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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우와 무대―정열은 강한 것―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명우와 무대―정열은 강한 것― 名優와舞臺―情熱은强한것―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이금룡 李錦龍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3 昭和十六年三月
면    수 229 (229)
기사
나는 映畵를 붓백이로하는 사람인지라 서투른 붓을드러 글쓰기를 恒常 躊躇하던中 貴社의간곡하신 付託을 저바릴수없어 옛記憶을 더듬어 몇줄써볼까한다.
내가 映畵界에 나온것이 어느듯 十年이 훨신 넘는 模樣인데 그렇게 가난하고 구차스럽던 映畵界에서 어떻게 十餘年을 하루같이 걸어왔는지 스스로 다시한번 놀라지 아니할수없는일이다.
回顧하건데 그때만하여도 이따의 文化水準은 남달리 뒤저서 演劇과 映畵의 文化的價値를 認識치못하고 一般社會人士들은 俳優라하는것을 鄙賤하기 짝이없는것으로 푸대접하던것이 通例었다.
옛날 花郞道의 빛나는 精神은 본받으랴 하지않고 歪曲의 길로 곧장 줄다름질처서 社會로부터 偉嚴과信望을 송두리채 잃어버린 廣大―이廣大들과 文化指導精神을 품고 저들世代에 賦與된 課題를 푸러보라고 허덕이는 新劇人과 映畵人을 混同해서 갓바치 或은 白丁을 얏잡어보듯 업수이 여기던 時節에 나는 이따의 映畵文化를 爲해서 몸을 밭이겠다는 커다란 野望을 품고 때마침 朝鮮에 처음으로 誕生한 『演劇의집』門을두드리었다.
그것은 곧 恒師玄哲先生의 經營인 朝鮮俳優學校었다.
나는 玄哲先生의 사랑의 그늘아래서 劇工夫를 熱心이했다. 많은學徒들은 질거운마음으로 工夫하기에 熱重했고 學校는 날로 興旺해갔었다.
그러나 누가 뜻하였을까? 學校를 세운지 半年이 다가지못하여 財政難에 휩쓸리고 말었으니 그것은 猛烈히 부러오는 颱風과 같어서 막어낼 道理가 없었다.
敦化門앞 金氏의집 二層에서 昌信洞으로―昌信洞에서 苑洞姜氏宅으로―苑洞姜氏宅에서 다시 昌信町으로―이렇게 집없는 서름을 받으며 移舍짐을 옮기는동안에 멋쟁이 學徒들은 슬그머니 다새여버리고 二十餘名學徒가 單八九名으로 줄어들고 말었다.
그러나 남어지 學徒들은 落心치않고 더욱 굳은마음으로 劇術을 硏磨할뿐이었다. 玄先生은 웃는얼굴에 눈물을 먹음고 채찍을 들어 우리들을 指導해주었었다.
눈보라처 문풍지우는 치운 겨을날 冷房에 무릎을꿀코 앉어서 「트르게넾」의 「그前날밤」을 펼쳐들고 「인사-」과 「에레나」를 수없이 불렀으나 結局 그 情熱의 冷房은 舞臺로 化하여보지못하고 滿二年이되던 어느 가을날 슬프게도 學校門은 굳게 닫기어지고 말었다.

그해 겨을 나는「아리랑」을 製作發表한지 얼마되지않는 朝鮮키네마會社에 入社했다. 會社의 雰圍氣란 實社會에 처음으로 나오는 나와같은 사람으로서는 呼吸하기에 매우 힘드렀었다. 이미 故人이된 羅雲奎氏는 아리랑노래를 世上에 퍼틀여놓고 어깨가 읏슥해서 映畵界의 王座를 占한양 言語行動이 거칠고 꿋꿋하였으며 그外의 모든 社員(演技部와技術部)들도 한결같이 사귀기가 까다랍고 驕氣들이 大端했으나 참고 견디는中에 서로 마격의사이가 되었었다.
世月이란 實로 빨은것이어서 내가 키네마社에 入社한지 一年餘에 「風雲兒」 「금붕어」等을 製作發表케되었었다.
그러나 「금붕어」를 封切하고 次回作은 計劃하던 어느날 社長과 우리들사히를 往來하며 부지런이 活躍하는척하던 XX氏의 숭물스런 奸策이 暴露되자 우리들은 곧 職을 辭하고말었다.

그러나 그때나 이때나 買金을 求하기란 極히 어려운일이었었다. 우리들은 貧窮에 떨며 거리를 彷徨했다. 울어도보고, 굶어도보고, 世相을 咀呪도해보고, 돈있는이를 찾어가 하소연도 해보고-그러나 사람들은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었다.
苦生을 떡떼먹듯하며 얼마를 지난후 마침내 團成社朴氏의 寬大한 사랑을 힘입어 한作品製作할 資金을 얻게되었다.
우리들은 곧 東大門밖 紅樹洞에 「羅雲奎푸로덕슌」이란 看板을 걸고 同人制로 羅雲奎, 尹逢春, 李創用, 李明雨, 洪開明, 李慶善, 朱三孫, 筆者等 諸氏가 힘을 合하여 作品을 製作하기 始作했었다.
「푸로덕슌」을 세우면서 곧「잘잇것다」를 製作發表하고 이여「玉女」를 製作했다.
한作品을 製作하고 또 새作品을 製作할 資金을 꺼러들이는동안이 사뭇 길어서 半年씩은 흔이 걸리었다. 그동안의 會社經理와 個人의 生活狀態는 悲慘그것이었다. 양말이 뀌여저 발가락과 뒷굼치가 커-다랗게 나와있는것은 例事로 반반한 옷이라고는 單只 洋服 한벌뿐이어서 外出하게될때는 반듯이 順番으로 돌려입고 나오게되었었다.
나는 그때 집이 에울인고로 每日 집에서 다니었다.
[사진] 이금룡의 사진으로 추정
그날도 나는 여러벗과함께 뫃여앉어 앞으로 製作할 映畵와 資金融通에對한 근심스런 議論을 하고있을때 멀리서부터 게걸게걸하는소리가 나더니 집을비러준 趙氏의집 늙은 청직이가 또 나타났다.
『밀린 집세구 뭐구 다 그만 냈버려두구 이달안으루 나가시우 안나갔다만봐라 모두 지끈지끈 부서버릴테니……』
우리들은 어이가없어서 멀거니 듣고만있었다. 그때 등뒤에서 상양하면서도 神經質인 L兄이나서며 좀 떨리는 목소리로 말대답을했다.
『뭘 부서노신단 말슴이십니까?』
『뭔 뭐야! 광대노름헐제 쓰는 도깨비쓸개같은것들이지!』
얼금얼금한 늙은이가 말에 주책이없었다. 性味팔팔한 H兄이와락 내다러 참아주먹만 들었다 놧다하는것을 곧 준자시키고 늙은 청직이를 슬슬 달래보았다.
『令監님! 그렇게 노하시지 마시구 어서 들어가십쇼 몃칠후면 다 해드리겠습니다』
『다구만둬! 어서들 나가! 나나나가―』
늙은 청직이의 發惡으로 집주인 趙氏가 뛰여나오고, 얼마있지않어 趙氏의집 財産을 管理한다는 某銀行員까지 出動되어 商議가 되었으나 彼此의 感情은 極端에 이르러 마침내 집을 내어 놓게되었다.
길길이 뛰던 늙은청직이가 집주인 趙氏에게 덜미잡혀드러가고 「푸로덕슌」의 여러벗들도 興奮이 가라앉을 무렵에 나는「푸로덕슌」을 나섰다.
어느새 가을이와서 庭園의 나무잎 굴러다니는소리가 슬겅슬겅났다. 近方에사는 조무레기 아녀석들은 허구헌날 「푸로덕슌」의門앞에 뫃이어 活動寫眞辯士의 흉내들을 내느라고 떠들석했다.
나는 거리로 나와 「아스팔드」에 길-게 누은 그림자를밟으며 집으로 向했다. 거리의 風景은 변함없이 豪華스러워 妓生을 실은 自動車가 永導寺쪽으로달리며 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힘없이 것는 내模樣―풀죽은 까명두루마기에 집신을신고 「캡」을 눌러쓴 내 초라한행색은 世界 어느 映畵界에서도 볼수없는 가엾은 몰골이었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수집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않었다. 오히려 나는 朝鮮映畵界의 실낫같은 命脈을 얼사안고 엉겅퀴길을것거니 生覺될때 뜨거운 情熱만이 끄러올을뿐이었다.
紫芝洞에 비둘기장같은 적은집―이집은 내가 웅거하는집이다. 大門을미니 안해가 마주나와주었다.
『벌써 저넉을지우?』
『네……, 언제부터 始作(撮影)한대요?』
『글세……… 좀더 기다려봐야겠오!』
『어서 일始作을혀서야 외상값을 갚을텐데―, 가개앞을 지내기가 부꾸러워요!』
안해는 상글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는 풀무를불어 겨를끼언지며 저녁을지었다.
나는 시장도하려니와 「푸로덕슌」이 장차 거리로 쫓겨나앉을것이 가슴에 걸리어 맥없이 房속에 앉어있었다. 부엌의 풀무소리가 더욱 자져지는품이 저녁을 빨리지으려 서드는모양이었다.
얼마후 부엌에서 퍼-ㅇ하는 擾亂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흥녁케 밖으로나왔다. 안해도 부엌밖으로 허둥지둥나왔다. 안해는 그맑고 부드럽고 어글어글한 눈에 눈물이 하나 가득이 고여있었다. 앞머리와 눈섭이 타서 노랗게 오그라저있었다. 그러나 안해는 원망하는빛없이 입가에 웃음을먹음고 내앞으로 가까이왔다.
『또 불덩어리가 쏟아저 나왔다우! 눈섭이 아주타진않었죠?』
나는 안해의 거스른 앞머리와 눈섭을 살살 비벼 털어주었다.
풀무를묻고 겻불을 때기始作한 후로는 가끔 불덩이가 아궁이밖으로 펑-펑- 터저나왔다. 나는 안해를 볼낯이 없었다. 안해는 이렇게 궁상마진 살림사리를 오랫동안 참으며 해왔었다.
그러나 一年이지난後 어느가을날―별총총히 빛나는밤, 그는 머리우에 흘으는 은하(銀河)와 기우러가는 조각달을 無限量 바라보며 구슬픈曲調를 코ㅅ노래로 부르더니 고만 어디로던지 훨훨가도록 해달라고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가난혀구는 더 싸울수없으니……난 친정으루간테야요』
나는 그를 달래고 타일렀으나 종래듣지않고 마침내 그는 회색 안개속으로 살아저버리고말었다.
貧困은 내 사랑하는 안해를 빼아서가고말었다.

趙氏의집에서 쫓겨난 「푸로덕슌」은 그건너 조그마한집 사랑채로 移舍를했다.
同人들은 더욱 勇氣를내어 「사랑을찾어서」「사나희」「벙어리三龍」等 세作品을 製作해내었다.
그러나 때는 甚히 어지러웠으니 社會主義運動은 세차게 머리를들고 이러섰고 한편 經濟공황은 날로 深刻해갔었다. 映畵舘入場料는 넉마값으로 低廉해젔으나 觀客의數는 每日같이 줄어만들었다.
그럼으로 朝鮮의 各「푸로덕슌」들은 作品製作할길을 잃고 갈팡거리게되었고「羅雲奎푸로덕슌」亦是 資金難에 빠져서 그의 運命은 風前燈火와같이 危殆했다. 그러나 그時節엔 「羅雲奎푸로덕슌」이 가장 人氣가있었으니 羅氏만 좀더 理性의 움즉이미 컷들아면 그만한 難關은 突破했을것이나 그의 주책없는 好色으로 말미아마「푸로덕슌」은 사분참 꺾우러지고말었다. 이에 四五年間 苦樂을가치하던 同人들은 鬱憤함을 禁치못하며 흩어지었다.

그後 某氏의 猛活動으로 貴한 資本을 잇끄러「아리랑後篇」을 만들렀다. 그러나 이내 映畵人들은 제가끔 가고말었으니 地方巡廻劇團으로, 「푸로」運動하다가 監獄으로, 滿洲로, 제故鄕으로, 或은 장사치로―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말었다.
그러나 나는 굼던지 먹던지 서울에 머믈어 있으면서 映畵界가 다시 回復되기를 기다리리라 했었다.
그러나 내 어머님은 자나깨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근심하시여 타일으시는 말씀이 每樣 같었었다.
『主께(基督敎會) 다시나가서 悔改하고 남과같이 잘버러서 잘살어야한다. 남다 흉보는 俳優노릇은 왜헌단말이냐』
나는 어머님말씀을 더 拒逆치않고 映畵界가 다시 回復될때까지 무슨方法으로던지 어머님을 잘받들어드리기로했다.
여러날 궁리끝에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어린것을 거느리고, 살림사리를 수레에 실고 江原道두메로 流浪의길을떠났다.
나는 X邑에 머믈러있었다.
나는 내 生活方便을 엿보는 한편 글읽기를 게을리하지않었으니 「플라톤」의 것이나 「春園」의것이나 「꾀테」의것이나 「夏目」의것이나 「스피노사」의것이나 그外 누구것이나 내 精神의 糧食이될만한것을 求하여 읽기에 樂을삼었다.

世月은 덧없이 흘렀다.
내가 X邑에 머므러있은지 두햇만에 나는 「카나다」에서 돌아오신 내 姊氏의 도움을받어 다시 서울로 오게되었었다.
이때부터 朝鮮映畵界는 바야흐로 活氣를 띠우게되었으니 宮殿과같은 映畵舘이 여기저기 그雄姿를 나타냈고 映畵會社가 簇生했다.
나는 그리웁던 故鄕 서울에온지 얼마 안되어 鍾和氏監督 「逆襲」에 主演을 하게되었다.
나는 그後 「프리란서」로서 朝映, 半島, 高麗, 漢陽, 文化映畵協會等 諸會社에 請함을받어 出演케되었으니 그 主要한것으로「漢江」「圖生錄」「迷夢」「國境」「海의光」「志願兵」「新開地」等을 製作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돌아보건대 지나간일이 모두 한마당 꿈같으나 이러한 적은 結晶이나마 도움이되어 오늘날 朝鮮映畵界가 이만큼 健實한 步調로 뻗어나가게된것을 기뻐하지않을수없다.
끝으로 나는 나보다 하루라도 먼저 나와 우리 映畵界를爲하여 努力많이하신이에게 感謝와 榮光을 돌리는바이다.
昭和十六年正月一日 紅樹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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