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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 발달 소사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조선영화 발달 소사 朝鮮映畵發達小史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임화 林和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6 昭和十六年六月
면    수 196 (196)
기사
[사진] 영화 장면 2매
寫眞은 {金幽影監督「昏街」의一場面·林和主演 左가林和氏·右가金兌鎭氏)

朝鮮의 映畵史는 內地나 支那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活動寫眞의 輸入으로부터 시작된다. 光武七年頃(?)(明治三十六年 西紀1903) 東京 興行業者 吉澤商會의 손을 거처서 輸入公開된 英米煙草會社의宣傳『필님』이 朝鮮에 있어서 活動寫眞上映의 嚆矢라고 한다.
그러나 興行物로서 活動寫眞이 登場한것은 光武八年(?)頃 圓覺社에서 佛國「파례」製短篇喜劇과 實寫를 上映함으로 부터인데 뒤니어 演興社, 長安社, 光武臺等에서 陸續 活動寫眞을 上映하고, 米人「골부란」「보사덕」等의 經營하는 漢城電氣會社에서 電車宣傳兼 「메리꼬라운드」와 더부러 「活動寫眞觀覽所」를 現東大門 電車會社車庫趾에 開設하야 開化朝鮮의 重要한 新娛樂物로 活動寫眞이 登場케되였다. 勿論 本格的으로 常設興行케 된것은 大正初葉以後에 屬하는 일인데 上映된 寫眞은 最初엔 前記한「파레」製短篇, 米國靑鳥製喜劇과 實寫와 朝鮮風物을 박은 幻燈類까지 였으나 漸次「유니버-샐」長篇과 內地의 新派物과 初期時代劇等이 盛行하였다. 이러한 事情은 아마 內地의 活動寫眞 輸入時代로 同一했든듯싶다.
이것이 所謂 辯士와 樂隊와 더부러 옛記憶이 새로운 活動寫眞時代의 面影이다.
이時代는 常設舘도 京城에 五六個所, 地大都市에 四五個所, 그밖에散在한 幾個所의 非常設舘等을 모두 合처서 손꼽을수 있을만큼 普及程度도 얕었었다. 이러한狀態가 아마 大正十年以後까지 繼續되였으리라고 믿는데, 이期間이라는것은 周知하는 바와 가치 아즉 映畵라고 하는 述語조차 생기지 아니한 時代에서 「필님」은 여태까지도 神奇한 發見品이요, 活動하는 寫眞으로서 單純한 娛樂의 對象엣 不過하였다. 非單 朝鮮만이 아니라 內地나 活動寫眞의 原産地인 外國에서 미처 「필님」이 藝術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世界映畵史上에서 活動寫眞時代라고 부르는 時代를 西洋과 內地에서는 多少間이나마 製作하는것을 通하야 體驗하였지만 우리 朝鮮서는 그저 求景하면서 지내온것이다.
그럼으로 儼密한 意味에서 말하면 朝鮮映畵史에는 活動寫眞時代라는것이 있을수 없을지 모른다. 求景만 하고 製作하지 않는 歷史라는것은 없는 법이다.
歷史란 恒時 만드는것과 되어지는 일을 가르치는 말이요, 더구나 藝術의 歷史라는것은 創造의 歷史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朝鮮에 있어서 儼密한 의미의 映畵史는 當然히 製作의 開始로부터 비롯해야 할것이다. 活動寫眞時代라는것은 映畵의 前史時代일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선 우리가 일즉이 觀客이든 한 時代에 지내지 않는다.

朝鮮에서 映畵가 製作되기 비롯한것은 大正七, 八年頃 新派演劇의 流行이 한곱이 넘고, 한창 連鎻劇이 輸入되려할때 劇團에서 만든 連鎻劇「필님」부터이다. 新劇座, 革新團, 文藝團等이 東京에서 內地人技師를 데려다가 亦是 內地의 新派連鎻劇을 模倣하야 몇場面式 박어 가지고 演劇의 場面과 場面사이에 「스크린」을 내리고 비추어 본것이 朝鮮의 人象 風物이 「스크린」에 나타난 始初다.
예전 舞聲時代의 撮影技師이였고, 지금은 錄音技師로있는 李弼雨氏같은이가 벌서 이 時代의 連鎻劇「필님」撮影者였다.
그러나 連鎻劇「필님」을 우리가 映畵라고 불를수 없는것은 活動寫眞을 映畵라고 부르지 못하는것 以上이다. 그것은 活動寫眞만치도 獨立된 作品이 아니요, 演劇의 한 補助手段에 不過하였기 때문이다. 結局 映畵의 한 胎生에 그치는 것이다.
獨立한 作品이 만드러지기는 大正九年에 이르러 聚星座, 金陶山一行이 京畿道廳의 委囑으로 製作한 虎列剌豫防宣傳映畵와, 大正十年 尹白南氏가 遞信局의 依賴로 製作한 貯蓄思想宣傳映畵 「月下의盟誓」로 嚆矢를 삼게 된다.
그러나 이 두作品으로 말하면 連鎖劇「필님」程度는 아니드래도 完全히 獨立한 映畵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前者가 萬一 演劇의 附屬物이라면 後者는 官廳의 廣告紙와 같은 한 宣傳手段에 지내지 않기 때문이다 朝鮮映畵史를 말하매, 이 두 作品을 最初의 作品으로 枚擧하는것은 그 製作의 動機, 作品의 內容은 如何間에, 다른 藝術의 補助를 받지않고 自體로서 完結되었기 때문이다.
좀더 完全이 獨立한 映畵가 되기는 大正十一年 當時 黃金舘과 朝鮮劇場을 經營하든 興行師 早川某가 東亞文化協會의 名義로 製作한 「春香傳」에서다. 이映畵에는 그때의 人氣있는 辯士였든 金肇盛이 出演을 하고, 妓生이 出演을 하야 觀客의 歡迎을 받었다.
原作이 有名한 春香傳인 關係도 있었고, 또 처음으로 大衆的場所의 「스크린」에 빛이는 朝鮮의 人物과 風景을 보는 親近味가 大端히 觀客을 즐거히 했든 모양으로 興行에는 成功했다 한다.
이것을 契機로 釜山에 朝鮮키네마株式會社라고하는 公稱資本二十萬圓의 內地人企業會社가 생기어, 安鍾和, 李月華主演, 「海의秘曲」, 尹白南監督의 「雲英傳」, 「神의粧」等의 作品을 만들었으나 會社는 企業的으로 成功하지못했다. 朝鮮映畵는 아즉 大規模企業의 對象이 되기엔 甚히 幼稚했고, 朝鮮의 市場은 아즉 未完의 時期에 있었기 때문이다. 要컨대 그들은 演劇에선 新派劇, 連鎖劇의 隆盛과 映畵로는 「春香傳」의 成功에 眼目 輝煌하야 時機尙早의 誤解를 한것이다.
作品으로 보면 「雲英傳」이 「春香傳」과 더부러 古代小說을 映畵化한 意味에서 同一한것이고, 「海의秘曲」과 「神의粧」은 하나는 戀愛劇이요, 또 하나는 敎訓劇으로 모두 朝鮮의 人情風俗을 映畵로 본다는 以上의 興味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會社로부터 草創期 朝鮮映畵界의 柱石이된 尹白南, 安鍾和, 李慶孫, 羅雲奎, 南宮雲, 李月華, 鄭基鐸, 李圭卨等의 諸人材를 出世시킨것은 있지 못할 숨은 功積이라 아니 할수없다.
그後 尹白南氏가 獨立「푸로덕슌」을 京城에 創立하야 李慶孫監督, 羅雲奎主演의 「沈淸傳」을 製作하였다가 解散되었는데, 이作品으로 朝鮮映畵가 좀더 確實한 藝術的路線上에 올으는感을 주었고, 또 尹白南「푸로덕슌」은 그뒤 오랬동안 朝鮮映畵製作의 支配的機構이였든 小規模製作母體의 先鞭을 친것으로 意義가 있었다.
「沈淸傳」은 같은 古代小說의 映畵化라고 하드래도 「春香傳」이나 「雲英傳」에 比하야 製作態度가 眞摯하여 觀衆으로 하야금 비로서 朝鮮映畵를 好奇心以上의 態度로서 對하게 하였고, 또한 이 作品은 監督으로서의 李慶孫氏와 天品있는 演技者로서 羅雲奎氏를 世上에 보낸 記念할만 作品이였다.
그後, 李弼雨氏가 當時 朝鮮日報에 連載中이든 人氣漫畵 「멍텅구리」를 映畵化하였고, 高麗映畵製作所라는 곳에서 新派小說 「雙玉淚」를 만들었고, 또 前記한 東亞文化協會에서 妓生康月花의 實記 「悲戀의曲」과 「興夫傳」等을 만들었으나 모두 幼稚한것이여서, 結局 興行師의 技巧主義와 熱誠있는 初期映畵人들의 盲目的試驗의 域을 넘지 아니했다.
李慶孫氏가 「尹白南푸로덕슌」의 朱仁奎, 南宮雲, 金靜淑氏等을 데리고 맨들은 李光洙氏의 小說 「開拓者」의 映畵化도 交是 失敗하였다. (寫眞은「半島의봄」의 一場面·右가金一海·左가金素英)
繼續하여 新小說의 作者로 또한 內地新派小說等의 飜案者로서 草創期 朝鮮文壇에 功勞者이였든 趙一齊氏가 鷄林映畵協會라는 團體를 일으켜 尾崎紅葉의 金色夜叉를 飜案한 「長恨夢」을 맨들고, 뒤니어 尹白南監督으로 內地의 劍戟調時代劇 「山塞王」을 맨들었으나 모두 成功치 못하였다 더구나 「山塞王」은 豫期에 反하야 興行成積도 不良하야 以後 他人으로 하야금 劍戟調時代劇이라는것을 다시금 試驗할 慾心을 全然 拋棄케 할만하였다.
이協會가 意義가 있다고 하면, 朝鮮키네마會社以後 가장 많은 作品을 맨들고, 또 오래 持續되어 浮動無雙했든 初期朝鮮映畵界에 이의 態度의 土臺가 되어준點이 그 한아요, 또한 거의 全部라고 해도 좋으리만치 그以後 朝鮮映畵界에서 活躍한 映畵化人들을 길는點 또한 있기 어려운 點일것이다.
이時代는 朝鮮映畵史上에서 「푸로덕슌」亂立時代라고도 부를만치 實際 作品을 내기까지 이른圍體는없어도 京城市內 웬만한데면 「××푸러둑슌」 或은 ××映畵製作所라는 看板을 볼수 있을만한 形便이였다. 左右間 映畵에서 情熱이 一般으로 非常히 澎漲했든 時代다.
그러나 作品으로 이렇다 할만한것이 남지아니했다, 그저 돈千圓만 마련될듯하면 누구 製作, 製作, 하며 俳優가 監督이 되려고 映畵를 하는 사람이 많든 時代다.
그러나 이時代는 일로부터 올 좀더 確固한 基礎와 方向을 가진 朝鮮映畵의 準備를 爲하야 隱然中에 土臺가 싸아지고 있는 時代였다.
外國에서는 活動寫眞時代가 終焉하고 藝術로서의 映畵의 時代가 展開되기 비롯하는 時代였고, 朝鮮서는 素朴하고 幼稚한草創期의 盲目的試驗으로부터 漸次 어떤方向과 一定의 水準이 發見되랴고 하는 前夜이였다.

朝鮮映畵興行觀覽人員增加率調
年次 入場人員增加率 人員增加率
昭和八年 一○○,○○ 一○○,○○
昭和九年 一一○,六○ 一○一,一三
昭和十年 一四九,四七 一○五,二九
昭和十一年 一五一,三一 一○六,○四
昭和十二年 二○三,五一 一○七,五二
昭和十三年 二三八,一七 一○八,八六


朝鮮映畵가 素朴하나마 참으로 映畵다운게 되고, 또 朝鮮映畵다운 作品을 맨들기는 大正十五年 羅雲奎氏의 原作, 脚色, 監督, 主演으로 된 「아리랑」에서 붙어다. 이作品은 本町 某內地商人의 出資로된 「朝鮮키네마푸로덕슌」의 製作인데, 「아이랑」을 만들기前「籠中鳥」라는 流行歌映畵를 津守란 內地人監督, 李圭卨主演 羅雲奎助演으로 撮影하야 多幸히 失敗를 보지않고, 또한 羅雲奎라는 俳優의 存在를 世上에 認識시켜 다음 作品을 맨들 可能性이 있게 했음은 多幸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二回作品으로 맨들어진 「아리랑」은 絶對한 人氣를 得하야 朝鮮映畵로서 興行成積의 最初記記을 맨들었을뿐만 아니라, 朝鮮映畵史上 無聲時代를 代表하는 最初의 傑作이 된것이다.
이作品에 素朴하나마 朝鮮사람에게 固有한 感情, 思想, 生活의 眞實의 一端이 適確히 把握되어있고, 그時代를 휩싸고 있든 時代的氣分이 玲瓏히 表現되어 있었으며 오랬동안 朝鮮사람의 傳統的인 心情의 한아이였든 「레이소스」가 비로서 映畵의 根底가 되어 或은 表面의 色調가 되어 表現되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이作品에서 單純한 朝鮮의 人象風景, 習俗以上의것을 맛보는 滿足을 얻었다. 이點은 朝鮮映畵가 誕生以後 當然히 가저야 할것으로서 미처 가지지 못했든것을 사람에게 주었음을 意味한다.
뿐만아니라, 이作品의 成功은 그 內容에서만 아니라 形成과 技術에 있어서도 在來의 朝鮮映畵의 水準을 突破한대도 緣由하였다. 이만 하면 單純한 好奇心에만 끄을니어 보아오든 觀衆은, 安心하고 朝鮮映畵를 對하게쯤 되었었다.
또한 이作品을 通하야 一世의 人氣女俳優 申一仙을 世上에 내여놓아 여러가지 意味에서 「아리랑」은 朝鮮의 無聲映畵時代를 紀念하는 「모슈맨트」였다.
그 다음, 「風雲兒」「野鼠」「금붕어」等을 繼續 發表하여 綿綿한 哀愁와 더부러 輕快한 우슴, 鬱勃한「니히리즘」과 더부러 飄飄한 放浪性等으로 聯想되는 羅雲奎調라는것을 이야기할만큼 그의 特徵은 明白해젔고 그의 地位는 於焉 朝鮮映畵界의 中心에 存在하였다. 그는 「아리랑」以後 諸作品에서 볼수있듯 人氣俳優만이 아니고, 좋은 「씨나리오」作家요, 또한 보다 좋은 演出者이였다.
이 몇해동안은 實로 朝鮮映畵史上 羅雲奎時代라고 일홈해도 좋은 時代다. 事實 無聲時代의 朝鮮映畵界서는 羅雲奎以上가는 映畵藝術家는 나오지 아니했다.
間或 異議를 말할이가 있을지 모르나 나는 朝鮮映畵의 全無聲時代를 羅雲奎時代라고 말하고도 싶다.
그뒤 映畵界는 「朝鮮키네마푸로덕슌」의 中止와 前後하야 얼마間 不振期에 드러갓다가 昭和六年에 오랬동안 休止狀態서 있든 鷄林映畵協會가 詩人 沈薰氏의 原作監督으로 「먼동이틀때」를 姜弘植, 申一仙을 主演으로 製作하야 朝鮮映畵史上 드물게 보는 良心的製作態度를 보혔다. 그것은 西歐의 文藝映畵를 接하는듯 한것으로 「開拓者」를 萬一 失敗한 文藝映畵라면 「먼동이틀때」는 非輕的 成功한 文藝映畵라 할수있었다.
如何間 이作品은 確實히 「아리랑」과 더부러 記憶해둘 優秀作이다.
이와 前後하야 李圭卨氏가 製作한 「不忘曲」, 「紅戀悲戀」, 極東「키네마」의 「怪人의正體」, 大陸「키네마」의 「支那街의秘密」, 朝鮮映畵製作所의「運命」, 그外 數種이 있으나 모두 言及할것이 못된다. 그中 李慶孫氏가 平壤「키네마」에서 製作한 「椿姬」는 畵面의 아름다운 映畵였다.
그동안 昭和二年頃부터 常設舘團成社映畵部에서 人氣있는 辯士 金永煥氏가 「落花流水」, 「종소래」, 「세동무」等을 製作하야 觀客을 끄으렀으나 이것들은 아주 俗化하고 商業主義化한 作品이였다.
이 時代에 羅雲奎氏는 「朝鮮키네마」를 그만두고 獨立 個人「푸로덕슌」을 이르켜 亦是 自己의 原作, 監督 主演으로 「잘있거라」, 「玉女」, 「사나이」, 「사랑을 찾어서」, 「벙어리三龍이」等을 製作하야 變함없이 人氣를 得하고, 自己의 藝術的性格을 維持해 왔으나, 그도 次次 高調期를지나온感이 있어 「슬램프」가느껴지고, 當時 映畵界의 一部에서는 變하는 時代情勢와 더부러 傾向映畵에의 關心이 높아지고, 主로 新人들이 거기에 接近되여있었다.

安鍾和氏가 主宰하고 李慶孫, 金永煥氏等 文壇, 映畵人이 關係하고 있는 朝鮮映畵藝術協會의 年少한 成員과 左翼文化人들과의 合流되여 「流浪」, 그뒤에 「서울키노」, 「昏街」, 「火輪」等이 맨드러졌는데 이것은 모두 金幽影氏의 作品이였다.
羅雲奎氏의 作品이 多分히 「내슈낼」한 傾向을 가진것이라면, 前者는 어느程度 傾向的인 意圖를 가진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昭和三年부터 五六年頃까지의 朝鮮映畵界의 狀呪인데, 一種의 內的 心裂의 時代이어서 新興映畵藝術家同盟이라는 團體가 생기고, 「씨나리오」作家協會라는것이 생기고, 「캎프」의 映畵部가 생기고, 하야 새로운 動向이 活潑하게 表面化되면서 朝鮮서 처음으로 映畵理論과 批評이라는것이 생기어 徐光霽氏같은이가 活潑히 活動한것도 이 時期다.
傾向映畵運動은 組織과 理論에 앞슬뿐으로 實際 創作活動이 相伴치 못하면서 昭和八九年頃에 이르러 社會情勢는 變하기 시작하야 이 運動은 退潮되고, 다른 한便 羅雲奎氏와같은 이도 또한 「스람프」의 빠저 여러가지 作品을 맨들었으나 全體로 朝鮮映畵는 進步하는 形跡이 보이지 않었다. 羅氏의 「七番通小事件」, 「鍾路」等은 「아리랑」等에 比較도아니 되는 當時 盛行하든 「깽」映畵의 拙惡한 機能에 不過하였으며, 그것을 挽回코자 試驗한「아리랑」後篇, 「아이랑」三篇等도 모두 이 優秀한 藝術家의 低調를 救해주지 아니했다. 그뒤 오래 雄圖을 품고 無聯한 歲月을 보내든 安鍾和氏가 「메카폰」을들 機會를 얻어 「꽃장사」, 「銀河에 흐르는情熱」, 「靑春의十字路」等을 製作하고, 中央映畵社 方漢駿氏가 「撒水車」 「李圭煥」氏가 「임자없는 나룻배」, 「바다여 말하라」, 朴基采氏가 「春風」을 製作하였으나 도루 새로운 時期를 劃할 程度의 成果를 어찌 못했다.
그러나 이 三四年間의 沈滯後, 昭和九年頃부터 朝鮮映畵는 再建期에 들어가는 感이 있어서 技術的으로도 아주 새로운時期를 開拓하기 시작하였다.
監督도 尹白南, 李慶孫, 羅雲奎와 같은 朝鮮映畵草創期의 사람들이 漸次로 第一線으로부터 退場하고, 李圭煥, 方漢駿, 朴基采, 尹蓬春等의 新人이 登場하기 시작했으며 前述한바와 가치 安鍾和氏가 演劇으로부터 映畵로 進出을 하고 있는等 매우 多事했다.
또 俳優에도 沈影, 金漢, 獨銀麒, 田澤二, 金一海等 男優와 文藝峯, 金素英, 金信哉, 玄舜英等의 女優에서 보는바와가치 새로운 「쩨네레슌」이 成長했다.
要컨대 昭和八, 九年間의 朝鮮映畵界는 「싸이랜트」時代의 末期였고, 「토-키」時代를 마즈려고 속으로 焦操하든 時代였다.
當時의 朝鮮映畵가 直面한 任務는 하로 바삐「싸이랜트」時代로부터의 解脫이였다.
이時期는 벌서 外國映畵는 勿論, 內地映畵가 完全히 「토-키」時代로 移行한 때였다. 한 常設舘에서 外國과 內地의 映畵는 모두 「토-키」인데 唯獨 朝鮮映畵만이 舊態依然한 無聲에 머므러 있다고 한것은 奇異했을뿐만 아니라 觀衆으로하야금 이것도 映畵인가 하는 疑問을 이르킬만큼 不自然하고 「아니크로닠」했을것은 想像하고도 足한일이다.

朝鮮의映畵檢閱
昭和十四年中의 檢閱事務槪况을 示하면 左와 같다.
映畵檢閱總數 三,六四○件 二,七二四,四八二米
新檢閱 一,六二七件 一,九五五,四○五米
複本檢閱 九七件 一四五,五○○米
再檢閱 四七件 八三,五六二米
手數料免除檢閱 一,八六九件 五五○,○一五米
映畵檢閱에 있어서 新檢閱은 一錢, 複本檢閱과 再檢閱에는 各 그 半額의 檢閱手數料를 徵收한다 但, 公益上 必要타고 認定하는 때는 그 手數料를 免除한다.
昭和十四年中의 檢閱手數料總額은 二○,六九九圓三六錢也.


最初의 朝鮮「토-키」는 昭和十年 京城撮影所에서 李弼雨, 李明雨氏 兄弟가 製作한 「春香傳」이다. 이 映畵를 通하야 朝鮮語가 映畵史上 처음으로 映畵「필님」에 錄音되어 보았다. 이 作品은 자못 世人의 歡迎을 받었다. 그것은 勿論 初期의 朝鮮映畵(無聲)가 받은것과 마찬가지로 最初의 朝鮮「토-키」라는 單純한 理由에서였다.
「春香傳」이란 小說이 無聲, 有聲을 勿論하고 매양 朝鮮映畵의 出發點이 되였다는것은 奇異한 일이다.
그後 京城撮影所에서는 洪開明氏의 「아리랑고개」, 李明雨氏의 「薔花紅蓮傳」, 「洪吉童」, 漢陽映畵社에서는 「아리랑」三篇을 「토-키」化 하였지만, 벌서 사람들은 最初의 「토-키」 春香傳을 보는것과 같은 寬大한 態度만을 가지고 臨하지는 아니했다.
單純한 「토-키」가 아니라 어느 程度까지 外國이나 內地의 作品水準에 接近하거나 或은 朝鮮「토-키」로서의 固有한 性格을 갓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였다.
이러한 重要時期의 李圭煥氏는 鈴木重吉氏와 더부러 大邱 聖峯映畵園에서 「나그네」를 發表하였다.
이 作品이 어느 程度까지 內地人의 援助를 얻어는지는 別問題로 하고라도 「토-키」時代에 드러온 朝鮮映畵를 비로소 盤石의 土臺우에 올려놓은 作品임은 事實이다. 사람들은 「아리랑」을 볼때와가치 기뻐하였다. 이 事實은 技術에서만 아니라 內容에 있어서도 觀衆의 要永의 한部分을 滿足시켜준것을 意味하는것이다. 또한 女優文藝峯氏가 비로소 自己의 眞心한 價値를 發揮해본것도 「나그네」요, 當代의 女優文藝峯을 世上에 내보낸것도 「나그네」다. 이것은 「나그네」가 實로 여러가지 意味에서 朝鮮映畵史上에서 「아리랑」과 類似한 意義를 갖는 作品임을 意味한다. 이作品에 對한 批評이 如何히 區區하고, 얼마마한 量의 缺陷이 指適된다해도 「토-키」時代에 드러온以後 朝鮮映畵中 아즉 그水準을 超越한 作品이 없는 優秀作品은 不動의 事實이다.
「싸이랜트」 「아리랑」을 成功시킨것과 가치 「나그네」를 成功시킨것도 「레아리즘」이란 事實은 銘名될 必要가있다.
內容의 어느 部分에 가서 아무리 首肯하기 어려운곳에 逢着하드래도 作者가 生活의 眞實을 追求하는 境遇에는 사람들은 感動을 받는것이다.
이밖에 當時까지 朝鮮에는 「토-키」外에 아즉「싸이랜트」가 製作되여 安鍾和氏의 「人生航路」, 申敬均氏의「純情海峽」, 洪開明氏의 「靑春部隊」等이 製作되어 「싸이랜트」와 「토-키」의並用時代인 感이 있었으나 이作品들을 最後로 朝鮮映畵史上에서 「싸이랜트」는 完全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가 昭和十二年이었다.
이해에 記錄할만한 作品으로는 畵家安夕影氏가 紀新洋行에서 製作한 「沈淸」이 있어, 이 作品에서 安氏는 古代小說을 映畵化하는데 새로운 機軸과 더부러 畵面의 繪畵的인 美를 보혀주었다.
그뒤 本格的인 「토-키」時代가 始作되여 製作도 旺盛해저, 方漢駿氏의 漢江, 尹蓬春氏의 「圖生錄」, 評論家 徐光霽氏가 處女「메카폰」을 잡은 「軍用列車」等이 陸續發表되었다.
이때로부터 朝鮮映畵에 있어 釜山의 「朝鮮키네마會社」以後로 오래 中絶되었든 企業化의 傾向의 推進되어 朝鮮映畵會社가 成立되어 第一回作品으로 朴基采氏가 李光洙氏의 小說 「無情「을 映畵化하고, 뒤니어 李圭煥氏가 原作, 監督으로 「새出發」을 製作하였고, 劇硏座映畵部에서 金幽影氏가 「愛戀頌」, 安哲永氏 「漁火」, 東洋劇場에서 「사랑에속고 돈에울고」, 方漢駿氏가 「城惶堂」, 漢陽映畵社의 「歸着地」, 崔寅奎氏의 「國境」等이 製作되었으나 모두 「에푹」을 지을만한 水準에 이르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漸次 「토-키」化된 朝鮮映畵가 一般的으로 技術的水準이 向上되고 있었든것만은 움즉일수 없는 事實이며, 그中에서 朝鮮의 監督들이 顯著히 技術偏重에 빠저 職匠化할려는 傾向이 눈에 띠웠다.
「싸이랜트」時代를 어제가치 지나온 朝鮮映畵로서 爲先 새 技術을 取得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事情을 생각할때 首肯될수 있는 事實이나, 朝鮮映畵의 健全한 發展을 爲하야 技術과 더부러 藝術을, 或은 藝術로서의 「朝鮮토-키」의 水準에 到達하기 爲하야 이 限界는 하로바삐 버서나야 할것이다.
그것은 마치 完備한 機械設備와 커다란 生産機構를 必要로 하는 「토-키」時代의 朝鮮映畵가 이以上의 發展을 爲하야는 企業化의 方向을 가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事情과 竝行되는것이다.
이러한 點에서 高麗映畵社가 近間 發表한 崔寅奎監督의 「授業料」, 「집없는天使」와 全昌根監督의 「福地萬里」는모두 作者의 藝術的性格이 서로 다른데 不拘하고 興味있는 批評의 對象이 될것이다.
周圍의 諸事情이 如何間에 自己의 藝術的性格의 獲得과 企業化의 길은 依然히 朝鮮映畵 今後의 運命을 決定하는 것이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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