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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한 내선 문화의 교류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영화를 통한 내선 문화의 교류 映畵를通한內鮮文化의交流
종    류 논설 論說
필    자 김성균 金聲均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6 昭和十六年六月
면    수 206 (206)
기사
[사진] 羅雲奎監督「벙어리三龍이」一場面 故羅雲奎主演]
總督府圖書課映畵檢閱室 金聲均
本論에 들어가기前에 먼저 映畵란 어떤한것인가. 卽映畵란 었더한性質과 效力을 가진것인가. 다시 말하면 映畵가 우리生活에 얼마나한 힘과 影響을 주어왔고 주고있고 또한 줄수있는가를 말하여둘 必要가있다.
從來는 映畵란 한개의 娛樂物에 지나지않었고 따러서 惡風弊習의 唯一한 媒介者로서의 烙印을 벗지못하였었다. 從來로 보여준 外國映畵들이 다 그러하지않었는가. 亡國的奓侈, 頹廢한流行, 惡風怪習等……이러한것 外에 우리에게 무엇을 준것이 있으며 배운것이 있는가. 그야 아조 없었다고는 할수없으나 배워서는안될것, 본떠서는 못쓸것을 배우고, 본떳슴이 많었다고 볼수밖에없다. 안이 이렇게 말하는것이 正當한判斷일것이다.
從前까지도 우리의 눈을 어즈럽게 하였고 지금도 또한 각금식 볼수있는 젊은男女들의 奇怪罔測한 낮도까비같은 차림차림을 이判斷의 한개의 산(生)左證으로 들고싶다.
말이 너머 脫線이된 感이있으나 何如튼 映畵의魅力—힘이란 우리가 想像할수없을만치 强하고 크다는것은 以上의 事例로만 보아서도 能히 짐작하고 首肯할수있지 않은가? 銃으로 百番 威脅하는것보다 映畵로 한번 보혀주는것이 더 效果的일것은 贅言을要치않어도 잘 理解될줄안다.

映畵가 우에서 말한바와같은 性質과 힘을 包藏하고있다는 事實이 一般에게 認定케되자 映畵의地位도 一大轉換을 보게되여 從來의 單純한娛樂物이라는 아름답지못한 겁풀을 버서버리고 國策遂行上 重要한 武器의 하나로서 登場케 되였다. 저- 獨乙映畵를보고 伊太利의 映畵를보라. 輕兆浮薄한 米國映畵에서는 到底히 볼수없는 어디인지 威壓을 느껴지는듯한 굳건한 이데오로기로 一貫하여 있지않은가!
政府에서도 映畵의 重要性을 認識하고 벌서 映畵法을 制定實施하여 從來의 自由奔放한 惡弊를 一掃是正하고 紏合統制하여 國論의統一—國策遂行上 重要한 武器의 하나로서의 使命을 지우게되였고 朝鮮서도 여기 追隨하여 昨年八月부터 映畵令을 制定實施하여 朝鮮映畵에게도 日本映畵의 一翼으로서의 重大한 使命을 지우게되였다. 따러서 映畵人(監督, 撮影者, 俳優)에게 登錄制度를 實施하여 素質의向上과 地位의保障을 圖謀하게되어 第一回로 六十餘名의 登錄을 보게되었고 여기앞서 朝鮮內映畵人들은 그들의 大同團結을 期圖하여 朝鮮映畵人協會를 結成시켜 數日前에 임의 第二回定期總會까지 보게되였다. 또한편 製作者측에서도 群雄割據의 舊穀을 벗고 大同團結의 第一步로 合同機構의結成을 꾀하고있는 模樣이니 멀지않어 朝鮮映畵도 堅固한基礎우에서 活潑한進展을 보게될것이다.

以上에서 未洽하나마 論議된 映畵의性質 乃至 그效力과 朝鮮映畵界의 現象으로보아 內鮮文化를 交流식히는데는 映畵만치 最適切性을 띤手段性은 없을줄로안다.
그러면 映畵를 通해본 內鮮文化交流의 今昔觀은 如何하였든가. 朝鮮映畵가 생긴지는 벌서四半世紀라는 긴 歷史와 時日를 갓게되였었으나 從來로 튼튼한 地盤을 갓지못하였고 따러서 훌륭—보다도 콤마(,)程度의 技術조차도 發揮치못하는 幼稚한 狀態에서 버서나지못하였든 關係로 감올에 콩나기로 千辛萬苦끝에 어쩌다 한作品이 誕生되드라도 內地市場에 좀처럼 발을 드디여볼수 없었든만큼 映畵에依한 文化交流라고는 각금 特殊한映畵에 依하여 이쪽의風俗 習慣이나 名勝地의 風景等이 若干 紹介되였을뿐이고 또 內地映畵도 아무러한 이데오로기도없는 單純한 娛樂物만이 나오게되여서 結局은 彼此不充分하나마 風俗習慣과 名勝風景等의 紹介에지나지 않었고 文化交流라고 부를만한 事實은 보지못하였었다.
그러나 近日 時局의緊迫과 映畵技術의 發達은 朝鮮映畵地盤의 堅固化와 아울러 映畵에게 國策遂行上 必要하고도 훌륭한 手段性을 賦與케되었으니 內地文化를 交流시켜 陰으로 陽으로 內鮮一體促進의 훌륭한 手段이되고 道具가 될수있음은 조곰도 疑心할餘地가 없는바이다.
全朝鮮劇場總數一三九舘
―主要劇場寫眞貸付料金一覽表―
封切貸付料全鮮 約 五萬圓
再上映貸料全 一回에 約 二萬五千圓
(再上映料金은約五割로함, 再上映은五回可)
京城 明治座或은城寶,若劇 七○○○円
平壤 東寶劇場 三○○○円
大邱 大邱키네마俱樂部 二○○○円
釜山 昭和舘 二○○○円
仁川 愛舘 一○○○円
開城 開城座 四○○円
元山 大勝舘或은元山舘 一○○○円
咸興 明寶劇場 一五○○円
淸津 共樂舘 一○○○円
新義州 新劇座 一○○○円
水原 水原劇場 三○○円
安城 愛國劇場 二五○円
吉州 吉州劇場 一五○円
羅津 羅津劇場 一○○○円
雄基 雄基座 四○○円
會寧 會寧劇場 三五○円
羅南 初瀨座 三○○円
興南 興南座 四○○円
鐵原 鐵原劇場 二○○円
春川 邑愛舘 二○○円
定州 定商劇場 一○○円
宣川 宣川劇場 一二○円
鎭南浦 衆樂舘 一○○○円
信川 壽座 二○○円
安岳 大平劇場 九○円
龜浦 龜浦劇場 一○○円
方漁津 常盤舘 一一○円
密陽 密陽映畵劇場 一二○円
金海 金海劇場 一一○円
統營 蓬萊座 一○○円
燒付物 內地一本賣渡 約最低五千圓으로看做함
燒付物 滿映一本賣渡 約二千圓
全州 帝國舘 一○○○円
群山 群山劇場 一○○○円
光州 光州劇場 一○○○円
木浦 木浦劇場 一○○○円
馬山 共樂舘 五○○円
晋州 晋州劇場 五○○円
沙里院 共樂舘 二五○円
海州 海州劇場 三○○円
鳥致院 燕座 二○○円
公州 公州劇場 五○○円
大田 大田劇場 九○○円
淸州 淸州劇場 四五○円
江景 江景劇場 一二○円
長項 有樂舘 一○○円
論山 論山座 一○○円
裡里 裡里座 一一○円
南原 南原劇場 一○○円
扶餘 昭和劇場 一○○円
順天 順天劇場 一○○円
麗水 麗水劇場 一○○円
兼二浦 兼二浦座 一○○円
江陵 江陵劇場 一○○円
延安 延安劇場 一○○円
泗川 泗川劇場 一○○円
三千浦 三千浦劇場 一一○円
金泉 金泉劇場 二○○円
慶州 慶州劇場 一五○円
尙州 尙州劇場 一○○円
慶北安東 安東劇場 一一○円
浦項 浦項劇場 一○○円
(右는 昭和十四年度及十五年度의 實況에 依함) 以下는 不明으로 省舘함
右는 封切貸賃이오 再上映時는 右의 半額으로 看做함


그러면 映畵를通한 內鮮文化의交流는 如何한 方式과 手段으로 圖謀하여야만 最大의效果를 얻을수있겠는가.
첫째로 映畵를通하여 文化交流의 完壁을 期하는데는 內鮮映畵人들의 緊密한連絡이 必要하다. 從來는 朝鮮映畵는 그存在가 없었든만큼 內地映畵界에서 一顧의 價値도 없는것으로 評價(?)되여 왔었든關係로 朝鮮서는 敢히 內地의 映畵界와 關聯을 가질生念조차 하지못하였고 또 內地서는 內地대로 도라다보지도 않었든關係로 孤立狀態로 있었으나 우에서 말한바와같이 現在는 朝鮮映畵界의 地盤도 터를 잡게되여 앞으로의 活潑한進展을 約束하게되였고 또 昨今「授業料」라든가 「집없는天使」等이 朝鮮映畵의 닥처올進展을 內地映畵人들의 腦속에 깊이印처놓게되였으니 自今以後로는 映畵를通한 內鮮一體는 非單文化뿐아니라 그以上으로 飛躍的發展을보게 될것이다. 近日 加速度로 活潑하여진 內鮮映畵人들의奔走한 往來相을보라! 朝鮮映畵의將來, 映畵를通한 內鮮文化交流의 進展은 占치고도 남음이 있지않은가.
何如튼 朝鮮映畵의將來는 오로지 內地映畵人—안이 스승되는 그들의 眞心으로서의 指導와 愛護助長이 없이는 훌륭한發展을 期待할수없다고 斷言하고싶다.
(二六一頁에繼續)
『映畵를通한內鮮文化交流』繼續
連絡을 圖謀하여야 하느냐하는 問題가 남어있으나 이點은 朝鮮映畵人의 大同團結機關이라고도 할만한 朝鮮映畵人協會도 着々 그機搆를 强化發展식히고있고 또가까운 將來에 朝鮮映畵製作機搆에도 어떠한變化가 생겨 그地盤이 强化擴大될 모양이고 또 한편 內地映畵界에서도 朝鮮映畵에 對하여 多大한囑望을 가지고있는 模樣이니 여기서 重言復言을 要치않어도 內鮮映畵의 連絡은 圓滿有效하게 잘 運用될줄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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