代를 繼續하야
노래길에 精進 圓覺寺 舞台에서 活躍
朝鮮聲樂會 金昌龍
내가 노래를 배호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일곱 살 부터 인가 봅니다 그러케 일즉이 노래 공부를 시작하게 된 原因은 집안어른들이 모다 노래를 爲해서 一生을 밧치시기 문입니다 祖父님(金成玉氏)서는 일즉 도라가시엿스나 일흠난 名唱으로 진양調를 처음 불으기 시작한 분입니다 祖父님과 朝鮮近世의 名唱인 宋興祿氏와는 男妹間으로 두 분이 젊엇슬 부터 意氣相合햇든 모양임니다 家親(金正根)서도 祖父님의 을 이어 一生을 노래공부에 밧치시엿습니다 지금은 다 他界해 버렷습니다만은 南鮮의 有名한 黃好通 柳正學가튼 이들이 다 家親의 弟子이고 李東伯氏 역시 家親에게 노래를 배흔 분입니다
××
故鄕은 원래 全羅道이나 자라나기는 忠淸道 舒川에서 햇고 서울노 오기는 三十四五 歲이니가 지금부터 거진 三十餘年 前인가 봅니다 그 서울에는 圓覺社가 생긴 卽後로 圓覺社가 되기 문에 서울노 올나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悅賓樓 자리에 長安社가 잇섯고 朝鮮劇場 자리에 演興社가 잇섯기 문에 이 세 곳의 늘 出演을 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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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全盛時代는 아모래도 甲午 以前으로 그는 노래군의 生活도 훨신 安定되엿섯고 웃사람들의 寵愛도 만히 바덧습니다
李東伯氏도 그 大內에 드러가 노래를 불으고 通政大夫를 下賜바더 지금도 우리 사이에는 李通政이라고 불으지만 나도 東伯氏와 함께 通政大夫를 下賜바덧섯습니다 圓覺社도 업서지고 長安社 演興社도 다른 집이 되어버리고 黃金町에 光武□가 되엿섯스나 예전갓지 못해서 우리는 地方으로 단이며 겨우 殘命을 保存하게□ 되엿다가 最近에 와서야 京城에다 자리를 잡고 차々 무엇을 해 볼가 하고 잇슴니다
그러나 노래개나 불을 줄 아는 사람은 다 六, 七十이 넘어 늙어버리고 뒤를 이을 만한 젊은이들이고 그리 만치 못합니다
나도 그동안 애써 가르처 볼냐고 한 사람이 여럿 잇섯스나 中途에 고만두는 사람이 大部分이고 예전과 가치 一生을 노래에 맛기겟다는 사람이 업기 문에 한편으로 섭々하고 서운하기 이 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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