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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편편―연주 여행의 회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회고 편편―연주 여행의 회고― 回顧片片―演奏旅行의回顧―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박경호 朴慶浩
출처정보 중앙 中央
연    도 1936-03 昭和十一年三月
면    수 21 21
기사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슬픔과웃음 이것은 現在 나의생활에 없지못할 一種의 放縱이다. 아니一種의 榮養素다.
現生의 避할수없는 倦怠를 느낄때마다 나는 過去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으려고해본다. 그리하야 過去란 나에게 그렇게 意味없는것이 아님을 發見한다. 疲勞한저녁에 가끔 나혼자 무에라고 주절주절하며 픽픽웃기도 하는것을보는 내안해가 恐怖의 視線을 나에게 던지는것도 無理가 아니다. 그러나 인제 내가 다음에쓸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러 나의 獨白과 失笑 亦是 無理가 아님을 알것이다.
朝鮮에서 學校音樂과 그活動의 先驅者이라면 崇實專門學校를 말하지 않을수없을것이다 二十年前 崇實大學校에는 優秀한 合唱團吹奏樂隊 管絃樂團이 있었고 또半島에 崇大樂團이 가지않은 곳이 거이없으리만큼 演奏旅行이 또한 有名하였던것이다.
그때는 朝鮮各地에서 靑年會니 무엇이니하야 組織運動이 猛烈하던때이라 放學이되면 各地에서 崇大音樂團爭奪戰이 볼만하였고 崇大音樂團이온다면 數十里밖까지自轉車로 徒步로 歡迎을 나오는것은 勿論이요 도야지를죽여라 닭을 잡아라 그待接이란 果是 훌늉한것도 太古天皇氏쩍의 感이없지않고 또하로저녁 音樂과 講演을 하고나면 入場料外에 數百圓의 義捐이 드러오는대 經費와旅費를 除하고는 全部 主催團體에 寄附하던일 亦是 虎君이吸煙하던 時節에만 있을일이었다.
내가 在學時만하여도 北으로奉天까지 南으로濟州까지 五十餘군데에 招請을 받아 갔던일이 생각난다.
한번은 어느 시골에서 우리를 請하는 書信이 왔는대 그一節에 가라대
「······周知하시는바와 如히 此處는 農村이온지라 荷物은 많이 가지고 오실것 없사오나 그러나 피아노는 四五個 가저오셔야 될듯하오며 방오리 (바이올린)는 本邑 面長의 子弟분이하나 가젔사오니 안가저오셔도 될것이옵고 피아노를爲하야 짐군一人을 보내겠사오니 全部此人에게 지워가지고 오시옵소서-」
웃어우나 요지음에 볼수없는 純朴하고 구수한 맘을 말한것이다.
演奏旅行 란 언제나그러케 愉快한것이 아니다. 때로는 無限한因難과 冒險을 맛보게 된다.
한번 全羅北道어느邑에서 音樂會를하고 그이튼날 아침에 出發을 하려고 한즉 主催者側에서와서 제발 午后에 떠나달라고한다 그理由를 알고보니 그邑의 財産家이오 權力家인 某氏가 昨夜에 오지못하였음으로 아침에 그집에 가서 昨夜에한 順序를 그집마당에서 한번다시하여야 費用의 切半을 얻을수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斷然拒絶한후에 苦笑를 먹음고 떠나온일이있다. 그리고 돌아오는길에 亦是 懇切한請求로 忠北어느市에 一夜를 머믈게되여 午后三時頃에 一行은 到着하였다 와보니 삐라라든지 포스터같은 은 이름부터 아지못하고 興行의宣傳이라하면 依例히 新派劇團의 마찌마와리(街廻リ)밖에는 모르는친구들이라 우리가 到着하기를 苦待苦待하였다는것이다 할수없이 우리는 큰旗를 앞에세우고 한時間이나 徒步로 (그때에 이런시골에는 택시같은것은 求景도할수 없었다) 마찌마와리를 하였는대 樂器란樂器는 모두다 들고나서서 廣告를 하여야 된다고 내가 바이올린을 켜면서 따라가던일은 자다가도 웃을일이다.
이리하야 疲因한 다리를 쉬일 사이도 없이 저녁을 한술 얻어먹고 音樂會場인 公立普通學校로 갔다. 定刻이 되여도 한사람 오지않는다. 約半時間 지나니까 十餘人 모이고 한時間쯤 지나서 始作하는대 四百名이나 收容하는講堂에 겨우 十八人의 聽衆을 앞에 놓고 二十餘人의 樂士가 그래도 신이나서 하고나니 몸보다도 맘의 疲勞함이란 形容할수없었다. 總收入五圓四十錢也를 主催者側에 全部寄附하고 그날 밤으로 떠나왔다.
바루 그해겨울이다 平壤서 西이로 約七十里되는 村에 우리는 招聘을 받아 칩고바람부는날 午後에 十餘人이 自動車두대를 나누어 타고떠낫다 이車들이야 말로 米國같으면 단돈 十佛도 받지못할 古物이라 그 形狀의 착혹한것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뒤에떨어진 우리車가 떠난지 十分도못되여 말성을 부리기 始作하더니 中間쯤가서는 그만 딱붙어 가지고 一步不動이다. 樂器는많고 時間은 적고하야 徒步로 갈수도없는形便이라 運轉手의 말대로 車를 자꾸 떼밀면 機械가 動한다고하야 그치운날 三四時間을 戰戰兢兢하다가 먼저갔던車가 돌아와서 간신히 救援을 입어 音樂會定刻에 二十分이나 늦어서 倒着은 되였다. 벌서 會場은 大滿員이어서 저녁도 먹지못하고 音樂會를始作한후 合唱이라 獨唱이라 吹奏樂이라 그야말로 老狗痛囊之聲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車在鎰君은 목이 아프다고 獨唱을 할수없다고 하므로 司會者는 順序를 하다말고 그代身으로 다른것을 해달라고 자꾸졸른다. 이때에 李丙三氏(現東星商業敎授)가 무어라고 그분에게 귀속말을 하더니 意外에
「여러분 인제 朴慶浩氏가 코넷 獨奏를 해준다고 합니다」
廣告가 떨어지자 雨雷같은 拍手가 일어난다.
나는 實狀 손으로하는 樂器는 어느것이나 조금씩이라고 소리를 내일줄아나 입으로 부는 樂器는 그손가락 놀리는法은 훤하게 알면서도 「픽」소리 하나를 내이지 못하는것은 一種의 이야기거리었었다. 그래서 懇親會席上에서 餘興을 할때이면 依例히 나보고코넷獨奏를 하라고 성화를 시키는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音樂會에서 코넷獨奏를 하라고 熱狂的 歡呼를 이르키는것이다 옆엣놈들이 허리를웅켜잡고 웃는것은 勿論이오 司會者는 그냥
「사양마시고 어서 한曲調 해주시오」
하고는 聽衆을 向하야
「인제나오신답니다」
그야말로 進退兩難이다. 하지만 이難關을 無事히 突破하는것은그 瞬間에 나의 最大使命이다.
「네-참未安합니다마는 제가 오늘 찬바람을 너무쏘였더니 지금 腹痛이나서 喇叭을 불수가없습니다. 그저용서해주십시오」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배아픈 形狀을 하였다 끝까지 職務에忠實한 그司會者는
「섭섭하올시다마는 지금 그분이 腹痛이나서 코넷獨奏를 못하신답니다」
이廣告한지 十分이 못되여 淸心保命丹一封이 뒷門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 淸心保命丹을 그후여러해를 保管하여 두었다가 그만 잃어버리고말았다)
어느여름放學에 五人의 音樂傳道團이 濟州島를 巡廻할際 朝天이란곳에서 聖山浦까지 七十里의 險地를 踏破하게 되었다. 道路라는것이 別로없고 그냥 밭을 건느고 돌담을 넘어 가는대 人家가 없는것은 勿論이오 飮料水도 不足하야 미리準備하였던 고무管으로 말발자국에 고인물을 빨아 먹으면서 허덕지덕하야 찌는듯한 太陽이 西天에 걸렀을때 우리는 반가웁게도 한적은못(池)에 이르렀다. 누구보다도 내가먼저 옷을 벗어버리고 물속으로 텀벙!들어가 선즉 무엇인지 내다리가 서물거리며 갑작이 물이 술렁술렁 끓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이게반드시 曲節이 있는것이로구나하고 작은눈을 부릅뜨고 물속을 仔細히 살펴본즉 勿驚 數千마리의 배암이 사발에 담은 콩나물국모양으로 그못에 그득하야 不意의 襲擊者를 에워싸고 大騷動을 이르켜 나의生死가 一瞬間에 달렸는지라 그만 魂飛百散하야悲鳴의 SOS를 發하고 뛰어나오던 光景은 잊을수없는 一幅의喜活劇이었다.
이야기는 끝이나려면 아직도이갑절이나 더있으나 紙面이 없으니 한마디만 더쓰고 그만두련다 그때에 우리音樂團中에는 別別장난꾸럭이 말락꽁이 뚱뚱이 ×××이가 다있었다. 그리하야 틈만 있으면 가지各色의 장난이다나오는것이었다. 그중에도 우리들의文字로 打臀會라는것이 그중고약하였다. 이것은 한놈을 엎어놓고다른한놈이 그놈의 엉덩이를 죽어라하고 나려갈긴다. 그리하야 마진놈이 친놈을 알아마치면 친놈이 또잡히어 궁둥이에 주먹洗禮를 받는것이 이께임이다. 이께임에서는 肉臀으로 有名하던 (아직도 그렇지만) 玄濟明君은 그受難地帶가 襲擊者에게 優勢를許하고 남는까닭으로 언제나 잡히기만하면 그被害가 莫大하였고 그에反하야 骨臀의 所有者인 나는 그被襲地帶가 에디오피아 山岳地帶以上으로 險峻하기때문에 恒常 襲擊者에게 不少한 損害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놈을 攻擊하는데 들어서는 一步를 不讓하던것은 아직껏 마음에퍽不安스럽다.
平北어느곳이었다. 音樂會를하고난 이튼날 이장난꾼들이 모두근질근질하야 하던차에 어떤 靑年이 찾아와서 自己는 東京留學生이라고 하면서 意外에 그言事와 行動이 대단히 不遜하고 아니꼬운지라 우리는 一發의 暗號로 即時에 打臀會를 開하자 數分이못가서 이不幸한 東京친구가 걸려들었다. 野球投手의 粱君 팔씨름大將의 李君을 爲始하야 四五名의 猛打漢이 덤벼들었으니 그形便을 可히 짐작할것이라 바로마처도 아니라하고 다시 엎어놓고 치고 하기를 五六回거듭하고 나니 그렇게 傲慢하던 친구가 그만 삶아놓은 시금치가 되고말었다.
그날저녁 우리가 떠날때에 停車場에 나와서 가장 情다웁게도아주고 送別해준이가 이靑年이었다.
이렇듯이 崇大音樂團의 追憶이 아직도 훌륭하게 남어있다. 그모든 純情 冒險 로맨쓰 유모어는 지금은 追憶에서 밖에는 찾을길이없다. 아-그리운 時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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