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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 기업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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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조선영화 기업자론 朝鮮映畵企業者論
종    류 논평 論評
필    자 XYZ XYZ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6 昭和十六年六月
면    수 220 (220)
기사
[사진] 「七番通의小事件」故羅雲奎主演
[사진] 李創用氏
[사진] 崔南周氏
高麗映畵社社長 李創用氏
한참 난봉을치고 東으로 西으로 쏴단일나이므로 겨우三十을 갓넘은靑年이다
그렇나 그는 난봉과 쏴단이는것代身에 일과일을爲하야 오늘은新京, 來日은 東京하고 東亞가좁다하고 정말 쏴단인다
하기는 그렇게 황소처럼 부지런하고 勤實한데 그가 今日의高麗를 일으킨보람이 있었든지몰은다.
어쨋든 그는 무척 부지런하다. 남달은 事業的手腕이있다느니보담도 일은 아침부터, 夜半까지 일과일을 爲래선 물불을 헤아리지않고 努力하는이다.
그러한點이 그가 胎여난北쪽氣質일지몰으지만, 어쨋든 이勤勉만은 그의 事業家的인 唯一한資本이리라.
最初의 토-키-, 「春香傳」을 二千圓이란돈으로 全鮮配給權을 獲得한데, 그의 今日의映畵企業家로서의 第一步가出發된다. 勿論, 그전엔 紀新洋行이라는파라마운트代理店의 한 쎌스맨으로서 經驗을 쌓고있었다는것도 있지만, 그보담도, 한撮影技師로서 或은俳優로서 往年 羅雲奎時節의빛없는 從業員으로 지냈다는것도, 오늘엔 그를爲한 좋은經歷이다
그는 黙黙히 오늘의자리를위하야 七八年동안, 냄새나는 大昌洋靴店三層한房에서 필림配給에專念했었다.
그기간동안 그는 朝鮮映畵만의푸린트를모조리 配給맡었다하드래도 過言이아니리만침, 泰半의鮮産作品을 買收, 或은 配給權을 掌握했든것이다. 다시말하자면, 이것이 또한 大高麗(?)造成의基本이되었다.
只今은, 누가 무었이라해도 朝鮮映畵界의 猛將임엔틀림없고 將次도 또한몇해를두고 그의右에 나갈사람이없을것이다. 한從業員으로 社長에—
이렇게 말하고보면 確實히 立志傳中의 人이리라, 그렇나 오늘날까지 그의背後에서 그를 精神的은몰나도 物質的으로 莫大한援助를애끼지 않는사람으로 鍾路商人 東一商會의 젊은主人 吳德燮氏가있음도 黙過할수없다. 일찌기 朝鮮映畵가 企業的으로 何等의成算을 보지못하는今日, 그같은 좋은파트론이 있었다는것—茂盛한나무엔 그림자가크다는 俗談을빌진댄, 그가또한 映畵事業家로서 그手腕을 認定받었다는것—, 항시, 사람이란 남에게 미움받긴쉬어도 信任받긴 어려운게다. 李氏는 黙黙하든舊殼을벋고 最近二三年새 놀내리만침 有名해젔다. 그와함께 映畵界에投足한 同期生으로 吾人은 李明雨, 金漢, 尹逢春, 外數人의 現役諸氏를 들수있다. 그렇다고 누가 不運하고 누가成功했다는말은 絶對로아니다. 前記諸氏들도 비록 部門은달러 그의事業밑에 雇用되는수가 있는모양이나, 그건藝術家와 企業家란 嚴然한區分이 있으니까, 다만 現實的인計算方法으로 그는飛行機로 東亞가 좁다치고 去來하는터이니까, 그는 좋은일을많이했다. 授業料, 집없는天使, 福地萬里等 좋은사람을 잘包容하야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일을 많이낼것을 疑心치않지만 心腹이라고 業界에서 公認하든 金正革君을 잃어바린것은 吾人이알지못할 內的事情도 있으려니와 그事務室에 꽃없어진듯 出入하는사람에게 서운함을느끼게한다. 그렇나, 아직도 그의곁엔 西龜方漢駿, 崔寅奎等의 實際家들이 모혀있으매 自重하야 그 前途에祝福을빈다.
(玄水)

朝鮮映畵株式會社長 崔南周氏
항용, 朝鮮의映畵企業家란 남의資本을 運動하야다가 꾸려나가는 사람이많다. 다시말하자면 시체말로 푸로카-가많다
그러나 崔南周氏는 다른映畵企業家들모양으로 푸로카-는아닐것이다. 무어니해도 卅餘萬圓의 巨資를 朝鮮映畵를爲하야 投資하였고, 傍系로는 朝鮮文庫出版의學藝社에 拾餘萬圓을내놓았다.
藝術家라느니보담도 얼는 그에겐 映畵를사랑하고, 文化를위하야 일해보겠다는 興味라도 갖었다.
우리는 이以上, 現代의企業家에게 所望해선못쓴다.
그러므로 어느意味로선 崔氏는, 거이完壁的인 映畵企業家일것이다. 그뿐만아니라, 氏는 그가 아직 어떤高普在學時代, 安鍾和氏演出作品인「꽃장사」라는 映畵에 主演까지 한일이있다고하니 映畵界投足의經歷도 어제오늘이아닌것같다. 現在는 鑛山家로서 南陽社를 主宰하는한便, 映畵會社는 全혀李載明氏에게 一任하야 維持하는것같으나, 問題는 이朝映會社가, 創立以來三, 四年을 經過한今日까지 아모런 뚜렸한 功績을 내놓지 못함에있다 名色五十萬圓會社요 朝鮮에선 오직하나뿐인 本格的스타디오를完備하야 갖고있으면도 도무지, 그活動에있어선 幼稚千萬이믄왼일인가? 世間에선, 그配下에일할만한 人物이없다. 或은 崔氏自身이 어떠한사람을 信賴하야 쓸줄몰은다等 의논이분분한모양이다. 아모래도, 前者인, 人物없는便이 마땅한 批評이리라, 創立作「無情」이 그랬고 「새出發」「水仙花」等 全혀 朝鮮映畵을爲하야 자랑될 作品은못되는것이매 根本責任을 뭇는다면 首領인崔氏께 있기도쉬우나, 오히려 直接關係者들에게 罪(?)가있다하고싶다.
그個人으로볼때, 우리는 언제든지, 情熱의人이라느니보담, 健兒다운 元氣旺盛한 그를볼수있다. 남에게 지기싫여하는 英雄的性格. 그리고 의협심, 오히려, 人間的으로도 無限한 땃뜻함을 풍기는貴族的紳士다.
近日은 所謂映畵令發動을앞두고 巷間「天氣師」따위가 淸進町 京城別邸大門에불이나리만침, 株券讓渡或은 共同經營, 合同妙策等을갖고 쫓아다니는 모양이나, 張本人은 유유히 正座하야 언제든가 自身으로서 내밟은 映畵界의일을 築成하리라고 豪語한다고하니 우리는 現在의 崔南周보담도 明日의 崔南周에게 期待를갖는者이다. 實際로今日까지의 푸로카-橫溢時代를 淸算하는 意味에있어서도 그의活躍은 크게 注目된다. 다만 村山知義와 春香傳等의 허풍宣傳만은제발 하지말것이며 力行實踐하야 하로바삐, 좋은일을 하기바란다. (全南光州를故鄕으로 가지고 本年三十四歲)
(泉泉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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