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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고별의 노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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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실화 고별의 노래(하) 実話 告別의노래(下)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홍난파 洪蘭坡
출처정보 중앙 中央
연    도 1936-08 昭和十一年八月
면    수 226 226
기사
実話 告別의노래(下)
太平洋上의悲戀哀曲
洪蘭坡

大洋의落照
何如턴 한房에 세사람이共居하는以上에 携帶品이나 金錢같은것은 잘간직할必要가 있으므로, 나는日用品만을 끄내여놓고는 그外의다른携帶品은 加房속에 깊이넣은後 쇠를채워버렸다. 그리고는내房에 딸려있는『뽀이』를불러서 若干의『팁』을준後, 그의案內로 乘降機를타고 荷物室에 나려가서, 船中에서 必要할衣服몇벌을 꺼내여다가 爲先 靑灰色의 新調洋服을바꾸어입고는 다시甲板으로나아갔다 그때에는 橫濱港도 眼界에서 벗어난지 이미오랬고, 어느便을바라보든지 오직 一望無際한大洋인데 落日의 붉은노을이 비단疋을풀어던진듯이 이편 뱃머리로부터저쪽水平線까지 뻗히여서 그찬란하고 황홀한風景은 壯麗, 痛快그것이었던것이다.
航海의第一日은 實로愉快했다 早春以來의 쌓이고뭉쳤던모든鬱憤과 懊惱와悲歎과哀愁는 씻은듯이사러저버리고, 歡喜와愉悅만이 孤寂과함께心中에充溢했던것이다 미리準備했던 『파잎』을 비뚜름이입에물고서, 鳥打帽에『콜푸』바지라는 차림차림으로, 甲板의最上層A떽으로부터 最下層인D떽까지를 一巡하고 다시 그아랫層에있는 三等船室까지도訪問하야 뱃속위모든設備라든지裝置를 대강보아두었다. 저녁밥時間인七時三十分이되자 船『뽀이』의알외우는 鐵琴의單調롭고도 『하-모닉』한音樂이 나의귀를 놀래주었다. 이것이 食事의準備되었음을 告해주는것인줄을 나는그다음날에야 눈치채였던것이다.
배탄後의첫食卓 보고듣는每事每物이 新奇하지않은것이 없지마는 食堂에 굉장하고華麗한設備라든지 食事『메뉴』의훌륭하고도 豊富한品에는 喫驚하지않을수없었다. 『쑤ㅂ』으로부터시작하야 『띠-써-ㄹ트』에이르기까지의 數十鍾의飮食物名錄을볼때에 事實로 나는어떤것을擇할는지도 갈팡질팡했지마는 그보다도 처음보는 飮食을 잘못請했다가 一等客의名譽나 體面을더럽힐가겁나서 朝鮮에있는洋食店에서 흔이먹던恒茶飯의것몇가지를請했을뿐이었다. 그러나 한가지多幸한것은 同船한李氏夫妻와 나는 같은食卓에서 食事를하도록 座席이配定되어 있었으므로, 來日부터는 李氏의擇하는飮食에 나는「上同」이란 註만을 달기로內心에作定했었다 그리면서도 그날저녁의『메뉴』를한장 슬적집어가지고 내房에가서, 英和辭典의신세를 저가면서 飮食이름을배우랴고했지마는 원수의이것은 全部佛語로 씨여있었으므로 英和辭典이 그것을解說해줄까닭이 없었던것이다.

달밤의小夜樂
食後에 社交室로가서 『피아노』한曲調를탔다. 率直하게 告白하면 나는내가音樂家이시라는것을 船客들에게 알려주어서 조그마한尊敬이라도 받어보고싶었고, 또 그네들과 談笑할機會를 만들고저하는 허물없는꾀에서 이같이했던것이다 果然나의妙案은成功하야 그날밤으로 數많은 새로운친구를 만들게되었으니 그中에는英國人, 米國人도많었지마는 中國人도 또한적지는않었다. 그러나 나의미천짜른英語는 決코그네들과 社交를할程度는아니였다. 그래서 된소리안된소리 한두마디式 동강동강주고받다가는 저쪽이 먼저일어서지않으면 내가슬그머니 자리를避해야만될形便이었다.
三等室에 나려가서 故國으로부터 米國留學가는李氏와및 米國으로부터 여러햇만에故國에돌아왔다가 다시米國으로가는 美術家朴氏를찾어서 함께運動室에가서 핑퐁도치고 『첵커-』(洋棋)도 두다가서로헤여진때는 밤이 이미 깊어진十一時半頃이었다 나는 나의房에가서 寢衣를바꾸어입고 자리에누으랴니까, 갑작이 까닭모를 슬픈생각이 떠올라서, 到底히 잠을이룰것같지는 않었으므로, 나는다시 밖으로나아가서 뱃머리에앉은채로 茫茫한大洋을 시름없이나려다보았다. 이날은 陰曆으로 보름께였었던것이다. 皎皎한 둥근달은 구름없이 맑게개인하늘로부터 洋上에 나려비췰제 몇時間前에 비최던 落照의활홀함과는 正反對로 몹시도淸楚하고 한가하고感傷的이어서 厭世哲學者가아닌 나로서도 投身의誘惑을 받음이甚하였다.
꼭같은形態이것만도 이것을보는 사람의 感興에따라서 그읊으고노래하는方式이 다른것은 月色일것이다 내萬一上古音樂史에나오는「放浪歌人」의類였던들 「月下의小夜樂을 足히읊었을것이오, 李太白은못된들 平凡한詩人歌客만되었더라도 應當읊조림이 없지못했겠거늘, 그러나 그때나로서는 이값없는淸風과 임자없는 明月을 맞고보내기에 亦是 값없는눈물로 했던것이다. 이윽고 寒氣가 몸에숨여들매 精神을차린나는 떠나기싫은 이뱃머리를 눈물로作別하고 寢床우에몸을실었던것이다.

한배안의同胞들

이튼날아침 七時三十分에 뽀이는 珈琲와 『쿡키』를 寢室로가저왔다. 이것이 아마 朝鮮의所謂『자리-ㅅ朝飯』이란것인가보다. 何如턴 貴公子의生活이로구나―하는생각이났다. 아침食事는 어제저녁에決心한대로 李氏夫妻의 흉내를내였다. 四五朔동안 『미음』과粥으로만 連命해오던나로서, 이와같은豊富한肉類를 貪食하고도 胃腸에何等의 異狀을 깨닷지않을뿐만아니라, 口味와消化力이 普通健康한사람에比하야 못하지않게된것을 생각하매 實로 一種의奇蹟과같았다 죽고싶다하면서도 주검을 무서워하는것이 사람의常情이다. 口味가생기고 消化力이 갑작이强해지자나는 인제는 사는가보다하는기쁨을 깨다렀던것이다. 食堂에서나온後 同船한同胞들을 一一히찾어다니며아침인사를하고나서 社交室에들어가서 N·Y·K·專用의 고은편지紙에, 故國으로보내는편지를十餘장이나썼다 그러나 이것을지금 쓴다더라해도 故國의親知의손에 들어갈때까지에는 적어도 一朔이나걸릴것이오, 또旅行의途中에있는나로서 어디가서던지 定住를알리기前까지는 故國으로부터의音信을 받어볼可望이없음을생각하니 氣가막히었다.
點心도 亦是맛있게飽食했다. 事務長을찾어가서 나의本色을말하고 『바이올린』을練習하기에 適當한빈房하나만 빌려줄수없겠느냐고 請해보았다. 이윽고 그가나에게뵈어준房은 二等客室의一室로 다섯개의寢床이 텅텅비었다. 事務長의말이 이房에는 아무도없으니 맘대로使用하라고하면서 열쇠까지 나에게 맡겨버렸다 出航하기두달前에 二等室을豫約하자해도 滿員이라고不應하던것이 지금에알고보니 정말같지는않었지마는 그러나이런일까지 알앙곳할權利는 내게없으므로, 나는다만謝意를表하고서 그날부터 이房은 나의練習室로 獨占使用했다.
午後三時半에는 『애프터-눈·티 Afternoon tea)時間이어서 簡單한 茶菓의대접을받고, 五時入浴. 七時半夕食 아마 이『푸로그람』만은 航海中每日되푸리하는것이려니, 했더니 果然내생각이 들어맞었던것이다.

Me idianDay
그러나 夕食때食堂에서 한가지새『푸로그람』을 알게되었다. 그날밤八時半부터 A『떽』에서 舞蹈會가 열린다는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는 一大喜消息이아닐수없었다. 나는 舞蹈狂도아니오 舞蹈의名人도아니다. 그러나 나는東京서 學校를卒業하고나서, 或時 이다음에 洋行을하게되더라도―하는 漠然한생각과漠然한준비로 四五十日동안 所謂社交舞蹈라는것을배워둔일이있다. 그러므로 世界各國人이한테모인이배안에서 나의舞蹈의技術을 實驗하게된것이 나에게는적지않은기쁨이었던것이다.
그다음날부터는 每日밤마다 活動寫眞이니, 演劇이니, 舞蹈會니하는것들이 交代되기는했지마는, 그外에는 아무런 變化도없는 單調의海洋生活이 繼續되었다. 生活이 單調해짐에따라서 싫症이나고 싫症이나고보니 自然히頭痛이 따라왔다. 배탄五日만에 救命胴衣의着用練習이있었는데, 警鐘이울리자船客一同은船室에 備置했던救命胴衣를 등에지고 甲板으로一齊히 뛰어나가서, 『뽀-트』를 나리여海上에띄우는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豫想보다는 퍽싱거운작란에 지나지못했다. 그러나 그다음날에는一等船客一同의記念撮影이있었고, 夕食때에는 旅客의紀念名簿가 配布되어 比較的기쁘게지났었고, 七日째되는날에는 子午線을通過하는까닭에 그前날인八月四日이다시 重複됨에 퍽으나 新奇한생각이났다 이것을 所謂子午日(Meridian Day)이라하는데, 米國서東洋으로 올때에는 勿論이와反對로 曆書의一日이빠저없어지는것이었다.

船上의獨奏會
八月五日은이배가 橫濱을出航한後처음으로 風浪이일었다. 그러나 그동안 海洋에 단련이된까닭인지 食事를못하거나 行步를못할程度는아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어있기에는 너무도氣分이不快하야 일부러 몸을일쿠어가지고 아래웃層으로 돌아다니기도하고, 『떽꼴프』니『핑퐁』이니, 이따위『께임』으로 鬱陶한氣分을 抑制하고지나다가 午後三時半에는 船長의招待로 Captain slea party에叅席하야 模擬店에서 茶菓의대접을 받고, 이어서舞蹈會까지있어서 大端히愉快하게지났다 그이튼날은 배가次次로 布蛙港에가까워감을따라 風浪도甚하고 船體의動搖도 컸었다. 그러나 이날밤에는 나의獨奏會를 船中에서열기로했던까닭에, 흔들리는 머리와嘔逆나는氣分을 억지로참고, 終日 練習으로 時間을보냈다. 저녁밥때 食堂에 들어가니 이날의食卓은 特別히훌륭했다. 그理由는明朝에布哇港에 到着되는까닭에 이저녁을 Aloha dinner라고하야 極彩色의 日本畵를印刷한 『메뉴』와함께 조그마한 『오미야게』와 훌륭한別食을 많이내였다. 그리고 그『메뉴』우에는 나의獨奏會의招待狀이 놓여있음을볼때에 나는心中으로 대단히기뻐했던것이다. 食事後八時三十分에는 一等社交室에서一二等客을 中心으로하고 獨奏會를열었는데 나의同胞八人을 그자리에 正賓格으로 招待한것도 愉快한일이었다.
八月七日, 午前十一時三十分頃에 우리배가 布哇港에닿자마자, 米國政府로부터 派送할 移民局官吏들과醫師들은 적은從船을타고쫓아와서 步武堂堂하게 이배안으로올라왔다 同時에上空에는 米國航空隊의 飛行機가低空飛行으로 우리의배를監視하듯이 떠돌아다닐때에, 米國人들은 手巾을내여흔들며 歡呼하였지마는 그러나 나의眼目에는 몹시도異常스럽게보였다. 移民官들의旅券檢査가 끝나자 午後一時頃에 우리는上陸하였다. 곧荷物의稅關檢査를받어서 旅舘으로보낸後, 移民局에 붓들려가서 布哇에서 下陸하려는理由에對한 여러가지質問을받게되었다. 桑港으로가는船客들은 寄港時間中에 下陸하야 市街求景을하는것만은 容許하지마는, 그러나 이곳에서오랫동안, 적어도다음船便까지 滯留하랴던나에게對하야는 相當한理由가없이는 許諾할수없다는것이었다. 나는 率直하게滯留의目的을 說明했다. 그러나 演奏會를열기爲하여서라는말에, 그들은 이것도 亦是收入을目的으로한勞働이 아니냐고反問했다.

하와이同胞들
그러나 나는藝術家의演奏와 勞働과는 別物이오, 또東洋人인나로서 이곳에서 나의藝術을 披露하랴는데對하야 이것을米政府에서不許한다면 나는 이러한非藝術的國民의앞에서는 演奏하기를 질겨하지않는다고말했다. 그들은 나를別室로引導한後, 自己네들끼리 무엇인지한참동안協議하는모양이더니, 이윽고한官吏가 나에게와서 特別한好意로上陸滯留를 許諾한다는뜻을말했다. 이러하는동안이 두時間이나 걸렸던것이다. 나는 몹시不快하야처음에는 演奏고무엇이고다집어치우고 桑港으로直行할가하는 생각도있었지마는 그러나 이미上陸이許諾되었고, 또布哇亦是米領土인以上 나는 이미훌륭히 米國에入國된사람인즉, 日後에 米本州로갈때에는 米國땅에서 米國땅으로 旅行하는셈이라, 何等의調査나審問이없을것을생각하며 시원하기짝이없었다.
그러나 移民局을 벗어나온나는 어디로가야옳을지몰라서 한참동안 애를썼다. 나의『매너저-』格인 李氏夫妻는 여러出迎者들틈에 쌓여서벌서어디로가버린지오래고, 다른同胞들亦是 다各各親友들의引導로 市街구경을가고난때이니, 나는어디로가야할지 나의짐이 어디가있는지 알길이없었다. 그때李氏의생각에는 내가移民局에 붓들려간以上그렇게速히나오지는못할것인즉 달리周施하야 規定의千弗保證金이라도걸고 나를 꺼내내일생각이었었다고한다. 左思右度한끝에 나는택시를 잡어타고 朝鮮人敎會로 가자고했다. 布哇란本是 좁은바닥이라, 運轉手는 다시두말없이 機關을發動시키더니, 十分이 채못가서 어떤木造二層집앞에 車를멈추었다
在住牧師洪氏의厚意로 그宅에서 저녁을먹게되었는데, 純全한 朝鮮飮食을對하자 한편으로는 너무도意外에 놀래였고, 한편으로는 반갑기도하야 집떠난지 꼭二週日만에 처음으로 입에맞는飮食을 먹었던것이다. 食後에 李氏宅에電話를걸어서 나의住所를알리우자, 李氏夫妻는 곧自家用自働車를가지고 쫓아왔다. 그래서 李夫人의操縱으로車를몰아서 우리三人은 布哇港埠頭에나아가 그날밤에 米本州를向하야떠나는 朴, 李君을作別하고서는, 布哇名物(其實은米國名物)의하나인所謂『촵스이』란것을 먹으러갔다 『촵스이』란것은 一見廣東式料理를 米國化시킨것같았다. 그러나 勿論洋料理는아니오, 그렇다고 純中國料理도아닌만큼 『촵스이』란이름그대로 雜菜式이었다. 그때까지는몰랐지마는 나중에 米本州에가서 알고보니, 米國全土의 坊坊谷谷마다 中國人의 『촵스이하우스』가없는곳이없고, 또 그네들의商業이 어느곳에서나 殷盛됨을볼때에 大國民의根氣있는底力에는感心하지않을수없었다
李氏의周施으로 布哇滯留中은安元圭氏宅에 留하기로되어 넓고큼직한, 그러나혼자쓰기에는 몹시쓸쓸해보이는房을 차지하게되었다. 安氏夫人은 옛날梨花學堂出身으로 나의姊氏와 同窓인關係上, 나는그宅에서 마음便히 지낼수있었음은 대단히愉快했던것이다.
風浪은 그리 甚하지않었지마는 그래도 二六時中不絶히 動搖되는 船中生活을하다가 陸地에나려서 넓직한寢台에 몸을푹파묻고쉬게되니 前日에 들어오던바布哇가 地上天國이람은 나의寢台로부터 이미맛보는것같았다. 이튼날은 門밖에待令하고 기다리던李氏의自働車로布哇美術舘을 訪問하야 演奏會開催에關한일을 協定하고, 그길로 「와이키키」海濱에가서 散策하다가 李氏宅에서 저녁을먹은後, 밝는날日曜禮拜에『선』을보이기爲하야 敎會에가서 『바이올린』을 잠간맞훠보았다 伴奏者鄭愛英孃은 아직 高等學校學生임에도 不拘하고 布哇屈指의 『피아니스트』로, 年前에音樂競演會가 이곳에열렸을때 一等賞을獲得했다고한다.

호놀룰루의첫印象
「호놀룰루」의 첫印象은 愉快와幸福그것이었다. 都市에나서 都市에자라온나로서는 四時長春인이러한Openplace에 呼吸을하게될때 脫俗한仙人과도같은 淸淨한 氣分이 넘치었던것이다. 어디를가나 棕櫚의푸른 그늘이오, 路邊庭前의이름모를 寄花瑤草는 別有天地非人間을 實現시킨것이라고 밖에는생각되지않었다. 四季의區別이없고 『어름』과『눈』을 모르는나라인만큼 住宅은 거이全部가木造의 別莊式이어서 어디를가거나都會地같이 보이지않고, 오직 避暑地나遊園地같은感이났다. 茫茫한大洋中에 이러한樂土가 솟아있음은 奇蹟과도같았지마는 또다시 놀래인것은 어느집에나 自働車를가지지않은집이없다는것이다. 이적은都市에 人口는不過三十萬이라는데 八萬臺에가까운自働車가 晝夜의別이없이 東馳西走한다면 足히알어볼일이다. 美術舘에서 돌아오는길에 商店街를一巡해보았는데, 建物로보아서는하잘것없었지마는 그러나 實로整然한觀이있었다.
九日은日曜日이었다. 四方에서은연히들려오는 아침 鍾소리와함께잠을깨인나는 敎會에갈準備로 『모닝코-트』를입었다. 自働車는 勿論門밖에對合하고있었던것이다. 禮拜時間에 짤막한한曲調를 타서들린後, 李夫人의『뜨라이車』로 『촵스이』집을 다시찾어갔다가 뜻밖에거기서李承晩博士를 만나게되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二十餘年前에 내가 中學校다닐때에 李博士에게 工夫해본일이있었으므로, 반가히쫓아가서 人事를했다 李博士는 내가布哇에왔다는 말을들었던지는모르지마는 何如間 그는 나를 잘記憶하였고 나의兄의安否까지도물었다. 紅顔의靑春時代가 엇그제같것마는 老博士의머리에서는 거문털을 골으게된것을볼때에 多年海外風霜에 시달린痕跡이 曆曆히보였던것이다. 晝食後에 다시李夫人의能爛한『뜨라이브』로 이곳에서二十三마일되는「와히아와」村에가서그곳 우리同胞의敎會의 新築獻堂式에 叅席하였다가 紀念寫眞을찍고돌아온後, 卞牧師의招待로 李氏夫妻와함께 晩餐을가치하고, 밤에는敎會에가서「現下의朝鮮」이란題로約四十分동안 講演을했다. 이것이나에게는生後처음되는 處女講演이었던것은 勿論이다.
十日午前中에 美術舘을往訪하였다가 休日인까닭에 題鳳而歸하고그길로다시N·Y·K支店에가서 다음船便에 船室을豫約한後, 『촵스이』집으로가서 點心을먹고는 李氏와함께 僑民團本部로 李博士를徃訪하였다. 이날午後에 桑港으로부터 龍田丸이入港하였는데 그이튼날아침에 橫濱을向하야 出航한다는말을듣게되자 내自身이 그배를타고 집에가돌아가는듯이반가워서저녁때부터 쓰기시작한편지를 밤中까지써서, 故國있는 親知들에게布哇到着後의 第一信을띄우고서는 그이튼날부터는 演奏會에 關한準備와 練習에專心했다. 그까닭은十八日밤에 美術舘露天劇場에서 美術舘主催로 獨奏會를公開하기로決定했던것이다.

伴奏者스콕孃
海上에 떠있는동안에는 勿論흙냄세를맡을수가없으니까 無可奈何려니와 布哇에 나린後에도 흙냄세는 別로맡어보지도못하고드나나나自働車신세만지게되니, 인제는事實上흙냄새가그리웠고 두다리가비비틀리는것같았다. 그래서 이날저녁에는 아무에게도알리지않고 슬그머니혼자서 집을튀여나와서 商店街까지徒步로쏘다니며 「하와이」土産物도몇가지샀다. 이윽고 旅舍에돌아가보니 그곳 有志여러분은 오래前부터와서 나를기다리고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나의失踪에對하야 쓸작없는걱정까지도했다고하는말에 나는 未安도했지마는 그러나 心中에는 내가제법어느나라王族이나되는것같은 웃으운생각조차났던것이다.
十二日에는 李氏夫妻의 引導로 「하와이」知名의 人士를 歷訪하고 獨奏會伴奏를해줄 스콕孃을만나서樂譜를건니었다. 스콕孃은 市俄古音樂學校出身으로 훌륭한體格과美貌의 所有者이었다. 나는 本國있을때 가끔西洋女子와交際를해본일이있지마는 大槪는 宣敎師요또남의婦人이므로 異性間의 허물없는 交際라고는 어떻게하는지알길이없었다. 그러나 스콕孃을 처음으로 對할때에 그는 宣敎師도아니요 남의안해도아닌 一個의『피아니스트』요 處女였던만큼, 우리의對話에는 만나던첫날부터 아지못할一種의甘味가섞였던것이다. 至今이나그때나別差異는없지마는 그래도 그때의 나로서는 英語會話의不通을 얼마나괴로워하고 원통해했던지, 나는마치 원숭이흉내내듯이, 벙어리손짓하듯이, 別別짓을다해가며 애쓰던생각을하면 우숩기도하고 재미스럽기도하다. 스콕孃은 나더러담배먹고싶지않으냐고 數次나물었다 나는女子앞에서 그의諒解를 얻지않고 담배를피우는것이 失禮임을 알았던까닭에 事實上 먹고싶은담배를 못먹고있었던판이다. 그러나 묻지도않는말을 저편으로부터自進하야勸하듯이 말할때에, 나는 얼핏米國女子들은 담배를피운다는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담배匣을 끄내여가지고 그女子에게먼저勸하니까 그는 반가운얼굴로사양없이 한個를 입에물었다. 그때부터 나와그의談話는 훨신더自由롭게 되었던것이다.
밤에는 活動寫眞舘에 구경을갔다. 『토-키-』라는것을 보기도이번이처음이오, 『파잎오-갠』을들은것도 이날이처음이다. 서울이나동경에서 『토-키-』를못본것은 本是내自身이 活動寫眞보기를 질겨하지않은 罪려니와, 『파잎오-갠』만은 東京에서도듣고 구경할곳이없는것인만큼 그리고 그것이너무도 훌륭한이만큼, 나는 미칠듯이마음이躍動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생각난것은 나혼자서만 이러한훌륭한 音樂을듣는것이 몹시도아까웠었다. 劇場에서 돌아오던길에 『쏘-다파운텐』앞에 車를멈추고서, 女給이木板을 車우에걸처놓고 『아이스크림』을먹은것도 「하와이」가아니고는 갖어보지못할 한風景이었던것이다

朝鮮을잊은이들
十三日木曜에는 「푸나하우」音樂學校에가서 練習을한後, 李氏와함께當 地音樂家「뻬스트」氏를 往訪하였다 同氏는 布哇의有數한洋琴家요 古代樂聖의遺稿蒐集家로 有名한분이다. 그집에서 나는 「빡흐」 「헨텔」 「모차-ㄹ트」 「하이든」 「뻬-토벤」 「쇼팡」 「-스트」等百餘樂聖의筆蹟과 遺稿를 구경하고, 밤에는 卞牧師의 『뜨라이브』로 百餘마일을달려서 「코코카이」村에열린 夏期音樂學校學生의 修業演奏를 들으려갔다. 十餘年前에 布蛙에건너와서 音樂修業을하고있는 朴安得君을 만나보고 또그의演奏까지 듣게된것은 퍽으나반가웠다.
十六日은 내가布蛙에到着한後 둘재번의日曜日이었다. 亦是 四方에서울려오는 敎堂의아침鍾소리에잠을 깨인나는 이날의『푸로그람』을 多少準備해가지고 安氏夫妻, 李氏夫妻와共車하야 敎會로갔다 이날은 꽤도분주하게지냈다. 午前禮拜에는 「내가본朝鮮의將來」라는題로講演을하고, 閉會後에는 國民會本部의 午餐會에 叅席한後, 午後에는陸海軍Y·M·C·A主催音樂會에出演해주고 다시「푸나하우」에가서伴奏를맞후어본後 밤에는 國民會禮拜堂에가서 다시講演을했다 特別히 이날밤의講演은 그곳에서生長한 朝鮮靑年을 中心으로하고한것인데, 어느程度의感興이나 効益을 그들에게 주었을지는모르지마는 後에들으니朝鮮서처음오는 낯서투른사람의말을 이만큼이나 熱心으로 들은것도 稀貴한일이란말을듣고, 나는 心中에落望했다. 첫재 그들은 朝鮮을 배우고저하지않는것같았었다. 그들이 비록米國의市民權은 가젔을지라도 언제까지든지 머리털검고 눈알까만 黃人種이요 朝鮮人種이람은 꿈에도생각지않는것같았다. 甚히哀惜한일이다.

斷想의悲曲「告別의노래」
十八日, 布蛙美術舘主催로 仝舘露天劇場에서 午後七時四十五分부터첫번獨奏會가열리었다. 공교스럽게도 이날밤에는 비가부실부실나려서 雨傘을쓰고 椅子에앉어서듣는聽衆들이 나의눈에 퍽으나 奇異하게보였지마는 그러나 一曲一曲의演奏가 끝날적마다 그네들은熱心으로拍手하고 歡呼해 주었으며 또間間히 布蛙의風俗의하나인 꽃으로만든『목도리』를 걸어주는사람까지있어서 나는生後에 이날밤처럼感激하고 興奮된經驗은 다시없다고하리만치 得意自若했던것이다 『프로그람』最終에는, 내가京城서告別演奏會를 할때와같이 「告別의노래」를 演奏했다. 이樂曲은本是 「하와이」의代表民謠로 「하와이」가米國에倂合될때에 그當時「하와이」女王은 이노래를自作하야 사랑하는自己백성들에게 마지막作別로불러준것인만치, 이날밤 이곳에서 내가이曲調를 演奏할때에는 聽衆은몹시도感舊之懷에 쌓여있는것같았다
그러나 이「告別의노래」(原名alohaoe)는 그네들에게 있어서보다도내自身에있어서 한층더 斷膓의悲曲이었으니, 일직이내가서울서 K孃과사랑을 약속하고 지나던때에某蓄音機會社請託으로 提琴獨奏를 吹込하게된일이있었다. 그때 나는이곡조를編曲하야 K孃의伴奏로吹込한일이있었는데 이또한무슨因果인지 나는曲調에「告別의노래」란題目을부첬고, 나와 와는 이『레코-드』가發賣되던때부터 사랑의解消를宣言하게되었고, 더욱이나 그會社에서는曲目解說紙에 「마치사랑하는戀人과戀人이 서로헤여지는場面을탄식하는듯한悲曲」이란說明을 부첬었다. 勿論여기에는 아무豫感도 約束도없는일이것만도 이노래가K와나사이에 참말告別의노래가되었고, 錦榮이가 죽던날밤에도나는無心히 이노래를탔고 告別演奏會를하던날도마지막으로 눈물과함께이노래를演奏했거늘, 오늘이밤이자리에, 이노래의참말主人公되는 「하와이」民衆앞에서 또다시 이노래를타게된것은 至今생각해도 偶然같지않은偶然의일이라 아니할수없다

나는 二十一日에 淺間丸을타고 米本大陸으로向했다. 米國에 入國한後의일은 여기에더쓰지않지마는 나는 米國에간後부터 次次로맘속의 傷痕도고처지기始作하야, 至今에는 옛날과같은明朗性을 다시回復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多幸이랄지도 모를것이다. 何如間나에게있어서 斷膓의悲曲 「告別의 노래는 五年前八月十八日밤布蛙에서열린獨奏會때에 그노래의主人公들앞에서이것을돌려보낸後부터는여러해지고다니던 맘속에 重荷를풀어놓은듯한輕快味를 느끼게된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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