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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나례, 산대극의 관계를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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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처용무, 나례, 산대극의 관계를 논함 處容舞, 儺禮, 山臺劇의關係를論함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송석하 宋錫夏
출처정보 진단학보 震檀學報
연    도 1935-04 昭和十年四月
면    수 87 八七
기사
一, 緖 言
二, 文獻及論考와 이에對한 若干의批判
三, 處容舞와 山臺劇의 現實的比較
四, 處容舞 · 儺禮 · 山臺劇의 本質的考察
五, 結 言


朝鮮에는 演劇이 없다는것은 世間에서 흔이 말하는바로 事實 朝鮮에는 演劇이없었다. 따라 充分한 發達도 生長도 없었다. 그러나 筆者는 從來로 朝鮮에도 演劇이 있었다고 하여왔는데 이는 結局 다른 視度에서 그렇게 한말에 지나지 않는다.
演劇上의 朝鮮은 아즉 斧鉞을 드리지 않든 野生林이나 處女地라고 하겠다. 演劇이라는 樹木을 殖林할 사람이 없다느니 보다 차라리 어떤 그릇된 殖林家가 演劇樹의 殖林을 不必要한 까닭과 不好한肥料를 하얐으므로 野生이 그대로 存在하였다. 그리고 現在의 朝鮮의 演劇은 다른데서 苗木을 갖어온 改良種이 全盛이고 在來種은 그影子조차 감추어서 接부치 苗木만이라도 發見키가 어려웁게 되어있는 狀態라고 하겠다.
朝鮮의 演劇에는 現代 輸入演劇 以外에 在來의 그것으로는 偶人劇 ·假面劇等의 特殊演劇과 象徵的의 中國劇類似 (보다더 簡畧化한것) 의 倡調劇 (又는倡劇) 과 및 舞踊에서 發達된 無言劇 (黙劇) 等이있는데 本稿에서는 이들을 紹介하려는것이 目的이 않이며 다만 在來 있는 某種의 假面劇과 假面舞踊의 關係를 論하여 보려는것이 그目的이다.
演劇發生의 原因의 하나로 宗敎的原因을 드는것은 筆者亦是 肯定하는것이다. 宗敎的이라고 말하더래도 儀式과 關聯되여 있는것이 大部分이며 그儀式的原因中에도 두個의 相異한 觀念이 存在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即 하나는 儀式의 前(몬저)形態가 演劇으로서 演劇에서 儀式으로 發達한것과 또하나는 儀式의 方法인 演劇 다시말하면 演劇自體가 儀式이고 儀式自體가 演劇이란 二大別을 할수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宗敎的原因 좀더詳細하게말하면 儀式的動機에 因한 演劇發生의 例는 朝鮮의 假面劇에서도 發見할수있는 것이나 (唯獨朝鮮뿐만아니다)(一) 이런 觀念的分類에 關해서는 他日에 考察하려고 하는것이다.
朝鮮의 假面劇 乃至 演劇的色彩가있는 假面舞踊은 新羅時代로부터 高麗時代까지에 五戱 (五伎) · 舞劍戱 · 處容舞 · 無㝵等이 있고 高麗朝中葉以後로 現代에 亘해서는 中部朝鮮의 山臺劇, 黃海道鳳山을 中心으로한 탈춤, 南鮮의 慶尙南道 海岸地方을 中心으로하야 發達한 五廣大노름 及 野遊等이 있어 이에對한 簡單한 紹介와 考察은 前에 他에 했음으로(二) 이제 重複을 避하는것이나 그中 二三을 除한外에는 자못 宗敎的 特히 儀式的 方面에서 發生하였다고하겠다. 그러나 演劇과 儀式의 關係에 對한 考察은 前言과같이 割愛하기로하고 오로지 處容舞와 山臺劇과의 關係만에 對하야 畧述코저한다.
處容舞는 高麗朝末期의 諸詩人의 題詠에서든지 또는 樂學軌範及其他文献으로 因하야 알려진 假面舞踊으로 演劇的色彩의 濃厚한것이었으나 體系있는 演劇에까지는 發達치 못한것으로 一部識者가 말함과같이 處容舞는 山臺假面劇의 同體異稱이라 함은 全然 承服치못하겠으며 但或 山臺劇自體가 舞踊을 多分히 包含한 關係上 그影響을 바든것은 免치못하얐으리라 하는것이면 이에는 首肯할 點이 없다고 하지를 않겠노라.

(一)西藏의 「하모」劇, 蒙古의假面劇 其他太平洋諸島의 그것等 其類例가 頗多하나 一々히 列擧치 아니하며 比較的 詳細하게 考察한 著書에 The Drama of Savage peop'e by L. Havenmayer 가있다. 또西藏의 儺系假面劇에 關하여는 W. D. Hambly 의著 Tribal Dancing and Social Development 參照
(二)「朝鮮の人形芝居」(人形芝居硏究-昭和四年-東京). 「朝鮮の民俗劇」(民俗學第四卷第八號-東京).
「五廣大小考」(朝鮮民俗第一號-京城). 「朴僉知劇に對する數三考察」(季刋人形芝居第四號-京都).
「朝鮮演劇」(平凡社大百科事典十七卷-東京). 「鳳山舞用假面」(東亞日報昭和八年十二月).
「南朝鮮假面劇復興氣運」(東亞日報昭和九年四月). 「沙里院民俗舞踊に就いて」(ドルメン第二卷第九號-東京). 等各拙稿參照



處容舞가 如何한 由來를 가젓는가를 말하기前에 世間에 흔이 引用되는 三國遺事의 處容郞條와 樂學軌範의 處容舞의 兩古文獻과 한個의 現代 論文을 冗煩하지마는 轉錄하야서 讀者의 便宜를 돕고 다시 그에 對한 若干의 批判을 하여볼가한다.

○三國遺事 卷第二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 在鶴城西 南今蔚州 王將還駕, 盡歇於汀邊, 忽雲霧冥噎, 迷失道路, 恠問左右, 日官秦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爲龍刱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得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鳥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畵公之形容, 不入其門矣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右文中에, 新羅의 吏讀文字로 쓰인 鄕歌가 있는데 이解讀을 試한 學者는 金澤庄三郞博士(一), 申釆浩氏(二) 鮎貝房之進氏(三), 小倉進平博士(四)等인데 그中小倉敎授의 對照譯을 擧하면 다음과 같다 (近間에 梁柱東氏의 未發表한 譯文이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採錄치 못함을 遺憾으로 생각한다)

第十六 處 容 歌

東京은에
東京明期月良

밤들어노너다가
夜入伊遊行如可

들어사자리에보곤
入良沙寢矣見昆

가이네히러라
脚烏伊四是良羅

둘은나이엇고
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누이언고
二肹隱誰支下焉古

믿이내이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앗어늘엇디리잇고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樂學軌範卷之五 (依太白山本)

鶴蓮花臺 處容舞合設
初入排列圖

引 北 引
人 白 黑 黃 紅 靑 人
仗 處 處 處 處 處 仗
舞 容 容 容 容 容 舞
童, 童

花 燈 花
旋 白 旋
節 蓮 蓮 靑 節
舞 筒 筒 鶴 舞
童 鶴 童
花 花 花 花 花

盖 花 花 花 花 盖
舞 舞 舞 舞 舞 舞
童 童 童 童 童 童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妓


牙 大 唐 唐 唐 銅 玄 伽 鄕 唐 ■
琵 琵 琵 耶 琵 琵
箏 箏 琶 琶 琶 鈸 琴 琴 琶 琶 琴

洞 唐 觱觱 觱 杖 方 玄 伽 鄕 月月 ■
耶 琵
簫 笛 篥篥 篥 鼓 響 琴 琴 琶 琴琴 琴

唐 杖 杖 杖 敎 大 大 大 大 大 大
笛 鼓 鼓 鼓 坊 鼓 笒 笒 笒 笒 笒






五方作隊圖


黑北


舞 舞 舞
白西 黃中 靑東



赤南

始終回舞圖

人仗旌節■女妓拍■篥唐笛洞■唐琵琶大笒鄕琵琶■琴杖鼓玄琴伽倻琴月琴方■牙箏大箏敎坊鼓銅鈸靑白■靑紅黃黑白處容引人仗旌節■執花舞引(위에서 반시계방향으로 원을 구성)

十二月晦前一日更初, 樂師女妓樂工等詣闕, 是日儺禮時, 樂師率妓工奏樂, 至驅儺後, 設池塘具於內庭, 樂師率兩童女, 以入坐於蓮花中而出以待節次, 凡驅儺後, 處容舞二度, 前度則無鶴蓮花臺回舞等事, 樂師執銅鈸, 導靑紅黃黑白五方處容及女妓執拍, 樂師鄕樂工奏處容慢機即鳳凰吟一樓女妓唱處容歌, 前腔新羅盛代昭盛代天下大平羅候德處容아바以是人生애相不語하시란대附葉三災八難이一時消滅하샷다中葉어와이뵈즈이여處容아븨즈이여附葉滿頭揷花계오샤기울어신머리에小葉아으壽命長願하샤넙거신니마해後腔山象이숫깅어신눈닙에愛人相見하샤오은어신누네附葉風入盈庭하샤우글어신귀예中葉紅桃花가티붉거신모야해附葉五香마샤웅긔어신고해小葉아으千金머그샤어위어신이베大葉白玉琉璃가티해여신닛바래人讃福盛샤미나거신에七寶계우샤숙거신엇게예吉慶계우샤늘의어신맷길헤附葉설믜모도와有德신가매中葉福智俱足하샤브르거신배예紅鞓계우샤굽거신허리예附葉同樂大平샤길이신허튀예小葉아으界面도샤넙거신바래前腔누고지어셰니오누고지어셰니오바늘도실도어바늘도실도어附葉處容아비누고지어셰니오中葉마아만만아만니여附葉十二諸國이모다지어셰온小葉아으處容아비랸마아만하니여後腔머자외야자綠李야리나내신고매야라附葉아니옷매시면나리어다머즌말中葉東京발다래새도록노니다가附葉드러내자리보니가라리네히로섀라小葉아으둘흔내해어니와둘흔뉘해어니오大葉이런저긔處容아비옷보시면熱痛神이아膾ㅅ가시로다千金을주리여處容아바七寶를주리여處容아바附葉千金七寶도말오熱病神를날자바주쇼셔中葉山이여매히여千里外예附葉處容아비랄어여려거져小葉아으熱病大神의發願이샷다. 以次入如圖排立, 樂至中葉, 杖皷擊鞭, 處容五者皆俯腰, 而並擧兩袖(凡舞始作擊杖鼓鞭而並俯腰而舉兩手後倣此)下置膝上, 靑紅者回顧相面, 黃者回顧而, 東黑白者回顧相面, 訖還北向, 擊杖皷皷面, 並舉而兩袖而落(무릅디피舞○隨手而皆舉足靑紅黑白者並先舉內足黃者先舉右足○內謂兩人間也東立者左爲內西立者右爲內後倣此○凡舞終舉並還北向撀杖鼓鼓面舉兩手而落後倣此○凡舞一從黃者之舞唯左右手足各異用之耳後此倣此)擊鞭, 靑紅者回顧相背, 黃者回顧而西, 黑白者回顧相背訖(随手而皆舉足靑紅黑白者並先舉外足黃者先舉左足○東立者右爲外西出者左爲外後倣此) 擊鞭, 如上儀舞訖(相面二度相背二度凡四度也) 擊鞭, 靑紅黑白者, 並舞手而內挟, 黃者舞手而右挟(黃者無耦故稱左右後倣此) 並舞手而換挟訖(靑紅黑白者並外挾黃者左挾○紅程 돔듬 舞) 擊鞭, 五者舞進(바딧舞 ○靑紅黑白者並內足先進黃者右足先進) 於顧庭正中, 齊行北向而立訖, 擊鞭, 黃者東向而舞(人舞○左手先舉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並西向而舞並右手先舉左右手皆兩度 訖, 擊鞭 黃者西向而舞(人舞○右手先舉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並東向而舞(左手先舉左右手皆兩度) 訖, 擊鞭, 紅者舞退, 立於南方右足先退黑者舞進, 立於北方(左足先進) 靑黃白者, 無立於其位(黃者中央靑者東方白者西方○바디作隊舞)訖,擊鞭,黃者北向而舞(右手先舉左右手皆兩度○垂楊手무룹디피舞) 靑紅黑白者, 舞向中央對舞並左手先舉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 背中央 各向其方而舞(並左手先舉左右手皆兩度) 訖, 擊鞭, 黃者北向而舞(右手先舉左右手皆兩度向他方倣此○垂楊手五方舞四方同) 黑者向中央對舞(左手先舉左右手皆兩度第四手擊初鞭靑者舞作擊後鼓黑者落手他方倣此) 樂漸數則,奏鳳凰吟中機, 妓唱其歌(歌詞省略)三方立者, 隨樂節, 舉袖而落(隨手而皆舉足他方倣此) 黃者東向而舞 靑者向中央對舞, 黃者南向而舞, 紅者向中央對舞, 黃者西向而舞, 白者向中央對舞, 訖 擊鞭, 黃者不出其方, 周旋而舞左旋○右手先舉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 並不出其方, 一時向中央而舞(並左手先舉左右手皆兩度) 又不出其方, 周旋而舞(右旋○並左右手皆兩度) 訖回舞 左旋○黑者先出 三匝各還立其方, 北向而舞, 擊鞭, 黑者舞退 (左足先退 紅者舞進右足先進) 五者齊行而舞, 樂漸數則奏鳳凰吟急機, 連奏三眞勺, 妓唱其歌(歌詞省略) 黃者仍立而舞, 靑紅黑白者舞退, 齊行而舞(左右手皆兩度或一度) 黃者舞退, 靑白者舞進, 舞退, 紅黑者舞進, 舞退, 訖, 五者齊行而舞, 樂奏井邑急機, 妓唱其歌(註略)五者變舞井邑舞 仍奏北殿急機, 妓唱其歌(歌詞省略)五者舞出(懽場舞) 女妓樂師樂工, 以次而出, 樂止, 又至後度, 備陳鶴蓮花臺 · 儀物等具, 執銅鈸樂師先導, 靑白鶴次之, 靑紅黃黑白處容次之, 引人仗 · 旋節 · 蓋(引人仗旋節蓋兩伴一伴立於舉花之次) 奉花舞
童次之, 女妓次之, 執拍樂師, 鄕唐樂工各以次隨之, 樂奏靈山會相慢, 妓工齊聲唱詞靈山會相佛菩薩以入回旋左旋 三匝以次如圖排立, 擊拍擊大皷, 奏靈山會相令, 樂漸數, 五方處容足蹈歡舞, 女妓樂工及執儀物假面舞童等, 亦從而足蹈搖身極歡, 訖, 樂止五方處容小退左右分立 樂奏步虛子令, 擊拍, 靑白鶴如譜進退而舞, 啄蓮花, 兩童女乃出, 兩鶴驚躍而退, 樂止 還立於初位, 兩童女下池塘, 齊行而立, 呈才如儀, 訖, 又奏處容慢機女妓唱處容歌 五方處容復立前位, 容作一如上儀, 訖, 樂止 奏彌弛讃, 女妓二人導唱西方大敎主南無阿彌陀佛 諸妓齊聲和(註省略), 如前回旋(註省略), 至本師讃(註省略), 觀音讃(註省略),並如上導唱和之至觀音讃諸妓齊聲唱歌(歌詞省略), 以次而出, 樂止, 乃訖,(讀點은筆者가附함)

○安 廓 氏 論 文 大 意

處容舞와 山臺劇에 關해서 現代的考察를 試한 學者는 安廓氏一人뿐이라고하겠다. 同氏는 雜誌「朝鮮」(昭和七年二月)에 「山臺戯と處容舞と儺」라고 題한 論考에서 大畧 處容舞는 驅儺儀(五)에서 發達하야 山臺都監이라는 別名을 가젓다고 보았으나 이에는 承服하지 못하겠다. 處容舞가 儺儀와 同一한 觀念인것은 大體로 肯定하는것이나 處容舞와 山臺都監노름이 同種異名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것이다. 以下同氏의 論考를 좀더 昭細하게 檢討하면 氏는(但原鮮譯)
「李朝時代에있어 假面戱라는것은 處容舞와 山臺戱와의 둘밖에없다. 이 둘은 當代의 創 造가아니고 前代의것을 利用해서 小規模로서는 處容舞로 大規模로서는 山臺戱로 된것같다. 그러므로 處容舞와 山臺戱와는 分立視할수없고 同一視할것이다. 高麗當時에도 이 兩者는 分離하지아니하고 同一物인것같이 稱하여왔다. 이것은 高麗李穡의 牧隱集에 山臺雜劇이란 題下에 이런 詩가 보인다.
山臺結綴似蓬萊 獻果仙人海上來
雜類皷鉦轟地動 處容衫袖逐風廻
長竿倚漢九平地 爆火働天似疾雷
欲寫太平眞氣像 老臣簪筆愧非才.
여기에서 山臺劇이람과 또詩의 內容에 處容舞를 說明한것을 볼진데 山臺劇이 即 處容舞 인것이 明白하다. 勿論 高麗時代에도 本來 두가지것을 山臺劇에 合作하엿든것인지는모르 나 山臺劇이란 內容에 處容舞가 主張된것은 事實이 되어왔다………이와같이 處容과 山臺 와는 同一한것인것이 確實한 同時에 處容舞에 由하야 山臺戱의 根據를 探考할 端緖가 發 見된다」(九○-九一頁)
라고 말하였다. 군데군데 意味不通한데도 있으나 要約하면 處容舞와 山臺戱 둘밖에 없는 假面戱는 同一한것이라고함이다. 그리고 同氏는 三國遺事의 處容郞條全文을들고 다시 高麗時代에 이說話에依하야 「劇詩로 化해서 一種의 舞劇이 演出햇다」라고하고 樂學軌範 · 稼亭의開雲浦詩(六) · 益齊의小樂府(七) · 陶隱의處容歌等(八)의 文獻을 들어서 高麗時代의 所謂舞劇이 盛함을 證明하고 다시 나아가 處容은 「日蝕神의星」이라하야 樂學軌範 · 東國歲時記上元條 · 佛書宿曜經 · 大日經䟽 · 聿斯經等으로서 立證하였다. 또 後漢書卷十五先臘條(文省略) 와 其外 李穡의 驅儺行
天地之動何冥々 有善有惡紛流船
或爲禎祥或妖蘗 雜糅豈得人心寧
辟除邪惡古有禮 十有二神恒赮靈
國家大置屛障房 歲々掌行淸內庭
黃門侲子群相連 掃去不祥如迅霆
司平有府備巡警 烈士成林皆五丁
忠義所激代屛障 畢陳恠詭趨群伶
舞五方鬼踊白澤 吐出回祿呑靑萍
金天之精有古月 或黑或黃目靑熒
其中老者傴面長 衆共警嗟南極星
江南買客語侏離 進退輕捷風中螢
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
低回長袖舞太平 醉臉爛赤猶未醒
黃犬踏碓龍爭珠 蹌々百獸如堯庭
과 三國史記樂志에있는 崔致遠의 鄕樂雜咏五首中의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趨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을 들어 「이黃金面은 儺儀의 方相氏 黃金四目과같고 手抱珠鞭役鬼神은 疫神을 驅逐하는 形態의 描寫임으로 儺는 三國時代에 新羅에 入하야 處容舞가되고 處容舞는 山臺가되엿다고 論하고 또 如左히 附添하였다.
「上述함과같이 山臺戱는 單純한것이아니고 頗히 複雜한것으로 全然 儺儀로 成立한것이라고 못한다. 即 百戱는 主로 儺戱를 行하야 後日에 至하야는 百戱라는 名稱을 잊고 다만 儺라고 稱하고 一名 山臺戱라고 하여왓다. 虛白集(九)에있는 觀儺詩에도
秘殿春光泛彩棚 朱衣畵袴亂縱橫
弄丸眞似宜僚巧 步素還同飛燕輕
라고하야 儺儀에도 여러가지 雜劇 (所謂百戱)을 行하여왔다. 即 山臺戱는 變體的의 儺儀 를 主로한 百戱인 것을 斷言한다」
라고하였으나 前後의 論旨에 矛盾이있고 把握하기 어려운 要領이나 結局 山臺戱는 儺儀로부터가 아니고 百戱가 唐代에 新羅에 流入하야 그百戱에서 儺가生하고 그것이 一名山臺戱인 同時에 또한 變態的儺戱라고 하였으나 不得要領도 甚하다.
如斯히 安氏의 論考는 말하려는것이 那邊에있는지 大端不分明함을 遺憾으로 생각한다. 李穡의 山臺雜劇詩에만 依하야 山臺劇과 處容舞가 同一하다고함은 早計라고하겠다. 차라리 筆者는 驅儺를 根源으로하야 全然別個로 發達한 別種類라고 보고싶다. 山臺問題에 關해서는 本稿에 後述할것이나 筆者는 李穡의 말한 山臺雜劇은 安氏도얼마간 言及함과같이 槪括的의 넓은 意味로 解釋해서 所謂 「百戱各般」을 指稱한것이라고 본다. 恰似히 曲馬團의 名稱下에 曲馬 ·妖術 · 曲藝 · 레뷰 ·코메디等을 包含한것 같지나 않는가한다. 現在「社堂패」(一○)의 名稱下에 演劇 · 舞踊 · 歌曲 · 땅才操 · 동굴이 其他를 하는것과 같다. 그러므로 筆者는 도로혀 牧隱의 驅儺行과 虛白堂의 觀儺詩에 依하야 處容舞의 別名이 山臺劇이 아니고 驅儺의 戱化한것이 (名稱은依然히驅儺禮라고하고 山臺雜劇인것 같다. 牧隱의 詩에 對하야 安氏는 그全部가 處容舞의 描寫인줄 안것같으나 實은 處容舞의 描寫는 「處容衫袖逐風廻」뿐이고 他의 「長竿倚漢九平地」는 대광대 (竹廣大) 를 말함이요 「爆火働地似疾雷」는 爆竹又는 花火를 指稱한것이라고 보겠다. 또 臆測을 許容한다면 「山臺結綴似蓬萊」는 舞臺를 山에 設置한 模樣이라고 하고싶다.
安氏가 말하는 稼亭의 開雲浦詩 益齊의 小樂府 陶隱의 處容歌等은 高麗時代의 舞劇의 盛大함을 證明한다 느니보다도 處容舞及處容歌의 一端을 叙述함에 지나지않는다고하겠다. 即 處容歌는 新羅時代로부터 存在하였다는것을 말할따름이다.
牧隱의 驅儺行에있어도 「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 低回長袖舞太平」은 處容舞를 描寫한것인지 모르나 「醉臉爛赤猶未醒, 黃犬踏碓龍爭珠, 蹌蹌百獸如堯庭」은 明白히 다른 구경꺼리를 指稱한것이다.
虛白堂의 觀儺詩를 檢討하더래도 「秘殿春光泛彩棚」은 구경꺼리 全景을 描寫하고 「朱衣畵袴亂縱橫」은 舞踊의 描寫이나 處容舞를 指稱한것인지 不明하며 (이衣裝은많음) 「弄丸眞似宜僚巧」는 隋唐에 盛行한 西域系統의 雜戱와 同一한것이아닌가하며 「步素還同飛燕輕」은 줄타기를 가르치고 「小室四旁藏傀儡」는 偶人劇의 舞臺를 말한것이며 (人形芝居 第四號所載拙稿參照) 「長竽百尺舞壼觥」은 대광대의 曲藝를 指稱한것으로 安氏의 말과 같이 驅儺 (戱化) 에 百戱各般이 包含된것은 事實이라고 하겠으나 處容舞가 山臺劇이란 例證는 되지않는다.


(一)金澤庄三郞 「吏讀の硏究」(朝鮮彙報, 大正七年四月)
(二)申釆浩 「朝鮮古來의文字와詩歌의變遷」(東亞日報, 大正十四年一月)
(三)鮎貝房之進「國文(方言俗字) 吏吐·俗證造字·俗音·借訓字」(朝鮮史講座自第一號至第三號-京城).
(四)小倉進平「鄕歌及吏讀の硏究」(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紀要第一號)
(五)鬼神쫓는儀式, 儺, 難, 大儺, 追儺, 驅儺, 驅儺儀, 儺儀, 儺禮, 驅儺禮等各樣을쓰나, 本稿에는區分을하지않음. 또綵棚儺儀, 彩棚儺禮, 歲時儺禮라는것이 文獻에보이고 民間에서는 山臺劇을 儺藝라고도한다. 그런데 文獻에 儀式인 정말의 儺禮와 戱化한演劇인 儺禮를 區別하지 아니함이많고 安廓氏亦是襲用하였음으로 筆者 또한 不用意하게도 再襲用한데가 있을는지모르나 이는 讀者가 推想하면 自解할것이다.
(六)稼亭先生文集卷之二十 十二丁 開雲浦詩에「地勝仙遊密, 雲開世路通, 依俙羅代兩仙翁, 曾見畵圖中, 舞月娑娑白, 簪花爛爛紅, 欲尋遺跡沓, 難窮須喚半帆風」이라고하얏다.
(七)李齊賢益齊集 益齊亂藁四小樂府에 「新羅昔日處容翁, 見說來從碧海中, 具齒頳唇歌夜月, 蔦肩紫袖舞春風」이라고함.
(八)李崇仁陶隱集에 處容歌라고 題하야 「十一月十七日夜, 聽功益新羅處容歌, 聲調悲壯, 令人有感」이라하고 또 「夜久新羅曲停盃共聽之, 聲音傳舊譜, 氣像想當時, 落日城頭近, 悲風樹梢嘶, 無端懷抱惡, 功益亦何爲」라함.
(九)成俔虛,白堂詩集卷之七觀儺詩.
(十)社堂은 社黨 · 祀黨 · 社長 · 等으로도쓰며 萍草行旅를하는 藝人으로 男社堂·女社堂의別이有함. 表面은 假面劇, 人形劇, 俗謠, 舞踊, 曲藝를하나 그裏面은 머슴階級을 相對로 賣春(男子는鷄姦)을하는 團體로 그根源은 相當히 오랜것같으며 近代에와서는 寺刹이이를 利用하게되어 寺奴의 觀을 呈하였는데 安城靑龍寺社堂 及南海 花芳寺중매구가 다그例다. 그래서 이를 引率하는居士 · 모갑 (某甲이라고普通借字한다) 이와 社堂間에는 複雜한 關係를 形成하야 社會學上으로 參考할만한 點이많다. 그리고 男社堂의 鷄姦에있어는 印度支那의 네이 (ney)와 恰似하며 全體로 보아서는 平安朝當時이 日本傀儡子와同하다고 하겠다. 即 大江匡房의 「日本傀儡子記」에 「傀儡子, 無定居無常家, 穹廬氈帳, 逐水草以移徙, 頗類北狄之俗, 男則皆便弓馬, 以狩獵爲事, 或跳雙劍弄七丸, 或舞木人……女則爲愁眉, 啼粧折腰步齲慈咲, 施朱傅粉, 倡歌淫樂, 以求妖媚, 父母夫胥不誡, 口亟雖逢行人旅客, 不嫌一宵之佳會, 微嬖女之餘, 自獻千金, 繡服錦衣, 金釵鈿匧之具, 莫不悉有之不耕一畝田, 不採一技桑, 故不屬縣官, 皆非土民, 自限浪人, 上不知三公, 傍不怕牧宰, 以無課役, 爲一生之樂, 夜則祭百神鼓舞喧嘩, 以祈福助, 東國, 美濃……云云」이라고 하야 朝鮮의 社堂하고 同一함을 알겠으며 또그것이 北方俗하고 類似함을 알겟는데 그後日本서는 此語를 專혀 木偶에만 使用하야 クミツ 라고發音한다. 그리하야 學者中에는 朝鮮의 廣大가 日本語クミツ의 原語라고하는 이도있는데 그는專혀 中宗朝人崔世珍의 訓蒙字會中에 있는傀字發音광대괴와 儡字發音광대애 依하얏다. 그러나 이에承服하기 難하며 우리의 薄倖한 學者 金在喆氏의著「朝鮮演劇史」中에 引用한 郭秃說이有力할 것이다. 그리고 崔世珍의 訓字에 注意할것은 同書儡字註에 「傀儡假面戱俗呼鬼臉兒」라하야傀儡戱와假面戱하고는 同一한것같이말하얏는데 이또한 一理가있고 考究할點도있다. 다만種別的으로 傀儡戱와 假面戱가 同一하다고 보얏다면 全然不可한것으로서 訓蒙字會가 發刊된 嘉靖六年四月(中宗二十二年)보다約四十年前成俔의 虛白堂集卷之七의 前出觀儺詩中에있는「小室四旁藏傀儡」를보든지 又同書卷之十四 觀傀儡雜戱詩 「煌煌金帶燿朱衣, 跟絓投身條似飛, 走素弄丸多巧術, 穿絲刻木逞神機, 宋家郭秃奚專美, 漢祖平城可解圍, 爲敬朝廷陳縟禮, 皇華眼大定嘲譏」를보면 (이는大略世祖七年壬午年作으로推想됨) 人形劇을指함을알겟다. 다만 「走素弄丸多巧術」까지가 意味不分明하나 이는두가지로 解釋할수있는데其一은 「줄타기」,其二는 「마리오넷트」(marrionette) 中의一技術로볼것이나 其如何를 不問하고 後句를보아人形劇임은틀님없으며 이것을 民間傳承上으로보아 只今도 人形劇, 簡單한假面劇, 땅才操, 줄타기를總稱하는 民俗藝術을 民間에서 稱하기를 朴僉知노름, 洪同知노름, 꼭두각씨노름, 山頭朴僉知노름, 社堂패노름이라고함을보아 斟酌할수있다. 그러면社堂의 그것하고 이民俗藝術하고와 相異한點인데 普通의區別로서는 前者는賣春을 主로한 不級의 그것이오 後者는 賣春도하지만 比較的規模를 크게한 技術은 主로한團體로서 廣大가 普通이것을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崔世珍의 錯誤도 이에서 出發한것이라고 보겟다. 그리고보면 日本傀儡子記 에보이는 傀儡子하고社堂하고 그形態機能에잇어 같고 人形 을 意味한 クミツ는 朝鮮의傀儡戱에 相當하고 朝鮮서 傀儡雜戱라고하는데는 山臺雜劇, 綵棚儺禮同樣, 다른 노름도 包含됨을알겟다. 그러나 이는다시局外者의 認識不足에 因한錯誤요 그自體에는 儼然한 區別이 存在하였을것이다.



도리켜 宮中의 處容舞 (樂學軌範에依함. 民間에서는 前에慶州에서 老妓映月이를 主로하야 處容舞의 復興을 圖하얏으나 未幾에 廢止되고 그舞法亦是 宮中式에 依하였다 하며 李氏朝初期에 宮中式으로 變更하기前의 形態그대로 民間에 傳承된것은없다) 와 現代山臺劇을 現實的方面으로 그類似點과 相異點을 對照比較하야 兩者間의 關係를 考察闡明하여 보겠노라.
其一은 觀念上으로볼때 (後述參照) 處容說話의 發生綠起는 僻邪進慶의 思想에서 綠由된것으로 處容이 外出하였다가 歸家하야 그戀敵을 爲하야 舞踊을 한것이라든지 門前에 畵像을 붙이므로서 僻邪의目的을 達成하는 것이라든지 또 그舞踊에 있어도 五行思想의 五方處容 (民間信仰에 있어서 五方神將은 惡鬼邪神을 退治하는 힘을 가젓다고 믿는다) 이 假面을 쓰고 舞踊을 하는것은 다僻邪觀念에서 우러나온것이다. 이에對하여 現代山臺劇도 그 第一科場(一) 四方神告祀舞(兩人舞) 에 邪神을 驅逐하는 舞踊이있다. 이들은 積極消極의 差는 있으나 그蒙利에는 全然同一하다. (海西地方 탈춤에는 四上佐舞 南鮮地方의 五廣大假面劇의 五神將舞가 同一한 觀念이다)
其二에 그들에 쓰이는 音曲及 歌謠를 比較하여보면 處容舞에는 新羅時代로부터 傳한것이라고 볼만한 處容歌를 最初에는 緩調로 (處容慢機即鳳凰吟一機)(二) 다음에는 얼마간 急調(鳳凰吟中機)인「山河千里………」를 唱하고 다시 急調(鳳凰吟急機) 로 나아가 「내님을따라서……」를 唱하고 最後에 眞勺 · 井邑急機 · 北殿急機를 奏하야 前半을 맡이고 後半에 드러가서는 靈山會相慢 · 靈山會相令 · 步虛子 · 處容慢機로 漸次 彌陀讃, 本師讃, 觀音讃等의 佛菩薩頌德歌謠로 넘아가는것이나 一方 山臺劇은 最初의 四方神告祀舞에 念佛打令 (俗曲) 의 伴奏로서하고 그外에는 念佛打令, 굿거리 等으로하며 노래도 短歌調 · 俗謠를 하는것은 할수없다 하더래도 歌詞에 至하야도 前者와 共通된것이 全然없다.
第三에 舞踊上으로 이것을 볼것같으면 處容舞 (第一圖及第二圖參照) 의 踊型으로(動作的種別) 樂學軌範에 「埀楊手 무룹디피舞」(정강이를 올니면서 몸을左右로 흔드는춤) · 「발바딧舞」(발을쾅쾅굴니는춤), 「紅程도돔舞」(蛇行形으로가면서추는춤) 及 其外에「人舞」·「埀楊手五方舞」等이 보이고 山臺劇에는「돌단舞」(삥삥돌면서 추는것 · 「곱사위舞」(杖皷의 앞에서 뒷거럼질하면서 추는춤) 「화장舞」(風物앞에서 두팔을 번가러 억게까지 올렸다나리는춤) · 「여다지舞」(곱사위舞를하고 두팔를 順次로 돌니면서 삿태다 (胯間) 박고 다시 그것을 한목 앞으로 내밀어 左右로 벌니고 杖皷에 向하야 나아가면서 추는것 (第四圖參照) 「멍석마리춤」(杖皷에 向해서 멍석을 마는 形容을하면서 舞進하는것) 等인데 處容舞의 各型은 山臺劇의 如何한 型에도 該當하는 것이없어 舞踊的立場으로는 全然類似點을 發見할수 없다.
其四 造型美術上으로 比較하면 假面의 形態에잇서 處容假面 (第三圖參照) 과같은 假面은 山臺假面 (第九圖參照) 에는 類似한것이 하나도없고 南鮮假面劇의 大宗인 五廣大劇 (例晉州·統營·金海駕洛) 假面 (第七, 八, 十, 十一圖參照) 及野遊劇假面 (第五圖參照) 에도 類似한것이없고 山臺劇의 最後의 系統인 鳳山탈춤 假面(第六圖參照)에 稍類似品이 있으나 이類似的關係는 그根據가 甚히 薄弱하다 即그面의 隆起程度가 近似할 따름이요 容貌는 조곰도 같지않다. 이러므로 全然同一系統이라고 할수없고 製作材料上으로 보더래도 處容假面은 苧布로만들고 (絶種後에 李王職에서 推象的으로 製作한 新品은 紙製) 山臺假面은 木製 · 瓠製이며 (間或 後述할 鳳山式 紙製品이有함 鳳山의 假面은 紙製品 부해서 型梓에넛는다) 이고 晉州五廣大假面은 紙製 (平面에그린것, 但瓠製도有함) 로서 材料如何는 그系統에는 別노問題될 것도 없지마는 相異한것마는 事實이다. 그리고 益齊의 小樂府에 보이는「貝齒頳唇」은 現存한 어떤 假面에도 發見하지 못하겠고 名稱上으로도 同一 又는 類似한것이, 없다.
其五 文獻的으로는 別述함과 같으므로 重複의 徒勞를 다시 않겟다.
叙上함과같이 宮中의 處容舞와 現代의 山臺劇間에는 僻邪觀念에있어 共通點을 가지나 이것은 後述함과같이 處容舞와 山臺劇이 同一이란 例證이 되지를않고 他點인 造形美術上, 舞踊動作上, 音曲歌謠上 (註와 같이 部分的으로 共通한것은있다) 의 相異點으로 觀之하면 處容舞가 山臺劇이라고 斷定함에는 너무나 不利한 資料라고 아니할수없다.)


(一)科場問題에關해서는 「季刋人形芝居」(第四號京都) 所收 拙稿 「朴僉知劇に對する數三考察」 參照. 科場을幕, 場. 景等으로譯하나 다穩當치못하며 朝鮮民俗劇의 科場은一種 獨特한 것이다.
(二)鳳凰吟은 李期世宗때 歌詞를 改撰해서 廟廷의正樂으로한것인데 世祖代에이르러 改題하야 合奏樂으로 만든것이며 그關係는 左表와如함.

曲名(管分) 俗名 稱號 曲數 曲名(絃分) 摘要 備考
鳳凰吟 井邑 曲 一 X 壽齊天, 昇萬平歲, 壽廷長, 表正萬方의繼 X
壽齊天 井邑 曲 三 X 을녀부는井邑 X
動動 井邑 曲 二 X 細歌樂(세가락)井邑 X
昇平萬歲之曲 與民樂 曲 七 X 五雲開端朝 X
壽廷長之曲 尾還入 曲 七 X 賀聖朝尾還入(디도드리) X
表正萬方之曲 靈山會相 曲 八 重光之曲 管樂靈山會相 **
長春不老之曲 步虛子 曲 七 黃河淸之曲 X X
北殿 X 曲 一 X X X
眞勺 X 曲 四 X X X

** 靈山會相管分에는 上靈山, 中靈山, 細靈山, 加樂除只, 三絃還入 (上絃) 念佛還入,打令, 軍樂의 八曲의 組合曲이며, 絃分은俗間의 「줄풍류」로三絃還入及念佛還入之間에下絃이入하야九曲의組合曲이된다.



處容이라함은 前揭文獻과같이 新羅第四十九代의 憲康王이 現今의 慶尙南道 蔚山郡大峴面 細竹浦(處容岩은溫山面處容里에在)인(?)開雲浦에 擧動하였다가 마침 還宮할지음에 갑작이 이러난 雲霧까닭으로 길을 이렀을때 隨行하는 日官이그것은 東海龍의 所變이란 上奏를함으로 近境에 龍을 爲하야 佛寺를 創起하라는 勅命이 나리자 雲霧가 四散하고龍이 七子를 다리고 王의앞에 現身하야 王德을 讚揚하고 舞踊과 奏樂을 獻하얐다. 그中一子 處容이 王을 따라 入京하야 王政을 輔佐하였으므로 王은 級干의 地位를주고 또한 美女로써 妻를 삼게하였다. 疫神이 그美貌를 欽慕하야 사람으로 變形하야 夜半에 處容의 집에 竊宿한것을 處容이 外出하였다가 歸家하야 이것을 發見하고 唱歌作舞하야 이를 물리치매 疫神이 形容을 날아내여 꾸러안저 「내가 公의 妻를 欽慕하야 이제 犯하였더니 公이 보시고 怒하시지 아니시니 己後난 公의晝像만보아도 門에 드러서지 않겠다」는 意味의 說話에 由始된것이다.
望海寺 綠起傳說로서의 以外의 處容說話를 그構成되어있는 要素를 檢討하여보면 (一)龍은 雲霧를 自由自在하는 힘을 가젓다고 생각하는것 (二)神 (善神) 은 現實的으로 人間의 政治에도 干與할수 있다는것 (이것은 新羅時代에 있어 神에對한 觀念의 特色이다)(一) (三)疫神 (惡神) 이 形姿를 變하야 人間과 生理的關係를 맺일수 있는 것 (이것은 觀念的으로는 美貌를 猜忌한 疫神이 疫病을 傳染하려든 것이라 고도 解釋할수 있으나 三國遺事의 「入良沙寢矣見昆」以下를 볼것같으면 明白히 性交의 姿勢를 指稱함이라고 할수있다. 近代의 朝鮮의 痘瘡神은 巫俗上으로 女性이며 名稱은 戶口別星媽媽이나 여기에 말하는 疫神은 如何한 種類의 疫인지 不分明하다) (四)妻의 不貞을 보고怒하지않고 도로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엇다는것 (五)晝像만으로서도 (假面으로換置하여도無妨) 惡神을 물리칠수가 있다는 것等이나 要는 이說話의 가장重要한 核心이되는 疫神과 妻의 交涉 (觀念又는 生理的의 어느것을 不問하고) 이 契機가되어 儀式的演劇化 (舞踊化) 된것은 明瞭한 事實인데 總括的으로 보면 이說話는(二) 僻邪進慶觀念及新羅花郞道 讚揚觀念을 包含한 複合說話가 아닌가한다.
朝鮮에서 善惡二神에 對한 人間의 自己防禦 又는 蒙利의 方法으로서 前者에 對하여는 演劇, 歌舞等의 儀式을 奉納하거나 或은 饗應으로 待遇하야 (兩者併用도有함) 그加護를 受하려는것과 惡神에 對하야는 酷刑외 儀式으로서 退治하든지 或은 뽄세만인 飮食으로서 待遇하는것이 (乞人에게 施物하는것처름) 通例이다. 그런데 이處容說話에는 惡神에 對하여도 歌舞로서 待遇하였다. 新羅時代의 花郞徒가 歌舞를 嗜好하고 文武에 曉通하고 그度量이 넓은것으로 看板을 삼아 男兒의 氣像이라고 뽑내는 事實로서 推測하면 이說話도花郞道讚揚의 具現이라고 보겠다
假面又는 晝像으로 積極的으로는 儺, 消極的으로는 雜神禁忌에 利用하는것은 中國의 옛날부터 있는 原始信仰으로 (中國에限한것은아니나)이處容說話는 中國의 그것인지 朝鮮自體의 信仰인지 不明하나 如何間 僻邪進慶의觀念에서 나온것은 틀림없는것이며 또이思想은 比較的 뿌리가 굳세여 現存의 朝鮮民俗에 있어도 各形態에 發見할수있다. 그리고 處容의 言語學的 解釋은 筆者는 이方面에 智識이없으나 安廓氏說 (昭和七年二月號 朝鮮) 이傾聽할만하다.
處容歌의 創作年代에 對하여는 「東京明期月良」……奪叱良乙何如爲理古」까지는 諸家가 考證함과 같이 新羅時代作임은 大畧明白하나「新羅盛代昭盛代………小葉아으熱病大神의發願이샷다」는 只今 形便으로는 羅代作이라고 認定할 何等의 材料도없다. 高麗末期의 李崇仁의 陶隱集에 處容歌라고 題하고 「十一月十七日夜, 聽功益新羅處容歌聲調悲壯, 令人有感」이라하고 「夜久新羅曲, 停盃共聽之 聲音傳舊譜, 氣像想當時, 落日城頭近, 悲風樹梢嘶, 無端懷抱惡, 功益亦何爲」랄뿐이요 全豹를 모름은 依然하다.
處容舞는 (依樂學軌範) 錫製耳環附假面에 紗帽를 쓰고 牧丹花及 桃枝桃實을 꼿고 彩衣를닙는 舞踊인데 이宮中式以外에 民間에도 있음직하지마는 現存에는 傳하지않는다. 相當히 體系있는 處容舞의 創作年代는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參考할만한것이없고 高麗史卷七十一, 樂二에 引用한 李齊賢의詩「新羅昔日處容翁, 見說來從碧海中, 貝齒頳唇歌夜月, 鳶肩紫袖舞春風」 及 麗末國初의 李詹의詩「滿天明月夜悠悠 東海神人下市樓, 路濶可容長袖舞, 世平宜揖百錢遊, 高踨縹緲歸仙府, 遺曲傳在慶州 巷口春風時一起 依然吹動揷花頭」에서도 그創作年代를 明白히할아무資料도없다. 由此觀之하면 處容舞의 創作은 高麗時代以前으로는溯及하지못할 것같다. 李朝成宗朝人 成俔은 其著 「鏞齋叢話」에「音樂處容之戱, 肇自新羅憲康王時, 有神人云云」이라고하였으나 出典未詳하야 取上하기難하다
上述한것을 總括的으로 말하면 新羅에 處容說話에 基因하야 處容歌가 生하고 (같은新羅時代) 高麗時代에 이르러 그歌謠를 幾部分間 補飾하야 容踊化한것이라고 봄이 妥當하지 않을가한다.


中國의 儺禮에 關하여는 周禮夏官司馬, 後漢書禮儀(中), 禮記月令 (季春) (仲秋) (季冬), 論語(鄕黨編), 唐六典 (一四) 等에보이며 이에對한 說明은 省略하나 朝鮮에도 比較的 일즉이 輸入되여 新羅崔致遠의 詩에있는 五戱 (五伎) 도 儺라고 斷定하는 學者가잇다(三). 高麗史禮志(四)에 依하면 高麗靖宗六年(1040)에는 이미 儺禮에 關한 詔書와 奏狀이있었고 睿宗十一年(1116)에는 또儺禮에 關한 倡優雜技가 있었다.
高麗史의 記錄으로서 推測하면 이道化的儀式은 漸次 演劇的色彩를 띠운것같은데 이는 當然의 歸結이며 儀式그自體가 演劇인 形態에 往往히 發見할수있는 現象이다. 爾後 漸次 儺禮(儀)는 假面舞踊 及 假面劇의 代名詞의 觀을呈하야 디디여 雜戱 (伎)百般을 意味한것에 通用한것은 李穡의 牧隱集二十一卷 驅儺行 及 成俔의 虛白堂集 觀儺詩에 依하야 明白하다. 그러나 儀式인 儺禮와 演劇인 儺禮를 大略 區別햇다고 볼수있는 點도 없지는않다. 增補文獻傋考卷百七에
世宗戊戌(1418) (世宗卽位之年) 欽差宦官陸善才, 奉勅書及欽賜名稱歌曲一千本來 綴綵棚設儺禮,
라고함은 世宗卽位에 關한 明帝勅書를 持來한 陸善才를 爲하야 演出한것이며, 또世宗實錄 (卷一百二十六) 三十一年, 冬十月 戊申朔條에
禮蓸啓, 洪熙宣德兩皇帝(明의仁宗宣宗) 登極, 詔使之來, 不用綵棚儺禮, 至正統時乃用之(明英宗即位時) 今必詔使又來(明景宗即位時) 然太上皇帝陷虜庭非常時之此(謂明英宗敗陷土木堡) 綵棚儺禮似若喜慶, 恐或未安, 上曰洪熙宣德之時, 易月之制未畢故耳今日之事, 雖天下所痛憤, 然無凶問, 綵棚儺禮,似難廢也
라고 特히 「綵棚儺禮」라하였는데 (이는山臺劇을 指稱한것같다) 이에 對하야 「儀式儺禮」는 李朝仁祖時의 戶曹 判書李曙의 上疏文에
歲時儺禮, 市民所費甚多, 宜罷之
라고하야 「綵棚儺禮」에 對하야 「歲時儺禮」로서 區別하였다. 다만 遺憾으로 생각하는것은 歲時가 반듯이 除夕을意味하는것이 아님으로 前記의 歲時가 大內의 儀式인 除夕大儺禮를 指稱함인지 又는 다른것을 意味함인지는 不分明하나 年中行事인 儺禮를말함임은 틀임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山臺劇 (山臺노름 山臺都監노름 山臺都監노리等稱號에 對하야는 他日詳考하려함으로 于先如上한 名稱으로 槪括하노라) 의 名稱은 아즉까지 出處不分明한것인데 山臺라는 文字가 最初에 쓰인 文獻은 麗末 李穡의 牧隱集卷三十三으로 「自東大門至闕門前, 山臺雜劇前所未聞也」와 및 前引한 同人의 詩라고하겠다.
山臺의 語原 及 槪念의 問題는 앞서 畧述함과같이 比較的 重要問題이면서도 只今까지 放置햇든것이다. 이語原乃至 出處는 李穡의 牧隱集에 「山臺」라는 文字는 있으나 그出典에 關해서는 何等보임이없고 文意上으로 解釋하면 그以前부터 山臺雜劇이란것이 있엇는것만은 事實인데 그때 비로소 都市에 드러왓다고봄이 妥當하지않을가한다. 그러면 그前에는 어떤 特別한 地理的區城에서만 하든것으로 推測되는것이다. 萬若 筆者에게 臆測을 許容한다면 이特別한 地域은 山麓인 臺地이고 그곧에다가 棚을 設하야 綵幕을 에워싼것의 表現으로 나온것이 아닌가한다. 그러므로 牧隱의詩「山臺結綴似蓬萊」의 山臺의 意味는 「山의臺」라는 意味로와 「演劇名의山臺」라는 두가지로 解釋하고 싶다. 柳得恭 (李朝正宗時人) 의 京都雜誌에
演劇有山戱野戱 兩部屬於儺禮都監, 山戱結棚下帳………
이라하야 山과 野를 對立식힌것을 보더레도 그에는 어떤 理由가 介在한것이라고 할수있을뿐더러 李瀷 (李朝顯宗時人) 의 星湖僿說 (五下技藝門) 에는 좀더 昭詳하야
綵棚山者, 高麗遺俗也, 今世別置都監, 每上使至, 爲左右棚, 競鬪新奇
하고해서 明白히 山에 「綵의棚」을 設해서 演出한것으로 解釋할수있다. 다만 筆者가 가장 當惑하는것은 明 董越의 朝鮮賦에
光化門外東西, 列鰵山二座, 高與門等, 極其巧……平壤黃州皆設鰵山, 陳百戱迎詔, 而王京爲勝
이라고하는 鰵山인데 映畵撮影所의 셋트와 같은感을 주나 이것은 道具를 描寫한것인지 又或 山臺劇 全景을 表現한것인지 不明하다. 그러나 저러나 筆者는 山臺라는것은 山에因綠이있는 地理的區城에 演劇을 演出 하려고 設置한 貌樣을 指稱한데서 始作한것이라고생각한다.
山臺劇을 觀念上으로보면 麗末과 現代와는 相異하다고 할수있다. 前出의 牧隱의 山臺雜劇詩를 分析하면 그에는 處容舞 ‧ 竹廣大 ‧ 爆火等의 三個雜伎가 包含되여 있고 現代의 山臺劇에는 그第一科塲에 原始演劇形態에 往往이있는 儀式 (此에는僻邪) 乃至 綠喜物인 告祀祝願舞踊이 있을뿐이요 他雜伎는 全然包含되지 않는다.
一言以蔽之하면 初期의 山臺雜劇은 各獨立한 雜戱를 總括해서 指稱할때의 稱號이며 「儺禮」(初期時代의演劇인儺禮) 라는 字句와 同樣으로 使用되었고 現代 느저도李朝正宗以後의 山臺劇은 體系及 演劇條件을 具備한 特殊한 演劇의 名稱이라고 하겟다. 或者 山臺의 告祀祝願 ‧ 沙里院탈춤의 四上佐舞及 南鮮五廣大劇의 五方神將의 科塲은 處容舞와 關係가 없다고 解釋하너냐反問하면 이에對한 答은 至極히 簡單하야 屢說한 假面에 對한 觀念으로 부터 再出發하야 解釋하면 氷釋할것이다.


(一)處容說話의外에 「三國遺事, 紀異卷一, 桃花女, 鼻荆郞條」參照.
(二)邪는惡神中에도 奸惡卑賤淫兇한것으로 이를 退讓하는意味의 字句로서는 僻邪, 辟邪, 闢邪等을씀.
(三)安廓 「山臺戱と製容舞と儺」(朝鮮, 昭和七年二月號)
(四)高麗史 禮志六(季冬大儺儀)에 靖宗六年十一月戊寅詔日, (前略) 歲終儺禮, 磔五鷄以驅疫氣, 朕甚痛之, 可貸以他物, 司天臺奏, 瑞祥志云, 季冬之月, 命有司大儺旁磔土牛以送寒氣, 請造黃土牛四頭各長一尺高五寸以代磔鷄從之」,又「睿宗十一年十二月己丑大儺, 先是, 宦者分儺爲左右求勝, 王又命親王分主之, 凡倡優雜伎, 以至外官遊妓無不被徵, 遠近坌至旌旗亘路,充斥禁中」이라고하였다.



如斯總觀할때 舞踊 ‧ 演劇에 關한 文獻이 甚少하고 게다가 李朝의 儒敎政策이 禍가 되어 이들 藝術의發達은 直接間接으로 阻止된 結果 後世의 學徒로 하여곰 그硏究에 多大한 不便과 危險을 가지게하였다.
舞踊 演劇에 限한것은 아니지마는 古代와 關係를 가진 文化科學의 硏究 特히 史的硏究에는 文獻에 依한考證學的方法과 民間傳承에 依한 民俗學的方法이 有力한것은 世人이 業己 認定하는 바이나 朝鮮에는 이들演劇關係의 文獻이 자못 없고 다만 蒼海遺珠的의 數三端的 文獻에 依하든지 或은 極度로 蹂躙된 民俗藝術에 依하야 그全豹의 幾部分이라도 窺視하려는 가장 無暴한 計劃을 하지않으면않된다. 如斯한 不自然하고 無理한 條件下에서 이를 硏究하지않으면않되는것은 할수 없는것이나 잘못하면 硏究者自身도 모르게 別路에 徜徉하게되는것이다.
叙上의 處容舞 ‧ 儺禮 ‧ 山臺劇에서만 하더래도 安廓氏와 같이 李穡(牧隱)의 驅儺行에 處容舞가 있고 山臺雜劇詩에 處容舞가 있다하야 驅儺와 山臺劇을 同一한것이라 斷하고 山臺劇을 儺禮라고 稱한 前揭各文獻에 依하야 三段論法的으로 三者同一하다고 斷案한것은 一面妥當한 論考같기도하나 事實은 大端 皮相的觀察로서 文獻의 檢討를 嚴密히 하지않고 또民俗學的 實際事象을 無視한데서 生한錯誤라고 아니할수없다. 處容舞와 驅儺는 僻邪進慶觀念에 있어는 同一하다고할수있으나 儺禮로부터 分立햇다는것을 李穡(牧隱)의 驅儺行과 成俔(虛白堂) 의觀儺詩로 證明함은 不徹底한 말이다. 前者의「醉瞼爛赤猶未醒 黃犬踏碓龍爭珠, 蹌々百獸如堯庭」은 處容舞를 가르치지않고 後者의 「弄丸眞似宜僚巧……長竿百尺舞壺觥」은 前 함과같이 各々 다른 雜伎의 描寫로서 各獨立한 雜伎의總括的稱號인것을 알수있고 李穡이 말한 山臺雜劇의 槪念도 大畧이와 同一한것으로 어떤 特定의 演劇名稱이 아니고 全然 別個로된 各種의 演劇 及 演劇形態物의 總稱이니 儺禮가 處容舞요 山臺劇이라고 할수없다.
抽劣한 秃筆로 重言復言한 이들 三者에 對한 筆者의 主張은 設令 處容舞와 儺禮를 同一한 日字에 擧行한다 할지라도 樂學軌範及實錄 ‧ 文獻備考에도 보이는것과같이全然別個의것이요 또槪念이 다른 雜伎總體를 意味한 儺禮도 處容舞一個만 指稱하지를않았다. 山臺劇도 高麗末期에는 雜伎百般을 指稱하였으나 現代에는 特定의 演劇名稱이며 雜伎는 全然 包含하지 않으니 이또한 處容舞라고 할수없다. 다만 現代의 山臺劇에 處容舞와 同觀念의 舞踊이 包含되어 있는것은 事實이며 또 儺가 山臺劇의 發生動機를 지은것만은 肯定하는것이다.

附言 本篇은 오로지 朝鮮의 舞踊 ‧ 演劇에對한智識을 가지지않는 人士에게 槪念을 줌을 目標로하야 前에 季刋演劇學 (東京)에 發表한것을 今般에 極少部分을만 添添削하며 飜譯한것이다. (乙亥二月於海美貞海南莊脫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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