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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예술과 농촌 오락의 진흥책―조선 향토예술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향토 예술과 농촌 오락의 진흥책―조선 향토예술론― 鄕土藝術과農村娛樂의振興策―朝鮮鄕土藝術論―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이능화 李能和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4 昭和十六年四月
면    수 213 (213)
기사
總督府朝鮮歷史編修官 無能 李能和
世界各國이 各其 民族性을 따라 歌舞 其他 藝術이 自然存在하야 一國의 風俗을 이루운 것이다. 우리朝鮮에도 古來로부터 傳來하는 鄕土娛樂의 藝術을 볼때에 趣味津々한것이 많이있다. 그러나 高麗中葉以後로부터 李朝五百年間에는 社會指導的地位에 在한者 卽 四民의 머리 되는「士」라는 者들은 다만 漢化에 醉하야 程朱의 理學이나 詩文이나 禮說等學에 沒頭하야 그 精神이 他事에 미칠 餘暇가 없든것이다. 그러니까 本土固有의 諸般藝術은 그 發生한 以來 그냥 그 모양대로 제멋대로 行해저 있었고 하나도 改良하거나 向上케하는 指導者는 없었든 것이다. 今般貴誌의 命題한 諸種藝術中에서 若干種을 試驗的으로 들어 보랴한다.
一, 歌舞
歌舞라는것은 世界의 어느民族 開明人 野蠻人을 勿論하고 다 있는것이다. 우리朝鮮에도 原始以來로 諸種 歌舞가 固有하니 그 歌舞의 發生을 推究하여보면 最初에는 巫祝으로 말미암아 된것이다. 原始時代에는 民智가 暗昧하야 神을 崇奉한것은 世界各國의 共通的이였으며 朝鮮 古代에도 巫風이 盛行하야 歌舞로써 神을 마저서 祝祭를 行하든것이다. 그리하야 巫祝은 社會上에 第一尊貴한 地位에 있었다. 中國도 그러하다. 中國古書書經에 이런말이 쓰여있다.
「敢有恒舞于宮, 酣歌于室, 時謂巫風, 疏曰以歌舞事神故歌舞爲巫覡之風俗也」
이것을 미루어보면 朝鮮原始의 歌舞는 巫風임을 窺知키 足하다. 朝鮮古代 三韓風俗의 一斑이 陳壽魏志에 보였으니 아래와같다.
「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 相隨踏地, 低昻手足, 相應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이것을보면 巫風과 農俗이 서로 섞이어서 歌舞娛樂을 이룬것이다. 卽今 朝鮮의 三南地方에는 이른바「두래農事」라하는 風俗이 存在하니 두레라함은 クミ(組)를 말한것이며 農村에서 五月쯤 모낼때에 두레를 짜가지고 今日은 甲家의 水田에 植付하고 明日은 乙家의 水田에 植付하나니 旗皷錚鈸로써 응덩춤(尻舞)을 추며 農歌 六字拍이 미노리 其他를하여 모를 심는다. 이것이 卽 朝鮮의 歷史的 民衆的 羣聚歌舞다. 年前에 白系露人等이 團成社에서 農舞를 演奏하는것을 보니까 우리朝鮮의 두레農功舞와 彷似한데 朝鮮舞보담 더 進步된것이다.
假面舞 卽 탈춤은 新羅 崔孤雲先生의 樂府詩에 獅子탈을 쓰고 춤추는것을 쓴일이 있고 高麗時代에는 탈을 쓰고 춤추는者를 廣大라 하였으니 此는 麗史에 나타난것이다. 大低 廣大에는 藝術의 特長이 있으니 卽今 俳優等者가 卽 그것이다.
舞童은 新羅時代 八關會(佛敎의一種法會)에 쓰든 樂舞니 高麗太祖가 此舞를 親賞保存하야 麗朝를 것처 지금까지도 存續하는것이다. 李朝高宗卽位甲子에 大院君이 當局하여 景福宮(今總督府)의重建을 始作하야 三四年間 繼續工事中에 京城鍾路 六矣廛(六主夫廛) 其他 商店 市井等은 各其 舞童牌를 짜가지고 工事場에 들어가서 興行하고 一方으로 六字拍이 개고리타령 梅花타령等 雜歌를 唱하여 役夫等으로 하야금 勞役의 苦를 이저바리게 할일이있다. 以上과 같은 歷史的歌舞에 對하야 그 振興策을 말하면 筆者의 意見으로는 歌에는 歌手, 舞에는 舞手로 하야금 指導케하야 들된것은 改良케하고 좋은것은 더 向上케 하는데 農村振興會等 機關을 通하야 獎勵하면 좋치 아니할까 생각한다.
二, 山祭
朝鮮의 山祭는 原始時代로부터 行해 나려와서 至今까지 變치아니 한것이다. 各部落마다 鎭山(主山)이 있으면 그 山上에 반드시 樹木있는곳에 祭壇을 設定하야 그 四至(周圍)에 왼색기를 꼬아서 둘러막고 종이나 불가지를 間間히 부치고이것을 「줄」(儉乼)이라한다. 儉乼은 神繩을 意味한것이다. 朝鮮語에 卽今 行用하는 神字는 卽 漢字外來語요 固有한 古語에는 神은 「」이라하였다. 「」(カム)은 內地에 流入하야 神을 表示하는 用語로 되었으니 今日國語에 「カミ」라는것은 卽 朝鮮語「」의 變化된것이다. 此는 內地人文學博士宮崎道三郞氏와 金澤庄三郞氏等의 考證한바도 있고 內地古書 出雲風土記等書에도 「カム」를 볼수있다. 朝鮮語의 「儉乼」과 國語의 注連繩(七五三或之米奈波)와는 亦是 共通性이 있을줄 믿는다 朝鮮古語에 神을 「」이라하는 證據는 무엇이냐하면 以上國語「カム」가 그 鐵證이 될만하며 또는 朝鮮語에 五色을 말할때에 綠은 草에서 紅은 火에서 白은 日에서 黃은 金에서 (古語金日那論見雞林類事)나오고 黑或玄은 「」에서 나왔다. 玄妙難測曰神이다. 또는 한 器皿이 깨여진것을 잘붙혀서 얼이없으면 쪽같다 하나니 此는 神接했다는 말이다. 朝鮮各部落에서 山祭를 지내랴면 陰曆十月이나 或은 五月中 中日字를 擇하야 祭員을 選定하되 生氣福德을 보아서하고 沐浴齋戒를 嚴肅히하고 夜間行祭時에는 낫낫치 部落民의 姓名을 들어 祝願을하면서 白紙一張을 燒上한다. 燒紙가 잘 上昇하면 그 當人의 一年家運이 吉하고 燒紙가 잘 오르지안코 땅에 떠러지면 不吉하다는 觀念을 가지는것이다. 이 山祭는 一名은 天祭라고도하야 一部落 居住民의 福利를 爲하야 行하는바니 亦是 民俗信仰의 一種이다. 現下神을 崇奉하는 이때에는 가장 適合한것이니그 振興策은 當局者가 어려니 講究할것이다.
三, 윳노리(擲柶)
朝鮮의 擲柶戲는 陰曆歲初에 盛行하는 娛樂인데 그 意味가 있을만큼 學者等이 그發生한 歷史를 硏究하는者가 많다. 年前에 米國시카고大學敎授 스타博士가 朝鮮에 來하야 各種의 風俗을 調査하는中 特히 擲柶에 對하야 여러가지로 筆者에게 質問함을 받았다. 스博士의 말을 들은즉 米國人士들이 朝鮮柶戲에 맛을들여서 마치 中國의 麻雀을 嗜好함과 같은 現狀이라한다. 筆者는이렇게 생각한다. 우리風俗에 歲初를 當하면 人人이 當年身數를 占치는일이 많은데 밤윳을 던저서 黑白의 재처지고 업처진것을 따라서 六卦策을보아 當年運命을 보는것이 卽 윳의發生한 始初가 아닐까한다. 或說에는 高麗忠宗王時에 宮人들이 命宮에 善星惡星을 알아내가지고 祈禳等事를行한것이라한다. 이 娛樂이 米國에까지 移出된것으로보아 더 硏究獎勵할 必要가 있는것으로 생각한다.
四, 씨름(相撲)
씨름이란것은 佛書涅槃經에도 보이고 漢武帝時史書에도 보임으로 世界的으로 久遠한 歷史를 가진것이다. 朝鮮의 씨름은 亦是 農村娛樂의 一種이다. 한여름 가운데서 피땀을 흘리면서 農事를 짓고 七月中元 卽 白衆날이되면 農夫들은 一日休暇를 利用하야 强力한 씨름으로써 娛樂을 삼는것이다. 그날은 한廣場을 擇定하여 가지고 老少男女가 다 모이여서 씨름을 구경하며 酒食으로써 醉飽하고 가장 强力者에 對하야 行賞을해서 農夫의 心事를 皷舞시키는것이다. 內地의 相撲이 存在할동안에는 朝鮮의 씨름도따라 發達向上하여 갈것으로 確信하는바이다.
五, 繩引(줄다리기)
줄다리기도 亦是 强力比較의 一種娛樂이오 또한 團體心 勝癖心을 생기게 하는것이다. 이편 저편을 갈러가지고 줄을 댕길쩍에 한편이 끌리기를 始作하면 그편 老少兒弱男女를 勿論하고 줄에 당겨붙어서 지지 아니하랴고 애를쓴다. 鄕土에서 亦是 歲初에 줄을 댕기는데 이런말도있다 이기는 편에는 그해 農事가 잘되고 지는 편은 農事가 잘못된다는 觀念이있다. 줄 댕기는것이나 편쌈이나 모다 兒童等의 작난으로 始作되어 어른의 쌈이 되는것이다. 이것도 保存할 必要가 있다. 禁止치만 아니하면 自然存續될것이다.
六, 鬪牛
西班牙國에 鬪牛시키는 風俗이 世界에 第一이란말을 들었으나, 朝鮮에는 特히 晋州에서만 此風이있다. 晋州人士等에게 勸勉하여 西班牙의 그것을參考함이 改良向上하는 方途가 아닐까한다.
七, 廣大
朝鮮의 廣大는 以上에 말한바와 같이 假面을쓰고 戲舞하는者니 이것은 卽今 日山臺舞의 系統이다. 그러나 山臺匠이와 廣大는 分離되었다. 廣大는 專業的으로 말미암은 藝術의 特長이 있다. 그러나 社會的地位로보면 賤待를 받은것도 事實이다. 卽今에 와서는 時代의 風潮를 따라서 俳優等은 社會의 貴客이 되었다. 藝術을 向上시키기 爲하야 廣大를 잘 養成할 必要가 있는데 此는 社會의 各劇團에 맡김이 第一得策일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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