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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역대 가집 편찬 의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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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논술―역대 가집 편찬 의식에 대하여― 論述―歷代歌集編纂意識에對하야―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조윤제 趙潤濟
출처정보 진단학보 震檀學報
연    도 1935-09 昭和十年九月
면    수 1
기사


詩歌·戱曲·小說은 文學의 三大部門이라 할수있으나, 朝鮮에서는 웬일인지 戱曲의 發達은 거의 보잘것 없고, 小說 亦是 一般學者의 그다지 關心한배 되지몯하야 充分한 發達을 成就하지 몯하였다하겠는대, 한갓 詩歌만은 그래도 各時代를 通하야 우로는 國王의 御製를 비롯하야 公卿·學者等의 觴詠이 있고 밑으로는 庶民, 妓女에 이르는 唱吟이 있다싶이 各階級을 綱羅한 뚜렷한 發展을 볼수있으니, 實로 詩歌는 朝鮮文學의 中樞的 地位를 가지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詩歌의 硏究는 文學硏究에 大量的 寄與가 될것이며, 또 此의 編纂意識은 或은 一般文學的 意識을 말하는것이 될지도 모를것이다.
大抵 歌集編纂이란것은 年年이 되는것이 아니고 一定한 어떠한 時期를 기다려 그 時代까지 積載된 詩歌를 總括하야, 一便으로는 낯낯이 散佚되여가는것을 붓잡아 매어두고 他便으로는 歌人, 學徒에 通讀의 便益을 주는事業이 될것이여서, 말하자면 한時期的 事業으로 이것의 歷代的 編纂意識은 곳 區劃된 그時代 그時代人의 文學的意識을 보여주는것이 되겠거니와, 오늘날 遺傳하야 우리앞에 보이는歌集은 그다지 各時代를 通하야 볼만치 많들 몯하야, 遺憾이나 이것을 立體的으로 觀察하기는 多少 困難한 點도 없지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歷代의 歌集編纂事業에 簡素한 史的考察을 試하며, 現今 남은歌集에 對하야 紹介를 한 다음에, 平面的으로 그들을 一括하야 數點에 對힌 編纂의 意識을 말해볼가 한다.



먼첨 歌集編纂事業을 史的으로 내다보면 그 가장 오랜것은 아마도 眞聖王二年 (西歷 八八八)에 角干魏弘과 和尙大矩가 勅命에 依하야 「三代目」을 撰集한 것일줄 믿는다.[註一] 魏弘과 大矩는 그傳記며 歌學上 素養을 詳考할수 없으나, 大矩는 三國遺事에 依하면 月明師, 融天師와 같이 僧侶로 新羅의 歌學名家인듯하니,[註二] 그의 撰集인 三代目은 新羅 各時代를 縱貫하고 各階級을 橫通한 훌륭한 卿歌集인 것을 집작할수있어 마치 日本萬葉集을 想像케한다. 萬葉集은 大約 西歷七 五十 年前後에 撰集되였다하니 그보다는 約百有餘年 뒤떨어젔다 하지마는 古代에 있어 朝鮮과 日本은 文化史上 늘 많은 類似點을 가지고 있는것으로보아 겨우 百有餘年을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三代目, 딴편에는 萬葉集이 있었다는 것이 偶然치 아니하고, 또 그들의 編纂內容이 過差없음을 믿을수 있다. 그러나 이 三代目은 오늘에 傳를 몯하얐다
三代目이 撰集된 以後로는 오랫동안 歌集編纂에對한 말은 들리지 않었다. 三國時代는 勿論이요 高麗五百年까지도 無事히 지내고, 李朝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意識이 다시 돌아와 建國後 얼마아니잇어 이것의 蒐集編纂에 對한 議論이 朝廷에서, 일어났으니, 지금 이에 對하야 簡單히 그 要領만을 들어보면, 李朝는 儒敎로써 建國의 理想을 세웟는만큼 歌集에 對하여는 特別한 用意를 한듯하야 于先 創業當初 國家 大綱의 組織制度가 成立되자 곳 힘을 舊樂整理와 新樂樹立에 썻으니 雅樂은 世宗朝에 朴堧이 南陽에서 磬石을 얻고 甕津에서 秬黍을 求해 高麗末年 以來 散亂하였던 것을 大整理하야 完全한 것을 맨들었다. 오늘날 世界的으로 有名하야진 李王職雅樂은 곳 그 當時 整理되야 오늘에 傳해온 것이거니와, 朴堧은 雅樂만이 아니라 또 俗樂 · 民歌의 蒐集 整理에까지 意見을 가지고 그 實行方法을 論한것이 있으니 世宗 十二年 二月 上疏文에
(前畧)此等遺亡諸篇 不可悉記, 然, 譜法尙存 其歌詞舊本, 意必有傳寫私藏者焉, 願令中外悉求, 我朝舊時歌曲, 如有詳悉舊本, 自告進呈者, 賞之以職則, 舊樂之缺, 庶可塡補矣, 如此然後, 擇其歌曲之詞, 其中君臣道合, 父子恩深, 夫婦節義, 兄弟友愛, 朋友諸信, 寶主同歡, 發於性情之正, 有關於人倫世敎者, 以爲正風, 其男女相悅 淫遊姦慝, 逞欲無恥, 有愧於綱常者, 以爲變風, 云々,[註三]
이라하얐다 即 高麗以來 朝鮮歌樂은 그 歌詞를 遺亡한 것이 可히 悉記할수 없으나 이들中에는 아직 民間에 傳寫하야 두었을 者가 있을것이니 中外에 求하야 이들을 蒐集하자는것이다. 이 朴堧의 意見은 採用되였는지 아니되었는지 조곰 알기 어려우나 世宗十五年九月의 禮曹啓文에
我朝開國以來, 禮樂大行, 朝廟雅頌之樂, 己備, 獨民俗歌謠之詞, 無採錄之法, 實爲未便, 自今依古者採詩之法, 令各道州縣, 勿論詩章俚語, 關係五倫之正, 足爲勸勉者及其間曠夫怨女之謠, 未免變風者, 悉令搜訪, 每年歲, 抄錄上送從之,[註四]
라한것으로 보면 곳 採用되지 몯한듯하다. 그러나 그의 意見인 만큼 當時世人의 注意를 喚起한듯하야 드디여 禮曹의上啓한바 되여 國王의 裁可를 얻은듯 하다.
이 民歌蒐集은 王政의 得失과 風俗의 隆替를 알수있다 하야, 支那에서는 일즉부터 試驗해 본것이다. 詩經의 正風은 卽 그리하야 採集된 民俗의 詩라는것은 有名한일이나 朝鮮서는 어쩐지 그러한 計劃이 歷代에 있었다는 말을 듯지 몯하였었는대 李朝에 와서 비로소 이 問題가 일어나 民歌蒐集의 具體的 事業이 進行된것은 多少 늦은感도 있건마는 그래도 括目할만한 事實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意見을 일으킨 朴堧은 그 根本思想이 支那思想의 影響이라 하겠지마는 實로 다른사람이 생각하지 몯한곳까지를 着目하였다 하겠으니 더욱이 그의 意見中에는 人倫道德에 關係한것뿐 아니라 男女相悅, 吟遊姦慝, 逞欲無恥한것조차 이를 蒐集하자는 말이 있는것은 特히 우리의 注意를 要할點일듯 하겠다. 그러나 일건 計劃을 세워 組織的으로 蒐集한 民歌며 俗樂은 果然 有終의 美를 얻었으며 또 어떠한 意識下에 編纂되여 後世에 남긴는지 알수없다. 一個人의 일이 아니고 一國家의 일이며 더욱이 國王의 允許에 된 事業이니 얼마간이라도 蒐集은 되였을것이고, 어떠한 形式으로나마 編纂되였을 것은 疑心치 안하는배나, 오늘날 남아 傳하는것이 없고 뿐만아니라 實錄에서도 아직 그 方面의 文獻을 얻지 몯하였으니 무어라 말할수없다. 다만 世宗十五年九月 禮曹啓文에
今慣習鄕樂五十餘聲,[註五] 並新羅 · 百濟 · 高麗時 民間俚語, 猶可想見當時政治得失, 足爲勸戒,[註六]
라 한것으로 보면 民歌蒐集을 實行하기 前에도 鄕樂五十餘聲이 編纂 整理되여 있었는것만은 事實이다.
以上은 國家 政府의 힘으로 計劃된 編纂事業의 一端을 말하였거니와 이러한 事業은 반드시 政府의 힘을 기다리서야만 될것이 아니고 文化의 向上한 社會에 있어서는 도로혀 個人에 期待될바이많다 하겠으니, 李朝 初期는 아직 文物制度가 整頓되지 몯한때라, 그確立上 自然히 이것이 政府의 힘으로 實行된 感이 있었으나 이時期를 지나면 漸々 이것은 民間事業으로 個人에 옮아갓다. 退溪의 書漁父歌後에
頃歲, 有密陽朴俊者, 名知衆音, 凡係東方之樂, 或雅或俗, 靡不裒集, 爲一部書, 刋行于世, 而此詞與霜花店諸曲, 混載其中,[註七]
이라한것은 當時의 民間歌集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貴重한 文獻이라 하겠으나, 지금것 나의 寡聞한바에 依하면 或은 이것이 民間編纂의 最初의 歌集이 아닌가한다. 그런대 이 朴俊은 頃歲云々이라 하얐으니 退溪當時의 사람이 었겠지마는 그傳記가 詳細를 몯햐고, 그가 編纂한 歌集도 어떠한 이름으로 불럿는가 退溪는 말하지 않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것을 朴俊歌集 이라假稱하야 두고보면, 이것은 退溪의 紹介에 依하야 東方樂에 쓰이는것이면 雅樂, 俗樂할것 없이 모조리 裒集한 것인것을 알겠고, 또 刋行까지 되여 世上에 流布되였으며, 그內容에는 漁父詞며 霜花店諸曲이 收載되였든것을 알겠는데, 雅友金台俊君은 이것을 樂章歌詞와 同本視하야 「樂章歌詞 一名國朝詞章이란 책은 高麗, 李朝初期까지에 傳해 오는 俗樂歌曲을 退溪李滉의 當時人 朴俊이란 嶺南선비가 모흔것이니, (다음에 前記 退溪의 書漁父歌後文 引用) 이 一本이 偶然히 李王職圖書舘에 傳하여 온것이 近者에 廣布되여 樂章歌詞 或은 國朝詞章이란 名稱으로 傳한다」[註八]라하였다. 金君의 이說은 무슨 根據있는 說이 아니고 다만 傳聞筆錄한 것인것을 나는 잘아나, 그러나 이것은 設令 虛浪之說이라 할지언정 一顧할 價値가 없든안할듯하니 다시 金君說에 얼마곰 鼻見으로 補筆하야 憶測을 더하야보자.
樂章歌詞는 現李王職圖書舍에 備藏된 木板本 歌集이나 그 體裁와 內容에 對하야 一言건내보면 大綱 俗樂歌詞, 樂章, 雅樂歌詞, 歌詞, 四部에 난후어있어 俗樂歌詞에는 宗廟永寧殿 迎神以下 數種歌詞가 있고 樂章에는 閟宮 俗樂 南公轍製와 御製一章이 있으며, 雅樂歌詞에는 그歌詞數種이 있는데 이까자는 다 漢文歌詞로 되여있다. 그 다음 歌詞라는 部는 二三 例外는 있으나 大槪 朝鮮文歌詞로 되였으니 參考的으로 그題目만을 들면 與民樂 (漢文), 步虛子(漢文), 感君恩, 鄭石歌, 靑山別曲, 西京別曲, 思母曲, 楞嚴讚 (漢文에諺吐)靈山會相 (漢文), 雙花店, 履霜曲, 가시리, 儒林歌, 新都歌, 風入松(漢文에諺吐), 夜深詞 (漢文에諺吐), 翰林別曲, 處容歌, 漁父歌, 滿殿春, 華山別曲, 五倫歌, 宴兄弟曲, 霜臺別曲等으로, 大綱 高麗에서 李朝初期에 屬한것이라 하겠다. 그런대 體裁에 이르러서는 板本이라 하지마는 大端히 亂雜하야 分間할수 없게 되였다. 일터이면 前述한바와 같이 俗樂歌詞, 樂章, 雅樂歌詞, 歌詞로 난후어 있으나, 俗樂歌詞部에는 그 第一張 第一行에 俗樂歌詞上이라하고, 그다음에 그下도 없이 最後張 最後行에 가서 俗樂歌詞終이라 하였으며 兩面꺽음에는 俗樂이라 하였다. 또 樂章部에는 첫張에 南公轍製樂章을 筆寫하야 오려붓치고 다음張에 御製樂章을 亦是 筆寫하얐으며 張數는 記入하지 않었으나, 꺽음上에는 다 樂章이라는 印字가 보인다. 雅樂 歌詞部는 全部 八張으로 되여 첫張第 一行에 雅樂歌詞라하고 第七張 最後行에 歌詞終이라 하였는데 제八張에 새로 筆寫添附하야 그 最後行에가서 또다시 歌詞終이라는 印字를 노았고 張數字는 順位가 틀림이없이 여기와서 八이라 印字하얐다. 뿐만아니라 꺽음上에는 다 歌上이라 하였다. 그리고 歌詞部는 어떠냐하면 첫行에 歌詞上이라 하였지마는 最後行에가서는 歌詞上終 或은 歌詞終이라는 文字를 發見할수없고 꺽음上에는 歌上이라는 文字가 보인다.
이와같이 樂章歌詞는 그 體裁가 大端히 亂雜하고 板模도 오랜것 같이는 보이지 않으나 그러나 이것은 朴俊歌集인 듯이 보이는 點이 多分있는듯 하다. 卽 첫재로 朴俊歌集은 或雅或俗을 靡不裒集이라 하였었는데 果然 여기는 靡不裒集이라까지는 말할수 없을지 모르나 雅樂, 俗樂의 重要한것은 包收되여있고 또 이에 收載된 歌詞는 모다 中宗以前에 屬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注意를 가장 많이 끄는것은 本書收錄의 漁父詞와 聲岩改纂의 漁父詞와 틀린다는 것이니, 元來 聲岩은 朴俊歌集에서 漁父詞을 얻어 말에 不倫한 것이며 或重疊된 것이며 또 傳寫時의 訛作인듯한 것을 될수있는대로 舊文 本意에 因하야 增揖을 加하야 十二章을 九章에 刪改하였다.[註九] 그런데 本書의 漁父詞는 聲岩이 아직 纂定하지 않은 十二章의 漁父詞 그模樣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면 樂章歌詞는 그板이 亂雜하고 古色이 없어 朴俊의 刊行本이라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하드라도 그內容을 吟味하여보면 朴俊歌集과 類似한點이 不少하니 처음의 憶測은 空然히 無斷한 憶測이라 할수는 없을듯하다. 或은 좀더 勇斷을 낸다면 樂章歌詞와 朴俊歌集은 同一한 것이라고까지 말할수 있을지도 모를것이고 萬若 그러한 勇斷이 果然 容恕할수 있다한다면 樂章歌詞는 民間歌集의 矯矢가 될것이다. 또 設令 樂章歌詞가 朴俊歌集이 아니라한다 손치고도 그內容으로 보아 現存 歌集中의 最古라 하여도 過誤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樂章歌詞는 民間歌集이라 하지마는 그 內容은 民間에서 直接 불리는 民間的歌詞라 하기보다 차라리 宮中歌樂에 쓰이는 것이 大部分이라 하겠다. 事實 또 李朝에 있어서 詩歌의 發達을 보면 그 初期에는 舊樂整理가 大部分의 事業이오 創作方面에는 있다하여도 創業의 頌詠 쯤이 있을 程度이었었다. 그러다가 燕山朝 以後가 되여 歌詞文學이 擡頭하고, 壬辰亂이 그치고는 時調文學이 特히 旺盛하야 詩歌文學의 本格的 發展을 보았으나 歌集의 出現은 日常 그러한 隆盛期의 後幕에 보이는 것이니 때로말하면 肅宗以後 英祖 · 正祖時代에 가장 많이 나타났다. 나는 이時代를 詩歌史上에 있어 詩歌撰集時代라고까지 부르고자하나, 이時代의 所産歌集中 重要한것을 들면 靑丘永言, 海東歌謠, 今古歌曲等이 다 그것이니 다음에 이들 歌集에 對하야 簡單한 解說을 하겠다.
靑丘永言은 金天澤編이다. 金天澤은 字는 伯涵,號는 南坡라한 英祖朝 歌客이요 또 名唱이었었다. 그의 傳記는 未詳하나 當世歌客 金壽長과 同年輩로 敬亭山歌壇을 이루었고 浣岩鄭來僑 (字潤卿) 와도 交分이 좋은듯하야 鄭潤卿은 特히 그의歌集을 爲하야 序文을 썻었다. 本書는 그가 古今歌曲의 裒集癖을 가지고 주어모아 各々曲調에 依하야 分類編纂한 時調中心의 歌集인대 收錄된 歌數는 卷末 歌詞 十七首를 合하야 通計 實로 一千十五首에 達하고, 知名作者만도 百四十名 가까이 包含하였다 編纂年代는 明示한 것이 없으나 그 序文에 「歲戊申春玄窩鄭潤卿序」라하고 跋文에 「丁未季夏下浣磨獄老樵題」라 한것으로 보아 大約 英祖三, 四年인듯하다.[註十] 아마 所收歌數의 많기로는 現在 傳하는 歌集中 이에 넘을者가 없을듯하다.
靑丘永言이 나온제 三十五年後 卽 英祖三十九年에 또 金壽長에 依하야 東歌謠가 編纂되였다. 本書는 靑丘永言이 曲調로 分類編纂된데 對하야 作家 標準으로 分類編纂하얐다. 所收歌數는 無名氏作 三百十五首를 合하면 八百八十三首인대 그中에는 編者 自作이 百十七首가 있다. 編者金壽長은 앞에서 말한바와같이 金天澤의 好友로서 多少 그의 後輩인듯 한데, 字는 子平, 自號하야 老歌齋라하였다. 京城花開洞에 住宅을 두고, 노래를 부르고 詩을 읊으며 當時 歌客들과 交遊하야 自身이 그指導의 자리에 있었는듯 하나, 本書를 編纂한것은 그의 晩年 七十四歲時었었다. 넓이 關係文獻까지을 蒐集하야 作者作品에 後序를 부처두는 實로 愼重한 態度로 編纂을 하였으나, 編纂한後에도 修正, 增補하기를 겨을리아니하야 英祖四十五年 即 그의 八十歲되든 해에는 後輩 金友奎以下 九人의作 六十七首를 더하야 改正書를 내었다.[註十一] 金天澤. 金壽長은 모다 當世 洞歌者로서 一世를 風靡한듯하나 또兩人에 各々 歌集의 編纂이 있었다는 것은 크게 注目할 點이 될듯하다.
古今歌曲은 前間恭作氏의 考證에 依하면 海東歌謠가 編纂되든 다음해 卽 英祖四十年에 松桂煙月翁에 依하야 編纂한 것인듯하다. 原本은 淺見倫太郞氏의 所藏으로 나는 直接 原本에 接見할 機會를 얻지 몯하고 그 複本을 읽었을 따름이나, 이에 依하면 처음에 支那의 辭賦歌曲 十四首가 있고 그다음에 漁父辭九章, 感君恩四章, 相杵歌, 關東別曲, 思美人曲, 續思美人曲, 星山別曲, 將進酒歌, 江村別曲, 閨怨歌, 春眠曲等이 있고, 短歌는 맨뒤에 錄載되여, 그內容으로 分類되여 있다. 全歌數 長短歌合하야 二百九十六首에미첫다. 內容을 檢察하건대 다른歌集라 別다른것은 없는듯하나, 한갓 그分類法이 人倫, 勸戒, 頌祝, 貞操等 오로지 그內容에 依한것이 뒤에말할 東歌選과 아울러 注目할것이 되겠다.
以上靑丘永言, 海東歌謠, 古今歌曲은 英祖 文化를 闡揚할 三歌集이라 하겠으나, 이밖에 年代는 未詳하지마는 亦是 이時代의 編纂인듯한 歌集에 東歌選을 뺄수 없다. 本書는 書名과 같이 朝鮮歌曲中 有名한것만을 擇出 編纂한것인데 總歌數 二百三十五首라는 小歌集이다. 大綱 知名作家, 無名作家, 兩部에 난후어 있으나, 처음에는 平調, 羽調 界面調와 中大葉, 北殿, 數大葉의 說明을 마추고 各曲의 實例로 初中大葉, 二中大葉, 初數大葉 二數大葉의 順序에 時代 人名의 區別이 없이 몇首 들었다. 그리고 每首끝 에는 遺意 嘆, 忠, 懷古, 隱逸, 思等目을 달아 그 內容을 指摘한것도 滋味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本書를 구타여 여기 가지고 온것은 그內容을檢察할때 知名作家는 最古乙巴素, 成忠에 始作하야 李鼎輔에 마첫다는것이다. 李鼎輔는 英祖朝 大提學이고 또 時調作家이거니와 그의 後라할지라도 金天澤 金壽長과 같은 歌客이 있었건 마는 한말 紹介도 없이 李鼎輔로 끝매진것은 或은 本書가 海東歌謠等보다 일즉었으면 일즉었지 늦지안하리라 믿기때문이다. 그러나 그反面 또 英正時代를 지내면 詩歌界는 大段히 不振하야 들만한作家도 나지안했으니까 李鼎輔 以後의 作家를 드지몯하고 金天澤 金壽長等은 社會的 地位라던지 그作品이 足히 取할 거리가 되지몯하야 後世의 編이면서도 올리지 안하였는지도 모르겠다. 要컨댄 疑問을부치면 얼마라도 부칠수 있으나 便宜上여기合하야 그紹介를 하여두겠다.
다음 大綱 英祖御世를 지내면 詩歌界는 大體로 不振한狀態가 繼續되였다. 앞의 三歌集은 마치 從前의 詩歌를 여기와서 總淸算하야 버린 느낌이 잇고. 以後의 詩歌界는 單純히 그를 反覆 活用한데 지나지몯 한듯이 보이나 이러한 데에 歌集은 自然 實際 唱曲을 爲하야 編纂될것이다. 靑丘永言이라던지 海東歌謠따위를 보면 눈에 딸아서는 亦是 그러케도 생각되지않지도안하지마는 그래도 海東歌謠같은것은 널리 文獻을 裒集參考하야 編纂한 文獻的歌集의 地位를 잃지않는데 이 뒤에 나타난 南薰太平歌는 그러한 意識이 없이 다만 唱曲家의 텍스트가 될 따름이었었다.
南薰太平歌는 編者가 未詳하오나 癸亥年에 京城石洞에서 刊行되였다. 純朝鮮文으로 되여 一字의 漢字가 섞이지않었고 短歌時調에 있어서는 終章 第四句를 墜落한것은 警言을 要할것없이 實際 노래로 부르는 그대로를 적은 것이 되겠는대, 全體를 時調, 雜歌, 歌詞에 난후어, 時調는 曲調에 依하야 二百二十四首를 分類 收錄하얐고, 雜歌는 소춘향가, 매화가, 백구사等 三首, 歌詞는 춘면곡, 상사별곡, 처사가, 어부사等 四首를 收載하얐다. 그런대 앞에 말한 板刻年代인 癸亥는 其實 어느 癸亥인지 確實를 몯하였다. 年表에서 最近의 癸亥를 찾으면 純宗三年, 哲宗十四年이 있거니와 用語法, 用字法이며 板이 조곰도 古色이 없을뿐아니라, 編纂되여서 板本으로 될때까지는 얼마 동안 寫本으로 傳하여 왓을것을 想像 하여야 될것이니, 比較的 近代에 屬한 哲宗十四年의 癸亥年일지도 모를것이다.[註十二]
要컨댄 英祖朝以後에서 哲宗, 高宗朝에 이르는年間에 이러한 歌集이 이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나 이것은 勿論 詩歌界의 한 沈滯氣分을 나타내는것이다. 그러나 그와같은 沈滯期는 詩歌界에 오래머물어 있지 않었다. 高宗朝에 와서 朴孝寬의 昇平稧를 中心으로하야 다시 詩歌界에는 曙光이 비첫으니, 朴孝寬의 熱誠있는 指導와 그門下에 모여드는 歌客들의 活氣있는 活動은 듭거 英祖朝 敬亭山歌壇을 出現식혓다. 그러나 때는 오랫동안의 沈滯하였던 뒤나, 無根의 雜謠가 世上에 流行하였고 流布되여 있는 歌集이란것은 第次며 名目이 없어저 보는者에게 不便이 적지 않었으니 그들에게는 自然히 一世를指導할 價値있는 歌集의 編纂이 必要하여젔다. 그리하야 나타난 것이 곳 歌曲源流다.
歌曲源流는 靑丘永言 海東歌謠와 合하야 朝鮮의三大歌集이라 일러오는대 가장 널리 世上에 流布되여 있고 또 異本도 많이 있기로 有名하다 奎章閣本, 李王職圖書舍本, 崔南善氏本, 李王職雅樂部本, 總督府圖書館本이 다 그 異本이라할수있으나 이들은 各々 조곰式 差異가 있고, 그中에 奎章閣本에는 編者의 跋文이 있고 李王職圖書舍本에는 安玟英의 序文이 있는것은 特히 貴貴한 것이라하겠다. 全體 歌數는大綱 八百餘首인대 이를 曲調에 依하야 編纂하였으며, 끝에는 따루 女唱歌聚[註十三] (雅樂部本에는 女唱秩)라 하야 一百七十餘首를 別錄하였다. 編纂年代는 安旼英序에 「丙子榴夏節周翁安珉英字聖武序」라하였으니 高宗十三年인듯하다. 그리고 다음編者에 對하야 一言하면 이것은 한사람의 손에 編纂된것이 아니고 昇平稧中에서 朴孝寬의 門人들이 서로 모이여 蒐集編纂한 것인듯하다. 따라서 이 編纂事業에 늘 指導的責任에 있는 이는 勿論 朴氏 自身이거니와 朴孝寬은 字를 景華라하고 號를 雲岸이라하였다. 大院君의 特別한 寵愛를 받어 號는 實相 大院君의 所賜한 것이라하나, 平生에善歌하야 水流花開之夜이나 月朗風淸之辰에는 劉亮한 喉聲이 제절로 흘러나와 가는구름을 멈추니 녯날 龜年善才라도 可히 미칠수 없었다. 그러므로 風流才子며 冶遊士女가 推重치 않이가 없어 다 字와號를 부르지 않고 朴先生이라 불렀으며 遺逸風騷客이 모이여 昇平稧를 모으니 先生는 곳 그 稧의 主盟이 되였다한다.[註十四] 그리하야 그를 中心으로 知友門人이 雲集하니 本書의 編纂에 많이 힘쓸 安玟英 (字聖武 號周翁)같은이도 다 그中의 一人이다.
以上 大綱 우로는 三代目에서부터 밑으로는 歌曲源流에 이르는 歷代의 歌集과 그 編纂事業을 簡單이 一顧하였다 이밖에도 아직 드지 몯한 編者未詳의 數種歌詞集과 歌詞六種 (淺見淺太郞氏藏) 이며 또 客樂譜 (鄭鶴謨氏藏) 와 古今寄詞 (崔南善氏藏) 가 있고 更新以後에는 活字를 利用하야 商品的으로 編纂한 많은 歌曲集이 있지마는 一切 그들에 對하여는 言及하지 않았다 그러면 以上 말해온바로씨 여기 總括하야 生覺해보면 朝鮮에 있어서 歌集編纂事業이 일어난 것은 벌서 千數百年前 일이 지마는 그後 그事業이 中斷하야지고, 李朝에 들어와서 다시 復興하였으나 처음에는 單純히 國家事業이더니 차々 個人事業으로 옮아감에 딸아 樂章 中心에서 一般詩歌中心으로 나아가고, 詩歌의 衰退期에는 一種 唱曲本으로 進出하야 하마트면 歌集의 文獻性이 大部分 喪失할가 하였더니, 末期에 와서 다시 歌集 本來의 精神을 깨달았다. 그리고 歷代 歌集에 取錄하여온 詩歌의 種類로 말하면 처음에는 長歌만이었으나 나종에는 大部分이 短歌이었었다. 또歌集編纂人을 내다보면 個人編纂時代에와서는 皆是 그들의屬하고 있는 階級이 比較的 當時 사람의 崇敬의 的이 되지몯하였는 듯하다. 卽 朝鮮에 있어서 歷代歌集의 編纂人은 兩班階級엣 人物이 아니고 平民階級엣 人物이었음이 注意된다. 딸아서 그들의 編纂意識도 一層 우리의 注意를 끈는다 하겠다.


그러면 지금부터 本論에 들어가 그들 歌集編纂意識에 對하야 말 해보자. 編纂意識이라 할지라도 이를 크게 말하면 거의 詩歌 全般에 미치는 것이 되여 到底히 이 卽論에 있어서는 收拾할수 없으니 여기서는 될수있는대로 問題를 좁히서 直接歌集에 關係되는 限에서 歌體, 分類, 作家, 原作, 分節, 編者及 序跋等 六項에 난후이 말해 볼가 한다.
1. 歌體
詩歌는 그를 內容으로 分類하는 以外에 形式으로 分類하야 長歌, 短歌로 난훌수 있고, 또長歌와 短歌는 各其 特質에 依하야 幾種에 區別할수있거니와 古來로 歌集編纂者는 이것을 如何히 意識하고 있었던가. 우리는 歌集을 閱覽할때 長歌가 있으면 短歌가 있음을 보고, 古歌가 있으면 新歌가 있음을 볼뿐 아니라 樂章이 있으면 또 俗歌가 있는 것을 보듯이 모든 歌體를 歌集中에서 容易히 發見할수 있으나, 大綱 그歌集의 內容性質로서 區分하야 보면 長歌本意의 歌集과 短歌本意의 歌集 二種으로 할수 있는대, 樂章歌詞며 歌詞集等은 다 前者에 屬하는 것이고 靑丘永言, 海東歌謠 等 三大歌集과 客樂譜 東歌選, 南薰太平歌等은 다 後者에 屬하는 것이다. 그러나 前者에 있어서는 大部分이 長歌로 編錄 되였지마는 後者에 있어서는 번드시 短歌만으로 된것이 적고 普通는 短長歌가 一冊에 混在하야 있음을 본다. 그러면 이야기는 主로 이方面에 傾注하게되겠으나, 그 앞에 長歌를 本意로한 歌集에 對하야 簡單히 말해치우자면 歌詞集種類는 모다 歌詞만으로 되였고, 樂章歌詞는 그中에 思母曲과 新都歌와 같은 比較的 短型을 收拾한것이 있다하드라도 큰 變化를 볼수없이 長歌集本의 體裁를 잃지않었다.
그런데 短歌를 本意로 한 歌集이 되면 그와같이 單純하지 않고 若干 複雜한듯이 보이니 于先이것을 靑丘永言에서 例를 들어 보면 처음에는 短歌로부터 始作하야 主로 時調集의 趣意를 잃지않었으나 끝에 將進酒, 相思曲, 春眠曲, 勸酒歌, 白鷗詞, 軍樂, 觀燈歌, 襄陽歌, 歸去來, 漁父詞, 還山別曲, 處士歌, 樂貧歌, 江村別曲, 關東別曲, 黃鷄歌 梅花歌等 長歌를 부첬고, 南薰太平歌 亦是 이와같이 雜歌篇 (쇼츈향가 화가, 구사等),歌詞篇 (츈면곡, 상사별곡, 쳐사가, 어부사種)을 附末하엿으며, 古今歌曲은 短歌앞에 漁父詞, 感君思, 相杵歌, 關東別曲, 思美人曲, 續思美人曲, 星山別曲, 將進酒辭, 江村別曲, 閨怨歌, 春眠曲等을 載錄하였다. 이것들은 特別한것으로 附錄的 取扱을 한다하고도, 全般에 亙하야 아직 長短이 서로 混入하고 있음을 볼수있다. 이것은 거의 一般的傾向이니 一々히 書名을 들어 도로혀 煩雜케 할 必要가 없으나 一二 그 例를 들어 본다면 海東歌謠는 作家本意에 編纂되여 比較的 歌體에도 注意하야 同人作이면 짧은 것을 먼저하고 긴것을 뒤에 돌리는 態度를 取하였으나 卷末이 되면 多少 그 意識이 不分明하야저서
陽春이布德하니 萬物이 生光輝라 우리 聖主는 萬壽無疆하사 億兆- 願戴己하고 群賢은 忠孝하야 愛民至治하고 老少에 벗님네도 無故無恚커늘 名妓歌伴 期會하야 細樂을 前導하고 水陸珍味 五六駄에 金剛山 도라들어 絶代名勝 求景하고 醉한잠에 을니 에  늙은 즁이 邀我引導하야 吳楚東南景과 齊州九点烟을 歷々히 盤廻하며 其間에 英雄豪傑들의 자최를 무를쩍에 夕鍾聲에 어나고 朝飯을 재촉하야 望月懐陵으로 正菴齋室 霽月光風水 洛山等 玉流川에 塵纓을 씨슨後에 文殊菴 中興寺에 軟泡杯酒하고 晴日에 登臨白雲峯하니 咫尺天門을 手可摩-라 萬里江山 遠近風景이 眼底에 森羅하야 丈夫의 胸襟에 雲夢을 삼컷는듯브른 니리오니 簫皷는 喧天하야 洞壑이 울히는듯 山映樓 올라안자 花煎에 点心하고 伽倻ㄱ고 검은고에 가즌稽笛 섯겻는듸 男歌女唱으로 終日토록 노니다가 扶旺等 긴洞口에 軍歌으로 드러간이 左右에 섯는 將丞 分明이 반기는듯 往來遊客들은 못내부러 하돗드라 암아도壽城春臺에 太平閑民은 우리론가 하노라
와같은 長歌가 十二句短歌 사이에 混入하야 있음을 볼수있다. 그러나 이만한것은 海東歌謠에 있어서는 한 例外로 보겠지마는 靑丘永言이라던지 歌曲源流 같은데는 더욱 그 態度가 朦朧하였다.
그러면 歷代 歌集編纂者는 歌體에 對하야 全然意識이 없었던가 하면 그러치는 않었는듯하다. 앞에서 말한 것은 一部分的 缺点을 指摘한 것이고 全體의 主義로서는 그래도 어떤 意識이 움즉이고 있는듯이 보인다. 海東歌謠는 벌서 말하였거니와 古今歌曲도 長歌, 短歌를 確分하였을뿐아니라 短歌篇에 있어서도 大綱 짧은 것은 긴것보다 먼저 排列하기를 油斷하지 않었고 其他 다른 歌集들도 될수 있는대로 그 精神을 잃지 않을랴한 것이 보인다. 即 女唱類聚에 있어도 大體에 있어 그 主義를 踏襲하였고, 南薰太平歌도 그러케 混亂하지는 않었다. 다만 部分的으로라도 그만한 不整頓이 있었다는 것을 뒤에서도 말할바와같이 歷代의 歌集이 大槪 曲調와 作家와 및 그內容에 分類 編纂된 關係上 自然히 그 歌體는 어느 程度까지 犧牲되지 않을수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말하자면 歌體에 對한 意識이 編纂上에 充分치 몯한 탓이라고는 할수있다. 萬一 그意識이 分明하였드라면 設令 曲調, 作家, 內容에 分類 編纂된다 할지라도 좀 더 歌體에 用意할수가 있었을 것이고, 또는 오로지 歌體에 依한 分類編纂도 있었을 法도 하다. 要컨덴 問題는 意識有無에 있다하겠으나, 事實 또 歌集을 歷覽하랴면 大部分이 實際 唱曲에 主力을 두었다고도 할수있으니, 實際唱曲에 있어서는 或은 歌體 같은데에 用意하지 않어도 좋았을지 모른다. 그리하야 이것은 그다지 重視되지몯하고 다만 餘力으로서 整理 加功되지 않었는가 하니, 意識이 있었는 것은 否認할수 없으나 嚴密한 意味에 있어서는 아마도 그 意識이 充分하지 몯하였다 안 할수 없을듯하다.
2. 分類
分類는 歌集編纂事業에 가장 重要한 問題이고 또 編纂者에 依하야 몇 가지로라도 分類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으나 歷代 우리의 歌集編纂者는 大綱 曲調, 作家, 內容 三種에 分類編纂하야 왔다. 그中에도 가장 普遍的으로 쓰이 온것은 曲調分類法이니, 靑丘永言, 歌曲源流, 客樂譜, 南薰太平歌, 女唱類聚等은 다 그것이고, 그다음 取한 分類法은 作家에 依한 것인대, 海東歌謠, 東歌選等이 그것이며 內容分類法을 取한 것은 比較的 적어 古今歌曲에, 若干 그 色彩를 加味한 東歌選이 있을뿐인듯 하다. 그러면 일로서 도 벌서 어느 程度까지 歌集에 對한 編纂者들의 意識 全體는 엿보일 바와 같이 實로 그들은 作家보다도 內容보다도 더 曲調에 偏重하였든 것이다. 이것은 말할것 없이 唱曲을 重要視하야 編纂하였기 때문이 거니와 먼첨 歌曲源流에서 그 分類된 內容을 列擧하야 보면
羽調中大葉
長大葉(二中大葉)……(筆者 註)羽調二中大葉?
三中大葉………………(筆者 註)羽調三中大葉?
界面調初中大葉
二中大葉………………(筆者 註)界面調二中大葉?
三中大葉………………(筆者 註)界面調三中大葉?
後庭花

二後庭花
羽調初數大葉
二數大葉………………(筆者 註)羽調二數大葉?
中擧……………………(筆者 註)羽調中擧二數大葉?
平擧……………………(筆者 註)羽調平擧二數大葉?
頭擧……………………(筆者 註)羽調頭擧二數大葉?
羽調三數大葉
搔聳
界面調初數大葉
二數大葉………………(筆者 註)界面調二數大葉?
中擧……………………(筆者 註)界面調中擧二數大葉?
平擧……………………(筆者 註)界面調平擧二數大葉?
頭擧……………………(筆者 註)界面調頭擧二數大葉?
三數大葉………………(筆者 註)界面調三數大葉?
蔓橫

羽樂……………………(筆者 註)羽調樂時調?
旕樂……………………(筆者 註)旕樂時調?
編樂……………………(筆者 註)編樂時調?
界樂……………………(筆者 註)界面調樂時調
編數大葉
旕編
三十目으로 난후어 있다. 靑丘永言의 分類 項目도 元體에 있어서는 變함이 없지마는 後庭花, 臺, 二後庭花며 中, 平頭擧가 없는 代身에 普化葉, 北殿, 栗糖數葉, 言弄等의 項目이 있는것을 보겠는대, 또 여기는 羽調二數大葉, 栗糖數葉, 界面二數大葉, 弄, 羽樂時調, 界樂時調, 編數大葉等의 重疊이 있는듯하다. 南薰太平歌는 그 分類法이 훨신 簡單하야 卷頭에 낙시뇨, 롱, 편, 송, 소용 우됴, 후정화, 계면, 만수대엽 원사쳥, 잡가, 가사等 十二項目을 내세우고 本文에 들어가서는 처음에 낙시됴, 끝에 잡가, 가사의 項目이 있을뿐이다. 이것은 아마 낙시됴, 롱, 편 계면等은 曲調上의 區別이고 內容 그것에 있어서는 한首를 가지고 어느 曲調로라도 부를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인듯 하다.
다음 女唱類聚의 分類法을 보면 이것도 別다른 것은 없지마는 特히 女唱이라 하야 多少의 差違도 있는듯 하니 前에 依하야 그 項目을 列擧하면
羽調中大葉(우됴듕한입)
界面調中大葉(계면듕한입)
後庭花(후정화)
臺(대)
羽調長數大葉(우됴두자진한입)
中擧(우됴듕허리드자진한입)……(筆者 註)羽調中擧數大葉?
平擧(우됴막드진한입)…………(筆者 註)羽調平擧數大葉?
短數大葉(우됴존진한입)…………(筆者 註)羽調短數大葉?
要糖數大葉(밤엿진한입)
界面調數大葉(계면긴진한입)……(筆者 註)界面調長數大葉?
中擧(등허리드즌한입)……… (筆者 註)界面調中擧數大葉?
平擧(박즌한입)………………(筆者 註)界面調平擧數大葉?
短數大葉(죤즌한입)………………(筆者 註)界面調短數大葉?
弄(項目墜落)
羽樂(우락)
界樂(계락)
編數大葉(편자입한즌
(註) ( )內는前間氏藏本女唱歌謠錄에依함
十七項目에 난후었다.
그러나 曲調分類法은 歌集編纂上에 얼마만한 價値를 齎來하였는가. 曲調는 本來 音樂上의 高低, 長短이며 唱法을 規定한 것이고, 文學上或은 詩歌 形式上에서 區別한 名稱이 아닌以上 一首의 詩歌를 設令 羽調니 界面調니 中大葉이니 數大葉 어느것에 分屬식혔다 하드라도 果是 그詩歌를 그 曲調에 專屬 固定식힐수 있을가. 歌曲源流編者는 그 跋文에 詩歌와 曲調와의 關係를 明言하야
羽界, 本非係着者, 亦推移有權變之道, 唯在歌者之變通, 而或以羽爲界, 以界爲羽, 數大葉, 弄, 樂, 編, 互目推移歌之, 非徒以譜上名目偏執可也, 韻彙之平上去入高低淸濁, 亦有權變合勢之理也, 且所謂女唱辭說, 亦非女唱坪係着者也 男唱辭說中, 移以爲之者也, 亦非念理通神者則, 不可解得者也爾 [註十五]
라하야 曲調는 詩歌를 規定할수 있는것이아니고 一首의 詩歌는 如何한 曲調에라도 歌者 마음대로 推移唱出할수 있다하였다. 이것은 歌曲源流 編者와 같은 歌學權威者의 한말이니 充分히 信用할수 있다 하겠거니와 일로 보면 曲調分類法은 그 根據가 實로 危險한듯이 생각된다. 그러면 歷代 編纂者가 즐겨 이 分類法을 쓴것은 그 理由가 어데 있었는가. 歌曲源流 編纂者도 曲調와 詩歌의 關係를 認識하고 있으면서 敢히 取하였다 한다면 우리는 그中에서 무엇을 把握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나, 아직 그를 闡明히 할수는없지마는 이것은 아마 그 詩歌를 그 曲調에 固定한다는 意味가 아니라, 다만 그 曲調에 比較的 適當한 詩歌를 分配함에 그치지 않었는가 한다.
다음 作家에 依하야 分類 編纂한 歌集에는 海東歌謠와 東歌選이 있다 함은 앞에서도 말 하였거니와 歌集은 어느 意味에 있어 立體的으로 平面的으로 모든 歌人 作品을 一堂에 集合한 것이라 볼수있으니, 이것을 作家에 依하야 分類를 試한 것은 實로 的實한 方法이라 할수있댜. 그리고 人物은 또 그 自身에 있어 時代를 意味하는 것이 되여 作家分類法은 제절로 年代的으로 分類하는 것이 되겠으나, 編纂者는 이것도 잘 意識하고 있었던 것이다. 卽 海東歌謠에서 그 例를 보면 모든 作家 百餘名을 麗朝, 本朝에 난후어 麗朝에 李穡, 鄭夢周, 孟思誠, 三人을 올리고 本朝에 들어와서는 太宗, 成宗, 孝宗, 肅宗, 四大王을 먼저 推戴하고, 다음에 國初의 金宗瑞, 成三問, 朴彭年, 王邦衍等으로부터 始作하야 順次로 後代에 미처 最後 本人과 無名氏에 이르렀다. 東歌選도 처음에는 曲調의 說明格으로 金光煜外 數人의 作品을 年代의 順位도 없이 羅列하였지마는 第二張재부터는 太宗, 孝宗, 肅宗, 三大王을 推戴코 高麗의 吉再, 李穡, 元天鍚, 李存吾, 李兆年을 가지고왔으며 그다음에 比較的 作家에 信用이 적은 郭輿며 乙巴素, 薛聰, 崔冲, 成,, 忠, 禹倬等의 作家를 揷入하고는 本朝에와서 孟思誠, 金宗瑞,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兪應孚, 金宗直의順으로 後代에 미처 金裕器, 金聖器, 尹淳, 李鼎輔, 其他 妓女와 無名氏에 이르럿다.
일로 因하야 歷代의 作家는 一歌集內에 整然히 羅立하야 年代的으로 詩歌를 鑑賞할수 있고, 또 一 個人의 作品은 한곳에서 充分히 玩味할수 있다. 그러나 이들 歌集에 있어서도 曲調와는 完全히 因綠을끈을 수는 없는것 같하야 처음에는 반드시 曲調의 몇을 내어 例示한 것을 볼수있으니, 東歌選에도 初中大葉, 二中大葉, 北殿, 初數大葉, 二數大葉의 歌例를 들었었지마는 海東歌謠에도 亦是 初中大葉, 二中大葉, 北殿, 二北殿, 初數大葉, 二數大葉의 六目을 들어서 各一首式-二數大葉에는 없는것 같지마는-그에 無記名으로 配當하였다. 이것은 勿論 卷初의 小部分으로 거의 歌集 全體에는 影響이 없겟지마는 作家分類의 歌集에서도 그와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또한 黙過할수 없다.
그리고 最後로 內容에 依한 分類編纂에 對하야 一言하야 두겠다. 內容的 分類란 것은 全然 文學的 意識에 立脚하야 分類한 것이라 보겠으나, 이에 屬한 歌集은 가장 적어 古今歌曲이 있을뿐이란 것은 앞에서도 말 하였지마는 古今歌曲은 短歌 二百四十六首를 人倫, 勸戒, 頌祝, 貞操, 戀君, 慨世, 寓風, 懷古, 歡老, 節序, 尋訪, 隱遁, 閑適, 讌飮, 醉興, 感物, 艶情, 閨怨, 離別, 別恨, 二十項目에 난후고, 다시 三十四首의 蔓橫淸流와 十四首의 自作 短歌를 附載하였으나, 그 二十個의 分類項目이란것은 거의 短歌 全體를 能히 包容할수 있는 精密한 分類法이라 할수 있다. 지금各項目에서 第一首의 一首式을 引例하야 編者의 이에 對한 意織을 밝히 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니나흐시고님군이먹이시니이두분恩惠하날아이업다이몸이죽기를限하야아니갑고어이허리 (人倫)

길흘듸몰나거리여셔바자니니東西南北의갈길도하고할샤알픠셔가사아뎡길어잇니 (勸戒)

泰山이다니여슛돌만치되올지나黃河水다여위여만치되올지나그제야父母兄弟를여희거나말거다 (頌祝)

楚江漁夫들아고기낙가지마라屈三閭忠魂이드러니魚腹中의아모리鼎鑊의은들니글줄이이시랴 (貞操)

江山을됴히녀겨내비록노닐진들님향마이야어니즐소니胸中의一片丹心은하이말아시리 (戀君)

춤을추려고宇宙間의니러셔니扶桑若木의매걸려못출노다두어라니러션타시니우즐겨나보리라 (槪世)

黃河水다터니聖人의나시도다草野群賢이다니러나단말가어즈버江山風月은누를주고니거니 (寓風)

天地언졔나며興亡을뉘아더니萬古英雄이몃치나지나거니아마도一片明月이네나알가노라 (懷古)

靑春少年들아白髮老翁웃지마라공변된하아래넨들엇마져머시리우리도少年行樂이이런듯여라 (歎老)

츤블긋블긋닙흔프릇프릇이내마음우즑우즑고야春風은불고도낫바건듯건듯노라 (節序)
가을비을마오리雨裝直領내지마라十里길엇마가리전나귀모지마라가다가술집에들면갈동말동여라 (尋訪)

자다가ᄭᆡ니窓밧긔아왓다不老草왓오니혜실가마실가그아蓬萊山아로다슈고로이왓도다 (隱遁)

山됴코물됴흔곳의바회지혀집짓고아래고기낙고구름속의밧츨가니生理야足가마블을일은업셰라 (閑適)

오날이무날고一年의니로다百年을살아야百日을즐기리니百年을살동말동人生이아니놀고어이리 (讌飮)

술아네그르다네글은줄내니르마네아닌젼의아니端士러냐醉야미친말하고ᄭᆡ온後의뉘웃노라 (醉興)

花灼灼범나뷔雙々柳靑々괴고리雙々날즘성긔즘생다雙々다마엇지타이내人生은혼雙이업니 (感物)

燈盞불그므리갈졔窓前너머드던님과새배달뎌갈적외다시안아누은님은이몸이가니된들니즐줄이이시랴 (艶情)

綠楊은실이되고黃鶯은북이되야渭城三春의나니의실음누고셔綠陰芳草를勝花라하더니 (閨怨)

別路雲初起하고離亭葉正飛라슬프다사은기력이만못도다千里의不作一行歸니그를슬허노라 (離別)

슬프다우즘ᄉᆡᆼ늣겁다부바람月黃昏계워갈제일일이愁思로다풀긋희이슬이쳐눈물듯리라 (別恨)

以上은 各項目에서 選擇의 與否없이 第一首를 引出한 것이지마는 그 分屬의 適實함을 알겠으며 同時에 그 分類種目이 精妙함을 諒得할수 있다.
그런대 이 內容에依하야分類編纂한 歌集에 더 한가지 말 해 둘것이 있다. 그는 앞에서 말한 東歌 選인대, 이것은 벌서 紹介한바와 같이 元體는 作家分類를 取한 것이지마는 每首 밑에 다시 그內容을 指摘한 것이 있으니, 實例로써 說明에 代하면 金宗瑞作에
朔風은나무긋테불고明月은눈속에듸萬里邊域에一長劒집고셔셔긴람큰한소에거칠거시업서라 壯
과 같이 「壯」이라하였고, 또 그다음 成三問作에는
首陽山라보서夷齊를恨노라주려죽을진들採薇도것가아모리푸새엿거신들긔뉘헤낫더니 慨
와같이 「慨」라하야 그 內容을 指摘하였는대, 이러한 것을 주모아 보면 遺意, 意(遺意), 嘆, 忠, 懷古, 古(懷古?), 隱逸, 隱(隱逸?), 思, 問答 問(問答?), 帝, 慨, 述, 老, 壯, 咏, 孝, 昇, 豪, 景, 興比, 別, 酒春, 橫(蔓橫?), 樂時調, 蔓橫의 二十八種目이된다. 이中에 橫, 樂時調, 蔓橫은 曲調의 名稱이고, 意, 古, 隱, 問은 各々 遺意, 懷古, 隱逸, 問答의 重疊인듯하니 이들을 除去하드라도 아직 二十一目이 되거니와 이것의 所屬詩歌와의 關係 및 古今歌曲에서 分類한 項目과의 比較는 繁雜을 덜기 爲하야 여기서는 約하겠지마는 大體에 있어 彼此의 類似함을 알겠고 純全히 內容에 依하야 分類編纂하지 않은 다른 歌集에서도 그러한 意識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라하겠다.
以上 曲調, 作家, 內容에 依한 分類에 對하야 編纂者의 意識을 보았다. 各其 分類에 對하여는 조곰더 批判을 加하야 그 意識을 分明히 할 必要가 있었는듯 하나, 大綱 일로서 古編纂人의 分類意識을 알겠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文學에 對한 意識도 얼마큼 窺察할수 있었을 듯이 一言以蔽之하면 分類에서는 그量으로 보아 作家와 內容에보다도 曲調에 置重한 關係上 잘몯하얏드면 文學的 意識이 犧牲되지 않었을가 하는 危險을 느끼게 한다 하겠다. 그리고 以上의 分類는 主로 短歌群의 分類가 되었겠지마는 다시 長歌와 混編하였을 境遇에는 이 밖에 歌體에 依한 分類法도 있을法하다는 것을 想像케 한다.
3. 作家
作品과 作家는 떨어질수 없는 關係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시 말 할것 없지마는 時代가 지내고 오래 되면 많은 作品 가운대는 不識不知間에 그作家를 잊어 바리는수가 없들 않다. 더욱이 短歌와 같이 口誦되여 傳하기 쉬운것에 있어서는 決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作品을 正當히 理解하는대는 반드시 그作家를 要求하는것도 贅言을 要하지 안하는 것이니 그러한 現象은 있어 좋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될수 있는대로 그 防止에 힘써서 어떠한 形式으로라도 作家를 保存하지 않으면 아니될것인대 歌集編纂者야말로 그 責任의 當路에 있다 하여 可할 것이고, 또 充分한 意識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遺憾스럽기도 過去 우리 編纂者들은 充分히 이點에 意識을 가지고 잇지 몯한이도 있는듯이 보인다. 于先 이들로서 들어 보면 樂章歌詞, 客樂譜, 南薰太平歌, 古今歌曲 編纂者들이니, 樂章歌詞같은 것은 大部分이 宮中 歌樂에 쓰이는 歌詞이니까 編纂者가 조고만치라도 그 意織이 있었다 하다면 그時代에서는 作家를 찾아 記錄하야 둘수 있었을 것이고, 南薰太平歌, 古今歌曲도 比較的 後代에 와서 編纂된것이니 다른 歌集을 參考하드라도 얼마쯤은 그作家을 밝혀 두지 몯할理 없을 것이다. 그런대도 不拘하고 全然 作家의 記名이 없다는 것은 要컨대 作家에 對한 意識이 없는 所致라 하겠거니와 이들歌集은 다 無記名한대로 各其 主義에 依하야 作品을 羅列하고 말았다. 其他 歌集에 있어서는 힘 다가는데까지의 注意는 한것이 보이는대 左에 各歌集에 나타나는記名作品數와 作家數를 表示하여 보면

歌 集 總作品數 記名作品數 作家數
靑丘永言 ※九九八 三○六 一三八
海東歌謠 ※八八三 五六八 九九
歌曲源流 六二六 二一三 一二二
女唱類象 一七八 二九 二三
東歌選 二三五 九二 一一二

※京城大學本五六八首에다가李熙昇氏藏本에依하야無名氏三一五首를加하였다.
※便宜上끝에添附한長歌十七首는빼었다.
以上과 같이 되여 總作品數의 大約半이 記名되여 있다 할수 있으나 各歌集 作品은 서로 重出함이 많음으로 作家數는 右表 總數 四九四에 重疊된것을 빼고보면 實數는 一九九 밖에 되지안는듯 하다. 即簡單이 말하면 歷代 編纂者는 大約 二百人의 作家를 意識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無記名의 作品에서도 果然 無名氏냐 名氏냐를 探求하야 그에對한 編者의意識을 檢討할 問題도 있겠지마는 여기서는 問題를 훨신 좁히서 이 記名된 作品의 作家에 對하야 編纂者의 意識程度를 究明하기로 하겠다.
于先 作家를 列錄하야 보면 乙巴素, 成忠, 薛聰, 郭輿, 禹倬, 崔冲, 鄭知常, 李兆年, 李存吾, 徐甄, 元天錫, 崔瑩 李穡, 圃隱母堂, 鄭夢周, 吉再, 孟思誠, 鄭道傳, 趙俊, 李之蘭, 成汝完, 成石磷, 卞季良, 黃喜, 太宗, 李稷, 金宗瑞 南怡, 端宗, 成三問, 朴彭年, 柳誠源, 河緯地, 李塏, 兪應孚, 月山大君, 金時習, 王邦衍, 成宗, 朴誾, 金宗直, 趙光祖, 金宏弼, 金馹孫, 徐敬德, 朴英, 李賢輔, 李彥廸, 曺植, 洪暹, 盧守愼, 李滉, 洪春卿, 安珽, 宋純, 宋麟壽, 趙岦 宋寅, 嚴昕, 成昌世, 李後白, 李陽元, 金玄成, 高敬命, 成守琛, 成渾, 成運, 奇大升, 申光漢, 鄭澈, 李珥, 金麟厚, 徐益, 洪廸, 李德謦, 李恒福, 林悌, 李濟臣, 柳自新, 申欽, 李廷龜, 李廷蓋, 趙纉韓, 權韠, 李安訥, 金■, 洪瑞鳳, 李舜臣, 金尙容, 金尙憲, 趙存性, 趙憲, 金長生, 翼李元, 朴明賢, 楊士彥, 林晋, 梁應濎, 金應鼎, 李仲集, 金光煜, 具仁垕, 鄭太和, 蔡裕後, 尹善道, 鄭斗卿, 姜栢年, 曺漢英, 孝宗, 白光勳, 鄭述, 韓濩, 張晩, 鄭藴, 洪翼漢, 林慶業 李明漢, 鄭忠信, 金應河, 金堉, 李浣, 積城君, 麟坪大君, 朗原君, 李華鎭, 李貴鎭, 許珽, 肅宗, 宋時烈, 南九萬, 李澤, 柳赫然, 朴泰輔, 具志禎, 金聲■. 申請夏, 金昌業, 儒川君, 尹斗緖, 兪崇, 李廷變, 朴仁老, 張炫, 朱義植, 金三賢, 金昌翁, 許橿, 金裕器, 金聖器, 張翼鵬, 英祖, 趙顯命, 朴後雄, 李在, 李渘, 尹游, 尹淳, 趙明履, 李鼎輔, 金天澤, 金壽長, 金相玉, 金煐, 李勉,昇, 吳擎華, 李敏淳, 金時慶, 李廷鎭, 鄭壽慶, 翼宗, 申喜文, 金致羽, 金箕性, 金祖淳, 趙慶濂, 白景炫, 金鼎禹, 具容, 朴孝寬, 安玟英, 宋宗元, 永恩府院君, 朴英秀, 李象斗, 任直, 朴尙侃, 柳希齡, 眞伊, 紅粧, 笑春風, 寒雨, 求之, 松伊, 梅花, 多福, 明玉, 千錦, 桂娘等이된다. 나타난 그대로 보면 時代는 三國時代에서 李朝末期에 이르고, 階級으로 말하면 우흐로 國王 大君에서 밑으로 庶人 妓女에 이르럿다 할수 있어 形式만으로는 全時代를 貫通하고 全階級을 綱羅하였다. 그러나 이들 所謂 作家는 皆悉 그作品의 作家임에 틀림이 없을가.時代的으로 말하면 果然乙巴素, 成忠, 郭輿, 薛聰 같은이의 作家가 있었을가 하는 것이 問題고, 歌集과 歌集을 比較하여 볼때는 그 作家에있어 적잔은 衝突을 發見할수도 있으니, 이런것들도 重大한 問題이지마는 너머 張皇한 嫌도 없지 않으니 따로 다른 機會로 미루고 여기서는 그러한 事實이 있다는것만을 말해 두고 모든것을 省畧하야 다만 歌集에 나타난 그대로의 編纂意識을 말해 볼가 한다.
첫재 作家의順位는 作家分類에 依하야 編纂된 海東歌謠, 東歌選 같은 것은 勿論이지마는 靑丘永言같은 데도 大綱 時代順으로 하고 列聖 御製에 對하여는 特別히 尊敬하야 時代를 超越하야 모든 作家앞에 올림을 잊지않었다. 海東歌謠를 보드라도 麗朝에 李穡, 鄭夢周, 孟思誠, 三人이 보이고, 本朝에 들어와서는 金宗瑞, 成三問 앞에 太宗, 成宗, 孝宗, 肅宗을 올렸다. 또 靑丘永言에도 成忠, 乙巴素, 禹倬, 崔冲 以前에 太宗大王, 成宗大王, 孝宗大王, 肅宗大王, 翼宗大王이 있다. 其他 歌集에 있어서도 大體로 이에 準하였다 할수있다. 그리고 妓女와 같이 社會階級上 多少 賤待를 받든이들은 이 亦是 特別 取扱을 받아 끝에 或은 中間에 모라부치는 것이 普通이다.東歌選은 最後에 가지고와 無名氏를 그다음에 달고 靑丘永言은 끝에 申喜文 다음에 眞伊以下 八妓를 가지고 왔고, 海東歌謠 에는 趙存性과 朴明賢의 사이에 眞伊以下 名妓九人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歌集의 一般的 傾向이라 할수있고 曲調分類法을取한 歌集 같은데서는 반드시 그러치 않을 수도 있었다. 일터이면 歌曲源流같은 데서는 全然 그러한 意識이 없이 帝王의 作品이라할지라도 아모 區別이 없이 各其 曲調에 依하야 配列하얐고 妓女의 作도 그리하얐으며, 靑丘永言에도 또한 自然 그러한 例가 없지 않을수 없어 肅宗大王 御製가 다른 틈어 섞이고, 妓女의 作도 若干 散在하야 있는 것이 있다.
다음 書名位置는 大約二種이 있는대, 하나는 그作品앞예 그作家를 쓰고, 하나는 그作品 끝에 그作家를 쓴것이다. 海東歌謠며 東歌選은 前者의 形式을 取하였고, 歌曲源流는 後者의 形式을 取하였으며, 靑丘永言은 元體에 있어는 前者의 形式을 取하였으나 間或 後者의 形式을 取한 것도 있다. 그리하야 그 作家에 簡單한 그畧歷을 割註하야 두었다. 그 一例를 들어 보면
曹 植 字健仲號南溟 中宗
朝以遺逸累拜終不就
三冬에뵈옷닙고巖穴에눈비마자구름볏뉘도젹이업것마는西山에지다니눈물겨워노라

三冬에븨옷닙고巖穴에눈비마자구름볏뉘를젹이업것마는西山에지다니눈물겨워노라 曺植字健仲號南溟 中宗隱居 宣廟贈領相謚文貞

前者는 海東歌謠式이고 後者는 歌曲源流式이다. 그러나 畧歷割註는 모든 作家에 다 그러케 한것이 아니고 말 하자면 作家中에 編者가 그畧歷을 아는者에게만 하였고, 作者는 아지마는 그年代와 畧歷을 아지몯하는 者에게는 다만 이름만을 記하였다. 그리고 같은 作家가 두번 以上 나올 때는 歌曲源流 에서는 「見上」이란 割註를 빼지 않었다.
以上으로서 大綱 歷代 編纂者들의 作家에 對한 意識 程度를 보면 或 어떤데에 있어서는 作家를 明記하고 畧歷까지를 割註한 것도 있지마는 大體에 있어는 記名된 것도 아직 檢討의 餘地가 있는듯 하고, 어떤 歌集에서는 全然 作家의 記入이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는 一般이 그 意識이 充分하지 몯하였다는 一言으로 評할것 같다.
4. 原作
歌集編纂에 있어서는 그作品의 그作家도 重要하지마는 또 그原作도 等閑히 할것이 몯된다. 그런대 우리는 歷代歌集을 들고 볼때 이方面의 意識이 퍽도 不足함을 깨닷지 안할수 없다. 첫재 한책에 歷代의 作品을 모았다 한다면 自然히 其間에 時代에 依한 音韻上 變遷의 形跡이 보이야 될것인대 아모 이를 感得할만한 것을 發見할수 없다. 高麗때의 作品이나 近代의 作品이나 거의 作者를 두고는 어느時代 作品이란 것을 알 道理가 없게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各歌集은 各其 意志대로 原作을 刪補하야 自己의 말, 甚하기 말하면 自己의 作品으로 改作하고 말았다고도 할수있다. 그러므로 歌集에 載錄된 作品 그대로는 암만하여도 作者의 原作을 맛볼수 없고 딸아서 作者를 誤解하야 作者를 爲해 遺憾되는 일이 적지 아니하다. 저 有名한 尹孤山의 五友歌中 가장 言語의 美를 다하였다 보이는 石歌
고즌므스일로퓌며셔쉬이디고플은어이하야프르누르니아마도변티아닐바회뿐인가노라
가 時調類聚같은데서도
무슨일로픠여셔쉬이지고풀은어이여프르누르니아마도變치아닐바회인가노라
와같이 訛記되는것을 보면 歌集編纂이란 것이 容易치 안하다는것은 알수 있으나 歷代 編纂者는 何如튼 그意識이 不足하였다. 左에 二三 어느 것이라 選擇할것 없이 뽑아 그 原作에 對한 態度를 볼것같으면 退溪의 陶山六曲 其五
山前에有臺하고臺下애有水-로다만뎌기오명가명거든엇다다皎々白駒머리마고
가 海東歌謠에서는
山前에有臺하고臺下에ㅿ有水-로다만흔갈멱이는오명가명하거든엇ㅿ덧ㅿ타ㅿ皎々白駒는머리음ㅿ는ㅿ이ㅿ
로 되였고, 靑丘永言에서는
山前에有臺하고臺下에ㅿ有水-로다만흔갈먹기오ㅿ며ㅿ가ㅿ며ㅿ하거니엇ㅿ더ㅿ타ㅿ皎皎白ㅿ鷗ㅿ멀ㅿ니ㅿ마음ㅿㅿ니ㅿ
로 되였다. 發音에 큰 差異가 없는 文字上의 變形은 아직 그만두고도 「엇다다」가「엇더타」,「고」가「나니」와 같이 單語의 音韻 乃至 意味上의 變改이 있고, 甚하면 「白駒」가「白鷗」로도 아모 疑心이 없이 變하였다. 또 松江의 時調
새원원되여되롱갓삿메오이고細雨斜風의一竿빗기드러紅蓼花白蘋洲渚의오명가명노라
는 靑丘永言에
新ㅿ院ㅿ々ㅿ主되여되ㅿ롱ㅿ이ㅿ삿ㅿ갓ㅿ메ㅿ고ㅿ細雨斜風에一竿빗기드러紅蓼花白蘋洲渚에오ㅿ며ㅿ가ㅿ며ㅿㅿ리ㅿ라ㅿ
로 되였고.
새원원되여柴扉고텨닷고流水靑山을벗사마더뎟노라아야碧蹄예손이라커든날나가다고려
는 海東歌謠에
新ㅿ院ㅿ々ㅿ主-되야柴扉를곳쳐닷고流水靑山을벗삼아더졋노라아희야碧蹄예손이라커든날나가다닐ㅿ러ㅿ라ㅿ
로 되였다. 또 朴仁老의 時調
王祥의鯉里잡고孟宗의竹筍거검던멀리희도록老萊子의오입고一生애養志誠孝를曾子치리이다
는 各歌集에 다음과 같이 訛傳하였다.
王祥의鯉魚엇ㅿ고ㅿ孟宗의竹筍것거감든말이희도록老萊子의옷슬닙고一生에養志誠孝를曾子치ㅿ이ㅿ라ㅿ(海東歌謠)

王祥의鯉魚낙ㅿ고ㅿ孟宗의竹笋것거감든머리희도록老萊子의옷닙고平ㅿ生ㅿ에ㅿ養志誠孝를曾子치ㅿ리ㅿ라ㅿ(靑丘永言)

王祥에鯉里잡고孟宗에竹筍것거감든머리희도록老萊子의옷슬닙고平ㅿ生ㅿ에ㅿ養志誠孝를曾子갓치ㅿ리ㅿ라ㅿ(歌曲源流)

王祥의鯉魚잡고孟宗의竹笋것거감던마리희도록老萊子의옷슬입고平ㅿ生ㅿ의ㅿ養志誠孝을曾子가치ㅿ리ㅿ라ㅿ(客樂譜)

왕상의니어낙ㅿ고ㅿ둉의쥭슌걱거감든머리ㅿ발ㅿ토ㅿ록ㅿ노의옷슬입고일에양지셩효를중갓치(南薰太平歌)

왕상에니어낙ㅿ고ㅿ둉의쥭슌것거감든머리희도록로의옷슬입고평에양지셩효를중갓치ㅿ리ㅿ라ㅿ(女唱歌謠錄)
이와 같이 原作 或은 比較的 原作에 가깝다 信用할수 있는 것을 標準삼아 各歌集에 傳載된 것을 比較하야 보면 거의 嚴密한 意味에 있어 하나도 原作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하여 可할 듯 하다. 이것 要컨댄 編纂者가 原作에 對한 意識이 不足하야 그原作을 叅考할 사이없이 一般이 口誦하고 있는것을 그대로 信用하고, 또 多少語句上 疑心이 있을때는 自己의 意思대로 删正하야 버린탓도 있겠고, 또 後人의 傳寫時의 誤寫도 있겠지마는, 이點은 우리들이 歌集에 對하야 甚히 不安을느끼는바이고 또 將來에 操心을 要하지 않으면 안될 問題다.
5. 分節
朝鮮詩歌의 形態는 歌辭體와 같이 全然 分節할수없는것도 있지마는 이런것은 도로혀 例外라 할수있고, 一般은 大槪 各其 獨特한 形式으로서 얼마에 分節할수있다. 長歌에 보드라도 景幾體歌는[註十六] 一首가 몇章으로 난후이고 一章은 다시 前節 後節에 난후어지며, 短歌에서는 일터이면 時調가 初, 中, 終章 三章에 난후일 것은 明若한 일이나 이러한 形態上 分節이 歌集編纂者에게 意識되여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여기서 삷혀 볼가 한다. 먼첨 長歌集인 樂章歌詞에서 보면 이 意識이 大體에 있어 나타나 있음을 볼수 있을듯 하다. 이를터이면 感君恩은 四章, 鄭石歌는 十一章 靑山別曲은 八章, 西京別曲은 十四章에 分節되는 것이나 各章을 別行에 쓰든 안 햇지마는 各章사이에는 ○標를 두어서 各章의 分節을 分明히 하였고 景幾體歌에서도 各章은 勿論 前例에 依하야 ○標로서 分節하였지마는 一章內의 前後兩節에까지도 「葉」이라는 小字를 傍書하야 그 連繼을 區別하였다. 한낱 翰林別曲第一章에서 例를 들어보면
元淳文仁老詩公老四六李正言陳翰林雙韻走筆冲基對策光釣經義良鐘詩賦위詩塲ㅅ景긔엇더하니잇고琴葉學士의玉箏門生琴學士의玉箏門生위날조차몃부니잇고○
와 같다. 이와같이 樂章歌詞는-漁夫歌와 같이 當然히 十二章에 分節될것이 分節되지 않은채로 있는것도 있지마는- 大體에 있어 그意識이 明確하였다.
그러나 短歌集이 되면 이方面이 實로 不分明한듯 하다. 不分明하다는 것보다 차라리 그 意識이 全然없었는 것이 大部分이다. 卽 海 東歌謠와 같이 編纂意識이 여러 方面으로 充分히 活動하여 있는歌集에 있어서도 아마 이것만은 等閑히 한듯하야 아모 分節이 있는것을 볼수 없고 靑丘永言이며 東歌選等도 大部分이 分明틀 몯 하였다. 古今歌曲은 아직 그 原本을 接見치 몯하였으니 詳細한것은 勿論 알수없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 複寫本에는 亦是 分節의 痕趾이 보이지 안는다. 그런대 歌曲源流, 南薰太平歌, 客樂譜만은 比較的 그 意識이 明曢하게 나타난듯하니, 歌曲源流는 一首의 時調를 大槪 五章에 分節하였다. 이것은 時調를 노래로 부를때 五章에 난후어 볼으고, 本歌集이 主로 唱曲을 爲하야 編纂된 탓이라 싶으나 지금 그 分節된 狀態를 實例에 依하야 보면
黃河水맑다터니 聖人이시도다 草野群賢이다이러난단말가 어즈버 江山風月을누를쥬고이거니
와 같다. 이러한 分節이 本歌集에 있어서는 決코 잘몯된 例外가 아니고 一般的 主旨인듯이 보인다. 이에 對하야 南薰太平歌는 大部分은 分節하지 않었지마는 처음 四張에는 各首를 三章에 分節하야 章과章사이에는 句點을 찍어 分章을 明確히 하였다. 이亦是 例를 들어보면
간밤에부든바람만졍도화지거다, 아희는뷔를들고스로랴는고야, 낙화들고지아니랴스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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