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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대에 나오기까지 최승희 씨의 승리적 반생과 분투기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세계 무대에 나오기까지 최승희 씨의 승리적 반생과 분투기 世界舞臺에나오기까지崔承喜氏의勝利的半生과奮鬪記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일춘생 一春生
출처정보 신인문학 新人文學
연    도 1936-01 昭和十一年一月
면    수 0 면수 없음
기사
崔承喜氏라고하면, 모르는사람이 없을것이다. 只今은全日本의 人氣를 獨点한 女王으로 明春에는 伯林을 비롯하야 英佛米伊等, 全世界를 行脚하리라하니 말만들어도 시원치않은가? 지난十月二十九日에 大阪朝日新聞社 主催의 「舞踊會」가있었는데 女史가 東京으로부터 大阪驛頭에 나리자 大阪의 全人士가 出迎하다싶이하야 驛前에는 交通을 遮斷하는等 空前의人氣를 지었다니 氏의 得意의心境을 짐작하기에 넉넉하다.
그러나 이러한氏로 그의지나온 옛자최를 더듬어보면 實로 눈물나는 波瀾이 많다고한다. 이제 그의 半生의 발자욱을 더듬어보자 氏는 京城需昌洞出生으로 淑明普校와 淑明高等普通學校를 優秀한成績으로 卒業하였다고한다. 그러나 여기 한가지 이야기할것은 氏는 普通學校時代부터 唱歌를 잘하였으며 더욱 高普時代에는 피아니스트 金永煥氏에게 더욱 囑望을 받었다고한다. 그래서 氏가 高音三學年時代에 아버지의 失敗로 家庭이蕩盡되자 月謝金조차 낼수가없게되었는데 氏의才操를 아까워하는 淑明學校에서는 月謝金을 免除하고 其他여러가지 便宜를 도아주었다고한다.
이리하여 그가 十六歲의 봄을맞는때에 同校를卒業하였는데 同校創立以來의 最少年齡의 卒業者라고한다 卒業後의氏는 音樂學校를 志願하였으나 原來家貧한 處地이라 目的을 이루지못하고 그해봄에 京城師範學校에 入學試驗을 치렀는데 亦是優秀한 成績으로 패스하였으나 年齡이 적은關係로 一年間 入學許可를 延期하였다고한다 이리하여 氏는 憧憬의꿈을 가슴에안고 뜻없는 그날그날을 보내었는데 그때 母校淑明學校에서는 氏의 才操를 아까워하여 師範學校入學을 그만두고 一年만기다려 東京音樂學校에 보내주기로 決定하였다고한다. 音樂學校와 師範學校-이두길이 氏의앞에 놓여젔을때 氏의빛난 將來를 위하여 다시한길이 열리었으니 이것은 石井漠氏의 京城來演이다. 石井漠氏는 滿洲行脚을 마치고 日本內地로 돌아가는길에 京城을 들르게되고 또는 京城에서 公演을하게되었는데 石井漠氏는 朝鮮의山水가 明朗함을보고 크게느낀바있었다. 氏는이같이 山河가 秀麗한곳에 藝術的素質을가진 朝鮮處女가 반듯이있으리라고 생각하고 京城日報에 朝鮮女子로써 一二名의弟子를 求한다는意見을 京城日報에 發表하였다. 이新聞을본 崔氏의 오빠되는 崔承一氏는 多年間東京에있어서 石井漠氏의藝術을 理解하고 또는 그의人格을 尊崇하든터이라 自己누나인 承喜氏에게 議論하여 畢竟은 그의弟子로써 東京에 進出하게되었다고한다.
氏가 京城驛을 떠날때에 氏의舞踊進出을 아까워하는 宋金旋 林氏等 몇몇분은 驛頭까지 나와서 東京行을 挽留하려고하여 一大喜悲劇까지 이루었으며 마침내 京城을떠나 舞踊의 첫길을 밟게되었다고한다.
氏는 東京에건너가서 石井漠氏의指導아래 三年間 舞踊基本演習을하고 또는 때때로 石井漠氏의 賛助出演을 하였는데 一般舞踊界에서는 氏의 技能을 認定하고 將來가있는 舞踊家라고 稱讃하였다고한다. 그러나 그때 石井漠氏의 弟子인 石井小浪氏가 石井漠와 사이가 좋지못하여 分離하게되고 石井漠氏도 全혀 商業本位로나가는 形蹟이있어 石井漠氏의 舞踊硏究所는 매우 零落한 形便이었다고한다. 그래서 崔氏도 斷然 同硏究所를 脫退하고 露國行의理想을 품은後 斷然歸鄕하게되었다고한다. 成功者의앞에 반드시오는 試鍊의때가 氏의앞에 亦是온것이다.
氏는 京城에와서 露國을가고저 運動해보았으나 그것은 永遠한 꿈의한페지로 돌아가게되고 말었다. 氏의오빠인 前記承一氏가 亦是 第一線에서서 여러가지로 活躍을하였으나 한가지도 뜻대로 되는것이 없드라고한다 氏의男妹는 第一着으로 東亞日報에 交涉하여 公演會를 열고저하였으나 無慘히 拒絶을 當하고 다시京城日報에 交涉하여 第一回公演을 열었는데 매우人氣도 좋았고 收入도 相當하였다고한다. 그래서 京城서 二回公演을열고 地方까지 巡廻公演을하여 多少滋味를 보았다고 한다.
그후 京城吉野町에 崔承喜舞踊硏究所라는 看板까지걸고 三年間 二十餘名의 弟子를敎育하며 舞踊熱을 高吹시켰다고한다. 처음에는人氣가 좋았으나 舞踊도 亦是藝術인以上에 民族感情을 等閑視할수가없고 또는 鄕土情調를 無視할수가 없다고하여 線이굵고 暗淡한맛이있는 舞踊을 추었드니 藝術에 理解가없는 朝鮮이라 觀衆이 적어지고 人氣가 떠러저서 那終에는 經營할수없는 悲境에 이르게되었다고한다. 이에 氏는 悲壯한 決心을하고 그舞踊硏究所를 집어치우는 同時에 自己는 開拓者의 하나로써 그만 舞踊界에서 隱退하기로하고 當時오빠의친구인 早大學生인 安漠氏와 結婚을 하였다고한다
氏는 新婚을하고 「스윝홈」을 이루운후 京城서 단꿈을꾸는동안에 딸하나를낳었다고한다. 그러나 舞踊의天才를가진氏는 언제까지나 家庭婦人으로만 있을수가 없었다.
京城서 一年동안의 家庭生活을한 氏는 昭和八年三月에 夫君安漠氏와함께 손에 손을잡고 東京으로 다시건너가게되었다. 東京에 자리를 잡은氏는 다시 石井漠과 提携하여 第一回公演을 日比谷公會堂에열고 朝鮮서 虐待받고 不評判이든 純朝鮮情調를 나타내인 「에헤라, 노아라」 라는춤을 축었다는데 意外에 이舞踊이 暴風的人氣를 이르키고 樂壇과 舞踊方面에서는 只今까지 보지못한 東洋리을 發揮한 傑作이라고 大評判을 얻게되었다고한다. 이리하여 氏의人氣와 名聲은 超特急으로 全日本內地에 宣揚이되여 氏는 京都, 大阪, 名古屋, 九州等 全國을 巡廻하게되고 氏의이름은 旭日上天의 氣勢를 보게되었다고한다. 只今은 東京九坂會舘에 舞踊所를 두고 많은 弟子를 가리치며 女子大學을 卒業한 蕩淺某를 秘書로두고 活躍을하였는데 全國日本新聞社에서 每日十餘件式 舞踊會招請交涉이 들어오고 또는 面會오는 사람이 몇十名式된다고한다. 그리고 東京各레코드會社에서는 熱烈이 레코드吹込을 氏에게 交涉하며 一枚吹込에 몇千圓謝禮金을 주겠다고야단이나 氏는 斷然拒絶한다고하니 氏의節操를 알기에 넉넉하다.
只今은 氏의收入이 每月千餘圓可量이 된다고하며 더욱 藝術에 精進하는터인데 明年五月이면 世界舞臺에 氏의빛난藝術을 자랑하리라고하니 듣기에 시원치않은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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