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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대 음악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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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조선 역대 음악가 열전 朝鮮歷代音樂家列傳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이공학인 耳公學人
출처정보 신가정 新家庭
연    도 1934-12 昭和九年十二月
면    수 34 34
기사
조선력사상에 음악과 관계있는 인물을쓰려면 그수가 자못 헤아리기 어렵다. 고구려의 려옥(麗玉)은 공후(箜篌)란악긔를 잘타던 여자요 신라의 백결선생(百結先生)은 거문고를잘타 방아타령의 원조가 된이요, 고려에 있어서도 성준득(成準得)홍사범(洪師範)같은이며, 아조에 들어서도 맹사성(孟思誠)안평대군(安平大君)성화중(成和仲)남효온(南孝溫)리정은(李貞恩)이백원(李百源)성용재(成傭齋)한충(韓忠)강장손(姜長孫)정렴(鄭殮)김성긔(金聖器)림히지(林熙之)안문영(安玟英)박효관(朴孝寬)등이로 일일이 들이좃아 힘든다. 그중에서 우리가 꼭알아야함직한 멧분만 뽑아 그의전기와 일화를 간단히 소개하건대 아래와같다.

于勒과그一門

우륵(于勒)이란아는 본시 성렬현(省烈縣)─지금청풍군(淸風郡)─사람이니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유명한 음악가이었다.
처음에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가야고(伽倻琴)을 만들어 우륵으로하여곰 열두곡조를 짓게하였더니 지금으로부터 一千三百七十여년전에 신라진흥왕(眞興王)이 대가야나라를 멸하고 낭성(娘城)─곧청주(淸州)─에 순수하다가 그나라사람으로 우륵이란사람과 그제자 니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듣고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드려 우륵으로하여곰 악긔를타게하니 우륵과 니문이 각각 새곡조를 지어타거늘 진흥왕이 그들로하여곰 국원(國原)─곧 충주(忠州)─에 거하게하고 그이듬해에 왕이대내마(大奈麻) 벼실에있는 법지(法知)게고(階古)대사(大舍)로있는 만덕(萬德)세사람을 보내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하니 이세사람이 나아가 열한곡조를 배우고서 서로 말하되 『이것은 곡조가 어째 번음(繁陰)하니 다시고치자』하고 새로 다섯곡조를 만들어 우륵이다섯곡조를듣고 감탄하였다하니 그제자들이 오히려 나았던모양이다.
그런데 우륵이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게고에게는 가야고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가르치었다하니우륵은 참으로 조선가무의 조종이라하겠다.

王 山 岳

지금으로부터 一千三百여년전이었다. 중국 진(晋)나라 사람이 七현금을고구려로 보냈는데 고구려에서는 그것이 악긔인줄을 알기는 알았으나 그타는법을알지못하며 마침내 나라안에 광고하되「누구나 그곡조를 알아서 타는사람이 있으면 큰상을 주리라」하였다.
그때에 정승으로있는 왕산악(王山岳)이란이가 악긔를 고처만들며 동시에 곡조 百여개를 지어타니 이에 현학(玄鶴)이와서 춤을추므로 그악긔의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하였다가 뒤에 현금(玄琴)이라 고치었다.

玉寶高와그一門

옥보고(玉寶高)란이는 지금으로부터 一千三百여년전 신라(新羅)사람인데사찬(沙湌)벼실에있는 공영(恭永)의아들인데 일즉이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들어가 거문고를 배우는지 五十년에 스스로 三十곡조를 지어 이것을속명득(續命得)에게전하고 명득은 또 그것을 귀금선생(貴金先生)에게 전하였더니 귀금선생이 또한 지리산에들어가 세상밖으로 나오지아니한다.
이에 신라왕이 금도가 끊일것을 걱정하여 이찬(伊湌)벼실에있는 윤흥(允興)이란이를 남원(南原)공사(公事)를시켜금도를 전하도록 하였더니 윤흥이도임하던 직시로 총명한 두소년을 택하여 지리산으로 귀금선생에게 보내어거문고를 배워오게하니 그소년은 하나는 안장(安長)이오 다른하나는 청장(淸長)이었다.
이두소년이 귀금선생에게 나아가 배우나 귀금선생은 어쩐일인지 그 오묘한대까지 다가르쳐주지를 아니하므로 윤흥이 그안해를더리고 가치선생을 찾아가 뵈옵고
「임금께서 나를 남원으로 보낸것은 선생의 금도를 전하도록하려한것인데 이제 벌서 三년이 지나도록 선생께서숨기고 가르쳐주시지를 않으니 내가왕에게 복명할수가 업소이다.」
하며 윤흥은 술을받들고 그안해는 잔을잡아 무릎을꿀고 례를 극진히하매 선생이 비로소 그기술을 다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안장은 다시 그것을 그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하니 극종이 또 곡조일급개를 다시짓고 이를이어 금도가 크게 변창하야 그당시의곡조로도 평조(平調)우조(羽調)합하여 一百八十七곡이나되었다.

任 城 正

임성정(任城正)이란이는 지금으로부터 五百년전 세종(世宗)대왕때의 종실(宗室)인데 거문고를 어찌나 잘타던지 세종대왕께서 친히「저사람의 거문고는 스스로 별조(別調)가 있다」고까지 칭찬하신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임성정은 거문고로유명할뿐아니라 그의집이 서울남대문밖에있었는데 날마다 아침이면 일즉일어나 문지방에 걸터앉아 왼손 바른손을 번갈아가며 무릎을 치니 사람마다 일컷되 미첬다하나 이리하기를 三년이나 계속하더니 마침내 장고(杖鼓)를 잘치게 되었고, 또 입을오무리고서 손가락을 놀리며앉아 손님이 왔대도 만나보지 않더니 그러는지 三년에 젓대(笛)를 잘불게 되었는데 이밖예 그가몸이 약하여 활쏘는일 말타는얼을못하는것을 늘한탄하더니 아침마다 활을메고 산에올라가 날이밝도록 관혁을 쏘더니 그런지 三년에 또 활잘쏘는사람이 되었다한다. 사람은 뜻을세우기가 어럽고 세운뜻대로 주야로쉬지않고 연구하기가 어렵지 하면 안되는것이 없다하겠다.

朴 堧

박연(朴堧)이란이는 지금으로부터 五百여년전 세종(世宗)대왕때 사람이었다.
그는 도감제조(都監提調)가되어 음률을 맡아하는데 밤이나 낮이나 앉으나 누우나 가슴에 손을얹어 장단을 치며입으로 퉁수부는 모양을 하며지성을다하여 음악을 연구한이다.
더욱이 세종대왕께서는 친히 음악을 잘아실뿐만 아니라 특히 박연에게 모든일을맡기시어 때에 모든 악긔를 다박연으로 하여곰 만들게할새 해주(海州)에서나는 검은기장(秬黍)으로 악긔를만들어불기도하며 또 석경(石磬)을 만들어 교정하는데 박연이 가로되「그아무음은 一푼이높고 그아무음은 또一푼이 낮다」하여 다시 자세히 검사해본즉 과연 높은음에 그어놓은 먹줄이아직남은지라 그것을깎아 一푼이 낮게하니 그제야 바른 음이 나더라고한다. 그만콤 귀로듣고도 음의 지극히 적은차이까지 알아내는 이름높은 음악가였다.
그밖에 모든악긔가 박연의손으로 전부 이루어젔으며 아악을 완성함에 있어서나 또는 제향악(祭享樂)에쓰는 종(鍾)을 만듦에까지 박연의 심력없이된것은없다. 그러므로 조선음악사상 그의지위는 가장높은것이라 하겠다.

端 山 守

단산수(端山守)는 지금으로부터 三百五十여년전 명종(明宗)때 종실(宗室)의 한사람인데 옥저(玉笛)잘불기로 천하에 그이름이 들난사람이었다.
어느때 무슨일로 황해도방면에 이르렀다가 날은저물고 길은 산골이라 도적떼十여명이 활과칼을들고 달려들어 행장을털고 또 결박하여 어딘지 산골작이만수십리를 들어가니 포장을 둘러치고 창칼을 든사람들이 둘러선속에 한 괴수가 붉은관을쓰고 비단도포를입고서 높은 의자에 앉아있으니 그는 당시에 유명한 도적괴수 림거정(林居正)이었다.
거정은 묶이어온 단산수를 꿀어업치고
「네이름이 무엇이냐」
「단산수요」
거정은 깜짝놀라며「그러면 네가 옥저잘부는 단산수냐」
「그러하오」
「그러면 네행장가운데 옥저가 들었느냐」
「들어있소」
거정은 사람을시켜 결박을풀고 술상을차려다 놓아주며 친히 자기손으로 술잔을권하며 옥저한번 불기를 청하였다.
단산수―또한 어쩔길이없을뿐만 아니라 가슴에 슬픔이 일지않음도 아닌지라 슬픈곡조로 두어곡조 불렀더니 거정이 속으로 옥저는 잘분다마는 그소리가 너무나 처량하여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도적떼들의마음이 해이해질까 끄으려
「어! 인제 그만불러라」
하고 부하들을시켜 산문까지 바라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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