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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음악 개척사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조선 신음악 개척사 朝鮮新音樂開拓史
종    류 대담 對談
필    자 +++ +++
출처정보 신가정 新家庭
연    도 1934-12 昭和九年十二月
면    수 12 12
기사
[사진] 金仁湜氏 [사진] 金亨俊氏
金仁湜ㆍ金亨俊兩氏와의問答記

記者 오늘밤 두분선생을 뫼시게 되것은 우리조선에 신음악을 개척하여 주시던 그때이야기 말하면 옛이야기를 좀 들어서 일반에 소개하고저 하는 때문입니다.
金仁湜 우리가 무슨 개척을했다고 할만한것이 있나요. 지금 악단의 여러분께서 비로소개척해가시는것이라 한텐데…………
記者 천만에 말슴이십니다. 선생들께서 앞길을 열어주신것만은 세상이 다알줄 믿는것이고, 또 지금의 여러음악가들도 다 조선음악게의 선도자들이라고 아니할수없는줄도 믿읍니다. 여하간 지금으로부터 二十년전 내지 三十년전 이야기라면 다소 웃업고도 재미있는 말슴이 많으실줄알거니와 우리조선서 맨첫번 음악을 가르치신이가 누구십니까.
金亨俊 그야 무론 여기앉으신 김인식 선생이지오.
記者 네 그러면 김인석선생께서는 어디서 음악을 어떻게 연구하셨읍니까.
金仁湜 내가 음악을 공부하게된것을 말슴하려면 강서(江西)「도마에」란촌의 이야기 가나옵니다.
記者 네 무슨이야깁니까.
金仁湜 본시 내 가원께서는 조선十三도 방방곡곡이 안가신데가 없을만큼 방탕생활로 돌아다니신분인데 더구나 을미(乙未)년 우리조선에 단발령이 내리자내아버지는 부지거처로 도망해가버리시고 말았는데 그때 내숙부께서 나를 기어히 예수교학교에다 입학을시키섰어요. 그대로말하면 찬송가나 성경책이 없었고 서울서평양으로 등사판에 박히 복음서 낯권이 내려오던때이었읍니다. 그리다가 아버님께서 돌아오셔서는 예수교학교에 입학했다고 굉장히 야단을 치시는통에 당시 안창호선생이 경영하시던 강서 도마에로 갔었읍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안선생께 창가를 배운것이 었읍니다.
記者 그럼 그것이 멫년전인가요.
金仁湜 三十년전입니다.
記者 그때 맨처음으로 배우신 창가가 무엇입니까.
金仁湜 그때 처음으로 안창호선생께 배운 창가일뿐아니라 아마 조선서창가라고 명색한 것으로 처음인것은
산아산아 높은산아
네아무리 높다한들
우리부모 날기르신
높은은덕 밋을소냐
높고높은 부모은덕
어이하면 보답하랴
란것이니다.
記者 곡조도 안씨가 지은것입니까.
金亨俊 곡조는 그후에 지금 개성송고에 게신 정사인(鄭士仁)씨가 지은줄로 생각합니다. 그렇지오? (김인식씨를보며)
金仁湜 네 그렇읍니다.
記者 그뒤에는 어떻게 되었읍니까.
金仁湜 자꾸 나개인이야기가 되어서 미안합니다. 그뒤엔 숭실학교로 왔지오. 숭실학교에 와서부터는 어떻게 찬미하는게 좋고 또그방면에 재주가 좀 있었든지 웃반에 공부하면서 아랫반 창가선생노릇을 겸하게 되었읍니다.
記者 조선에 서양악기가 수입되기로는언제 누가 한것이 처음이겠읍니까.
金亨俊 그것도 아마 이 김인석선생이시지오.
金仁湜 그것도 한바탕 이야기거리가 됩니다. 역시 三十년전 이야긴데 그때 평양에 마목사란 서양목사가 있었읍니다. 언젠가한번 그이집 광에 소리안나는 벙어리풍금찬개가 몬지앉은채 굴려있는것을 보았읍니다. 그래서 그것을 갖고싶어교섭을 끄냈읍니다. 그는 아주한참이나 생각하더니 손까락을 꼽으면서 一百二十냥좋소하고 가격을 정해줍니다. 자 그러니 어듸 돈 一百二十냥이 얼른손에 들어옵니까. 그래도 한번교섭은 해놓았고 그놈을 꼭 사고는 싶고해서 돌아놔와 저 음악가 김영환씨 가친되는이가 그때 나와 동창이었기때문에 그이와 다른두분과함께 넷이서 합자를 해가지고 돈一百二十냥을 (무론 엽전이었읍니다) 어깨에 메어다주고 그풍금을 지고나와서는 고무풀로 바람구녁을 때우고나니 아주 소리가 훌륭히 났읍니다. 그래서 이것을 학교기숙사에다 갖다두고는 어찌나 타댔든지 학생들이 분주해 공부못하겠다고 교장에게 저 풍금을치어달라고 진정까지해서 내가 불려들어가 꾸중을 들은일도있었고 그리다가는 동무셋은 차차 자믜가없다고 떨어저나가고 나종엔 내한사람의 물건이 되었읍니다.
記者 지금 그풍금이 댁에있나요.
金仁湜 웬걸요 평양어디 돌아다니겠지오. 혹 부서지고 없는지도 모르지오.
記者 이오링은 누가 먼저 사셨나요.
金仁湜 내 기억에는 그것도 사드리기는 내가 처음일것 같읍니다.
記者 그때 무론 파는데는 없었을텐데.
金仁湜 그렇지오. 미국에다가 주문을해서 이오링을 샀읍니다. 그때 평양 선교사부인이 늘 이오링을하기에 매양 보아둔점이 있어서 소포뭉치를뜯어 이오링을 끄내자말자 어찌나 좋고급한지 및여 선생에게 가저갈 생각도없고 그저 밥도안먹고 혼자 궁리를 해가며 아까 그풍금이있고하니 거기 맞추어가며 자습으로 사흘만에 찬송가를 전부다 탈수가 있었읍니다.
記者 참 놀라겠읍니다. 원 처음만지는 악기를 배우지도 않고 타다니오.
金亨俊 말슴마서요. 이오링 이야기를 하면 지금도 우슴이 절로터집니다. 내가 처음숭실학교를 들어가니 웬양반이 커다란 관을쓰고는 풍금을 치느니 이오링을 켜느니 하는대 어떻게나 제미가있고 부러운지 모르겠더니 알고보매 그관쓰고 이오링하던이가 이김인식씨입니다그려. (笑)
記者 원 세상에 갓쓰고 자전거만타도 웃업다는겐데 갓을쓰고 이오링을 했다니 듣기만해도 허리가 아픔니다그려. 그런대 그이오링은 지금 어디 있읍니가.
金仁湜 그이오링도 지금은 평양어디 있을는지 모르지오.
記者 그런것은 보관해두어야 할겐데. 그대로있으면 사실 박물관에 갓다둠즉도 할건인데요.
金仁湜 그것도 내가 숭실을 졸업하고 서울로 오는통에 다팔았지오.
記者 팔다니오. 음악가가 악기를 팔아요?
金仁湜 예 그때 사정이 그랬읍니다. 내가 숭실을마치고 음악을 전공하러 독일로갈 결심을하고 여비를 장만하자니 그런것저런것을 다파는수밖에 없었읍니다.
記者 그런대 독일가셨더란말슴은 못들었는대요.
金仁湜 그때 二百원이 있으면 갈수가있는때지만 장만하노라고 한것이 百원밖에안되어서 서울로 올라와 영어공부나 좀해가지고 원산으로 우라지오스도크로 막걸어갈 작정이었지오. 그러다가 서울까지 와서는 그만 못가게 되고 말었읍니다그려.
記者 경성은 언제 오셨읍니까.
金仁湜 융회원년十二월二十七일이었읍니다.
記者 서울오실때 서울의 음악게는 어떠했읍니까.
金仁湜 서울은 그때 음악을 알지못하고있더군요. 다만 보성학교에서 돌아가신백우용(白禹鏞)씨가「상제는 우리××를 도우소서」하는 구한국시대의 국가를 가르치는 것뿐이었읍니다. 내가 올라와 YMCA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한편 역시 아래ㅅ반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이 이상한 소문이 자꾸퍼지게 되엇지오.
記者 그래서요.
金仁湜 도레미파……하고 가르치니 이것이 처음듣는것일뿐더러 재미도 있던모양이오, 또 나는 다소 조선정조를 띄인 것으로 곡조를 만들어서는 가르치니 어쨋든 사방에서 모아드는대 정신을 차릴수가없이 되었읍니다.
나종엔 여관까지 따라와서 창가한개만 가르처달라는 사람이 밀려들고 학교마다에서 우리학교에도 한시간씩만 와달라고 자꾸만 청함을 받게 되었읍니다. 참생각하면 느껍읍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통에 그만 독일간다는것은 슳어지고 말었읍니다.
記者 그렇겠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어라고 말슴할수는 없군요.
金仁湜 뿐만아니라그때 정세로말하면 창가를 한 음악으로 보는것이 아니라 주먹을 부르쥐고 떠드는 일종의 애국심으로 보는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빼고서 들어주지 않으면 저놈아주 나쁜놈이라고들 말하게 되겠기 때문에 할수없이 그시간들을 다맡아 가르치게되니 자연히 창가선생으로 판이박히고 말었읍니다.
記者 이상준씨도 초대음악가로 볼수있는데 오늘밤에는 마츰 일이 게시어 못오시게 되었읍니다마는 그는 어떻게 언제부터쯤 음악계에 나서게 되섰는지오.
金亨俊 그이도 이 김인식선생의 제자시지오.
金仁湜 그저 내가 다소 도와드렷지오. 평양서부터 가치 있었고 또 서울은뒤에그를 올라오도록 하야 내가 맡아보던 학교시간을 반이나 떼어서 그에게 넘겼지오 그리고 나는 서북학회(西北學會)의 제일음악강습소에가서 하로 두시간씩 가르쳤읍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그시절의 음악전문학교였읍니다. 그리고 一년만에 졸업을 시키는 제도이었지오.
記者 그당시인지는 꼭이몰라도 이왕직에 정악강습고(正樂講習所)가 꽤 유명했지오?
金仁湜 네 나도 말하려던차입니다. 그이왕직 정악전습소에서는 조선음악을 가르처 후대에 이으려고 하던것인대 이미 민간에 이 제일음악강습소가 있고보니 조선음악만 할것이아니라 서양음악도 가치가르치는것이 좋겠다고 의논이되었는지 내게와서 두학교의 병합을 요구했읍니다. 그래 나도 대단히 의미있는일이오 또 장래가 있는일이라 병합했지오.
記者 거기서 멫년이나 가르치섰나요.
金仁湜 한사년동안 가르첬읍니다. 그리면서보니까 아무리해도 확장을 아니할모양이고 차차 흥미좇차 잃게되자 그때 태화여자관을 설립한 미쓰 마이야스라는 이와 의논이되어 그이집 아래ㅅ층에다 음악장려회라는것을 새로절립하고 성악이며 긔악이며 음악이론이며를 가르치게 되었었지오.
記者 김형준선생께서는 경성오신지 얼마나 되심니까
金亨俊 나는 한二十년전에 왔읍니다.
記者 음악을 어떻게 배우시게 되었던지오.
金亨俊 나는 진작 평양에서도 이김인식선생에게 배웠고 또 二十년전에 경성으로와서도 역시 김선생이 인도하시는 경성찬양대(京城讚揚隊)에 대원으로있었지오.
記者 김형준선생께서는 코―넷을 잘부시던데.
金亨俊 천만엣! 그코넷은 지금 개성송고에게신 정사인씨에게서 배웠읍지오.
記者 그리고 김선생께서는 누구보다도 훌륭하신 따님(김원복씨)를 두섰고 또 사위(홍성유씨)를 보섰으니가 그게더 자랑스러우시겠지오.
金亨俊 우리원복이를 음악가로 만든데 있어서는 내옛날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처음 숭실학교로 갔을때 풍금타는것을보니까 그놈이 긔기막히게 하고싶건만 나는 고학하는 사람이라 시간이 나를 용서하지 않었읍니다. 얼마나 마음이 원통한지 그때 내결심이「나는비록 저것을 못배운다 하더래도 내아들이나 내딸들만은 저것을 꼭시켜서 내원을 풀어보리라」하였던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사를 제지하고 월급을 모으고 모아서 피아노를 사서 가르치고야 말었읍니다.
記者 참 거룩한 결심이십니다. 아버지의 불행이 딸에게와서행복으로 바꾸이고 그것이 조선사회의 자랑이된것에 있어서는다시금 기쁨을 참지못하실것입니다.
金亨俊 천만엣 무슨자랑이 됩니까마는 이야기니 이야기지오.
金仁湜 자랑이고 말구요.
記者 우리조선사람의 출연으로된 음악회의 처음이 언제 됩니까.
金仁湜 (한참 손가락을 꼽아보시다가)지금으로부터 二十五年전입니다. 그전에도 가끔 서양사람의 음악회는 있었지마는…………
記者 그때 출연한이가 누구였던가요.
金仁湜 정사인씨가 플륫을했고 최동준씨도 플륫을했고 (또보자) 정신에있던 김빼세가 독창을했지오. 그리고 경성찬양대합창이있었고 또 나도 독창을 했읍니다.
金亨俊 아이구 긔억도 좋으시오.
金仁湜 응? 긔억? (一同笑)
記者 그음악회는 어디주최 무슨동기로 했던가요.
金仁湜 그래참 그게 YMCA주최로 빈민구제 자선음악회였읍니다. 그래 그게제一회 음악회지…………
記者 그런대 실레올시다마는 두분선생님 춘추가 다 어떻게 되십니까.
金亨俊 저 이상준씨랑 셋이 다 五十씩동갑입니다.
記者 다 동갑이시라니 더욱 정다우시겠고 서로 잊지 못하시겠읍니다.
金仁湜 그렇지오. 三十년친구인대 잊을수가 있나요.
金亨俊 그런대 나이는 동갑이라도 이 김선생님은 내게도 스승이오 이상준씨에게도 스승이라 꼭 선생님 대접을했지 어쩜니까. (一同笑)
記者 김인식선생님은 퍽 기회가 선각하시게 되었던게죠?
金亨俊 그럼요. 음악방면으로야 최초의선생이시고 우리보다 훨신 앞선입니다. 평양서 그때 가르치고 배울때는 부르기를「접장」이라고 했기때문에 지금도 그저「김접장」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나이는 같아도 먼저안것이야 어쩜니까. 선생님 떠에받였지………
金仁湜 선생도되고 친구도되고……그저그보담도 서로 친형제같지오.
記者 지금 악단에 대해서 하고 싶은말슴은 안게십니까.
金亨俊 참 다들 선생님이시지오. 나는 한참동안 그저사 현제명씨 지휘하시는데 따라가서 배웠지오, 그저남보다 못하면 거기가 배우는것이 제일이지오.
金仁湜 음악하는이들은 감정이 예민한만큼 서로 자기라는것을 앞세우는 동시에 인격적으로 적은사람이되기가 쉬운것같더군요. 그래서 나스스로도 부절히 이점을 뉘우치고 경게하고 지납니다.
記者 아마 그것을 음악계뿐 아니겠지요. 세상에는 싀긔란 야릇한 감정이 있어서 매양 그들의 사회적인격을 시험하고 단련하는것입니다.
金仁湜 그러나 음악계 자체로 보아서는 나는 참유망한줄 압니다. 앞으로는 세게적 음악가가 자꾸 나올줄 믿는것입니다.
記者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선은 음악계뿐아니라 어떤방면에고 남을 뒤세우는 뛰어난 인재가 헤아릴수좇아 없이 나타나는 날이 올것을 장담하고 싶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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