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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진 민속―기생의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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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없어진 민속―기생의 특색 없어진民俗―妓生의特色―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백화랑 白花郞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36-10 昭和十一年十月
면    수 214 214
기사
[사진] 기생 연주 사진 1매

없어진民俗
妓生의特色
白花郞


기생!. 기생!.
그 일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음이없다.
오호려 더 자서히 말하면 기생이라는명칭이 지금와서는 시체문자로 통제(統制)가된 세음이다.
옛날노 말하면 기생의명칭도 여러가지로 난위였다
즉 그 일홈이 세가지로 구별되어있었스니 소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등이였다.
일패라는것은 관기(官奴)니이관기는 원래각지방 관청에 속하야있는 관비(官婢)중에서 똑똑한것을 뽀바서 춤과 노래를가르처 녀악(女樂)에 쓰든것이오 소위 이패라는것은 은군사이니 이 은군자는 비밀히 정조를파는 녀자를 가르처 말한것이다.
그런데 은군자는 흔이는 젓날에 기생노릇하든 녀자가 많음으로 일패인 기생보담 한게급을 내리어 이패라는 칭호를 붙이게된것이다.
그다음에 소위 삼패라는것은 혹 답앙모리이니 원래 삼패는 매음을 주장하는 논다니인바 그정조를 팔아서 재물을 맨든다해서 답앙모리(搭仰謨利)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것이다.
그런데 삼패도 물론 손님을 보기위하야 영업을하게된 여자임으로 그손님을 위하야 노래를 배우나 그노래는 잡가를위주하였고 원악이 일패인 기생이부르는 가사라든가 또는 춤은 가르치지도 아니하였고 배우려하지도 아니하엿다.
이상에 말한바 일패, 이패, 삼패이외의 또한 화랑녀(花娘女)라는 것이있으니 이화랑녀는 이패와같이 기생의몸으로서 밋그러저 된것도 아니오 또는 삼패와같이 손님을 접대하고 혹고 혹은 매음도하는것이아니오 히 남의눈을 피하면서 정조를 팔기를 목적한 여자이다.
그런데 화랑녀는 한곳에만있어서 정조를 파는것이 아니오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며 팔었으니 가령 봄이나 여름철긔에는 고기를 잡기위하야 어부가 많이 모흔 어장이나 그러치 않으면 각처에서 구실을 바드러나온 사람이 많이 모흔곳등 어쨋든 사람이 많이 모흔곳을 찾어단였고 가을이나 겨울 철외에는 깊은 산간까지 찾어 들어가서 품행이 방정치못한 중에게까지 정조를 파는 여자이다.
원래 이 화랑녀는 경긔(京畿)양성(陽城)군 가천(加川)이라는 곳에서부터 시작된것이 차차 이곳 저곳으로 번지어필경은 옛날구역으로 팔도(八道)강산의 어느곳이나 화랑녀의퀴々한 유두분면의 냄새가 마치지아니한곳이 별로없었다.
그런데 이 화랑녀의 폐단이 갈수록 심하야 순절한 풍속을 더럽히게하는 일이많음으로 그것을 업새버리려는 수단을 많이써왔다.
그러나 이 화랑녀가 애초에 시작되기는 정종대왕삼년부터 움이트게 된것님으로 그뿌리가 깊으니만큼 용이하게 업새지를못하였다.
즉 정종대왕삼년봄에 이 화랑녀가 맛치 가시나무싹이 도더나오듯이 시각이 되어가지고 그가시나무가 륙칠월이면 한끗왕성하듯이 이 화랑녀도 그해칠월달을 잡어들면서 아름답지 못한 일이 굉장하게 생기었다.
그래서 바로 그칠월달에 례조(禮曹)로부터 화랑녀를 국법으로 금지할것을 정종대왕께까지 알외여 아주 업새버리려는일까지 있었으나 능치못하였다.
도대체로 옛날조선 화류계의 여자종류가 얼마이었든지 기생이라하면 원래 관비중에서만 선택하든것이 차차 시대가 변하야 지금은 누구라도 마음만있으면 기생노릇을 하게되였다.
그럼으로 첬재 기생이되는 그특색도 지금은 업서진 풍속중에 끼어 살어지고 말었다.
○ ○ ○
다음에는 기생을 가르치는 제도와 풍속이다.
원래 기생을 두게된뜻은 나라에 경사가있을때 그것을 축하하기 위하야 소위 녀악(女樂)이라는것을 두게된것이니 이녀악은 고려문종왕(高麗文宗王)께서 소위 팔관년등회(八關燃燈會)라는 불사(佛事)를 위한노리 때부터 시작한것이 그동안 존폐(存廢)의 풍파가 많었으나 리조까지 넘어들어와서 또한 오백년동안을 이어 내려오게 된것이다.
그럼므로 기생을 가르치는것은 가사와 춤을 위주한것은 물 론 가령 노래라할지라도 잡가와다른것은 절대로 서끝에 올니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만일 잡가를 듯고저할진댄 삼패를 불러 들엇다.
팔아서 기생과 삼패의 게급이 이렇게 배우는것부터 엄격하야 다같은 외입쟁이라도 삼패의 입쟁이는 데데하게 알뿐만아니라 기생으로는도 삼패외입쟁이로 아는때는 벌서 문에서 그 찻는것을 따버리는수까지있었다.
본시 기생을 가르치는것은 가사(歌詞)와 춤이나 그밖에도 지방 지방을 딸아서 특색되는것이 잇섰다.
즉 관동(關東)기생은 관동곡을 잘부르고 안동(安東)기생은 대학(大學)을 잘외우고 영흥(永興)기생은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잘부르고 함흥(咸興)기생은 출사표(出師表)를 잘외우고 제주(齊州)기생은 말을잘타고 의주(義州)기생과 북청(北靑)기생은 말을 잘달니며 금무(劒舞)를 잘추고 평양(平壤)기생은 관산융마(關山戎馬)를 잘부르고 경성(京城)기생은 관동별독(關東別曲)을 잘부르고 선천(宣川)기생은 항장무(項莊舞)를 잘추고 경상도와 전라도기생은 단가(短歌)를 잘불렀다.
그럼므로 경상도 안동땅은세가지 특별한것이있다 하였으니 하나는 안동좌수(座首)요 하나는 기생에게 대학을 가르치는것이오 또하나는 속가(俗歌)에 성주(城主)푸리에 그성주의본(本)인 제비원이있다는것이다. 이 안동땅의 좌수는 중경재상도 좌수가 된다는것으로 유명한것이니 즉 경상도선비가 존경하는사람중에한사람인 김학봉(金鶴峯)선생도좌수를 지냈다는 말이잇다.
그런데 안동기생이 대학을 잘읽는것은 명종대왕당시 큰선비로써 일홈이 높든 주신재(周世鵬號新齋)선생이 그곳 청량산(淸凉山)에서 놀때에 탁문아(卓文兒)라는기생으로 더부러 서로 술취하기를 내기하기도하고 글을 외우기도 내기하다가 내종에는 탁문아가 대학을 잘외워 그날밤의 취흥을 도듬으로부터 일홈이 세상에 전하게된것이다.
그다음으로 관동기생이 관동곡을 잘부르는것은 선조왕당시에 정송강(鄭松江)상공(相公)이 일즉 강원감사(江原監司)로있을때에 정승상이 그곳 백성의풍속을 순박케하기위하야지은 관동곡(關東曲)을 부르기를 가르첬으니 정승상은 명재상일뿐만아니라 문장이 탁월하고 노래가 명창으로 스스로지어 스스로부르는것이 만하였다.
그레서 정승상이 그곳을 떠난뒤에도 의례히 관동기생은 관동곡을 가르처 필경은 관동기생의 특색이되게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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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말을 잘타는 기생으로 말하면 제주기생의, 주기생, 북청기생이있으나 그중에도 다각각 다른사정이있으니 제주기생이말을 잘타는것은 원래 제주도는말의 소산지라 남녀로소를 물론하고 말을억어하는법과 타는법이 일종의 습관이되어 그습관이 자연 기생에게도 밋치게 되었거니와 의주기생과 북청기생이 말을잘타고 금무를 잘추는것은 위주와 북청은 요사이 문자를 빌녀말하면 소중한 국방지대이라 자연 무예를 숭상하게된바 기생까지도 말을 달니고 칼을 쓰는법을 가르치게 된것이다.
그럼으로 금무를 보려면 반드시의주기생이나 북청기생으로하야금추게하였스니 금무는 즉의주기생과 북청기생의 특색이되었다
합흥기생이 출사표를 잘외우고 영흥기생이 룡비어천가를 잘부르는것은 그두땅이모두 리씨왕업의 발상지라 자연 그것을응하야 부르게 시작이 된것인바 부지중 그곳 기생의 특색이되고만것이다.
그 다음으로 령남기생과 호남기생이 단가를 잘부르는것은 필경 다른 까닭이 있는것이아니오 그산천외 긔운을 타고난것이 단가를부르는데 적당한음성을 가지게 된것이니 서도 기생이 수심가를 잘부르고 남도기생이 단가를 잘부른다는것이 순연히 산천정긔로써구별된특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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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옛날 기생은 다같은 가무를 공부한다할지라도 그중에서 특색하나식이 있게되여 각각 그특색을 딸라서 일름을흔날니게되었다.
지금은 기생이라할지라도 우선 그가무의 구별이 있을뿐만아니라 시대의 변천업딸하 외굵의 가무까지 수입이된 세상이니 만큼 더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옛날기생은 그러한 특색이있게된것이 분명 화류게의 크나큰 풍속으로서 생기게된것이다.
대저 화류게라하는 사회가 특별한 사회이니만큼 그 사회안에있는 풍속, 습관도 특별할것은 더할말이 없는것이다.
그런데 그사회의 특별한 풍속, 습관이란것은 꼭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데 각각 특색을 떨친것뿐아니라 례문제에 있어서 특색이있는것을 생각할것이다.
세상사람은 화류게에는 나무 특색되는 례의가 없는곳으로 생각하기가 쉬운일이라할수있으나 실상은 옛날 화류게에서는 례의를 압세우는것이 흐려 가무보담도 힘쓰게되었다.
즉 기생으로서 손님에게 대한 인사성이라든지 대접성에하나도 방심하는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즉 기생의 행세라할수있었다.
그럼으로 기생으로써 만일 기생의 행세상 틀니는일이있으면 기생자신에게로 즉접도라가는벌이 있는것은 물론이려니다 소위 기생서방이라는 그남자까지에도 그별이 련대자로 돌아가게된것은 이것이 일은바 기생의 례의문제로 생긴 특별한풍속이었다
요사이와같이 기생례의 풍속이 뒤박긴때라도 옛날소위 포주밑에있는 기생과 과기생단독으로있는 기생의 행동을 구별하야보면 포주밑에서 치어난 기생은 그언미 동작이 비유해말하면 아비의 교육이있이 잘아난 아이와같고 자긔단독으로서 기생노릇을하는 사람은 흔이는 아비없이 잘아난 자식과같은 차별을보이는수기많흐니 이것은 화류게에 독특한 교양이쇠퇴한것이라 할수밖에없는것이다.
그럼므로 옛날 로기가 현대기생을 비평하는말이
「흥. 기생은 재상과동등으로 첬거니 응당할 가무에 무식그중에도 특색이없고 겸하야 례를 모르고서야 어찌 재상과 똑같은 품수를 갖을수있나요. 요사이 기생은더말할것없이 옜날의 더벙머리와비슷하지요」
하며 한편으로는 기생의 자존(自尊)을 자랑하고 또한편으로는 화류사회가 퇴보하야가는것을 탄식하는것이 적지아니하다.
이에 그로기의 탄식하는 한마듸말이 조선기생의 특색은 벌서없어진 풍속중으로 끼어들어간것을 잘증명하는말이라 할수있을것이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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