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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시감―음악 비평과 연주자―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음악시감―음악 비평과 연주자― 音樂時感―音樂批評과演奏者―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김관 金管
출처정보 조선문단 朝鮮文壇
연    도 1935-05 昭和十年五月
면    수 137 (13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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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文壇編輯部依託은 「文學上에있어서의 音樂的形象」이란題이지만 期限까지 쓸수가없고 이러한音樂時感이라도 無放하다하니 이것으로이번은 代할수밖에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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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號「中央」에 실닌 音樂座談會 「樂壇回顧와展望」에 큰不滿을가지고 玄濟明氏가 中央日報에 (四月初旬)다가 讀感記를쓴일이있다. 其實은 正當한 讀感記랴하기보다 玄氏自身에關聯된 數個論點만을 들추어가지고 極力 辯護를하여노운 愚論이라고 하는것이 正當할것이다.
오날까지 내가 玄氏의 所論에對하야 黙過할여든것은 여러가지 理由가있었든것이다. 첫재는 一一이 그러한不快한 駄辯에 對答하는것이 점잔치아니한짓이고 둘재는 玄濟明氏는 그가特書하였든 바와같이 나의先輩가운데 一人인탓이고 셋재는 中央日報學藝部長의 親切한勸告를 고맙게 받었든탓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黙殺할여든 조고마한 이問題를 다시 여기서 끄집어낸것은 첫재 樂壇일에 어두운讀者에게 正當한理解를 줄수있는親切과 玄氏個人의 微微한問題로해서 該座談會全部를 一蹴할녀드는 玄氏의 狹隘한 ■毒的態度에 눈을감을수 없는데있고 따라서 演奏者가樂壇을 或은音樂을보는 頭腦의標本을 批判함으로서 反時代性格인 退嬰的樂壇雰圍氣를 排擠할여는 도음을가저 볼녀는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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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壇은 社會의 한토막을 占有하고 形成된 조고마한社會다. 가장平凡한소리다. 그러나 흔히 樂壇은 큰 社會라는것은 無視하고 사러왔다. 社會의 좋은 娛樂用具로서 어리광노릇은하여 왔지만은 社會의 국직한 팔(腕)노릇은 해본적이 稀有하였다. 이러한 溫室안에서 生育한音樂人이 읽는(讀)道程表는 恒常 그들周圍에서 一呎의圓을 그리지(描)못하는것을 우리는 經驗하여왔다.
溫室안에서 다름질을처 불여하였지많은 막히는곳은 언제나 溫室의담壁이였다. 마음껏 다름질을칠여면 溫室박으로 나와야겠다. 그러면 빠저나올門을 찾어야겠다. 偸安에머물느려는 凡夫가아닌以上 玄氏말같이 幼稚한樂壇에서는 樂壇人이 協同하여서 밟을길을 찾어야할것은 正當한일이다. 그座談會의 意圖는 그러한平凡한 그러나 가장重要한 우에쓴 이야기를 피(血)로하고꾸며진 樂壇時事批評이였다.
그러한 意圖를 推測(理解)치못하고 단지 自己個人에關한자미롭지못한 論點이있다고해서 (그도事實은 正當한科學的批評임에야) 卑怯하고 野淺한 感情의 魔神을타고 덤벼드는 醜態는 玄氏 스스로의 非人格的態度를 讀者에게 밝히는것밖에 아모것도아니다.
玄氏는 나와사히가 옛날에(五年前) 師弟之間이라는것을 좋은標榜으로 삼어서 叱責이나하듯이 가장高潔한척하는 耄碌에는 苦笑꺼리다. 지나치는말이나 荀子는 말하였다. 『靑出於藍而靑於藍』이라고-玄氏는 내나 尹君이 故意로 玄濟明이란 一箇의音樂者를 中傷시키히려는 惡心으로 꾸며놓은 兒戱的座談會로 認識하는듯 싶지마는 그것은 玄氏自身의 微溫的 低級한 社交的 人生處世의 態度로서보는 色眼鏡이 파뭇처있는탓을 알어야한다.
私的交涉으로 批評問題에다가 加減할것으로 아는當者가 愚劣하지안는가, 오날까지 나는 玄氏를 先輩의 한사람으로 人間的으로는 待遇와 尊敬을하여왔었다만은 그을 具王三氏가 婀娜하듯이 世界的歌手라고 生覺할수는 없었다. 人間的으로 親分如何한것과 藝術의優劣은 한눌(天)과 따(地)의問題이다.
先輩는 先輩답게 善處하는것이 무릇紳士다. 들으니 玄氏는 내나 尹君에게對한 人格的中傷을 宣傳한다하니 나로서는 오날까지에 품à나로서 先輩를 待하는 禮節은 바람에 날녀보내는 것을 哀惜하게 生覺하지알케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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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樂壇이 過去에있어서는 暗流가 흘너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否定할수없는 事實이다.
座談會대로 米國派와 日本派가 對抗的氣勢를 가저온것도 事實이다. 僥倖이玄氏가 그것을 몰느고지내왔다면, 그것은 오직 安價의幸福이다. 樂壇裏面史를 長遑하게 들출 必要까지느끼지 아니한다. 玄氏가 米國派니 日本派니한것을 樂派云云한것은 角度가다른 觀察의相異고(樂派를말함은아니다) 따라서 米國이나 日本에있어서의 音樂은 다가치 歐羅巴音樂을 輸入한것이니가 米國派니 할것은없고 國際的이란것으로 가장가볍게 理解를하고있다. 그러한 脫線까지애서라도 玄氏의常識은 零以下이다 웨냐하면 音樂은絶對로 國際的은아니다. 音樂은 民族을 超越할수없는것이다. 玄氏는 「뉴니버-살」과「인터내쇼낼」을 混同하고 區別使用치못한다. 國際性이란것은 오날 우리가 볼수있는 風俗, 習慣等이 國際的이란 用語밑해서 씨우게되는것은 資本主義組織의 태카단스가招致한 世界各國의 社會的 現象의一致이고 그것은 모든 文化形態의 乖離를 縮小한데서 생겨난것이다. 그럼으로 가령 日本과 米國의 音樂은 그들은 類似點은가지고있다한들 决코 同一하지는안타.
그類似性이란 民族을 周繞하는 社會的環境이 相似한데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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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演奏家가 座談會에對한 不滿으로 生覺한다면 玄氏의今番輕率은 가볍게 取扱하였을것이다. 그러나 우에말하듯이 演奏家들이보는 樂壇에對한 觀察眼이란 大部分이 皮相的인것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놀낼것은 아니다만은 大體로 工夫(硏究)를 아니하는것은 옛부터 有名한이야기다.
따라 玄氏의 尹君이 指摘하듯이 『바그넬리슴』的王冠을抛棄하지안느려는 原始的風景에서 다시한번 붓끝을 고처든것뿐이다.
朝鮮樂壇이 무었때문에 오날까지 一定한 포인트에서 답보로를 하고있는것인가? 優秀한演奏家 作曲家가 輩出하여 오기는하였다. 그러치만은 權威있는 批評家가 있지못한데 큰原因은 湝在하여 있는것이다.
우에서보듯이 演奏家들이 하여온 오날까지의 樂壇的行動은 名譽慾이거나 그러치않으면 地位때문인것이 許多하였다 朝鮮의 樂壇全體의 向上을爲하야 發展을 爲하야는 一毛의 努力을 한적은없었다. 우리는 그러한 態度다시말하면 非能動的精神을 揚棄하여야할 모멘트 에다다른지 이미오랜것을 아는者이다. 樂壇을爲한다는것은 이여서는 文化그것때문인것을 알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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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壇안에存在한 團體이거든 좀더 徹底한 ■實한 冷靜한 態度로 事業다운 事業을하는것을 樂壇은 (社會는)要求한다
이協會의 理事長인 玄氏의 不健實한 樂壇을 보는눈을 나는 忌彈없이 指摘하려는것이다.
다음으로 玄氏의 作曲을보자, 氏는 自己의 作曲인 「니-나」는 紅人種木樂器主題를 가지고 作曲한것이 偶然히 伊太利民謠와 酷似하게되였고 또는 슈-벨트의 『들장미』의리듬을 借用한것이 玄氏作曲인 『나물캐는處女』고 그것은 또한 偶然히 들장미와 恰似하다는것은 그의所論에서 抽出된 逆說이다.
玄氏의 主題는 小요 旋律은 大라고 하였다. 「니-나」가 테-마(主題)는같으나 旋律은 같지않다고, 이런 臆說은 取할데없는 잠고대다. 旋律은 主題로된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作曲是非를 部門이다른 이雜誌에서 쓰기를 躊躇케되니, 後日 機會를 얻게되는대로 再論하기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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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座談會의 顚末을 보면은 한가지 不幸한 事實을 實證하는 苛酷을 나는 손에넣게된다. 그것은 人間的으로 不具者 或은 傀儡를 말함이다.
玄氏는 東京音樂家協會常務 朴榮根君의말을 二三引用하였지마는 朴榮根君은 물론 座談會에出席한 一人이다.
내가 東京있든때, 東京音協委員으로 會報編輯責任者로서있었다. 그座談會는 내가 發案해서 昨年十二月十九日(中央에二月은誤植)銀座 エスキモ에서 委員長인 金文輔氏 招待로尹福鎭君 셋이서 會合한것이다. 當時 連記者가 없는탔으로 近處에있든 (音樂世界史)朴君을 불러왔으나 連記不能이라해서 結局은 내가 그것을 連記하게되고, 朴君은 己往 叅席하였으니, 또는 그當時, 朝鮮까지 特派員으로 갔다오고 하였으니까 發言權을 준것이였다. 不幸히 東京音協이 經理不足으로 會報를 印刷하지 못하게되고 보니까, 그座談會記錄은 朝鮮어느雜誌 고間에發表 하자하는 意見이 있어서 결국 金文輔氏의 贊同은 勿論 四人合意로 「中央」四月號에 發表하게까지 이른것이다.
朴榮根君이 批評家가아닌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그가 지난 二月中旬 서울에 演奏會(東京朝鮮音樂家協會)일로 왔을때 玄氏를만나서 그座談會를 惡宣傳하고, 나와尹君이 비저맨드러놓은것으로 한것이다.
그自身이 座談會에 出席하여서, 더구나 朴君이 暗流問題를 끄집어내놓으면서 무엇이 그렇게시키였든지間에 婀娜를 하고 自己免責을 表明한 間牒態度에는 입을버리지않을수가 없다.
事實을말하면 朴君이나 金文輔氏는 그座談會席에서는 더甚한소리를 한것이다.
玄氏를 聲樂家라고 할수없다는等, 尨甚한 言辭가 많음에도不拘하고 내가 尹君의 批評家的立塲으로서는 같은 演奏家끼리의 感情的 或은 선望으로 相互間의 中傷的言辭가 있음을 잘 알고있음에 우리로서는(君, 金管)다못 分裂에서分裂, 沈滯枯息되여있는 樂壇全面에 活氣를 띄우겠다는 老파心(?)으로 다시 그座談會記錄을 訂正하여서 發表한것이다 적은 玄氏個人을 中傷시킬려고 점잖지않은 感情을揷入하는發動을 한것은 絶對로아니다. 玄氏가 그렇게말성꺼리가되는것도 그만한 過失로因한 必然的報酬임을 玄氏는 自省하여야할것이다.
朴榮根君이 한말은 그座談會記錄 그대로이고 우에말한 酷毒한 感情的言句는 削滅한것이였다.
나는 이제도 그座談會記錄은 一分도 讓步하거나 取消할수없는것이다. 金文輔氏 만하드라도 一段座談會가 紙上에 發表되고하니까 自己스스로 두려움을가지나 그러한것은 비단 金氏만이아니라 오늘까지 演奏家諸賢이 取하여온 消極的 乃至 退嬰的인 미적지근한 態度이였다.
自己의 입으로 發表한것은 自己가 死守할義務가있다. 한입으로 두마디를 외우는 산人形따위 行動으로서 樂壇에 발을 버틔기는 너무나 때묻은 無力한일이다.
正當히 할만한 말을감추고 사는것이 美德이라는 社會道德이란 적어도 藝苑에서는 살어저야 하였을 舊道程表다.
그럼에도不拘하고 樂壇은 마치 十九世紀의 그것이다. 樂壇은 畓畓한「턴넬」은아니다. 가슴을펼치고, 허리를 펴고, 거러갈수있는 밝은 社會라야할것이다.
또는 朝鮮의 音樂人들이 社會事情에 鈍覺한것은 하필, 오날부터 始作된일은 아니다. 音樂과 樂壇을 混同하는 演奏家가있음에는 朝鮮樂壇에 씸포-니 오케스추라 가없는것보다 緊急한不幸이다.
-四月二十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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